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천요궁
“대형! 이놈들 벌써 사라졌는데요?”
황대산이 뛰어나오며 외쳤다.
“뭐! 방금까지 누가 있는 걸 느꼈었는데… 그러고 보니 기운이 다 사라졌네?”
“장원 어디엔가 비밀통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유성탄은 청담의 기운을 느꼈던 곳을 쳐다보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말했다.
“니들 우선 여기 정리하고 하후란에게 가 있어라.”
“예? 대형은 어쩌시려고요?”
“난 어디 좀 갈 데가 있다. 그럼 거기서 보자.”
유성탄은 말을 마치자마자 후다닥 뛰어나갔다. 다가오던 청담의 기운이 갑자기 멈춘 것이다. 그 말은 청담이 이곳의 상황을 눈치 챘다고 할 수 있었다.
“사자님, 포천망쾌가 장원에 나타난 모양입니다.”
청담은 다음 계획을 열심히 구상하며 장원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밀단의 단주인 채지공이 가마의 앞을 막더니 급히 보고했다. 청담의 안전을 위해 어디를 가든 먼저 가서 주위를 살피는 것은 지밀단의 임무였다.
“뭐야? 아니, 그놈이 어떻게 여기에?”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이미 장원은 쑥대밭이 됐고 손님들은 비밀통로를 통해 제삼의 장소로 이동 중입니다.”
“도대체, 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뭐기에.”
청담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타고난 머리와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을 무공을 가지고 천하를 요리해 왔다고 자부해 온 그였다. 하지만 유성탄에 대해서만은 어찌 대처를 할지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뭐냐?”
채지공은 지밀단의 대원 하나가 갑자기 뛰어오자 급히 물었다. 비상사태가 아니라면 절대로 이렇게 나타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천망쾌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거의 직진으로 오는 것이 사자님을 노리고 오는 것 같습니다.”
가마 안에 앉아 있던 청담의 안색이 변했다. 이미 유성탄의 추격을 한번 받아본 적이 있는 그였고 그 덕에 귀중한 강시 넷을 순식간에 잃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자님,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채지공도 심각함을 느꼈는지 급히 청담에게 피하기를 권했고 곧 가마 안에서 조그만 피리 소리가 들리자 가마꾼들은 가마를 돌리더니 굉장한 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말 이것이 우연이란 말인가? 어떻게 가는 곳마다 포천망쾌 저놈과 마주친다는 말인가?’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될 곳까지 나타나는 유성탄의 존재는 청담으로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고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서늘해 올 정도였다.
“아이 씨! 또 피곤하게 생겼네. 자식이 잡으러 가면 좀 기다려주면 좋잖아. 꼭 도망을 치네. 씨!”
유성탄은 청담의 기가 빠른 속도로 멀어지자 짜증이 확 일었다. 누군가가 잡으러 오면 도망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에이! 오살 얘들이 위험하다고 해서 쉬지 않고 뛰어왔는데 또 뛰어야 하나.’
유성탄은 엄청 귀찮았다. 하지만 한두 푼도 아니고 금자가 삼천 냥이었다. 유성탄은 빠른 속도로 청담을 쫓기 시작했다.
“분명 포천망쾌가 이곳으로 갔다고 했지?”
“분명합니다. 궁주님의 명으로 모든 조직의 촉각이 포천망쾌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 왜?”
“얼마 전에는 흑수칠흉까지 제거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우리만 가서 그를 잡아온다는 것은 거의…….”
“나도 안다. 하지만 궁주님의 명이 있었고 내 짐작으로도 잡아는 못 가도 쫓아오게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교미향과 천요궁의 정예 이십여 명은 유성탄이 갔다는 산으로 유성탄을 잡으러 가고 있었다. 천하 구석구석 없는 곳이 없는 것이 거지였고, 사람 사는 곳이면 반드시 있는 곳이 또한 주루와 기루였다. 특히 창기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수까지 합치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천요궁의 정보망은 바로 기녀들이었다. 정보를 구하러 다니는 개방이나 하오문과는 달리 기녀들의 정보는 그냥 방에서 밤에 얻어지는 것이 태반이었다. 개중에는 여자 앞에서 괜히 쳐보는 허풍도 많았지만 생각 외로 아주 중요한 정보가 자신도 모르게 술을 마시는 중에 튀어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유성탄은 이미 수많은 세력에서 주시하고 있었고 그 자신이 굳이 숨어 다니지도 않았다. 당연히 천요궁의 정보망에 안 걸릴 수는 없었다.
“쉿!”
교미향은 유성탄이 갔다는 방향으로 산을 올라가다가 손을 들어 일행의 걸음을 멈추고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뭐야? 포천망쾌잖아? 하여간에 찾으려고만 하면 그냥 찾아지니. 정말 쉬운 자야.’
