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1화 (1/157)

Prologue. 어느 전생자의 마지막

Prologue. 어느 전생자의 마지막

이번 생은 마법에 미쳐 살았다.

그리고 곧, 죽는다.

【 내 너를 일찍이 만나길 잘했구나. 】

제국의 ‘위대한 세 별’ 이라고 불리는 눈앞의 대마법사에 의해.

만신창이의 몸으로 고개만 겨우 들어 올린다.

“좋은 옷 입고 다니네.”

고위급의 마법 술식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던, 지금은 다 찢어진 대마법사의 로브 자락이 보인다. 입맛이 조금 쓰다.

철저한 늙은이 같으니. 저 로브만 아니었다면 적어도 팔 한 짝은 가져갔을 것이다.

나는 허탈한 기분을 누르며 말했다.

“제국의 세 별이라는 작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

【 본래 괴물은 새끼일 때 잡는 것이다. 】

세상이 이렇게나 부조리하다.

늘 있던 제국과의 국경 분쟁에서 갑자기 8위계 대마법사라는 거물이 튀어나올 줄이야.

쿨럭-

전투에서 과도하게 운용한 마나회로는 전부 박살났고, 그로 인해 길 잃은 마나가 역류하며 전신을 걸레짝처럼 들쑤셔 놓았다.

내공 한 갑자를 쌓아둔 단전 마저 터져나갔다.

게다가 저 하늘 위에선 타오르는 유성이 천공을 두 갈래로 찢어발기며 떨어지고 있다.

짧은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구나. 심지어 기사 따위나 익히는 검술에 적지 않은 시간을 쏟았음에도······. 】

“빨리 죽여라.”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늙은이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검붉은 유성이 허공을 잡아먹으며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 아이야, 너는 그 경이로운 재능을 제대로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

그래서 지금 나더러 어떡하라고.

무슨 유언이라도 뱉길 기대하는 건가.

조용히 입을 닫고 있자, 이전보다 부드러워진 대마법사 늙은이의 말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 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

웃기는 소리.

지금 내 몸은 신이 와도 되살릴 수 없다.

상대를 짓눌러 죽이기 전, 얄팍한 우월감이나마 느끼기 위한 늙은이의 고약한 여흥일 뿐.

아니면 해골로라도 되살려서 쓰려나.

“난 사내답게 죽으련다. 여기도 지겨워지던 참이라.”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미련은 없다.

쓸만한 마법들은 전부 익혀뒀으니까.

푸욱!

품 안에 숨겨둔 단검을 비척비척 꺼내어 내 목을 찔렀다. 비릿한 핏물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울컥. 쿨럭-!

【 ······독한 놈이로고. 】

잠시 뒤, 유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대지를 달구기 시작하자 눈앞의 늙은이는 날 더 골려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이윽고.

세상을 환히 밝히는 거대한 광채와 함께 삐이- 하는 쨍한 이명만이 귓전을 메운다.

그렇게, 스물의 나이로 대륙 최연소 6위계를 목전에 두었던 왕국 마법사로서의 삶이자.

‘다음 세상은···좀비 아포칼립스만 아니면 좋겠는데.’

나의 4번째 생이 끝을 맺는다.

#1화. 전생자

#1화.

나는 전생자(轉生者)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생의 삶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는 너무 흔한 능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기야,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는 이들은 왕왕 있으니.

다만.

자그마치 4번의 전생을 모두 기억하며, 각각의 생들을 ‘다른 세계’에서 겪었다는 것이 그들과 나의 차이점이다.

【 첫 번째 생 - 한국 】

나의 첫 번째 생.

상당히 평범하고 재미없는 삶이었다.

기억나는 건 별별 이상한 아르바이트들과 더불어 게임관련 개인 방송을 꽤 오래 했었다는 것.

전업 스트리머의 딱 하나 있는 장점을 꼽자면···비는 오디오를 채우기 위한 혼잣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 정도.

각설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괜찮은 세상이었다.

살기 힘들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이 뒤에 떨어진 세상들에 비하면 무릉도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대체 누가 살기 좋은 21세기의 현대를 매도하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난 대충 살다가 죽었다.

