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화안태감 홍수동 (67/79)

제9장 화안태감 홍수동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빨리 기지 못해!”

새로 만든 몽둥이를 휘두르며 유성탄이 아우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유성탄은 아우들이 흑수칠흉과 싸우는 것을 보고는 뭔가 더 한 수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분명 싸우는 기술은 흑수칠흉에게 크게 뒤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공력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그들이 새로 배웠다는 소위 절기라는 것도 서투르기만 했다. 만약 강태웅이 없었고 백리빙이 합세하지 않았다면 오십 초를 견디지 못하고 다 죽었을 것이었다,

“대형! 이거 아무리 봐도 수련을 빙자한 사적인 고문 아닙니까?”

마동파가 입에 거품을 물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따지듯이 말했다.

“어쭈! 마동파 너 많이 컸다. 너 지금 대형에게 대들었다 이거지! 좋다, 내가 사적인 고문이 어떤 건지 보여주지. 모두 휴식! 그리고 나하고 마동파의 비무를 본다.”

“대형!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제 말은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알아! 나도 오해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감지했다. 그래서 그 오해를 풀어줄 생각이다.”

“대형,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오해를 푸는데 왜 비무가 필요한 겁니까?”

“그러니까 너는 안 돼! 옛날 성현이 하신 말 중에 이오제오(以誤制誤)란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오해는 오해로 풀어라 이 말이야. 알겠어?”

“대형! 이오제오가 아니라 이이제이(以夷制夷) 아닙니까?”

황대산이 히죽거리며 손을 번쩍 들더니 물었다.

“황대산, 너 나보다 똑똑해? 내 세상에 이이제이란 말은 들어보다 처음 본다. 이오제오야!”

‘하여간에 이제는 글까지 억지로 바꾸시네. 어쨌든 마동파, 수고해라.’

황대산이 더 이상 나서지 않고 입을 다물고는 여전히 히죽거리는 얼굴로 마동파를 쳐다보았다.

“동파 형님! 형님이라면 그래도 왕년에 대형께 많이 맞아보신 가락이 있으시잖아요. 저는 믿습니다, 동파 형님께서 아무리 못 해도 한 시진은 버티실 거라는 것을 말입니다.”

표도행이 한 시진은 쉬고 싶다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저게! 악담을 해라, 악담을. 대형한테 한 시진을 맞으라는 거야, 뭐야.’

“마동파 네가 새로 익힌 무공으로 사정없이 공격해봐라. 그러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라.”

‘요것들이 요즘 자주 기어오르는데 내 하루에 하나씩 작살을 내주리라.’

유성탄은 들은풍월로 마치 사부가 제자에게 말하듯이 말하고는 손에 침을 탁 뱉더니 몽둥이를 세게 잡았다.

“대형, 아니 가르쳐주신다면서 손에 왜 침은 뱉으시는 겁니까? 그건 완전히 사감으로 오늘 저를 작살내시겠다는 의지표명이 아닌가요?”

“아 그 자식 참! 내가 니들 대형인데 뭘 작살을 내고 그런다고 그러냐? 그냥 가볍게 정신이 들라고 사랑의 매 정도만 들려고 하는 거다. 그러니 걱정 말고 마음껏 덤벼라.”

서로 농담조로 이야기하던 마동파는 막상 비무가 시작되려고 하자 검을 단단히 잡더니 신중하게 공격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위에 앉아 비무를 보는 나머지도 말과는 달리 쉬려고 하지 않고 나름대로 비무를 따라 할 차비를 했다. 서로 간에 말은 그렇게 해도 진짜로 마동파의 실력을 올려주고 싶은 유성탄이었고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마동파였다.

“강태웅! 너까지 왜 이러냐! 똑바로 못해!”

“장우왕! 너 지금 개기냐? 왜 공격하는데 그 큰 대가리부터 내미는 거야! 그렇게 하면 상대의 공격거리가 더 짧아진다는 거 몰라!”