큰 산에서 찾으려면 상당히 힘들 줄 알았던 유성탄이 찾으려고 하자마자 눈에 띄자 교미향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유성탄은 청담을 쫓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땅에 귀를 대고 있었다. 청담이 간 방향을 찾기 위해서였다.
‘으잉! 웬 여자들이 이 산속에? 어, 이 기운은 바로… 소 젖?’
귀를 땅에 대고 있던 유성탄은 갑자기 느껴지는 여인들의 기운에 청담이 도망친 방향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번에는 교미향의 기운이 느껴진 곳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이군요.”
교미향은 유성탄이 쳐다보자 이미 들켰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모습을 나타내며 말했다.
“그리 오래전도 아닌데 오랜만은 무슨.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야?”
“저희 궁주님께서 포천망쾌 님을 좀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고 예쁜 게 왜 나를? 혹시 한번…….’
상큼한 상상을 하며 유성탄이 물었다.
“뭐, 가죽을 벗긴다느니 그러려고 찾는 것은 아니겠지? 솔직히 내 가죽은 벗기기 좀 힘들어.”
“호호호! 그럴 리가요! 저희 궁주님께서는 포천망쾌 님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한번 해보고 싶으시다는군요.”
“그래? 그건 좋은데 나 지금 좀 바쁘거든,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때 생각해 볼게.”
유성탄은 허심탄회하게 하는 대화가 어떤 건지 조금은 궁금했지만 우선은 금자 삼천 냥부터 챙기고 싶었다.
“잠깐만요!”
청담이 간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는 뛸 준비를 하는 유성탄을 교미향이 급히 불렀다.
“저희 궁의 아이들이 포천망쾌 님을 만난 기념으로 재미있는 춤을 선사하고 싶다는데 보고 싶지 않으세요?”
‘춤? 애들 춤이라면, 그거 옷을 살살 벗어가면서 추는 춤! 아이 씨, 최고의 기횐데.’
금자 삼천 냥이냐, 아니면 보기 힘든 나체 춤이냐의 기로에서 잠시 고민하던 유성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중얼거렸다.
“금자 삼천 냥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잡지 뭐!”
청담은 언제라도 잡을 수 있지만 이런 춤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몰랐다.
‘흥! 정말 궁주님 말씀대로군. 어떻게 일 단계의 반도 안 지났는데 벌써 눈이 저렇게 몽롱해질까?’
천요궁의 환락무는 오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 단계는 신음과 어깨를 살짝 비치는 정도로 기루에 자주 다녀본 자들은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도 않는 단계였다. 그런데 유성탄은 벌써 넋이 빠진 모습이 아닌가.
“포천망쾌께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랑 같이 가마를 타고 가면서 노는 것이 어떻겠어요?”
교미향이 교태로운 몸짓으로 유성탄을 향해 다가가더니 고혹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가마? 가마에서 노는 것은 어떤 건가?”
“호호호! 아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황홀한 추억이 될 거예요.”
“황홀한 추억? 헤헤헤, 좋은 말이네. 좋아, 가마 안에서의 황홀한 추억이 뭔지 안 해보면 후회할 것 같으니 해야지! 그런데 이 춤은 다 보고 가면 안 될까?”
“호호호, 여기는 그래도 백주대낮이에요. 진짜 재미있는 광경을 보려면 사람이 좀 없는 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 이 없는 곳? 이것 봐라. 점점 내가 좋아하는 상황만 말하네.’
“그럼 사람 없는 곳에 가면 춤도 끝까지 다 보고 황홀한 추억도 갖고 한다 이 말이지?”
“물론이지요.”
“난 만지는 것도 좋아하는데!”
‘징그러운 놈. 밝히기는…….’
교미향은 유성탄의 말을 듣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썹이 올라갔다.
“어?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눈치는 엄청 빠른 놈이군.’
교미향은 유성탄의 말에 급히 표정을 바꾸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어찌 포천망쾌 님께 화를 내겠습니까? 호호호! 농담도 잘하시는 것 같아요.”
“내가 겸손해서 말은 잘 안 하는데 나보고 사람들이 분위기에 맞춰서 말을 너무 잘한다고 하긴 하지.”
‘겸손은 무슨 얼어 죽을 겸손! 어떻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네.’
교미향은 이런 유성탄을 왜 화설군이 굳이 잡아오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유성탄이 그녀의 알몸을 보고 요상하게 뽀뽀도 좀 하고 그랬지만 그런 것 정도는 천요궁 사람이라면 간단하게 잊어버릴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응응, 그러니까 응…….”
“아이 참. 이 좁은 가마 안에서… 조금만 참으세요.”
“그래요. 성질도 급하시다, 참!”
교미향은 가마 안에 유성탄과 두 명의 여인을 같이 앉혔다. 좁은 가마 안이다 보니 거의 완전 밀착이 된 상황이라는 것은 눈에 보였지만 유성탄을 도망도 못 가게 하고 딴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양옆에 여인을 붙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본 것이다.
