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유성탄의 사랑 (66/79)

제8장 유성탄의 사랑

“대형! 비련의 남자 계획은 성공했습니까?”

방으로 먼저 돌아온 유성탄이 아무 말도 없이 팔베개를 하고는 벌렁 드러눕자 마동파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지만 그냥 있기에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대형…….”

유성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동파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시 조심스럽게 유성탄을 불렀다.

“아이 조용히 해! 나도 지금 헷갈려서 고민 중이다.”

“뭐가 헷갈리는데요?”

“그게… 이상하단 말야……?”

“뭐가요? 정말 답답하네.”

마동파가 재촉을 하고 듣던 표도행도 궁금한지 가까이 다가섰다.

“성공한 것 같기도 하고, 실패한 것 같기도 하고…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은 유성탄은 괴롭다는 듯이 몸을 돌려버렸다.

“동파 형님! 형님 생각으로 대형의 반응이 어떻다고 보시오?”

유성탄이 돌아눕자 더 이상 묻기 어려워진 마동파와 표도행은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 경험으로 보건데… 절반의 성공인 것 같다.”

“그런 말은 나도 하오.”

“대형께서 죽이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시는데 무공만 폐지해도 될 걸 굳이 다 죽여버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황대산이 흑수칠흉을 땅에 묻고 돌아오며 강태웅에게 물었다.

“흑수칠웅은 세상에 있어봐야 남들에게 피해만 줄 자들이다. 저 자들의 악행에 대해서는 너희들도 익히 들어왔을 것 아니냐? 대형은 대형의 뜻에 따라 행동하시게 놔둔다. 하지만 지저분한 일은 우리가 맡아서 처리한다. 그리고 그것이 모자란 우리들이 저런 엄청난 대형을 모시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충성인 것이다.”

“그래 맞아! 나도 어느 정도 내공이 생기면서 이제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는데 아직 멀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오늘 대형 봤지! 세상에 몇 달 만에 열 배는 더 강해지신 것 같더라.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장우왕도 놀란 듯이 말했다. 인간시장 조직을 깨부술 때는 그들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유성탄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들은 몰랐다. 하지만 흑수칠흉과 대적을 해본 그들은 유성탄이 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형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같은 모습을 보이시지만 이미 천하에서 대형의 위상은 전과는 천양지차다. 우리는 더욱더 정진하여 대형의 아우들로서 대형을 욕보이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대형의 비련의 남자 계획은 성공한 걸까요?”

철패가 끼어들었다.

“아가씨! 아까 우리들이 싸울 때 무슨 일 있었지요?”

백리빙은 자신의 작업실에 돌아와서도 한마디도 없이 책만 뒤적이는 정자운을 보며 물었다.

“일은 무슨… 그냥 뭔가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는 거야.”

백리빙은 정자운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더 이상 묻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어릴 때부터 한 방에서 뒹굴며 같이 살아온 둘이었다. 비록 정자운을 호위하는 주종간의 관계였지만 둘 사이는 정말 친자매 이상이었다. 서로 간에 못하는 말이 없었던 둘이었는데 정자운이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빙아! 잠깐만…….”

돌아서는 백리빙을 정자운이 뭔가 결심한 듯이 불러 세웠다.

“빙아, 솔직한 네 마음을 내게 말해줘야 한다.”

“말하세요.”

“너 유 대형을 어떻게 생각하니?”

“그 바람둥이를 내가 뭘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전 생각한 적 없어요.”

“빙아! 내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일이 복잡해진다. 다시 묻는다. 이번에도 똑같은 대답이 나온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다. 유 대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정자운의 다시 묻는 물음에 백리빙은 이번에는 즉각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거의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모르겠어요 저도… 이게 무슨 마음인지… 자꾸 그 얄미운 얼굴이 떠오르고 어디에 있건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고… 그런데도 그 사람만 보면 괜히 신경질이 나고 심통을 부리게 되어요. 아가씨도 보셨잖아요. 운하현에서 우리와 같이 걸으면서도 여자들만 보이면 엉덩이나 쳐다보고, 정말 우리보다 예쁜 여자들에게 그런다면 이해나 하겠어요. 그냥 치마만 걸치면 그러니… 솔직히 이러는 내 자신이 미워 죽겠어요.”