거의 매일 비무를 하면서 유성탄은 모두를 아주 혹독하게 대했다. 아우라고 해서 유성탄의 주먹이나 몽둥이에 맞는 것이 안 아플 수는 없었다. 죽지는 않지만 원체 아프니 그들도 죽어라 하고 맞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그러면서 그들의 실력도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칠우동을 나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거기서는 그렇게 수련을 해도 내공도 그렇고 초식도 영 진도가 안 나가더니 대형과 비무를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쑥쑥 느는 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표도행이 잠시 쉬는 동안 숨을 헥헥대면서도 스스로 느는 것에 자부심이 생기는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다. 그렇게 이해가 안 되던 초식들의 움직임을 이제야 나도 알 것 같더라. 하여간에 대단하신 분이야.”

마동파가 맞장구를 치자 모두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형! 지금 갑자기 감숙으로 돌아가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황대산이 유성탄에게 맞은 목을 손으로 주무르다가는 눈을 감고 자고 있는 유성탄에게 물었다. 유성탄이 자면서도 모든 것을 다 듣는다는 것을 아는 그였다.

“청혼하러 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요. 청혼을 하는데 굳이 감숙까지 갔다 올 필요가 뭐냐는 거지요?”

황대산의 말에 유성탄의 눈이 떠졌다.

“청혼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

“그럼 지금 어떻게 청혼을 하는지 몰라서 거기까지 가시려고 한 거란 말입니까? 하여간에 대형도 참! 제가 혼인을 했던 적이 있는 것 잊으셨습니까? 저같이 확실한 경험자가 있는데 제게 물었으면 이렇게 급하지 않아도 됐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 대산이 저 놈이 혼인을 했었지.’

유성탄은 급히 황대산의 곁으로 가더니 물었다.

“그래, 맞았어. 내게 진짜 필요한 아우가 있다는 것을 깜빡 잊었구나. 그래 한 번 얘기해봐라, 대산아.”

순식간에 진짜 필요한 아우로 변하는 황대산을 보자 장우왕이 끼어든다.

“대형, 나도 청혼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압니다. 제게도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래? 장우왕 나는 네가 개길 줄만 아는 줄 알았다. 소원이라니까 물어봐 주지. 그래 청혼은 어떻게 하냐?”

“청혼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혼인을 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 그러면 우선 그 여자를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나랑 같이 살자 하고 남자답게 말하는 겁니다.”

“말하고 나서?”

“당연히 같이 잘 준비를 하는 거지요.”

“니들 사는 동네에서는 다 그렇게 혼인하냐?”

“다는 아닙니다. 이따금 싫다고 하는 여자도 있거든요. 그때는 선물도 좀 갖다 주고 노력이 필요하지요.”

“고맙다. 자, 이제 황대산 얘기해 봐라.”

“킥킥!”

유성탄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듣다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황대산에게 묻자 표도행과 마동파의 입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터져나왔고 철패는 이빨을 드러내며 장우왕을 보며 씩 웃었다.

“정식 청혼을 하실 거지요?”

“정식 청혼은 뭐야?”

“정식으로 하는 청혼입니다.”

‘뭐야? 그걸 설명이라고 하는 거야?’

유성탄은 황대산의 설명을 듣더니 잠깐 멍한 눈으로 황대산을 쳐다보더니 한번 참는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은?”

“정식 청혼에는 청혼 절차가 아주 중요합니다.”

“청혼 절차?”

“청혼을 절차적으로 하는 겁니다.”

‘에이… 씨! 한 번 더 참는다 씨…….’

“그리고…….”

“먼저 보낼 예물을 고르시고 사주단자도 준비하셔야 합니다.”

“사주단자는 또 뭐냐?”

“사주를 넣은 단자를 말합니다.”

“에라, 이 빌어먹을 놈아!”

유성탄이 결국 못 참고 황대산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쳐버렸다.

“아야! 왜 이러십니까?”