‘어떻게 일 단계도 끝나기 전에 저렇게 간단히 유혹이 될까? 거기다 저놈 아까 보니까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는데. 저놈 진짜 고수 맞아?’
교미향은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생각을 하고 유성탄을 쫓아왔는데 너무나도 간단하게 유성탄을 납치하게 되자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물론 유성탄은 전혀 자신이 납치된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 * *
“또 사라졌다고요? 아니, 태웅장사까지 놓치면 어떡해요?”
장원을 떠난 유성탄의 행적이 감쪽같이 사라지자 하후란이 강태웅을 닦달했다. 지금까지 유성탄의 행동을 제어하지는 못했지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놓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은 완전히 유성탄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하, 대형께서 그냥 가라는데 전들 어쩌겠습니까?”
“하하… 요? 아니, 태웅장사께서는 지금 걱정도 안 되세요?”
“하후 소저께서 근래 대형을 보시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무슨 뜻이지요?”
“대형은 절대로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 * *
“죄송하게 됐소이다.”
청담은 장원에서 비밀통로로 빠져나온 자들을 두 번째 그의 비밀장원에서 만났다. 유성탄의 추격에 식겁했던 청담은 갑자기 더 이상의 추격이 없다는 말에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면서도 더 이상의 시간을 끌 수가 없는 상황에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만난 것이다. 갈수록 유성탄을 높이 평가하는 그였다.
“오랜만이오.”
조황이 따랐던 자가 머리에 쓴 두건을 벗으며 인사를 했다. 놀랍게도 그는 머리가 하나도 없었고 이마의 중앙에 뻘건 부처상이 문신되어 있었다. 바로 서역밀교의 중이었다.
“우리는 청 형만 믿고 먼 길을 왔는데 이렇게 고생을 시킬 줄은 몰랐소이다.”
이번에는 지정우가 쫓았던 죽립을 쓴 자가 죽립을 벗으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머리의 반은 면도를 했고 뒤는 묶어 높이 올린 왜국 특유의 머리를 한 자가 나타났다.
“미안하오. 생각지도 않은 방해자가 생기는 통에 조금 문제가 생겼소이다.”
말을 마친 그들은 둥근 탁자에 앉더니 밀담에 들어갔다.
“우리는 이미 상당수가 중원으로 들어왔소. 명만 내리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소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곳에서 활동에 들어갔소. 그리고 왜관에도 상당수가 들어오고 있소. 문제는 갑자기 왜관의 경계가 심해지고 있어서 왜관을 빠져나오기가 만만치 않은 듯싶소.”
“그것은 걱정 마시오. 내가 직접 왜관으로 갈 예정이니 잘 처리하겠소.”
무엇인가 일이 꾸며지고 있었다.
* * *
“공주님, 용 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요. 뭐 발견한 것이 있다고 하던가요?”
“확실한 것은 아직 없는데 변방의 움직임이 좀 수상하다고 합니다.”
“변방이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대규모 군사의 움직임은 안 보이지만 용문관, 귀문관, 호로관 등 새외로 나가는 모든 관문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는군요.”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던가요?”
“행색은 장사꾼이지만 가지고 들어온 물건도 많지 않고 그보다 움직이지를 않는답니다.”
“장사꾼이라면 당연히 움직여야 하는데. 그곳에 큰 장이라도 섰나요?”
“원래 관문들에는 커다란 상시장이 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크기나 교역량은 관에서 정한 대로 팔도록 군에서 철저하게 감시하기 때문에 아무나 끼어들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주소연이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왜관(倭館) 쪽은 어떻다고 하던가요?”
“그쪽은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곳도 알아보고 다시 보고하세요. 그리고 유성탄을 찾는 대로 빨리 돌아오라고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생각 외로 반역의 무리들의 세력이 강한 것 같다. 만약 안과 밖에서 같이 호응한다면… 도대체 이 자식은 어디를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하여간에 필요하면 없어요.’
팔지신타가 나간 후 혼자 중얼거리던 주소연은 종이를 꺼내더니 서찰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황제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야 할 비상시국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 *
“뭐라고? 금모전에서 절강에 거점을 세운 것 같다고!”
마룡방주 사군도는 마룡방의 정보 책임자인 소양도의 보고를 받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십대고수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 스스로는 절대로 십대고수보다 약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거기다 오대사파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곳도 마룡방이었다. 한마디로 어떤 세력이나 고수도 두려워할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근 일 년간 계속되는 외환(外患)은 사군도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구룡회와 전면전으로 치달을 것 같으니 어부지리(漁父之利)라도 얻을 요량인 것 같습니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당장 가서 모두 목을 베어 다시는 감히 절강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장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외당당주 조운리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조 당주!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사안이 아니오.”
내당당주 막송주가 조운리를 쳐다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듯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막송주는 내당당주 겸 군사 역할까지 하고 있는 마룡방의 머리였다. 그가 입을 열자 사군도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모였다.
