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염원하던
한 초고층빌딩 외벽을 차지한 거대한 스크린에서 낭랑한 목소리의 광고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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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바이오 컴퍼니 본사 회장 집무실.
투명한 창밖으로 인스턴트 마약 광고를 바라보던 중년의 남자, 잉그리드 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마약 카르텔로 가야 할 서류가 이쪽으로 잘못 도착한 것 같습니다만.”
“제대로 도착했네.”
“······.”
연방 대법원의 오래된 전통.
최종심의 판결문은 연방 집행관이 직접 원고와 피고 양측에 방문해 통보한다.
판결 불복이나 도피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는 명목이다. 반 회장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엔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가 인쇄되어있었다.
『 원고 반 바이오 컴퍼니는 피고 사천당가 코퍼레이션에 배상금 5억 크레딧을 즉시 지급하라 』
“보다시피, 귀측이 소송에서 패했네.”
연방 집행관의 날벼락 같은 통보에 반 회장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군요.”
몇 달 전부터 이어진 소송의 골자.
자사에서 개발한 나노 해독제 《Van-Type 4》는 마약중독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매우 성공적인 임상 결과를 거둔 만큼 수요자는 차고 넘쳐날 것이라 생각했건만, 시장에 출시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세계의 제약 시장과 마약 시장을 지배하는 무림계 메가콥인 사천당가에서 나노 해독제의 출시를 반기지 않았다는 것.
그냥 반기지 않는 정도로 넘어갔으면 좋았으련만, 그들은 반 바이오에서 개발한 나노해독제가 자사의 특허를 침해한 제품이라며 전방위로 압박해왔다.
무림계의 거목 대(大)사천당가.
연방 증권시장 전체 시가총액 7위.
메가콥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한 그룹.
그럼에도 반 회장은 소송을 선택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황당한 횡포질에 마법사 특유의 자존심이 발동한 것이다.
아무리 그 위세가 대단한 메가콥이라도 본사에서 내세운 증거들을 무마할 순 없으리라 생각했다. 본사에서 자력으로 개발해낸 제품이 확실했으니까.
부패한 시티 법원은 몰라도 연방대법원까지 소송을 끌고 간다면 분명 승소하리라 여겼다.
덧붙여 본사와 이해관계에 있는 대기업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도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자신의 장녀인 루벤카, 그 아이의 약혼자가 마법계에서 입지있는 그룹의 후계였기에.
하지만 철저한 오판이었나보다.
오늘 아침, 약혼으로 연을 맺은 그룹에서는 일방적인 파혼을 통보해 왔고 연방 대법원은 최종심 패소를 선고했다.
게다가.
“소송 배상금···5억 크레딧 즉시 지급?”
주식시장(F&S 연방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반 바이오 컴퍼니의 시가총액은 약 9억 크레딧. 반 회장이 가진 오너 지분과 자사주의 지분을 합쳐도 보유한 지분은 총 40%.
기업을 시장에 통째로 팔아넘겨도 당장 5억 크레딧은 마련할 수 없다. 나노해독제 제조시설 투자로 인해 본사의 현금성 자산도 바닥이다.
사실상 강제적 파산선고나 다름없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
본사에서 자신있게 제시한 증거나 연방 대법관 따위는···상위권 메가 코퍼레이션의 저력 앞에선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던 거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또 있을까.
찌이익- 찌직-
집행관이 들고 온 통보 서류가 반 회장의 마력에 의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잘게 찢겨 가루로 흩어진다.
“잘난 대법관도 메가콥의 뒷구멍이나 핥아먹는 개들이었군요. 벌레만도 못한······판결권을 끝까지 인공지능에 맡기지 않았던게 그따위 한심한 이유 때문이었다니.”
상스러운 반 회상의 욕설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도 집행관은 태연하게 물을 뿐.
“괜찮은 뒷배가 있었나?”
“······예. 오늘 아침 끊어졌습니다.”
“음, 자네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으니 뻣뻣하게 굴었을 테지.”
“소송을 결심하기 이틀 전, 새파랗게 어린 당가의 말단 직원이 찾아와서 내게 뭐라 지껄였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야 협박 비슷한 걸 했지 않겠나.”
“해독제의 코드와 특허권을 넘기면 체면은 차리게 해주겠다더군요. 감히 나를 상대로 말입니다.”
“제법 성공한 마법사의 자존심만큼 뭉개기 쉬운 것도 없지.”
쾅!
분노한 반 회장이 자리를 박찼다.
삽시간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마력.
회장실의 모든 집기가 우그러지며 허공에 떠오르더니, 당장이라도 천장을 뚫고 나갈 듯 진동한다.
그것은 실로 위협적인 광경이었으나.
“내게 하소연해봐야 소용없네.”
집행관의 태도는 시종일관 덤덤했다.
“······.”
그러자.
쿵!
반 회장이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그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마법계 인사가, 누구나 부러워하는 중견기업의 회장이라는 직함도 벗어던진 채로.