“설명해주랴? 왜 이러십니까는 왜가 이러는 거다! 이 자식아!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어떻게 설명을 나보다도 못하냐! 에그…….”

“어차피 대형께서는 설명해도 잘 몰라요! 전 그냥 절차만 말해드리고 준비는 제가 하려고 그런 건데…….”

“이 자식아! 내가 모르긴 왜 몰라? 내가 이래봬도 어렸을 적에 천재로 통했던 사람이다!”

“대형, 그래도 황대산보다 청혼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우리 중에 없을 겁니다. 조금 답답하셔도 끝까지 들어보시지요.”

듣던 강태웅이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니까요! 우선 한번 들어보시고…….”

“알았어! 계속해봐.”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말 잘하는 중신아비를 구해서 사주단자와 예물단지를 들려 보내는 겁니다.”

“중신아비? 그건 또 뭐냐?”

“중신아비란 중신을 드는… 아…비를 말하는…데…….”

황대산이 손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막으며 말을 끌었다. 그로서도 참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사주단자가 사주를 넣은 단자다 맞지 않는가? 정식 청혼도 정식으로 하는 청혼이 아니던가? 더 이상 뭘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중신아비였다. 그리고 그는 더 좋은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알겠다. 안 때릴 테니까 계속 얘기해! 모든 게 무식한 아우들을 둔 내 잘못이지 누구를 탓하겠냐? 더 이상 묻지도 않을 테니까 빨리 해라.”

“그런 정식 청혼이나 가문 대 가문의 청혼이 아닌 이상 부모님을 꼭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

“약식 청혼을 하는 겁니다.”

“약식 청혼? 약식으로 청혼하는 거 말이냐?”

유성탄은 아예 자기가 설명해 버렸다.

“그런 셈입니다.”

“그렇다 치고 그 다음은 약식 청혼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대형께서 직접 여자 앞에 가서 예물을 바치면서 나랑 혼인해 주십시오 하고 직접 말하는 방법과 편지로 이러이러하니 나랑 혼인합시다 하고 청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물이 들어간다니까 생략하고 두 번째가 좋겠다. 그런데 그냥 이러이러라고만 쓰면 되는 거냐?”

“그게 그런 이러이러가 아니고요. 그러니까 대형께서 왜 신녀나 백리 총사와 혼인을 하고 싶은지 그 당위성을 써서 보내는 겁니다. 물론 그 편지는 대형께서 직접 청혼했다는 증거가 되는 거지요.”

“당위성? 당위가 있는 성?”

이번에도 유성탄이 설명까지 했다.

“이번에는 그게 아닌데요?”

“됐다! 두 번째로 하자. 그러면 굳이 이렇게 급히 뛰어가지 않아도 되고 좋네!”

“그런데 그 편지를 대형께서 친필로 쓰셔야 하는데요.”

“친필? 내가 직접 써야 한다고! 이 씨 내가 글은 배웠어도 쓰는 법은 아직 못 배웠는데…….”

“대형, 진짜 글을 배웠으면 쓰는 것은 저절로 된다고 들었는데요?”

철패가 유성탄의 말에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붓을 그렇게 잡으시면 안 됩니다. 잡은 듯 만 듯 부드럽게 잡으시고 획을 그을 때는 단번에 그으셔야 합니다.”

결국 글 쓰는 법을 배우기로 한 유성탄은 가까운 객잔을 얻고는 이틀째 글을 연습했지만 타고난 악필인지 형편없는 글만 그리고 있었다.

“세상에! 아니 보고 쓰는 것도 못하십니까? 내가 발로 써도 그보다는 낫겠는데요.”

마동파가 턱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형, 쓰지 마시고 그리는 것은 어떨까요?”

황대산도 도저히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이것들이 단체로 물 먹이네. 씨!’

유성탄은 죽상을 했지만 연습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직 금년이 지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빨리 청혼을 하고 정자운과 백리빙을 안고 싶은 염원 때문이었다.