“빙아, 서너 살 먹은 아이에게 본능 이외에 올바른 도덕관념이나 예의를 바란다면 그것을 못하는 아이가 잘못이겠니 그것을 바라는 사람이 잘못이겠니?”

“그건…….”

“그 분은 나이는 많지만 사고는 그 충동이라는 곳에 빠질 당시에 그대로 멈춰 있는 것 같더구나. 내가 유 대형 그분을 우연히 만나서 같이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너무나 천진난만함에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단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맥을 짚어봤다가 너무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면 믿겠니?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다. 그런데 저런 사람이 천성을 착하게 태어났다는 것이 세상에는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를 것이다. 저 힘에 나쁘게 빠지려면 얼마든지 빠질 수도 있었는데 저 분은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 사람이 어떤 기연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몸에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힘이 들어 있다. 즉 여인 하나로는 저 사람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다. 너하고 나는 어차피 평생을 같이 붙어살라고 맺어진 사이 아니더냐.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시집을 간다면 너 역시 따라와야 하고…….”

백리빙은 이어지는 정자운의 말을 듣다가 놀라서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 둘이서 저 사람 사람 한번 만들어보자꾸나. 그리고 저 사람 너 굉장히 좋아해.”

“제가 보기에는 아가씨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호호호! 그 사람 아무 여자나 다 좋아하는가 보다.”

“아가씨하고 나 같은 여자를 얻고도 한눈을 판다면 내가 눈알을 파버릴 거예요.”

“대형, 언제까지 여기에 있으실 겁니까?”

흑수칠흉의 난입이 있은 후 이틀이 지났지만 정자운이나 백리빙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진득하지 못한 유성탄까지도 꼼짝을 하지 않고 자신이 만들어 낸 야바위점만 계속 보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마동파가 다시 총대를 메고는 유성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형, 여자가 신녀궁에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제가 내려가면 진짜 예쁜 여자 물색해서 소개시켜 드릴 테니까 이제 포기하고 내려가시지요?”

“됐다! 하하하!”

마동파가 신중하게 애기를 하는데 유성탄은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외쳤다.

“무슨 일입니까?”

아우들이 놀라 모여들었다.

“드디어 내가 최고의 점을 뽑았다.”

“최고의 점이라면… 무지 예쁘고 엄청나게 부자인 여자가 와서 돈도 왕창 주면서 한 번 주기까지 한다는 그거 말입니까?”

황대산이 물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니들도 알지?”

“그게… 진짜로 그런다면 좋은 거지만…….”

“그럼 대형께서는 지금까지 그 점괘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점을 치신 겁니까?”

“나오기를 바라기는 누가 바래? 하다보니까 나온 거지!”

“그래도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하셨을 것 아닙니까?”

“내가 누구냐? 집념의 유성탄이 바로 나야. 당연히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여기 앉아서 할 생각이었지. 왜?”

아우들은 유성탄의 말에 모두 한숨을 속으로 크게 내쉬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틀 만에 나왔기에 망정이지 만약 십 년 만에 나왔다면 십 년을 기다렸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 점괘가 나오셨으니까 이제 뭘 하실 건데요? 이제 떠나시는 겁니까?”

마동파가 아주 다행이라는 듯이 물었다.

“떠나기는 왜 떠나? 이제부터 자운이하고 빙아를 떳떳하게 만나는 거야. 점괘대로라면 돈까지는 몰라도 한 번은 줄 거 아니냐?”

“대형!”

“대형, 그건 제발!”

말하자마자 벌떡 일어서는 유성탄의 다리를 가장 힘이 좋은 장우왕과 철패가 껴안았다.

“이것들이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냐?”

“대형, 수천 번을 떼서 나온 점괘를 믿고 이러는 것은 정말 아닌 듯싶습니다.”

“대형, 맞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건…….”

“하하하! 자식들… 내가 이래봬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설마하니 상식 이하의 짓을 저지르겠냐? 걱정 마라. 나만 믿어.”

말을 마친 유성탄이 다리를 흔들자 그 힘이 좋은 장우왕과 철패가 간단하게 떨어져버렸다.