“제 자식들은 충분히 유능하니 배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힘써주십시오. 오딘···발할라···어디로든 가서 사람처럼만 살게 해주십시오.”
기업의 지분이 두 딸에게도 있다.
레나와 루벤카가 각각 지분 1%씩. 지분을 보유한 오너일가이니 사천당가의 마수는 반드시 자신의 두 딸에게까지 뻗칠 것이다.
연방 집행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로 무책임한 부성애일세.”
“돈을 드리겠습니다.”
“······황당하군.”
“루베르겐 집행관님. 크레딧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닥 대단치도 않은 제 귀에까지 집행관님의 소문이 들어옵니다.”
“그럼 못 들은 것으로 해주겠나.”
“5천만 크레딧.”
“그만하지.”
“1억 크레딧. 두 명만 힘써주십시오.”
“자네 돈 많군.”
“1억, 그리고 블러디 에센스까지 내드리겠습······.”
“내가 분명 그만하라지 않았나.”
순간 일변해 목을 조여오는 집행관의 압도적인 기세에 반 회장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이 이상의 설득은 불가능하리라 느낀 반 회장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판결 불복하겠습니다.”
“본 집행관은 협상을 하러 온 게 아니라 대법원의 뜻을 통보하러 온 걸세. 그러니 불복이라는 선택지는 없네.”
“입 닫고 조용히 죽으라는 거로군요.”
“지금까지는 대부분 그랬지.”
“······.”
조개처럼 굳게 닫히는 반 회장의 입.
잠시 가만히 앉아 분을 삭이던 그가 끝내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을 확인한 집행관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확인한 것으로 알고 가보겠네.”
조금 뒤.
사신같은 연방 집행관의 모습이 사라지자 허공으로 떠올랐던 집기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대부분이 형편없이 우그러지고 뭉개진 채였다. 꼭 반 일가가 겪게될 앞으로의 일들처럼.
“······.”
그렇게 홀로 남은 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망가진 집무실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반 회장은 돌연,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흐, 하핫······.”
이윽고.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물든 그의 눈동자가 집무실 구석의 한 공간으로 향한다.
* * *
반 바이오 컴퍼니, 레나의 사무실.
“아가씨.”
“벽보고 조용히 서 있어.”
“아. 예.”
오늘은 아무래도 시원한 콜라와 태업을 요구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전속 시종의 삶은 이렇게나 부조리하다.
어젯밤 일로 아직까지 심기가 불편한 레나가 업무를 보는 동안, 몰래 공용 시티넷에 접속해 시간을 보낸다.
발두르 의회에서 무슨 법이 통과되었다는 둥 군수기업이 파산했다는 둥의 뉴스들이 줄을 이었다.
문득, 연방증권거래소에 접속한 나는 하나의 기업을 검색했다.
‘사천당가.’
[ 기업명 ]
사천당가(四川唐家) 코퍼레이션
[ CEO ] : 당벽운(唐碧雲)
[ 본사 위치 ] : 수르트, 남경(南京)
[ 대표 업종 ] : 제약업
[ 시가 총액 ] : 1,884억 크레딧
[ 총액 순위 ] : 7위 ▲ —
[ 연 매출액 ] : 193억 크레딧
[ 총 직원수 ] : 359,000명(추정)
F&S 연방증권거래소에서 공시해둔 기업 사천당가의 대략적인 정보다.
시가총액 세계 7위.
워낙 음흉한 놈들이라 실제로는 드러난 수치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 가진 힘의 전부를 꺼내 보이는 건 뒷골목 흑도방파나 하는 짓이니 말이다.
‘구파 일방들도 그렇고···다른 세계라도 당가는 확실히 당가인가.’
그에 반해.
[ 기업명 ]
반 바이오 컴퍼니
[ CEO ] : 잉그리드 반
[ 본사 위치 ] : 발두르
[ 대표 업종 ] : 나노 의료기기
[ 시가 총액 ] : 9억 크레딧
[ 총액 순위 ] : 711위 ▲ 54
[ 연 매출액 ] : 5,700만 크레딧
[ 총 직원수 ] : 1,300명(추정)
반 바이오 정도면 발두르에서 나름 알아주는 기업인데도 당가와 비교하면 많이 초라하다. 최근 들어 기업이 급성장했음에도 이렇다.
현재 증권가를 달구고 있는 이슈.
나노 해독제를 둘러싼 반 바이오와 사천당가간의 특허소송 전쟁.
‘잘못되면, 그대로 끝이겠어.’
내가 아는 당가는 상식적인 놈들이 아니다. 3회차 세계인 중원의 사천당가도 그랬고, 지금까지 20년을 눌러앉아 살아본 결과 이곳의 당씨들 역시 꼴통이다.
무림시절 사파의 절대고수들과 기인이사들도 당문과는 부딪치길 꺼려했다.
한 번 시비가 붙으면 상대가 누구든 죽기 전까지 피를 말리는 독종놈들.
그런데.
내가 주인으로 모시는 레나의 아비가 얼마전 그런 당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무슨 특허 소송이라던가.
