#5화. 나는 갈것이다
5화.
대피로 계단을 네 칸씩 뛰어 내려간다.
그것도 축 늘어진 레나를 둘러멘 채.
지금, 이 천금 같은 기회를 기껍게 받아들인 육체가 한계 이상의 성능을 내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당장 무릎이 부서진대도 즐겁게 달릴 수 있으리라.
아무튼 나는 몸이 부서져라 달렸다.
로비와 승강기는 누군가 지키고 있을 것이 뻔하기에, 레나의 사무실이 있는 33층부터 비상 대피로를 따라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염원하던 노예 탈출이 코앞까지 왔다.
이대로 내려가 본사 바깥으로 나간 뒤, 시티 트램이나 사이버 택시, 캐리어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가서 처박히면 끝이다.
빌어먹을 전뇌 컨트롤 칩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할 때까지는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다.
그곳에서 계획대로 칩을 제거하고 자유의 몸이 된다.
하지만.
그 전에 들려야 할 곳이 한군데 있다.
반 바이오 본사 23층에 있는 반 루벤카의 사무실.
‘분명 남아있다.’
최근, 루벤카의 시종인 메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시종 숙소에서 네 주인이 잘났네 우리 주인이 잘났네하며 유치하게 나누었던 잡담들 중 하나였다.
[레반, 루벤카님은 학회에 가실 때 항상 챙겨가시는게 있어. 루벤카님 사무실 데스크의 두 번째 서랍을 열어보면 출장 전용 가방이 있거든. 그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
[안 궁금하다고 두 번이나 말했다.]
[우리 회사의 베스트셀러인 ‘의료용 나노로봇 시리즈’의 6세대 프로토타입이랑 이번에 자체 개발한 나노해독제 Van-type 4를 담아둔 카트리지 통이야!]
[그래. 다 들었으니까 자도 되나?]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에서 개최되는 학회에 갈 때마다 그걸 가져가서 여기저기 홍보겸 자랑을 하셔. 본사의 기술력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하시는거지. 심지어 신제품에 저명한 고위마법사 몇 분이 관심을 보이셨어!]
[그러면 뭐 해? 성격이 아주 개차반인데.]
[마음은 여리신 분이야. 이상하게 레반만 보면 행동이 과격해지셔서 그렇지.]
의료용 나노로봇.
반 바이오 컴퍼니를 지금의 중견기업 자리까지 끌어올린 제품이다.
신체에 이식받으면 온갖 질병과 독을 몰아내주는 것은 물론, 시간만 있다면 손이나 발이 잘려도 재생시킨다.
현재 반 바이오에서 판매하는 제품들 중 가장 고급형인 5세대 의료용 나노로봇.
그 5세대 제품이 시술 비용까지 합하면 무려 300만 크레딧을 넘어간다. 시티의 고급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다.
그런데 6세대?
아직 출시가 되지 않은 프로토타입이라지만 그 자존심 강한 루벤카가 직접 들고 다니며 홍보하고 자랑까지 늘어놓을 정도라면, 이미 제품의 안정성은 입증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약한 내게 그만한 보물은 없다.
20년이라는 세월을 탈출만 보고 버텨왔는데 막상 나가자마자 칼이라도 맞아서 죽으면 억울하잖은가.
그때 듣기 싫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길 잘했다. 귀담아듣지 않았던 메리의 오너 자랑이 내게 도움이 될 줄이야.
‘프로토타입만 빠르게 챙겨서 나간다.’
그렇게 도착한 23층.
미혼산은 23층 플로어에도 옅게 퍼져있었다.
반 바이오 빌딩의 23, 33, 43층은 오너 일가가 사용하는 층인 만큼, 다른 곳들보다 보안이 철저하다.
그런데도 전부 이 꼴이라면 아마도 건물 전체가 이 지경일 것이다.
- 으으···.
좀비처럼 비틀거리거나 이미 기절해 누워있는 직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천당가의 행사는 실로 과감했다. 업무지구 한복판에서 이런 짓을 벌이더라도 후에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얘기겠지.
23층 가장 안쪽, 루벤카의 집무실 앞에 당도한 나는 기절한 레나의 사원증을 갖다 댔다. 닫힌 사무실의 입구가 열린다.
심플한 사무실이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넓은 통창 밖으로는 업무지구의 화려한 빌딩들이 보였다.
고개를 급하게 돌려가며 사무실 내부를 빠르게 훑자, 메리가 말한 데스크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덜컥-!
굳게 잠겨있는 서랍. 곧바로 내공 실린 주먹을 연신 내질렀다.