“세상에 뭔 힘이 저렇게 좋대요?”

유성탄이 나가자 철패가 장우왕을 쳐다보며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대형께서 배울 만큼 배웠다고 큰소리 치실 수가 있는 건가?”

‘음… 이쪽이구나…….’

유성탄은 나오자마자 코를 벌름거리고는 귀를 쫑긋거렸다. 그리고는 한쪽 방향으로 급히 달렸다.

“아야!”

자신의 방에 앉아 수를 놓던 정자운은 그녀답지 않게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자 작게 소리를 지르며 찔린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할까?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아무리 고귀하게 자랐어도 여자였다. 커오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낭군이 될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상상 속의 낭군의 모습과 유성탄은 너무나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운하현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유성탄이란 인물이 그녀의 가슴속에 제법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깜짝 놀랐었다.

그리고… 지금 유성탄이 무산에 나타나고 그 앞에서 눈물까지 보인 후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녀는 모든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운 소저!”

조그맣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정자운은 깜짝 놀라 창문을 쳐다보았다.

“자운아!”

정자운이 자신을 쳐다보자 장난스럽게 정자운의 이름을 부르는 유성탄을 본 정자운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더니 일어섰다.

“오셨으면 들어오시지 왜 거기에 서 계세요?”

“그래도… 여자 방인데… 소원이라면!”

유성탄은 정자운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같이 좋아서는 안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경비무사들이 꽤 많았을 텐데 안 걸리고 잘 오셨네요.”

“이 정도야 누워서 떡 먹기지! 헤헤, 자운이는 잘 있었어?”

“저는 잘 못 있었어요.”

“뭐라고! 어떤 놈이 감히 나의 자운이를 힘들게 한 거야? 말해봐. 내가 당장 가서 요절을 내줄 테니까!”

“유 대형께서는 절대로 요절을 낼 수 없는 사람이에요.”

“하하하! 자운이가 몰라서 그러는데, 세상에서 내가 요절을 못 낼 사람은 없어.”

“그래요? 그럼 제가 요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을 한 번 말해볼까요?”

“말해봐!”

“유 대형의 아버님.”

“내 아버지? 그거야…….”

“유 대형의 어머님.”

“엄마? 그것도…….”

“유 대형의 동생 분들…….”

“알았어! 생각보다 세상에 내가 요절을 낼 수 없는 사람이 많았군.”

“제 말은 뭔가 말을 할 때에는 한 번 더 생각해 보시라고 하는 말이에요.”

“알았어.”

“찾아오신 용건이 뭐지요?”

“용건……?”

‘이거 또 내가 계획한 대화와 다르게 흐르려고 그러네. 이러면 안 되는데…….’

“용건이 없으신가 봐요?”

유성탄이 머뭇거리자 정자운이 다시 말했다.

“아니! 아니! 용건이야 많지! 너무 많아서 뭘 말할까 생각 중인데…….”

“저를 가지고 싶으세요?”

유성탄은 자신의 점괘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자 순간 자신이 더 당황한다.

“아니 천하의 유성탄을 어떻게 보고! 내가 이래봬도 여자 보기를 돌같이 보는 사람…….”

‘아이 씨!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지랄이냐. 에이!’

유성탄은 말하다 말고 자신을 때려주고 싶은 욕망에 빠졌다. 준다지 않는가. 그런데 초치는 소리를 자신이 했으니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알겠어요. 그럼 그건 됐고…….”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제발 다시 한 번 물어봐 줘!’

유성탄이 정자운의 말을 듣자 애절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이미 떠난 배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떠나실 예정으로 인사를 오신 건가요?”

“그야… 떠나기는 해야겠는데…….”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그리고 이번 흑수칠흉의 일은 언젠가 보답할게요.”

정자운의 말을 들으며 유성탄의 입이 벌어졌다. 생각했던 말은 하나도 못하고 스스로 무덤을 파고는 만 심정이 된 것이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

“우리가 어떤 사인데요?”

“우리가… 그 뭐냐? 그래 마차도 같이 타고 운호 호수도 같이 구경하고 왜 그런 거…….”

“아 그런 사이요? 그래요, 저도 유 대형을 좋은 친구로 생각할게요.”