“뭔가 이상합니다.”
막송주가 사군도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예! 시작은 조그만 흑도의 도박장에 낭인칠웅이라는 벌레만도 못한 낭인 나부랭이가 시비를 걸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낭인 나부랭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에게 생각지도 않게 마룡방이 자랑하는 두 개의 무력집단이 전멸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막송주가 그렇지 않아도 마룡방이 근래 가장 치욕적으로 생각하고는 일부러 꺼내지 않던 예전 사건을 입에 담자 모두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그러나 막송주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금을 주고 청부한 혈문도 가는 족족 살수들이 행방불명이 되면서 완전히 초상집으로 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아직까지 낭인칠웅의 진정한 정체를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와중에 구룡회가 본방의 수하들을 암살한 것이 밝혀지면서 지금 구룡회와는 사방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막송주는 주르륵 상황을 얘기하더니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시작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포천망쾌라는 신비한 포쾌 놈이 나타나더니 사방에서 마룡방의 무사들을 옥에 가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금모전이 절강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들 말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들이 상당히 많이 절강에 들어왔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막송주가 말을 끝내자 모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마룡방 최대의 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도 구룡회는 언젠가 손을 볼 생각이었다.”
사군도가 방주답게 의연하게 말했다.
“저도 언젠가는 구룡회를 손봐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무척 안 좋습니다.”
“무슨 상황이 안 좋다는 말이냐? 천하는 아직 본 방의 진정한 힘을 모른다.”
사군도는 마룡방의 숨은 힘을 믿는 듯했다.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구룡회만 상대한다면 제가 이렇게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입니다. 그들이 절강에 들어온 이유가 분명치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뒤통수를 치려 한다면 우리는 사방으로 적을 맞이하는 셈이 됩니다. 거기다 포천망쾌란 놈 때문에 곳곳에서 무사들을 운용하는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금모전을 지금 친다면 그놈들까지 구룡회의 편을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로서도 아주 힘겨운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말해 봐라.”
“금모전은 좀 달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막 당주께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금모전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모른다는 말이오? 우리가 약한 면을 보인다면 우리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를 놈들이 그놈들이오. 거기다 그놈들이 바라는 것이 뭔지 눈에 보이는 판에 어떻게 달랜다는 말이오!”
아직까지 서 있던 조운리가 열이 받았는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다면 구룡회에서 먼저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어쩌실 작정이오! 대안이 없이 무조건 목소리만 크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아시오!”
“조용히 해라.”
사군도의 목소리가 울리자 모두의 입이 닫혔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주님, 확실하지는 않지만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듣고 있던 정보책임자인 소양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해 봐라.”
“정보를 정리하다 보니까 포천망쾌 그놈이 돈에 아주 약하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포천망쾌 그놈을 돈으로 구슬려서 구룡회와 금모전 놈들만 옥에 가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확실한 정보냐?”
“예, 분명합니다. 절대로 정의로운 놈은 아닙니다.”
세상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마룡방에서는 유성탄을 이용하여 적을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 * *
“금모전이 절강에 들어왔다? 흐흐흐, 아주 절묘하게 나타났구나. 한번 의견을 말해 봐라.”
구룡회주 저만우가 비만한 몸을 모로 뉘인 채 물었다.
“금모전의 힘은 절대로 우리 구룡회나 마룡방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동안에도 여러 번 절강에 발을 디디기 위해 음모를 꾸며왔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매번 큰 손해를 입고 물러났었습니다.”
총관 유불곡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은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절강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각기 자신의 터를 지키고 있을 때는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지만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워 망신창이가 된다면 멀쩡한 한 마리보다 더 상대하기가 쉬워지는 법이다.”
“하지만 금모전에서 아직 두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는 말은 뭔가 음모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당 당주 심제림의 뜬금없는 말에 저만우가 이채를 띠고는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와 마룡방은 거의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금모전의 사구치평이나 내당주인 여충락이나 미련한 자들이 아닙니다. 저라면 구룡회와 마룡방이 싸움이 붙은 후에 상황을 봐가면서 절강으로 들어섰을 것입니다.”
심제림의 말을 듣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맞는 말이었다. 싸움이 붙은 후에 들어왔으면 쉽게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맞습니다. 그동안도 우리 구룡회와 마룡방은 으르렁대다가도 다른 사파가 절강에 들어서면 합심해서 몰아내곤 했습니다. 금모전이 지금 들어온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화해의 기회를 준 것이 됩니다.”
수하들의 말을 들으며 저만우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듣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 총관의 보고에 따르면 그동안 마룡방과 화해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그때마다 일이 꼬여서 더 상황이 더 나빠지곤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우리를 데리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감히 어떤 놈이 우리 구룡회를 어떻게 보고!”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금모전에게 반대급부를 주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은 안 된다. 사구치평 그놈은 아주 음흉하고 욕심이 끝이 없는 놈이다. 그놈과 동조를 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저만우는 사구치평에 대해 아주 잘 아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요?”
