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무영존 (63/79)

제5장 무영존

총관이 가져온 궤짝을 열어본 유성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열 근짜리 금괴 세 개가 들어 있는 상자는 그리 크지도 않았는데 장정 한 명이 끙끙거리며 들고 올 정도로 무거웠고, 뚜껑을 열자 누런 황금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누가 봐도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성탄의 입이 안 벌어지면 그것이 더 이상할 광경이었다.

“하하하! 역시 왕자님이 다르기는 하군요. 정말 아주 유익한 협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죽일 놈! 유익은 무슨 유익! 나를 풀어주기만 해라.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죽이리라.’

교중 왕자가 분을 못 참고 속으로 다시 욕을 하자 유성탄이 씨익 웃으며 교중 왕자를 쳐다보더니 다시 말했다.

“왕자님께서 바보 같은 부하들 때문에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인데 그래도 참으셔야지 자꾸 속으로 욕을 하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유성탄의 말에 교중 왕자는 가슴이 뜨끔했다.

“어쨌든 나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으니 이만 이 손이나 놓는 것이 어떻겠나?”

“물론 놓아드려야지요.”

유성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그런데 막상 행동은 교중 왕자의 손목을 더욱 세게 잡는 것이 아닌가.

“아까부터 말로만 놓아준다고 하면서 계속 나를 제압하고 있는 이유가 뭔가!”

교중 왕자는 유성탄이 오히려 더욱 세게 잡자 화가 나서 소리쳤다.

“제가 겸손해서 이런 말은 잘 안 하는데, 저를 아는 사람들이 저를 보고 그러더군요. 세상에 나처럼 완벽한 인간은 없을 거라고요. 만약 완벽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단어가 있으면 그것을 썼을 거라나 뭐라나…….”

교중 왕자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아까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두 번째 듣는 겸손하다는 말이 유난히 신경을 거슬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교중 왕자는 점점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번 유성탄의 면상을 한 대 치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가 딱딱해지고 있었다.

“우선 제가 왕부의 문 밖으로 나간 후에 풀어드리겠다는 말입니다.”

“뭐야! 이미 우리는 남자 대 남자로 협상을 했고 금을 가지고 오면 풀어주겠다고 니 입으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너는 사내대장부가 되어가지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다는 것이냐?”

“헤헤헤! 입이란 게 말하라고 뚫린 건데 두 말이 아니라 세 말은 못 하겠습니까? 저는 하루에 백 말 천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이익!”

교중 왕자의 안색이 붉어졌다. 화를 참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그 지위에 그 돈, 거기다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여인들까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성탄이 잡은 손에서 다시 이상한 힘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교중 왕자는 간신히 화를 참고는 다시 한 번 달래기 시작했다.

“어찌 하기를 바라느냐?”

“부하들보고 모두 물러서라고 하십시오. 제가 정문 앞까지 가서 왕자님을 놔주고 후다닥 저는 나가겠습니다.”

교중 왕자는 입술을 악 물었다. 그리고는 잠시 분을 가라앉히고는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라!”

하지만 교중 왕자의 외침이 울려 퍼졌는데도 한 명도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네 이놈들! 내가 물러서라고 하지 않느냐!”

“저하! 왕 전하께서 명이 있기 전까지는 포위망을 풀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습니다. 저희로서는 전하의 명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검을 든 채 유성탄을 노려보던 장군 하나가 포권을 하며 교중 왕자에게 소리쳤다.

“아버님께서 포위를 풀지 말라고 하셨다면 나로서도 방법이 없다. 어찌하겠느냐?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나를 풀어준다면 너는 그 금은 물론 본 왕부의 귀빈으로 크게 대접을 받고 왕부를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버틴다면 너는 이 포위망 속에서 쫄쫄 굶다가 결국은 지쳐서 잡히고 말 것이다.”

교중 왕자의 말을 들으며 유성탄의 표정에 갈등의 빛이 역력히 나타나자 교중 왕자는 뭔가 말이 먹힌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낮은 음성으로 구슬렸다.