‘유성탄, 유성탄! 너 오늘 왜 그러냐? 도대체 왜 이렇게 바보같이…….’

처음으로 유성탄은 자신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작별인사는 끝났으니 이만 가보셔야지요.”

“자운 소저… 그래도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유성탄이 떠듬거리며 한 가닥 남은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쓴다.

“가시거든 정식으로 제게 청혼을 하세요. 그러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유 상공.”

“유… 유… 상공!”

유성탄은 정자운의 마지막 말을 듣자 정신이 몽롱해졌다.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점괘대로 호박이 굴러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우와! 자운아! 고맙다.”

다짜고짜 달려든 유성탄은 정자운을 안더니 공중으로 번쩍 들어 올리고는 회전을 했다.

“어지러워요. 이만 내려주세요.”

“알았어!”

갑자기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정자운의 말대로 행동하는 유성탄이었다.

“유 상공, 옷 속에 뭐가 들어 있나요?”

“옷 속? 아무 것도 없는데… 아하! 내가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여주는데 자운이에게만 보여줄게.”

말을 마친 유성탄은 웃옷을 벗더니 온몸을 칭칭 감은 금자꾸러미를 풀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니 이 많은 금자를 몸에 두르고 다니셨단 말이에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

“상공! 의학적으로 남자에게 허리는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지금은 젊으셔서 모르지만 이렇게 몸을 혹사한다면 나이가 들어 허리를 못쓰게 되는 법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돈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다는 것도 공평한 것은 아닙니다. 상공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돈은 제가 맡아 두었다가 상공께서 필요하시다고 할 때 드리겠습니다.”

“이거 전부다?”

유성탄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저를 못 믿으세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빙아는 언제나 저와 한 몸같이 움직이는 애입니다. 빙아도 상공을 부군으로 모시겠다고 했어요. 그러니 나가시는 대로 빙아부터 찾아보세요. 또 청혼은 금년 안에 하셔야 합니다. 금년을 넘기면 오늘의 약조는 무효가 될 거예요.”

유성탄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정신이 몽롱했다. 정자운과 백리빙이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큰소리는 매일 쳤지만 이렇게 쉽게 될 거라고는 그도 생각을 못했었다. 그런데 호박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굴러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더 정신이 몽롱한 것은 두 눈 똑바로 뜨고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던 금자를 몽땅 빼앗긴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한마디도 따지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정자운의 방을 나오고 말았다.

“아이 씨! 이거 점괘가 영 이상하네. 분명 돈도 주고 몸도 주곤데 어찌하여 현실은 돈을 뺏기고 받은 거라고는 청혼하라는 말 한마디란 말인가. 야 정말 갈등 생긴다.”

혼자 중얼거리던 유성탄은 다시 코를 벌름거리고는 귀를 쫑긋했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백리빙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야 이거! 벌써 왔어?’

유성탄은 자신이 달려와 놓고도 어리둥절했다. 너무 몸이 빨라진 것이다.

‘햐! 이 정도면 저번에 기룡왕부에서 만난 노인이 뿌리는 장도 피할 수 있겠다. 확실히 남자는 장가를 가야 한다더니… 혼인 얘기가 나오자마자 몸이 달라지네.’

“이얍! 야하!”

살그머니 백리빙이 있는 곳으로 다가선 유성탄은 커다랗게 들려오는 기합소리에 머리를 쑥 내밀고는 좌우를 훑어보았다.

‘하여간에 씩씩해서 좋다니까…….’

조그만 개인 연무장에는 백리빙이 검을 들고는 열심히 무공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옷을 휘날리며 공중을 몇 번씩 회전하는 검을 연속적으로 찔러대는 백리빙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나비가 날아올랐다 내렸다 하는 듯 아름다웠다.

“빙아야! 나야, 나!”

고개를 내밀고 멍하니 쳐다보던 유성탄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백리빙의 검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자 급히 나라고 소리쳤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말을 하고 와야지. 이런 식으로 나타나면 제가 침입자인 줄 알잖아요?”

“미안, 미안!”

유성탄은 알았다는 듯이 말하고는 다짜고짜 백리빙을 껴안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풀지 못해요?”