“저 안에 포천망쾌가 있다고?”

가마 하나가 서 있고 옆에 십여 명의 관복을 입은 자들이 서 있었다.

“태감 나으리, 저자는 아주 위험한 자입니다. 굳이 나으리께서 직접 만날 필요가 있겠습니까?”

관복을 입은 자 중 하나가 가마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는 말했다.

“흠! 하지만 지금 위에서 빨리 가시적인 뭔가를 보고하라고 보통 성화가 아니다. 공주를 직접 심문할 수는 없지 않느냐?”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자 중에서 가장 무식한 자였습니다. 저는 나으리께서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싶습니다.”

“하하하! 아무리 무식하다 해도 동창의 태감에게까지 무례할 자가 세상에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대형, 조금만 더요. 이제 글자 비스름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들이 정말! 다 안 나가! 대형께서 집중해서 뭘 좀 한다는데 도대체 아우란 것들이 도움은 못 줄망정 방해만 하냐? 당장 안 나가면 니들 모두 한 대씩 맞을 줄 알아라.”

빙글거리던 아우들은 유성탄이 맞을 줄 알라는 말이 떨어지자 한 명씩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산 형님, 대형께서는 배우는 것과는 뭔가 안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래도 글을 써보시겠다고 노력하시는 게 가상하지 않냐? 괜히 스스로 천재라고 믿는 분위기는 꺾지 말자.”

“제가 보기에는 대형께서 천재인 것은 맞는데… 무공의 천재지 절대 학문 쪽하고는 연관이 없는 것 같던데요.”

표도행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당신들!”

갑작스런 철패의 외침에 대화를 나누던 모두는 몸을 돌렸다.

“나는 동창의 조은이라고 한다. 태감 나으리께서 포천망쾌와 대화를 나누시고자 한다. 들어가서 포천망쾌에게 나오라고 해라.”

동창의 삼대의 대주인 조은이 동창을 나타내는 은패를 꺼내 보이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귀에 들리네? 지금 동창에서 태감인지 곶감인지가 대형을 찾으니까 대형보고 나와라! 이 말인가 본데… 아 X팔 이거 고추 달린 놈들은 서러워서 어디 살겠나. 씨!”

장우왕이 조은의 말을 듣자 대가리부터 밀고 나오더니 개기기 시작했다. 손은 이미 등에 매인 도끼자루에 가 있는 것이 삐딱하면 그대로 도끼를 휘두를 태세였다.

‘이런… 포천망쾌 그놈만 무식한 줄 알았더니… 이놈은 한 술 더 뜨잖아!’

불 같은 성격의 조은으로서는 당장 한 방에 대가리 큰 장우왕의 머리를 부셔버리고 싶었지만 태감이 만나기를 원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감히 동창의 행사를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포천망쾌를 대형으로 부르는 놈들인가 본데 너희들의 그런 행동이 그에게 얼마나 큰 불이익을 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느냐?”

“정말 웃기는 작자 아니냐? 나도 고추나 좀 떼어볼까. 그러면 나도 저렇게 사람을 웃기는 재주를 가지게 될려나? 지금 누가 누구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거야? 하여간에 수염 없는 놈들과는 놀면 안 된다고 하더니 아이 재수 없어! 칵… 퉤엣!”

이번에는 마동파가 웃긴다는 듯이 빈정거리더니 가래침을 옆에다 뱉었다. 순간 조은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나왔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허! 조은, 아직도 급한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있느냐?]

하지만 조은은 귀에 들려오는 화안태감 홍수동의 전음에 참고 만다.

“누구라구?”

“동창의 태감이랍니다.”

“태감? 먹는 거냐?”

“동창의 좀 높은 사람인 모양입니다.”

‘높은 사람? 가만 있자. 그렇지 않아도 자운이에게 몽땅 돈을 빼앗겨서 몸이 무척 서운하던 판인데… 오늘 운이 좋으려나? 편지는 아직 날이 많으니까 내일 또 연습하지 뭐!’