심제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해 봐라.”
“포천망괘란 놈이 아주 돈 귀신이랍니다. 그놈을 이용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포천망쾌를? 그놈 아주 개차반이라고 들었는데 될까?”
“돈에는 아주 공손하다고 합니다. 그놈에게 돈을 주고 마룡방과 금모전 놈들만 잡아가라고 하면 틀림없이 말을 들을 것입니다.”
구룡회에서도 유성탄을 이용하여 돌파구를 마련하기로 했다.
* * *
“수하들의 사기가 안 좋습니다.”
“왜?”
“지금 이곳에 있는 수하들의 수가 겨우 오십여 명입니다. 거기다 본 전은 수천 리 떨어져 있으니 기습을 받으면 완전히 죽은 목숨이 아니겠습니까?”
“걱정 말라고 해라. 금모전의 외당 당주가 무슨 강아지 목숨인 줄 아느냐? 죽을 자리라면 내가 직접 올 이유가 있겠느냐? 그들은 절대로 우리를 치지 못한다.”
포덕술은 딴에는 의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불만스런 표정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사실 잘못하면 진짜 강아지 목숨이 될 수도 있는 이곳에 파견될 때 그도 약간의 저항을 했었다. 하지만 금모전의 외당당주인 포덕술 같은 간부가 가지 않는다면 수하들이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며 절대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내당당주 여충락의 장담에 전주인 사구치평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쩔 수 없이 오게 되었으니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하들로서는 불안하기도 할 것입니다.”
“걱정 말라고 해라. 거기다가 그 괴물 같은 포천망쾌 놈이 곧 우리를 도우러 올 것이다. 전주님 말씀이 우리가 들어오면 마룡방과 구룡회 놈들이 우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다 잡아가기로 약속을 했다고 했다. 우리는 청담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사구치평은 유성탄이 이미 그와 한 약속 따위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금모전에서도 유성탄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포천망쾌 그놈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예, 방금 수석당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곧 궁 안으로 들어올 것 같으니 준비를 하시라고요.”
천요궁의 최고 배분을 자랑하는 천색파파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는 말했다. 이미 나이가 구십이 넘은 그녀였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색색의 화장을 하고 있었다.
“흥!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세상에서 가장 납치하기 쉬운 놈이 바로 그놈이라고! 오기만 해봐. 내 그냥……!”
“마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화설군과 천색파파가 대화를 나누는데 역시 화장을 진하게 한 여인 하나가 급히 뛰어들더니 크게 보고를 했다.
“빨리도 오네! 전부 다 준비하라고 해요. 그리고 커다란 형틀도 준비하고요.”
“알겠습니다.”
“헤헤헤! 참 오래도 간다. 무슨 으슥하고 조용한 곳이 이렇게 머냐?”
유성탄은 두 여인을 양손에 안고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늦는 것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는 말투였다.
“좋은 데를 가는데 금방 가면 더 이상하지요. 그런데 손 좀 가만히 있으시면 안 돼요?”
오른쪽에 앉아 아양을 떨던 여인이 유성탄의 가슴을 손으로 쓸며 물었다.
“손이란 것이 잡히는 대로 주무르라고 있는 건데 그걸 사용 안 하면 벌 받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유성탄의 말에 두 여인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말도 참 재미있게 하신다니까!”
유성탄은 그냥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는 여인들의 말을 들으며 자신에게 남들에게 없는 여자 꼬드기는 말재주가 있다는 착각을 한다.
“어! 재미있는 마차네?”
마차가 서자 신기하게 마차의 지붕이 반으로 쪼개지며 열리자 유성탄이 신기한 듯이 소리쳤다. 급한 경우 지붕이 열리는 천요궁만의 특수한 지붕개폐식 마차였다.
“뭐야! 납치를 해 오랬더니? 저게 납치야!”
화설군은 거의 상반신을 벗은 채 유성탄의 품에 안겨 있는 두 여인을 보자 입에서 뜨거운 연기를 내뿜으며 교미향에게 소리쳤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으잉? 쟤가 어떻게……?”
유성탄이 화설군의 목소리를 듣고는 그쪽을 쳐다보다가는 화들짝 놀랐다.
‘엥! 저건 또 뭐야?’
유성탄은 사방을 둘러싼 여인들과 가운데에 놓여 있는 커다란 형틀을 보고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지금 보이는 광경으로 자신의 처지가 어떤 건지 누구라도 눈치 챌 상황이었지만 유성탄의 눈은 곧 형틀보다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여기는 완전히 천국이구나.’
유성탄의 주위를 둘러싼 여인들이 거의 다 쭉 빠진 몸매에 개성이 다른 예쁜 얼굴을 하고 거기다 밖에서는 보지 못한 짧은 치마를 입고 있는 것을 보자 자신의 상황이 어떤 건지 생각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너 이 자식! 오늘 죽었어!”