“자운이를 만났거든. 이제 곧 빙아가 내 마누라가 될 텐데 어떠냐?”

“좋게 말할 때 손 풀어요.”

“아이 이제는 그럴 필요… 아이구!”

싱글거리며 얼굴을 백리빙의 얼굴 쪽으로 들이밀던 유성탄은 코에 충격을 받고는 뒤로 물러섰다.

“빙아! 너! 감히 낭군 될 사람의 코를 머리로 받아!”

“사람이 좀 진실 되어 보세요. 그래요. 나 당신 좋아요. 정말 너무 좋아요. 그런데 당신만 보면 너무 화가 나요. 나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노류장화들에게나 하는 행동을 내게 할 수가 있는 거지요?”

유성탄은 생전처음으로 여자에게 좋다는 말을 듣자 마치 자신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솔직히 빙아를 제일 많이 생각했다고. 너무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안고 싶은 욕망도 생기고 그런 거지. 누가 감히 빙아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래? 정말로 나 빙아 좋아한다고.”

“좋아요. 그렇다면 정식으로 청혼을 하세요. 혼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제 몸에는 손 하나 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만약 억지로 방금 전 같은 행동을 한다면 전 그냥 혀를 꽉 깨물고 죽어버릴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유성탄은 백리빙이 혀를 깨물고 죽는다는 말을 하자 화들짝 놀라서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무슨 끔찍한 소리를… 절대로 손 안 댈게. 진짜야. 그냥 얘기나 좀 하지 뭐.”

“좋아요. 저도 얘기 좀 하고 싶었어요.”

“차 좋아하세요?”

연무장의 옆에 있는 백리빙의 처소에 들어간 유성탄이 자리에 앉자 백리빙이 물었다.

“차는 뭐…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고… 우선 앉아!”

“그래요 그럼.”

백리빙이 자리에 앉자 유성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리 곧 혼인도 할 사인데 그냥 손이나 잡고 있으면 안 될까?”

백리빙은 유성탄이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고 끈적한 소리를 지껄이자 아무 말 없이 혀를 내밀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더 이상 안 그럴게.”

유성탄이 놀라 소리치자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백리빙이 혀를 집어넣더니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저는 아가씨와는 달라요. 아가씨와 저 이외에 더 이상 다른 여자는 용납치 않을 거니까 그건 명심하세요.”

유성탄은 언제나 부드럽던 정자운과는 달리 날카롭게 말하는 백리빙의 말을 듣자 갑자기 화설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휴우! 빙아가 그렇게 말하니 나로서는 정말 할 말이 없네. 정말 나는 죽일 놈이야. 한 여자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놓은 나 같은 놈은 죽어야 해.”

유성탄이 자신이 말이 끝나자 갑자기 비통한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자 백리빙이 고운 아미를 치켜뜨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뜻이지요?”

“내가 순간적인 실수로 한 여자를 망쳐놨어.”

“뭐라고요? 설마… 그 치정살인이……?”

‘잉! 얘가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에이 쪽 팔리게…….”

“그건 나 아니야! 아무리 내가 그런 끔찍한 짓을…….”

“방금 끔찍한 소리를 했잖아요?”

“내가 실수로 어떤 여자를… 그 여자는 이제 시집도 못 갈 거고 영원히 나만을 저주하면서 살 거 아니겠어? 그럼 나는 평생 악몽에 시달릴 거고…….”

“그 여자랑 잤어요?”

“뭐 그건 아닌데…….”

“그 여자가 누구예요?”

“자운이나 빙아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여자야. 그러니 더욱 불쌍하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건드린 거예요?”

“그 여자가 마지막이야! 정말이야!”

백리빙은 정자운이 한 말이 생각났다. 유성탄은 체질상 한 여자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남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좋아요. 그 여자까지만 봐주겠어요. 하지만 혼인은 분명 아가씨와 저 먼저 하고 나서 그 여자랑 하세요. 그리고 더 이상의 여자는 용납치 않을 거니까 명심하세요. 만약 안 지키면!”

“알아, 알아! 눈알 뽑을 거잖아!”

유성탄의 이어지는 말에 백리빙은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드디어 웃었다! 빙아는 웃는 얼굴이 제일 예쁘다니까!”