“들어오라고 해라.”

결국 포천망쾌와 그 일행이 세상에 보기 드문 무시무시한 무식들의 집합이라는 것만 확실하게 확인한 홍수동과 조은은 유성탄을 불러내는데 실패하고 홍수동이 유성탄을 만나러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고 만다.

“자네가 포천망쾌인가?”

‘어쭈, 이게 처음부터 말이 짧네?’

홍수동의 첫마디부터 빈정이 상한 유성탄은 자기도 비슷하게 물었다.

“그대가 태감인가?”

홍수동의 이마가 약간 찌푸려졌다. 설마하니 자신에게 첫 마디를 이런 식으로 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조은의 말보다 더 한 놈이로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현 천하의 가장 무서운 곳을 들라면 바로 우리 동창이라고 할 것이네. 그러나 동창은 동창을 돕는 사람에게는 천하의 어느 집단보다도 더 큰 혜택을 주지. 어떤가? 살아 있는 권력인 동창과 친하게 지낸다면 자네의 앞길은 마냥 탄탄대로일 것이고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텐데… 어떤가?”

‘탄탄대로… 부귀영화… 분명 좋은 말인데… 에이, 그래도 고자 놈들과 친하게 지낸다면 엄마가 죽인다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올지도 모르는데… 거기다 나랑 같이 자자고 하면… 에이 소름 끼치네. 씨!’

“굳이 친하게 지내는 것은 말고 그냥 서로 성의만 오가는 사이는 어떻겠소?”

“성의만 오가는 사이라? 그것도 아주 흥미 있는 사이가 되겠군. 소문에 듣자니 포천망쾌는 돈만 좋아한다고 하던데?”

“아니!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난 돈만 좋아하는 그런 단순한 사람이 아니오.”

홍수동은 유성탄이 펄쩍 뛰며 부인하자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나 보다 한다.

“나는 돈만 좋아하는 게 아니고 금궤도 좋아하오.”

그리고 이어지는 유성탄의 말에 완전히 썩은 놈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것 참 동창과는 여러모로 어울리는 것 같구먼. 동창에는 돈과 금궤가 쌓여 있고 포천망쾌는 동창이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 말일세.”

‘이거 또 뭔가 수상한데? 동창이 없는 거라면 고추밖에 없을 텐데… 설마 내 고추가 튼실하다는 소문을 듣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유성탄을 보며 홍수동이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

“내가 알기로 자네가 가지고 있는 황룡패가 주소연 공주님께서 자네에게 주었다고 알고 있네만… 맞나?”

“공주? 난 공주는 만난 적이 없는데…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소이다. 난 황룡패를 공주한테 받지 않았소이다.”

홍수동의 얼굴에 언뜻 뜻밖이라는 표정이 스쳤다. 수십 년을 황궁에서 살며 눈치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오른 자가 그였다. 환관의 세계에서 눈치는 생존의 필수였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유성탄의 말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받았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하하하! 당연하지요. 누가 내게 황룡패를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보다 정확히 아는 사람은 천하에 없을 것이외다.”

당연한 얘기를 마치 대단한 정보라도 되는 양 큰소리치는 유성탄을 보며 홍수동의 입에 작은 미소가 나타났다. 스스로 자신의 수단에 만족감을 나타낸 것이다.

“역시 오늘 내가 이곳에 오기를 잘한 것 같구먼. 이렇게 말이 잘 통하니 말일세. 하하하!”

“그거야 좀 더 두고 봐야겠지요.”

유성탄의 이어지는 말의 뜻을 몰라 유성탄의 얼굴을 쳐다보는 홍수동에게 유성탄의 이어지는 말이 귀에 들렸다.