애초에 저만큼이나 차이가 벌어져 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반기를 든 건지 모르겠다.
그깟 마법사의 자존심이 그리도 중요한가? 잘나봐야 뭐 얼마나 잘난 마법사라고.
경험상,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날 것이다.
“레반!”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부르는 소리.
드디어 콜라를 허락해 줄 생각인가.
나는 하던 생각을 뒤로 밀어둔 채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 아가씨.”
“저, 저기좀 봐야할 것 같은데······?”
“?”
사무실의 입구쪽을 가리키는 레나의 손끝을 따라가자,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한 남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상당히 큰 키에 중년의 외모.
칠흑같이 어두운색의 러프한 정장.
당당하며 기품이 느껴지는 걸음걸이.
밖으로 드러난 손목과 손가락엔 군용 펄스건과 단분자 와이어 사출기로 추정되는 금속 무기가 탑재되어 있고, 볼 테면 보란 식으로 가리지 않은 일곱 개의 별 마크. 가슴팍엔 고급스러운 홀로그램으로 띄워진 공무원증이 보인다.
『 연방집행관 - 유크 루베르겐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방집행관?
연방집행관이 여길 왜 찾아왔지?
뚜벅-
코앞까지 다가온 집행관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천천히 응시했다.
단순히 시선이 스치고 갈 뿐인데도 몸이 저릿할 정도의 위압감. 업무를 보던 레나 역시 연방 집행관 출두라는 당황스러운 사태에 눈알만 굴리고 있다.
“저 아가씨 시종인가? 언제부터?”
나를 향한 집행관의 느닷없는 질문 세례.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가지 의문들을 숨긴 채 기계적으로 답한다.
“올해로 10년째입니다.”
“그렇군.”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아닐세. 그저···.”
말과 동시에 몸을 숙인 집행관이 내게 조용히 속삭인다.
- 마법계 기업 시종이 단전에 내공쌓는 취미도 있나 궁금하지 뭔가.
“······.”
담담한 어투에 살기가 어려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연방 집행관이 어째서 나를? 아니 애당초 이런 괴물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선······.
온갖 생각들로 머릿속이 난잡하게 변해가던 도중, 뒤이어 들려오는 집행관의 목소리가 내 잡념을 깨버렸다.
“당가도 참 지독하군.”
“······?”
“도착하면 적당히들 하라고 전해주시게.”
의문스러운 그 말만 남겨둔 채, 금세 몸을 돌려 떠나는 집행관.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레나가 참았던 숨을 내뱉는다.
느닷없이 나타나 무슨 소리일까.
저런 거물이 한낱 시종 따위에게 다가와 실없는 농담을 할 리는 없고.
‘적당히 하라고 전해라······뭘?’
그리고 그런 나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완벽하게 풀렸다.
유크 루베르겐이라는 이름의 연방집행관이 떠난 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치르릉-
치르르릉-
사내 통신망으로 연결된 수화기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연이어 울린다.
“뭐, 뭐야? 놀래라. 다들 갑자기 무슨 일······.”
[ 1층 로비입니다. 사천당가에서 찾아왔는데 회장님과 약속이 있으시다고······. ]
[ 지하 경비소입니다. 사천당가의 임원분께서 회장님을 찾아오셨는데 위로 올려보낼까요? ]
[ 사천당가 발두르 지사의 전무님께서 반 회장님을 찾아오셨······. ]
본능과 직감이란 게 있지 않은가.
아까 연방 집행관이란 작자가 찾아와 했던 얘기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스으으-
“······.”
그 순간.
피부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오감이 보내오는 정보에 집중한다.
분명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술에 물 탄 듯한 애매한 향이 언젠가부터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속에 남아있는 향.
지금의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미혼산(迷魂散).’
무색 무형 유취.
흡입한 자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마약. 나는 미혼산이 어디선가 하독되었음을 인지한 즉시 호흡을 멈추었다.
흡-
그래, 오늘이 개 잡는 복날이었군.
쥐톨만한 단전의 내공을 조금씩 끌어올리며 들이마신 미혼산의 약기를 몰아낸다.
“···졸리네.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레나는 약을 한껏 들이마셨다.
이미 동공이 반쯤 풀려있는 상태.
잔뜩 들이마셨다면 나도 별다른 수가 없다. 얼마 못 가서 쓰러질 것이다.
그때.
콰광-!! 꽈과광-!!!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건물의 최상층부에서 고막을 떨어 울리는 거대한 기파와 폭발음이 연신 터져 나온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듯 흔들리는 바닥.
누가 보더라도 심상치 않은 사태가 터진 이 시점에서, 평범한 시종인 나는···
“오늘이 복날 맞군.”
차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혼산이고 뭐고—
그토록 염원하던 탈출의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으니까.
▶ 긴급 상황
▶ 보호 대상 - 잉그리드 반 레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수행합니다.
덥썩-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경고음.
나는 전뇌 컨트롤 칩의 강제력을 따라 기절한 레나를 짐짝처럼 집어들곤, 미친듯이 사무실 밖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