“흰소리 그만 하고 이만 가세요. 아가씨께 들으셨겠지만 금년 안에 청혼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게으름피지 말라고요.”

“가기 전에 뽀뽀나 한번 안 될까?”

유성탄의 마지막 몸부림에 백리빙은 가만히 혀를 내밀었다.

“빨리 하산하자!”

갑자기 나갔다가 돌아온 유성탄이 급하게 하산을 하려고 하자 아우들의 얼굴이 똥색으로 변해버렸다.

“대형! 드디어 일을 치르셨군요. 결국 우리 낭인칠웅은 무림공적이 되어 세상을 떠돌게 된 겁니까?”

마동파가 다 안다는 듯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하자 유성탄이 괴상한 놈 다 본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말했다.

“얘는 또 왜 갑자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거냐? 도망이 아니라 빨리 집에 가서 정자운이하고 백리빙한테 청혼을 하라고 해야 한단 말야! 금년 안에 해야 한다니까 바쁘지!”

“대형, 그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립니까? 신녀와 백리 총사에게 청혼이라니요? 청혼하면 누가 받아준답니까?”

“장우왕 너 지금 나한테 개기는 거냐?”

“이렇게 개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대형 혼자서 찬물 마시는 것은 아니신가 해서 묻는 것뿐입니다.”

“잔소리 더 이상 하지 마! 분명한 것은 자운이하고 빙아가 나랑 혼인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거다. 헤헤헤! 니들 알아? 이제 난 양손에 둘을 안고 잘 거란 말이다. 부러울 것이다. 헤헤헤!”

요상한 웃음을 터뜨린 유성탄이 밖으로 나가자 아우들도 부리나케 뒤를 쫓았다.

“얘기 들으셨습니까?”

산길에 이따금 있는 간이 주막에 이십여 명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무료하게 술이나 차를 마시고 있는 노인들의 등에 검이나 도가 매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무림인일 터이다.

다른 또 한 노인이 어디선가 달려오더니 지휘자인 듯한 노인에게 달려가서는 급히 말했다.

“얘기? 다짜고짜 그렇게 무슨 말인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흑수칠흉이 포천망쾌에게 작살이 났답니다.”

“어디서 들은 소식이냐?”

“그 놈이 갔다는 무산 부근에서 시작한 소식이 벌써 절강에 퍼지고 있습니다.”

“흑수칠흉이 그 자에게 당했다면…….”

“우리들도 정면으로는 그 자를 당하기 어렵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허 거참! 분명 시작은 그리 대단한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갈수록 강한 자들이 그 놈에게 당하고 있으니 이걸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우선 이번 살행은 잠시 연기하고 성에 연락해서 다시 명을 받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흑수칠흉이라면 지금 우리 인원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당했다면 이번 살행의 실패확률은 십 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가 눈에 보이는데 그대로 결행한다는 것은 성주님도 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듣던 지휘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결심한 듯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번 살행은 내 권한으로 취소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성으로 복귀한 연후에 다시 계획을 짠다. 모두 떠나고 성에서 다시 만나자.”

말이 떨어지자 무료하게 앉아 있던 노인들은 하나둘씩 일어서더니 훌쩍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 * *

“뭐라고? 성주님께서 직접 오셨다고?”

현령 집무실에서 유성우와 한주현의 노인들을 위한 시설을 새로 짓기 위해 의논을 하고 있던 유정삼은 이목이 전해온 소식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아니… 성주님같이 높으신 분께서 왜 이런 곳에……? 혹시 우리가 뭐 잘못한 게 있는 것 아니냐?”

유정삼의 안색이 하얘지더니 유성우를 보며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어느 현령들보다도 일을 열심히 해 오셨습니다. 제가 나가봐도 아버님에 대한 칭송이 대단한데 무슨 죄를 주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잘못이 있었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성주님께서 직접 이곳에 오실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성우 네가 그러니까 마음이 안정된다. 이목! 성주님께서는 지금 어디쯤 오셨다더냐?”

“이미 한주현에 들어섰다 합니다. 불시에 오시는 바람에 보고가 늦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거야 어찌 이목 자네의 잘못이겠는가? 어쨌든 빨리 나가보세.”