“자, 정보를 들으셨으면 거기에 합당한 성의를 먼저 표시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서로 간에 성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말이 잘 통한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이것 봐라. 이놈 뼛속까지 완전히 썩은 놈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홍수동은 유성탄의 말에 세상에서 가장 요리하기 간단한 놈을 만났다는 것을 느꼈다. 홍수동의 경험상 유성탄 같은 부류는 돈만 주면 어떤 일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하하하! 정말 우리는 잘 통할 것 같군. 그렇지! 서로 간에 주고받는 것이 확실해야 믿음도 생기고 그런 거지. 하하하!”

홍수동은 커다랗게 웃더니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게 뭡니까?”

“전표일세. 얼마면 만족하겠는가?”

홍수동은 이런 거래를 할 때 언제나 하는 것처럼 통 크게 말했다. 상대를 야코죽일려면 그만큼 자신의 통이 크다는 것을 보여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얼마면 만족……? 히히히, 완전 땡 잡았구나!’

유성탄은 드물게 너무 만족스런 말을 듣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내가 솔직히 무척 통이 작소이다. 하지만 통 큰 대인의 뜻을 따라 조그맣게 금자 만 냥만 받겠소이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유성탄을 쳐다보던 홍수동의 눈이 크게 떠졌다. 금자 만 냥이면 그의 권한으로 지불할 수 있는 액수를 훨씬 많이 뛰어넘는 돈이었다.

“금자 만 냥? 지금 농담하나? 그따위 정보에 누가 금자를 만 냥씩이나 지불한단 말인가?”

홍수동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얘기 잘 되는 모양이오?”

장우왕이 앞에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조은을 쳐다보며 말했다. 유성탄과 홍수동이 하는 대화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파안대소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은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홍수동의 명만 아니었다면 커다래서 맞추기도 쉬운 장우왕의 머리를 벌써 흑멸장으로 쳤을 것이었다.

쾅!

갑작스런 폭음과 함께 갑자기 벽이 부서지며 홍수동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유성탄이 곧장 튀어나왔다.

“이게 아주 웃기는 태감이야? 누구를 거지로 아나!”

나름 대내에서 최고의 고수급에 낀다는 홍수동은 의연하게 서 있기는 했지만 이미 입에 가느다란 핏줄기를 보이며 안색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대형, 왜 그러십니까?”

아우들이 급히 유성탄의 뒤에 도열하며 물었다.

“저 수염도 없는 늙은이가 나보고 그러는 거야! 얼마면 만족할 거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나는 통이 작아서 많이는 원하지 않으니 금자 만 냥만 달라고.”

“통이 작아서 금자 만 냥만 달라고요? 하하하! 정말 통이 작으셨네요.”

마동파가 유성탄의 말을 받으며 크게 웃었다. 이미 뒤를 안 들어도 웃다가 왜 이런 일이 갑자기 벌어졌는지 짐작이 가는 아우들이었다.

“그랬더니 어이가 없어서…….”

“포천망쾌! 아무리 아는 것이 없다 해도 감히 태감 나으리께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느냐!”

“태감인지 곶감인지 그건 모르겠고 너! 저번에 그렇게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인데 오늘 더 때려줄까?”

자신이 했던 태감인지 곶감인지라는 말이 그대로 유성탄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장우왕은 기분이 무지 좋은지 입이 쫙 벌어졌다.

“확실히 대형하고 나는 통하는 게 많은 것 같아.”

장우왕이 주위 동생들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포천망쾌! 정말 이런 식으로 동창과 완전히 척을 질 작정이냐?”

조은은 유성탄이 더 맞고 싶냐는 말에 더 이상 강하게 말하지 못하고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동창하고 척을 지니 마니 하는 건지 모르겠네? 동창이야말로 나하고 척을 지면 좋을 것 같냐? 내가 마질대형이야, 마질! 한번 내게 걸리면 그건 누구를 막론하고 죽은 목숨이다 이거야! 그렇다고 그냥 죽이는 줄 알아? 죽을 때까지 괴롭히다가 안 죽여! 그건 엄청 괴롭다.”