유성탄은 화설군이 팔을 걷어붙이며 소리치자 흘깃 한 번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 까불면 평생 고생시킨다.”
유성탄의 말을 들은 화설군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어이가 없다는 투로 소리쳤다.
“뭐! 평생 고생시켜? 웃기지 마라. 오늘 내가 너를 작살내고는 평생 다시 볼 일이 없는데 무슨 평생 고생을 시켜!”
“너 여자가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고 뽀뽀까지 했으면 이미 볼 장 다 본 거라는 거 몰라? 이미 내가 니 몸에 온통 침을 발라놨는데 나 작살내면 누구한테 시집갈래?”
유성탄의 몸에 침을 발라놨다는 말에 주위를 둘러싼 천요궁도들이 요상한 눈으로 화설군을 쳐다보았다. 해석하기에 따라 아주 요상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자식이! 니가 무슨 침을… 아이, 드러!”
“까불지 말고 얌전히 있어! 난 낭군에게 막 덤비는 여자 제일 싫어한다.”
유성탄은 화설군의 말투에서 그녀가 백리빙과 같은 과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백리빙에게 사용했던 방법을 다시 사용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당장 저놈을 잡아서 기름 가마에 집어넣고 튀겨버려!”
하지만 화설군의 반응은 백리빙과는 달랐다.
‘에이 씨! 얘기가 잘 안 먹히네… 생각을 잘못한 모양인데…….’
유성탄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황음삼마를 상대할 때와는 또 달라진 그였다. 거기다 온몸에 두르고 다니던 금자를 정자운에게 빼앗긴 후 몸이 엄청 가벼워진 그로서는 여인들과의 싸움을 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그에게는 여인은 만지고 주무르는 존재이지 절대로 때려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신조가 있었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것이 가장 간단한 벙법이었지만 한 가지 남은 미련이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나체 춤은 끝까지 보고 가야 하는데. 분명 끝에 가면 홀딱 벗을 텐데.’
아직 상반신도 다 보지 못한 그로서는 천요궁의 환락무를 꼭 끝까지 보고 싶었다.
“너희들 뭐 하고 있어! 당장 묶어서 튀기라니까!”
화설군의 목소리가 다시 터져나오자 천요궁도들은 뭉그적거리며 무기를 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교미향과 천색파파로부터 천요궁의 태군(太君)이 될지도 모르는 자이니 혹시 싸우게 되더라도 척만 하고 절대 진짜로 싸우지 말라는 명을 받은 터였는지라 행동이 굼뜰 수밖에 없었다.
태군이란 천요궁주의 낭군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 진짜 이러면 너 사는 동안 나한테 무지하게 구박받는다.”
유성탄은 화설군을 쳐다보며 다시 한 번 엄포를 놓았다.
“이게! 내가 왜 너랑 살아!”
‘생각대로 안 되네. 에이, 그럼 딴 방법을…….’
화설군이 막무가내로 나가자 유성탄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역시 짧은 치마를 입고 다가서는 수십의 쭉쭉빵빵한 천요궁도를 두고 그냥 도망갈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금자 삼천 냥을 포기하고 택한 곳이 아니던가.
“분명 말하지만 나하고 흑혈신마라는 장의사 영감하고 무지 친하다.”
유성탄은 뒷배경으로 밀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말은 당장 천요궁도들에게 먹혔다. 그렇지 않아도 뭉그적대던 천요궁도들이 서로 쳐다보더니 화설군과 천색파파를 보며 어떡하냐고 묻는 얼굴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내 말 한마디면 황군이 한 백만은 달려올걸!”
천요궁도들의 발걸음이 이제 완전히 멈춰버렸다.
“그리고… 무산 신녀궁의 정자운이하고 백리빙이 내 마누라다.”
“뭐야!”
유성탄은 화설군의 살기 띤 음성에 마지막 말은 실수라는 것을 당장 눈치 챘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내 마누라가 될 거라는 말이다.”
화설군의 손이 올라갔다. 천요궁도들에게 우선 멈추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다른 천요궁도들과는 달리 화설군은 유성탄의 말에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유성탄이 실수라고 생각했던 마지막 말이 화설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말투까지 달라진 화설군의 질문에 유성탄이 신이 난 듯이 설명했다.
“자운이하고 빙아가 나한테 정식으로 청혼하라고 했다. 걔들하고 혼인하면 나 엄청 행복하게 살 거다.”
“뭐라고요?”
화설군의 목소리가 다시 뾰족해졌다.
“내가 겸손해서 말 잘 안 하는데, 나 정말 여자들한테 인기 좋다. 솔직히 내가 겸손해서 내세우지는 않지만 나만큼 잘생긴 사람 별로 없다. 거기다 키 크지, 돈 많지, 집안도 뼈대 있는 집안이지… 말하다 보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대단하다, 그치?”
유성탄의 말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천요궁도들이 입을 손으로 막았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한 것이었다.