포장까지 지나며 하위관리들의 고충을 잘 아는 유정삼으로서는 이목에게 보고가 늦은 잘못을 추궁할 수 없었다.

유성우와 이목 그리고 주부와 전사등 현청의 관리들을 대동하고 급히 성주를 마중 나간 유정삼은 현청의 문을 나서자마자 허리를 굽혔다. 이미 성주의 행렬이 현청 밖에까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아니! 허허, 어찌 유 현령께서 여기까지 직접 나오신 것인가? 내 이럴까 봐 일부로 연락을 안 하고 나온 것이거늘. 자자, 현청으로 들어갑시다.”

성주가 오는데 일개 현령이 현청 문밖까지 마중도 안 나가는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성주는 마치 그래서는 안 될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호들갑스럽게 말하더니 유정삼의 어꺊嚮?손을 얻고는 매우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성주님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대접할 음식이라도 준비했을 것을… 정말 죄송합니다.”

성주나 되는 높은 사람이 왔는데도 겨우 삼등품의 차를 내놓은 유정삼이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비록 하위직이지만 이십 년을 넘게 관원이었던 유정삼으로서는 잘못된 대접이 얼마나 불이익을 주는지 많이 봐온 터였다.

“아닐세. 내 유 현령께서 너무 정무를 잘 보아 사방에서 칭송이 끊이지를 않기에 한 번 직접 보고 싶어서 온 것이오. 그리고 직접 보니 정말 청백리의 표본을 보는 듯하여 기분이 매우 흡족하오이다.”

“과분한 찬사이옵니다.”

유정삼의 말대로 품계가 다섯 계단이나 차이가 나는 정이품 성주가 정칠품 현령에게 하는 말로서는 너무 과분했다.

“그래 뭐 어려운 일은 없으신가?”

“아이구! 어려운 일이라니요. 그저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유정삼이 급히 허리를 굽히며 말하자 유성우가 입을 열었다.

“감히 제가 낄 자리는 아닌 줄 압니다. 하지만 한주현이 다른 현에 비해 성으로부터 받는 예산이 너무 적습니다. 물론 한주현이 가난한 곳이다 보니 세금이 적게 걷히기는 합니다만 성에서 현에 보조하는 예산은 세금 액수와는 상관없이 인두(人頭) 수에 따라 배정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 인두 수에 따라 돈이 지급되지. 그런데 왜 성에 보고를 하지 않았나?”

“이미 여러 차례 성에 보고를 하고 시정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어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아이구! 저놈이 감히 성주님께… 이러다가 불벼락 맞지…….’

유성우가 너무 곧이곧대로 할 말을 다하자 오금이 저린 사람은 유정삼이었다. 그러나 성주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자네가 이름이……?”

“판관 직을 맡고 있는 유성우라고 합니다.”

“하하하! 자네에 대한 말도 들었네. 소문대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말 강직하구먼. 알겠네. 내 성에 들어가는 대로 어찌 된 건지 알아보고 시정을 하도록 명을 내리겠네.”

“감사합니다.”

“그래 유 현령의 큰 아드님께서 이번에 오셨던 검찰관과 아주 친한 사이라고 하던데 큰 아드님은 어디 가셨나?”

드디어 성주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 유정삼을 극찬한 이유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번에 나타난 검찰관이 공주이고 황룡패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로서는 사방을 수소문해 공주가 왜 감숙성에 왔다갔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북창부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었는데 포장으로 있다가 마약을 거래한 혐의로 걸려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유정삼이 파격적으로 한주현의 현령으로 임명된 이유를 듣게 된다.

중앙부처로 가거나 아니면 물 좋은 성의 성주로 영전하기를 학수고대하던 성주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검찰관을 역임한 공주라면 대단한 뒷배가 아닐 수 없었고 성주는 그 끈을 잡기 위해서는 그녀와 친구라는 유성탄을 구워 삼는 것이 제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큰 애는 검찰관님의 특별명령으로 모처로 갔습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저희들도 몇 달째 연락도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요. 하하하! 역시 대단하신 분을 친구로 두었으니 당연히 큰 아드님도 큰일을 하시고 계시겠군요. 오늘 아주 즐거운 만남이었소. 시간이 나면 이따금 성에도 놀러오고 하시구려.”