# - 서른하나에 사고사.

사망 원인 : 횡단보도를 향해 폭주하는 트럭.

【 두 번째 생 - 좀비 아포칼립스 】

모든 생을 통틀어 최악의 세계.

정말 다신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다.

전생을 겪은 사람 중 가장 불행한 사람.

입 밖으로 상태창을 백 번 정도 내뱉어본 사람.

이 세계에는 신 따위 없다는 걸, 상태창 백 번 외치고 나서야 깨달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다.

죽은 뒤에 간 곳이니 처음에는 당연히 지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지옥보다 더하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진 않은 곳이었다.

두 번째 세계의 배경은 좀비 아포칼립스.

강력한 좀비 바이러스가 전세계에 창궐해 대부분의 인류가 좀비로 변해버린 세상.

미약한 초능력을 각성한 소수의 인간과 민간 생존자들, 군 병력이 뭉쳐 거점도시를 형성하기도 했으나 종국에는 싹 다 무너지고 뿔뿔이 흩어졌다.

역겨운 체취와 피, 시체, 살점들의 향연.

대충 기억나는 것들만 나열해도···

총에 맞아도 멀쩡한 놈.

탱크도 맨몸으로 깔아뭉개는 놈.

헬기 프로펠러를 뜯어먹는 놈.

펄스 뿜는 놈. 산성액 뱉는 놈.

사람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놈.

그리고······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

참 절망스러웠고 하루하루가 개같았다.

그나마 정상적이던 인간들도, 실어증 환자처럼 아무말 없이 지내다가 종국에는 다른 인간들처럼 미쳐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는 좀비를 피해 다녀야 했으며, 순진한 얼굴을 한 인간은 좀비보다 더 위험한 존재였다. 주변의 모든 것이 위협이었고 이틀에 서너 시간 이상 자면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라는 건 참 신비하다.

그런 극한 환경 속에서도 꾸역꾸역 살아가며 25년을 버텼으니 말이다. 비록 제정신과 인간성을 뇌 어딘가에 깊숙이 박아둔 채였지만.

아포칼립스에서 잔뜩 얻었던 온갖 트라우마와 정신병, 강박증은 전생의 회차를 뛰어넘어 아직도 남아있다.

가끔 멋대로 도지는 정신병덕에 낭패를 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

또한, 힘에 대한 집착과 갈망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2회차부터였다.

좀비 아포칼립스 이후로도 두 번의 삶을 더 겪었으나, 뇌리 어딘가에 끈질기게 박혀있는 힘에 대한 갈망은 아직도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힘없는 자는 처참하게 유린당하다가 고통스럽게 뜯어 먹혀 죽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생지옥이었다.

약한 자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 - 스물다섯에 의문사.

사망원인 : 무너진 마켓에서 식량을 구하던 도중 습격당함. 그 후로 기억이 없는 걸 보면······이하 생략.

【 세 번째 생 - 중원무림 】

전생 3회 차.

80년대 군협지나 무협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강호인들의 세상.

세 번째 삶은 무림인의 길을 걸었다.

내겐 어릴 적 연이 닿은 스승이 있었다.

그는 무림의 십대고수이자 유명한 광인(狂人)이었는데,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넘어간 직후, 정신나간 폐인이었던 날 제자로 받아준 인간인 만큼···

【 네놈은 나보다 더 미친놈이로구나. 】

어딘가 틀어진 인간이었다.

첫 만남부터 어린놈 눈에 살기만 들어찼다며 나를 잔칫날 돼지잡듯, 아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팼으니까.

하기야 괜히 광마(狂魔)라는 미치광이 별호가 붙었겠나.

아무튼 조화경(造化境)의 절대고수인 스승에게 어릴 적부터 거둬진 덕에, 이전 회차에서 잔뜩 쌓아뒀던 갈망과 집착은 더 높은 경지를 향한 집념으로 화했다.

고작 서른의 나이에 초절정 끝자락.