‘저게 겸손이라는 말뜻을 알기나 하나?’
화설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유성탄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잘생기기는 했습니다.”
천색파파가 화설군이 약간 달라진 것을 보자 슬쩍 옆에서 바람을 집어넣었다. 옆에서 자꾸 잘생겼다고 하면 이상하게 잘생겨 보이는 법이었다.
‘그런가?’
“거기다 키도 솔직히 크고요.”
교미향이 거들었다.
‘크긴 큰데…….’
“거기다 이미 궁주님 몸에다 침까지 다 발랐다면…….”
“제가 알기로도 볼 것은 다 본 것으로 아는데요.”
천색파파와 교미향이 번갈아 가며 계속 바람을 넣었다.
“보긴 뭘 보고, 바르긴 뭘 발랐다는 거예요!”
화설군이 째려보며 말했지만 분명 아까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멈춰 섰던 천요궁도들의 발걸음이 슬슬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원래 천요궁도들은 몸으로 유혹하지 이런 식의 정면대결을 하지 않는 법이었다. 거기다 이미 포천망쾌에 대한 소문은 여기까지 퍼져 있었으니 그녀들로서는 유성탄과 싸우는 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너 들어와 봐!”
화설군이 드디어 유성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너? 들어와 봐? 어쭈구리, 이게 남자를 뭐로 보고’
존댓말과 반말을 번갈아 사용하는 화설군의 말투에 유성탄은 도대체 화설군의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야! 이게 감히… 니가 이리 와봐!”
“지금 나보고 이리 와보라고 한 거야?”
화설군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자신이 누그러지면 당연히 감지덕지할 줄 알았던 유성탄이 오히려 큰소리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 내가 겸손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이래 봬도 남자 중의 남자거든. 여자가 남자한테 큰소리치는 거 난 못 참아! 나야 사방에 나한테 오겠다는 여자투성이지만 넌 나 아니면 시집 못 가!”
“뭐야! 웃기지 마! 나가서 내가 살짝 웃기만 해도 남자들이 줄줄 따라다니거든. 한번 시험해 볼래?”
‘쟤가 진짜 웃기는 애네. 여자애가 지금 누가 더 잘 꼬드기나 시합하자는 거야, 뭐야? 씨! 에이, 나체 춤이나 다 보면 그냥 간다. 씨…….’
천요궁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는 것 중의 하나가 남자의 표정에 대한 것이었다. 같은 유혹도 그 당시의 남자의 기분 상태에 따라 통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천요궁에서는 경험으로 알았다. 이후 천요궁에서는 남자의 기분 상태를 알아내기 위한 최적의 방법을 찾다가 결국 표정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말로는 거짓을 말할 수도 있지만 여간한 사람이 아닌 이상 표정으로 거짓을 말하기는 어려웠다. 거기다 술까지 먹고 나면 바로 표정이 그 사람의 현재 마음 상태가 되는 법이었다.
거기다 유성탄은, 좀 미련한 자도 그의 얼굴을 보면 지금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그냥 알 수 있을 정도로 속마음이 가감 없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천요궁의 궁주인 화설군이야말로 남자의 표정에 대해 정말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성탄이 뭐라고 하건 큰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도 유성탄이 자신에게 절대로 나쁘게 대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떠오르는 유성탄의 표정은 좀 달랐다.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방법을 아는 그녀가 말을 바꾸지 않을 리 없었다.
“좋아요. 그럼 정중하게 초대하는 걸로 할 테니 들어와 봐요.”
“초대하는 걸로 하는 거하고 초대하는 거하고 무슨 차인데?”
“그냥 말 차이예요.”
“괜찮을까요?”
유성탄과 화설군이 안으로 들어가자 교미향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천색파파에게 물었다.
“걱정 마라. 내가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더냐. 궁주님이 네가 포천망쾌를 데려온다고 했더니 목욕하고 아침 내내 화장하고 옷도 열 번은 갈아입더라, 기름에 튀기려는 자를 만나면서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니?”
“호호호! 그렇지요? 사실 저도 그렇게 느꼈는데 궁주님께서 너무 막무가내로 나가시니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궁주가 어릴 때부터 내숭이 대단했지 않냐.”
“그래도 성질이…….”
“우리 볼 때만 그래. 우리 없으면 엄청 애교를 부리며 확실하게 유혹할 거다. 알잖냐? 궁주께서 어릴 때 전대 궁주님 이하 장로들에게 얼마나 예쁨을 받았는지. 애교 하면 궁주님이었다.”
“앉으세요.”
화설군이 유성탄과 단둘이 객청에 들자 탁자를 손으로 잡고는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꼬더니 다른 한 손을 허리에 대고는 유성탄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뭐야? 이상한 모습인데… 이상하게 보기가 좋네. 꼭 안아주세요, 그러는 것 같은데?’
유성탄은 화설군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였다.
‘하여간에 간단하다니까. 어떻게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자가 그렇게 센 거지?’