“성우야, 왜 그러느냐?”

성주가 떠난 후 유성우가 아무 말도 없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자 유정삼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너무 강직하고 고지식한 유성우는 이따금 아버지인 유정삼으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하곤 했다. 물론 그 일이 잘못된 것이 전혀 없었지만 오늘처럼 등골이 오싹하게 만든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형님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성주님께서 이곳까지 직접 오신 이유는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형님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형님께서 어디 가서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형님 덕분에 저만 너무 편한 것은 아닌가 해서요.”

“그렇게 따진다면 이 애비야말로 할 말이 없구나. 제대로 보호도 못하고 수십 년을 홀로 죽을 고생을 하면서 자랐는데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떠밀듯이 보냈으니… 내가 아비 자격이 없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버님께서는 저희들을 세상에 나오게 하신 단 하나만으로도 자식들의 효도를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를 그토록 사랑으로 키우셨는데 자격이 없으시다니요. 아버님께서 형님 때문에 이십 년 가까이 술만 드시면 울고 하시는 것을 저는 봤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 * *

“뭐라고요! 이번에는 서쪽으로 직행하고 있는데 그 방향이 감숙으로 가는 것 같다고요?”

“그렇게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이번에는 관원들에게 돈도 뜯지 않고 곧장 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산속으로만 움직여서 동선을 파악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랍니다. 어찌할까요?”

팔지신타도 보고는 하면서도 전혀 제어가 안 되는 유성탄 때문에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 정말 이 자식을……! 공주의 명으로 잡아오라고 할 수도 없고… 세상에 내 이렇게 제멋대로인 놈은 정말 보다 보다 처음 보네요.”

주소연은 당장 유성탄을 잡아다 몇 대 때렸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다.

“황지용 장군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무림에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고요.”

“무림에요? 지금 무림은 근 백 년간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무슨 이상한 낌새라도 발견한 것입니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닌데… 황 장군의 능력으로도 더 이상 캐어 들어가기가 버겁다고 하더군요.”

“그럴 것입니다. 무림이라는 곳이 그 힘의 끝이 어딘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이번에 유성탄이 흑수칠흉이라는 자를 단신으로 제거했다고 해서 무림이 시끌거린다고 하더군요. 흑수칠흉이란 자들이 그렇게 대단한 자들인가요?”

“대단하지요. 특히 대형이라는 자는 저와 단독으로 붙어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자입니다.”

“그래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주소연은 결심한 듯이 일어서더니 말했다.

“제가 직접 가서 끌고 와야겠어요.”

“공주님께서요? 공주님께서 모습을 나타내면 당장 동창이 눈치 채고 달라붙을 텐데요?”

“그렇지만 이번 일을 맡길 자가 유성탄 그 자식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무림 일에 유성탄을 투입하는 것은 좀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왜요?”

“지금까지는 거의 모든 일에 관이 연결되었으니 황룡패도 통했고 여간한 것은 저희들이 뒤에서 은근히 압력을 넣어 무마가 되었지만 무림 일에 뛰어드는 것은 그 상대가 지금까지의 상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동안 마룡방이나 구룡회의 무사들까지도 가차 없이 때려서 옥에 가두던 터였어요.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동안 무림세력과 여러 차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유성탄에게는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분이 있었고 모든 일이 관청을 중심으로 처리가 되고 있었기에 무림인들의 눈에는 유성탄이 포쾌였습니다. 그러나 무림의 일에 깊숙히 들어가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유성탄을 포쾌로 봐주지 않고 무림인으로 보거나 무림에 반하는 자로 볼 것입니다.

무림인으로 보이게 되면 정파와 사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고 선택을 하게 되면 선택한 쪽의 제파들은 조사가 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판단한 유성탄의 성격으로 볼 때 무림에 반하는 자로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말은 무림의 공적이 된다는 말인데 무림 천년 역사 중 어떤 고수도 무림의 공적이 되어가지고 살아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팔지신타의 말을 듣던 주소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해갔다. 아무리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유성탄을 죽음의 길로 들여보낸다는 것은 그녀로서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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