섬서에서 내 별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중원무림 전체를 따져봐도 십대 고수에 발가락 하나 얹을 정도는 되었을 거다.

오래 살았다면 더욱 상승의 경지까지 바라볼 수 있었고, 원한다면 어떤 자리든 꿰찰 수도 있었으며 유유자적 강호를 주유하며 살 수도 있었다.

전생에서 망가지고 피폐했던 정신머리도 늦게나마 제자리를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구파일방 화산파의 본산인 화산.

그 화산(華山)의 북쪽 봉우리에 들렀다가 피어있는 매화가 참 아름답기에···평소 눈여겨보던 여인에게 전해줄까 하며 가지를 꺾던 도중, 관계자에 덜미를 붙잡혔다.

그리고 관계자가 하필-

【 광마의 직전제자가 본산에는 어쩐 일이더냐. 】

본신의 경지가 하늘에 닿아 감히 매화검신이라 불리던, 화산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다.

절정의 무인도 손가락 하나로도 짓눌러 죽일 수 있는 중원의 절대자.

내 스승 광마보다도 두 단계 높은 배분의 노괴.

【 무재는 놀랄 만큼 출중하구나. 화산에 올랐다면 좋았을것을······. 】

죽을 각오로 검을 휘둘러봤으나 열 합을 버티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보통 매화치고는 너무 화려하다 싶었다. 추측컨대 자소단의 재료로 귀하게 쓰이는 천봉(天峰) 매화였을 것이다.

나뭇가지좀 꺾었기로서니 다짜고짜 사람을 죽일 작자는 아니고···.

# - 서른다섯에 타살.

사망원인 : 광마의 제자라서.

【 네 번째 생 - 라아기스 】

조금 전, 유성에 뭉개져 죽은 네 번째 생은 중세 배경의 판타지 세계.

검과 마법, 기사와 마법사들의 세상.

몇 개의 왕국과 제국이 국경선을 따라 대립하는 대수림에는 위험한 괴물들과 종족들이, 높고 험준한 산맥이나 깊은 바다에는 상식의 한계를 초월한 용(龍)도 있었다.

기(氣)를 마나로 부르던 세계.

그 마나가 풍족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세계.

나는 무림 시절의 기억과 경험을 살려 어린 시절부터 하단전에 내공을 쌓았다.

중원에 비해 높은 마나농도 덕분인지 내공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더러운 길바닥에서 가부좌를 틀고 운공해도 공기맑은 심산유곡에 있는듯했다.

무림의 기준으로 일류의 경지에 접어들었을 무렵.

우연히 마주친 왕국 마법사와의 대화에서 [ 어릴 적부터 마나를 홀로 터득한 천재지만 훌륭한 스승이 없어 등신 같은 짓을 했구나! ] 같은 소리를 들었다.

마나는 자연으로부터 빌려와 사용하는 것이지, 한곳에 묶어두는 것은 드래곤하트를 가진 용이나 하는 짓이라던가.

어차피 이 세계를 꽉꽉 채우고 있는 마나입자인데 그냥 그때그때 빨아들여 쓰면 그만이라는 소리였다.

이 세계에서 나고자란 마법사 입장에선 그럴 만도 했다.

라아기스의 마법사들은 심장을 중심축으로 삼아 생성한 마나회로를 이용했다.

자연의 마나입자를 얼마나 많이, 빠르게 흡수한 뒤 순환시키느냐에 따라 그 수준이 갈리는 것이다.

결국 그 마법사의 손에 몰타왕국 마탑으로 끌려가 “자기가 용인 줄 아는 비운의 천재” 소리를 들으며 마법을 배웠고, 몰타 왕국의 마나 호흡법을 터득했다.

몰타에는 ‘고리를 엮는다’라는 말이 있었다.

마나 입자를 받아들여 순환하는 통로인 ‘마나 회로’가 늘어날 때마다 고리를 엮었다고 표현하는 것인데, 나는 마법을 배운지 13년 만에 총 다섯 개의 고리를 엮어버렸다.

나이 스물에 5위계 상급 마법사.