‘무식한 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조은은 유성탄의 말에 짜증이 일었지만 이미 한번 당해 본 상황에서 먼저 손을 쓸 엄두는 못 내고 있었다.

“조은, 오늘은 그냥 돌아간다.”

유성탄의 주먹에 충격을 받고는 선 채로 급히 내상을 다스린 홍수동이 좀 기혈이 안정됐는지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가긴 어딜 가? 니들이 그냥 가면 여기 벽 부순 것은 누가 물어주는데? 이것들이 좋게좋게 끝내려고 했더니 완전히 안면 까고 미친 척하려고 그러네. 벽 수리비 안 주면 너희들은 못 간다.”

“수리비를 줘라.”

유성탄을 노려보며 말을 들은 홍수동이 조은에게 명하자 조은이 말없이 품에서 돈을 꺼내더니 유성탄에게 금자 한 냥을 던졌다

“응! 이건 뭐야? 너 지금 이걸 수리비라고 준 거냐?”

“벽이 부서진 거다. 금자 한 냥이면 이런 벽 백 개는 고치고도 돈이 남는다.”

“그건 니 벽이고 내 벽은 금자 열 냥은 있어야 고칠 수 있다.”

조은은 유성탄의 말에 아랫입술을 꼭 물었지만 결국 열 냥을 더 던지고 말았다.

“햐! 대형, 존경합니다.”

황대산의 말에 유성탄은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하며 쳐다보았다.

“벽에도 니 벽이 있고 내 벽이 있다는 거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통이 작아야 금자 만 냥이란 것도 전 오늘 처음 알았다니까요.”

표도행이 역시 기분 좋은 한 마디를 했다.

“나 유성탄은 돈 같은 것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자식이 감히 나를 돈으로 움직이려고 그러잖아. 난 그런 거 못 참지.”

유성탄의 이어지는 말에 아우들의 입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대형, 그래도 금자 만 냥이면 흔들릴 수도 있는 겁니다.”

“난 안 흔들려. 흔들릴 게 뭐가 있냐? 그냥 돌아서 버리지.”

* * *

“마 영주, 유성탄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됐나요?”

하후란은 무척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식이 얼마나 엉덩이가 가벼운지 간신히 알아냈습니다.”

“그럼 빨리 연락을 하세요. 잘못하면 오살이 위험하다구요.”

“이미 연락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연락이 갔을 겁니다.”

“여기로 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하루면 올 것입니다. 문제는 그 놈이 말을 듣느냐가 문제지요.”

“자신의 측근들은 무척 아끼는 사람이에요. 오살의 문제가 걸렸다는 것을 알면 즉시 달려올 겁니다. 그리고 마 영주님도 말조심하세요. 유성탄은 이제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할 거물이 되었어요. 함부로 이 자식 저 자식 할 신분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저도 그건 아는데 입에 붙어서…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주님께서 아가씨의 혜안을 무척 칭찬하셨습니다.”

“혜안이요?”

“유성탄을 선택한 것은 정말 본 문 역사상 최고의 거래였다고요.”

“호호, 제가 만사무불통지라는 것을 잊으신 모양이군요.”

“그래도 처음에 문의 원로들의 반대가 엄청 심했습니다. 잘못하면 멸문의 길로 들어선다고요.”

“하긴 위험한 도박이기는 했지요. 어쨌든 오살 중 한 명이라도 죽거나 다친다면 유성탄의 심술을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몰라요. 문도들에게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들이 무사히 도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하세요.”

“이미 근처에 있는 문도들이 모두 그곳으로 파견됐습니다. 우리 문도들이 무공은 약하지만 숨기고 도망치고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니 잘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살을 추격하는 자들이 누군지는 알아내셨습니까?”

“아직이요. 일급살수들인 그들을 그렇게까지 곤경에 처할 정도로 대단한 자들인데 전혀 정체가 드러나지를 않고 있어요. 제 짐작이 맞는다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밀세력이 분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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