화설군은 간단하게 맛보기로 보여주는 미혼술에 유성탄의 입이 헤벌쭉하고 벌어지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제가 예쁘죠?”
“암, 당연히 예쁘지!”
“정자운하고 어때요?”
“아, 그거야, 자운이보다 훨씬 예쁘지!”
유성탄이 입이란 상황에 따라 아무렇게나 지껄이라고 뚫려 있다는 신조를 가졌다는 것을 모르는 화설군으로서는 만족한 미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정자운이하고 혼인하려고 하지요?”
“착하잖아!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난 나한테 잘해주는 여자가 좋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나 잘하는지 알아요?”
화설군은 자신이 유성탄을 좋아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성탄이 정자운과 혼인할 거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턱 막히는 것이 절대로 유성탄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오묘한 여인의 마음이었다.
‘뭐야, 그럼 나를 속으로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이잖아. 헤헤헤, 역시 유성탄 너는 난 인물이야. 그냥 여자들이 막 넘어오는구나.’
그리고 여자들이 다 자기를 좋아할 거라는 유성탄의 착각이 점점 심화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잘하는데?”
“난 다 잘해요.”
“헤헤헤, 난 다 잘하는 여자 좋아하는데. 그럼 손이나 잡고 얘기할까?”
“손을 잡고? 왜 손을 잡자는 거야! 내가 조금 잘해주니까 나를 무슨 싸구려 여자로 아는 모양인데 진짜 손목 잘리고 싶어!”
갑자기 달라지는 화설군의 목소리에 유성탄이 화들짝 놀라 손을 급히 숨겼다.
‘얘가… 조금 또라이 기질이 있는 것 같은데. 나같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은 좀 골치 아플 것 같은데.’
유성탄의 인상이 변하자 화설군의 목소리도 변했다.
“호호호! 놀랐죠? 호호호. 사람들이 그래서 나랑 있으면 무척 즐겁다고 해요.”
‘이게 즐거운 건가? 그런데 왜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를까?’
아무래도 유성탄이 강적을 만난 듯싶었다.
“알다시피 내가 무림에서 가장 예쁘다는 거 아시죠?”
“그거야…….”
“그렇다면 그만큼 남자로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도 잘 아실 거고. 그렇죠?”
“그거야 뭐…….”
“자, 나 같은 여자를 꼬이려면 내게 뭘 해줘야 할까요?”
‘얘가 돈을 좋아하나?’
유성탄은 대화를 나누면서 어째 화설군을 데리고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화설군의 자랑을 떠나서 자신이 봐도 너무 예쁜 화설군을 포기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여인에게 미모는 최고의 무기가 아니겠는가.
“뭘 해줄까? 다 해줄게.”
유성탄의 다 해준다는 말은 다 안 해준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화설군은 아직 몰랐다.
“나 돈 많아요. 옷도 많고 부하도 많고 보석도 많아요.”
‘얘가 겸손할 줄을 모르네. 너무 잘난 체하는데. 어쨌든 돈은 많다니까 내가 일 안 해도 굶을 걱정은 없을 것 같으니 좋긴 한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나를 제일 사랑해 줘야 해요.”
“하하하! 내가 얼마나 사랑을 잘해주는데, 당장 보여줄까? 나 하룻밤에 백 번도 해! 진짜야.”
“흥! 난 하룻밤에 천 번도 해요.”
‘헤… 하루 천 번?’
유성탄은 화설군의 말에 기가 팍 죽어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된 애가 창피한 줄을 모르냐?’
“너 처녀 맞냐?”
“뭐라고요!”
“아니, 난 처녀가 어떻게 하루에 천 번을 할 수 있는지 이상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백 번을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데요? 내 말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루에 천 번도 더 할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당신 말은 다른 뜻이었어요?”
“아하! 그런 뜻이었구나. 난 또 깜짝 놀랐네. 그럼 뭘 해줘야 하는데? 니가 원하는 건 다 해준다니까.”
유성탄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은근하게 화설군에게 말하자 화설군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살짝 어렸다. 말이라도 원하는 것을 다 해준다는데 싫어할 여자는 없었다.
“흥! 천요궁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게 뭔지 알아요?”
“뭔데?”
“남자의 감언이설에 절대로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남자들은 혼인 전에는 간이라도 빼줄 것같이 하다가 혼인을 하면 싹 달라진다고 그랬어요.”
“아니, 어떤 놈들이! 하여간에 남자 망신시키는 놈들이 너무 많아. 난 한 번 입으로 한 말은 절대로 지키는 사람이야. 그런 걱정 하지 마! 그리고 솔직히 난 감언이설이라는 말 자체를 몰라.”
무식해서 모른다고 한 것을 진실해서 모른다고 한 걸로 착각한 화설군의 눈에 눈웃음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성탄은 그런 그녀의 너무 예쁜 모습에 입에서 침까지 흘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