백 살 가까이 살아온 몰타 왕국의 대마탑주가 6위계에서 7위계 사이였음을 생각하면 장래가 매우 유망한 마법사였지만···

늘상 있던 제국과의 분쟁 도중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대마법사가 불쑥 나타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제대로 된 마을도 하나 없는 곳에 말이다.

무림에서도 그렇고···힘만 센 늙은이들과의 연이 질긴 듯하다.

그래도 쓸만한 마법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다.

# - 스물에 재해사.

사망원인 : 운석과의 박치기 대결에서 패배.

여기까지 총 네 번의 생을 겪었다.

덧붙이자면 왜 내게만 이런 특별한 일이, 혹시 난 신처럼 대단한 존재인가, 같은 부류의 망상들은 진작에 관두었다.

다음 세계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억뿐. 날 때부터 무인의 단전이나 마법사의 마나회로같은 것을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어찌 되었건, 이제 무공도 모자라 마법까지 익혔다.

만약 이 죽음이 전생 굴레의 끝이 아니라면, 내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져 어떠한 세계에 떨어진다면······이제는 허무하게 죽지 않을 것이다.

설령, 좀비 아포칼립스보다 더한 세계에 떨어지더라도.

*

—라고.

괜한 소리를 지껄였다.

역시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 #No 31. 기억관리 프로그램 종합 카트리지와 컨트롤 칩 이식 완료. 신경 동기화 작업 중입니다. 〕

보통의 전생들과는 무언가 다른, 고저없이 딱딱한 기계음이 5회차 인생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 3,650일간 전뇌 동면 활성화. 가상 기억관리 프로그램이 최대속도로 주기별 업데이트를 실행합니다. 뇌파 안정화 단계까지 예상 시점은 3,650일 뒤입니다. 〕

“······?”

뭔가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

- 프로그램이 실행됩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말이다.

〔 안녕? 반가워! ]

〔 난 오늘부터 데이터 업데이트를 주관할 ‘지니’ 라고 해! 가장 먼저 ‘감각’을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지금부터 시작할게! 〕

내가 뭐라 의문을 표현하기도 전, 순식간에 몽롱해져 가는 의식.

금세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온다.

······

〔 안녕! 좋은 아침이지? 오늘은 ‘감정’을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안녕! 좋은 아침이지? 오늘은 ‘문자와 숫자, 언어의 이해’ 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안녕! 좋은 아침이지? 오늘부터 ‘세계의 문화 1편’을 업데이트 할 예정이야! 방대한 양인만큼 업데이트가 진행되는 30일간은 조금 어지러울 수 있어! 〕

파도처럼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정보. 기억들이 ‘업데이트’ 되기 시작했다.

〔 — ! ———— 지? 오늘은 ‘연방의 역사’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시티 외곽의 하루’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크레딧의 개념’을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기업의 역사’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정치와 경제의 상관관계’를 ———! 〕

〔 — ! ———— 지? 오늘은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 사이버웨어의 이해’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 ———— 지? 오늘은 ‘마법과 무공의 이해’를 업데이트할 예정이야! 〕

〔 — ‘시종의 기본자세’··· 〕

〔 — ‘마약의 역사’··· 〕

〔 — ‘성교육’ —! 〕

〔 — ‘개척에 대하여’ —! 〕

〔 — ‘이종족과 아인종’ —! 〕

〔 — ‘내연기관의 이해’ —! 〕

〔 — ‘죽지 않는 시체 언데드와 방사능의 상관관계’ —! 〕

〔 — ! — ? #%^@ ! 〕

〔 ! ? #%^@ ! 〕

······

〔 안녕! 좋은 아침이지? 〕

“······.”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지니의 인사와 함께 말짱히 깨어난 정신.

〔 오늘부터 #31은 발두르 시티의 마법계 제약회사 ‘반 바이오 컴퍼니(Van Bio Co.) 에 귀속되어 오너 일가이신 ‘잉그리드 반 레나’ 님의 시종으로 본분을 다하게 돼! 〕

〔 #31! 3,650일간의 대규모 업데이트 중 손실된 내용이 있을 수도 있으니, 헷갈리는 내용이 있다면 지금부터 내게 음성으로 질문할 수 있어! 〕

귀속, 시종, 마법계 어쩌고 하는 얘기들이 머릿속을 웅웅 울려댔다. 그중 가장 반가운 것은 음성으로 질문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 들리나?”