콰직- 콰직-
살갗이 찢어져 뼈가 보이고 삼류의 내공이 바닥을 보일 때쯤, 서랍이 우그러지며 데스크가 통째로 내려앉았다.
두 번째 서랍 속에는 메리가 말했던대로 작은 가방이 있었다.
후우우-
지퍼를 열자 하얀 수증기가 흘러나왔다.
냉장 기능이 있는 유리 카트리지에 정갈하게 담겨있는 저게 바로 나노로봇 6세대 프로토타입. 그 옆에 몇 개의 나노해독제 신제품도 소담스레 놓여있었다.
‘찾았군.’
반 바이오 컴퍼니의 업종은 ‘나노 테크놀러지’ 주력분야는 의료용 초정밀 나노로봇 제작. 기술력 하나는 발두르 시티와 업계에서 알아주는 수준이었고···.
이제 그 시리즈의 최후가 되어버릴 물건을 얻었다.
콰과광—
벼락같은 굉음이 울린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더 있을까.
지금 43층 회장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다.
나는 사무실을 뒤집어엎으며 열어볼 수 있는 건 다 열어봤다. 서랍, 스타일러 옷장, 카본 선반에 쌓여있는 온갖 트레이들과 가짜 화분 밑까지 열심히 뒤적였다.
다행히도 선반 위에서 쓸만한 놈들이 나왔다.
고농도 마나액 주입기 한 박스.
그리고 신경 부스터와 혈류 조절기.
보자마자 무슨 용도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그 대단한 루벤카가 쓰는 물건들은 아닐 테고······고문이나 심문용이겠군.’
고농도 마나액은 마법사들에게는 시간제 영약같은 물건이다. 하지만 마나회로가 없는 지금의 내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런 몸에 섣불리 사용했다간 부작용으로 쓰러지거나 죽겠지. 이건 나중을 위해 챙겨둔다.
다음은 신경 부스터. 진한 커피 열 잔을 단숨에 들이켠 것 같은 신경 각성 효과를 준다. 세상을 인지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혈류 촉진기와 같이 사용하면 효과가 곱절로······
콰과과과광-!!!
천장에서 먼지가 부스스 떨어진다.
“······.”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무지막지한 굉음.
빌딩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최상층의 소란이 점점 커지고 있다.
당가의 손님들이 제대로 된 무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이 이상 여기있는 건 위험하다.
전신의 감각이 이제는 정말 나가야 할 때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사무실을 빠져나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들쳐멘 레나와 이것저것 쑤셔 넣은 가방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계단으로 가는 길목에 방독면을 차고 있는 남자가 하나 있는데 척 봐도 우리쪽 직원은 아니라는 것.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푹!
허벅지에 신경 부스터와 혈류 촉진기를 꺼내 쑤셔 박았다.
피처럼 붉은 액을 눌러 주입하자, 토할것만 같은 울렁임이 찾아옴과 동시에 심장이 폭발할 듯 박동하기 시작했다.
탓!
이윽고 땅을 강하게 박찼다.
방독면의 지척까지 순식간에 쇄도한 나는, 또 하나의 주입기를 꺼내 들었다.
푸욱!
고농도 마나액 주입기.
- !?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감전된 듯 우뚝 멈춰버린 그를 지나쳐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듯 고동쳤다.
23층에서 2층 필로티 정원까지 단숨에 뛰어 도착한 나는, 레나를 업은 채 본사 뒷편에 주차된 차량 위로 뛰어내렸다.
쾅!
무릎과 허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하게 행인 무리에 섞여 들며 생각했다.
‘트램 역까지는 도저히 못가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무인 사이버택시를 잡아탔다.
- 오늘도 좋은 하루입니다.
내부 전면의 디스플레이에서 듣기 좋은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레나와 가방을 옆자리에 풀썩 던져두고 몸을 뉘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이제야 주변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코끝으로 부드럽게 들어오는 가죽 냄새.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기함급 택시였는지, 퍼스트 클래스 부럽지 않은 좌석과 위스키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본요금이 아마······.
사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이 쓰레기같은 몸이 기절하기 직전이거든.
- 제게 목적지를 말씀해주세요. 요금이 정상결제되면 운행이 시작됩니다.
디스플레이가 확대되며 발두르 시티의 지도를 띄운다. 현재는 내가 위치한 중심업무지구에서 램프가 깜빡깜빡 점등 중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기.”
서서히 아득해져가는 정신속에서 손가락을 놀렸다.
틱-
시티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역을 찍었다.
저 뒤로는 포장도로가 끊겨있고 거대한 방어장벽으로 막혀있어 택시로도 갈 수 없는 최후의 외곽 구역.
발두르 최악의 슬럼가.
나는, 웨스트 정크타운으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