“어쩌면 아버님께서 나를 그냥 놔준 것에 고마움을 느껴 더 많은 포상을 할 수도 있다. 아버님께서 상을 주신다면 나하고는 그 액수가 다르다. 나야 저 황금 삼십 근이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최고의 액수지만 아버님께서는 황금 백 근도 거뜬히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나는 주실 수! 있다는 말을 안 좋아합니다. 준다면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세상에 이런 지독한 놈이 있나? 욕심이 끝이 없구나.’

교중 왕자는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유성탄에게 이제는 아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계속 이렇게 며칠이고 버티고 있겠다는 말이냐?”

“그럴 리가요!”

웃기지 말라는 듯이 말한 유성탄은 몽둥이를 들더니 옆에 있는 사자상을 그대로 후려쳤다. 그러자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든 석상은 완전히 가루로 변해버렸다.

“니들 봤지? 난 한 번 말하면 꼭 그대로 행하는 분이거든. 왕의 명이고 뭐고 만약 열 셀 때까지 안 비키면 여기 계신 귀한 왕자님의 머리통이 이렇게 되는 거야! 내가 진짜 그렇게 하나 안 하나 한번 시험해 보고 싶으면 그대로 버티고 있어라.”

말을 마친 유성탄은 몽둥이를 들고는 교중 왕자의 머리를 겨냥하더니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하나!”

“둘!”

“셋!”

‘어쭈, 이놈들 봐라? 왕자가 죽는다는데도 꿈쩍을 안 해? 이거 진짜 왕자 맞아?’

유성탄이 셋이나 셌는데도 전혀 움직임이 없자 불안해지고 있는 유성탄이었다.

‘열 셀 때까지 안 움직이면 나도 이따금은 말한 것을 안 지킬 때가 있다고 그러는 거지 뭐!’

“넷!”

유성탄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넷을 셌다. 그런데 갑자기 군사들이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얼굴에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 하나가 걸어왔다.

‘뭐야! 왕자가 말해도 안 비키더니 이 영감이 왕인가? 아닌데…….’

유성탄이 보기에도 노인은 왕의 모습은 아니었다.

노인은 잠깐 좌우를 둘러보더니 유성탄을 보며 말했다.

“왕자를 풀어주거라.”

‘이 영감이 누구를 바보로 아나……?’

“내가 영감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영감 말을 듣겠소? 다섯! 보아하니 영감이 제법 높은 것 같은데 딴 말 말고 정문까지 쫙 길이나 열라고 하시오. 여섯!”

유성탄은 그 와중에도 수를 세고 있었다.

노인은 유성탄의 말을 들으면서도 전혀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아이로구나.”

노인은 교중 왕자를 흘낏 보더니 슬쩍 소매를 떨쳤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자, 이제 일곱을 세면 셋밖에 안 남아요! 그러니 빨리 길을 여세요!”

유성탄은 크게 소리를 치고는 입을 크게 벌리고 일곱을 외치려고 했다.

“아야!”

유성탄은 교중 왕자를 잡은 손에 상당한 충격을 느끼며 교중 왕자의 손목을 놓고 말았다. 아무런 낌새도 없었는데 마치 커다란 도끼로 자신의 손목을 누군가가 후려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쾅!

“아이구!”

유성탄이 손목에 충격을 느끼며 순간 놓친 교중 왕자를 다시 잡으려고 하는데 엄청난 폭음이 들리더니 유성탄의 몸이 그대로 일 장 가까이 날아가고 있었다. 손목을 친 힘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유성탄의 가슴을 무엇인가가 친 것이다.

“아이구, 가슴이야!”

땅에 그대로 처박힌 유성탄은 벌떡 일어서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지금 일어난 일이 노인에 의해 생긴 거라는 것 정도는 당장 알 수 있었다.

‘이 씨! 똥 밟은 정도가 아닌데… 흑혈 뭐시기 하는 노인만큼 강하다. 아무래도 도망을 쳐야겠는데… 하지만 저걸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잖아!’

어렵다 생각하면 튀고 보는 유성탄이었지만 이번만은 조금 경우가 달랐다. 자신의 물건을 놔두고는 절대로 도망을 못 치는 사람이 또한 유성탄이었다.