〔 응! 네 성대는 아주 건강해! 〕

내 입에서 흘러나온건 아직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자그마치 10년 만에 이 몸으로 처음 입을 떼어봤다.

혼란스럽고 요상한 일들이 벌어졌지만···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해본다.

“지니. 네 말을 요약하자면, 난 이제부터 대가리에 박힌 인공칩에 평생 강제로 통제당하는 인간 노예가 된다. 맞나?”

〔 응! 〕

“이거 아주 웃긴 새끼네.”

입이 열리자마자 자동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인공지능 지니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히 대답했다.

〔 3650일 전, 반 바이오 컴퍼니에서 #31을 주문 예약했어. 오늘이 바로 #31의 출고날이야. 〕

“잉그리드 어쩌고가 인간인 나를 시종으로 쓰기 위해 주문했다. 그것도 내가 태어나기 하루 전에?”

〔 응! 〕

“어미는 뭐 하는 인간이길래······.”

〔 인공 배양 시스템이야. 〕

“난 부모도 없나?”

〔 응. 〕

“······.”

도무지 믿기 힘든 지니의 답변.

그 뒤로도 몇번의 날카로운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나서야, 나는 마침내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은 진작부터 다 예상하고 있었던, 끝끝내 부정하고팠던 현실을.

‘굉장히 좆같은 세상에 떨어졌군.’

나의 다섯 번째 인생은······

“그냥 죽어버릴까.”

〔 #31! 그건 불가능하게 프로그램 되어있어. 〕

벌써 순탄치 않아보인다.

*

—— 그로부터 10년 뒤.

【 오딘 스테이션 ▶ 발두르 시티 행 】

시티 스테이션 앞에서 배속된 임원용 캐리어를 기다리던 한 남성이 옆을 보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루베르겐 집행관님 아니십니까?”

“칼스. 자네 꽤 오랜만이군.”

대답한 이는 가슴팍에 연방정부의 표식을 달고 있는 남자. 일곱 개의 별을 이어놓은 연방정부의 위압적인 마크가 스테이션의 밝은 불빛을 받아 번쩍인다.

칼스라 불린 남자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그런데 들고 계신 서류는 혹시 이번 ‘반 바이오 컴퍼니(Van Bio Co)’ 사건 관련 서류입니까?”

“그래. 듣자 하니 그쪽은 난리가 났다더군.”

“그랬었죠. 아무리 자사의 승소가 확실시된다 해도 일개 중견기업이 무림계 시가총액 3위, 사천당가(四川唐家) 코퍼레이션에 겁없이 소송을 걸어버렸으니······.”

일개 기업이 메가 코퍼레이션(Mega-Corp)에 소송을 건다? 말 그대로 정신나간 짓이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마법사란 족속은, 가끔 고개가 필요 이상으로 빳빳해질 때가 있단 말이지. 마법계 인사들은 그래서 골치가 아파.”

“확실히 그런 면이 있죠. 아! 물론 집행관님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쯧.”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궐련을 빼어 무는 집행관.

화아악-

손끝에서 피어난 불길이 궐련에 옮겨붙고, 흰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간다.

“칼스.”

“예, 집행관님.”

“자네도 반 바이오 컴퍼니 주식 샀나?”

“신제품 발표 전에 쓸어 담아뒀습죠. 당가와의 특허소송이 큰 산이지만 일단 승소는 확실할 테니-”

“그거 전부 처분해야 할 거야.”

“······예?”

때마침, 스테이션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연방정부의 공무용 캐리어.

집행관은 『연방대법원 최종심』 — 『원고 반 바이오 컴퍼니 패소』 라고 적혀있는 통보서류를 휘적거리며 캐리어에 올랐다.

덤덤한 마지막 말과 함께.

“이제 곧 사라질 회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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