아직도 황금빛 누런 광채를 내보이고 있는 상자를 슬쩍 흘겨본 유성탄은 갈등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공격한 노인이 하필이면 상자가 있는 방향에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감, 잠깐 내 할 말이 있시다.”

유성탄이 손을 들며 우선 쓸데없는 너스레를 떨었다.

‘영감? 있시다? 오랜만에 무림에 나왔더니 별 이상한 말을 다 들어보는군.’

노인은 어이가 없는지 걸음을 멈추고는 유성탄을 쳐다보았다.

‘됐다! 이제 슬슬 가까이 가서…….’

유성탄은 노인이 어떤 마음으로 걸음을 멈추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 소리치며 몇 걸음 상자 쪽으로 다가섰다. 조금만 생각하면 유성탄이 하는 행동에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누구라도 이런 와중에 무거운 황금상자를 들고 튈 생각을 할 거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충격이 꽤 컸을 텐데 몸이 단단한 놈이구나. 네 놈 사부가 누구냐? 어떤 놈이 너같이 버릇없는 개차반을 키웠는지 한번 들어보자.”

노인장은 알고 나면 당장 찾아가서 완전 멸문을 시켜버릴 작정을 하고는 슬쩍 유성탄에게 사문을 물어보았다.

“하하하! 영감은 내 사부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오줌을 지릴 것이오.”

노인의 한쪽 검미가 바짝 올라갔다. 유성탄은 그 노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무림에서는 누구라도 그 노인의 이름만 들어도 사색이 될 정도로 무서운 흉명을 떨치고 있는 자였다.

“그래,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한번 들어보자.”

노인장은 얼굴만 보아서는 전혀 동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유성탄의 대답을 듣고 나면 당장 때려죽일 생각으로 양손에 진력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 무림… 십대… 고수라고는 들어보셨소?”

유성탄은 일부러 말을 한마디씩 늘이면서 말했다. 우선 반응을 보면서 가짜 사부를 가르쳐 줄 생각이었고 그 와중에도 한 걸음씩 상자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네 사부가 십대고수 중 한 명이라는 말이냐?”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혹시 흑혈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시오?”

마치 뒷골목 흑도들이 처음 만나 서로 간의 족보를 대조하듯이 유성탄은 두루뭉술하게 확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흑혈? 설마 흑혈신마가 네 사부라는 말이냐?”

‘어떻게 된 거야? 겁을 안 내네. 씨!’

십대고수 중 가장 무서운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흑혈신마의 명호가 나왔는데도 노인의 안색에 전혀 긴장된 표정이 없자 유성탄은 생각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한 단계 더 높이기로 한다.

“흑혈 그 사람, 나하고는 동업자요.”

노인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미친놈! 흑혈신마가 너 같은 놈과 무슨 동업을! 허허, 정말 미친놈이군.”

노인은 말하다 말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성탄이 노인이 말하는 와중에 황금이 든 상자을 들고는 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노인만이 아니었다. 살기를 띠고 유성탄을 노려보고 있던 교중 왕자나 그 주위에 둘러서 있던 용호사노나 전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지금 이 와중에 황금을 들고 튈 생각이 있었다? 살다 살다 저런 별종은 처음 보는군.”

중얼거린 노인은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미 꽤 많이 도망친 유성탄이 무엇엔가 맞은 듯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노인의 장이 무려 삼십여 장을 질러가서는 유성탄을 맞춘 것이다.

“아이구, 아파라! 저 놈의 늙은이 뭔 힘이 이렇게 좋은 거야… 씨!”

유성탄은 그 와중에도 상자를 품에 안더니 후다닥 일어나서는 다시 달렸다.

“허! 정말 재미있는 놈이군. 나의 팔성의 무형파열장에 정통으로 맞고도 겨우 넘어지기만 하고 멀쩡하게 다시 달리다니… 아주 흥미로워.”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 채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노인의 몸이 지면에서 약간 뜨더니 마치 흘러가듯이 미끄러져 유성탄에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신법 중 최고의 절기 중 하나인 육지비행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놈의 늙은이 나랑 무슨 원한이 있다고 저렇게 죽어라 쫓아오는 거야?”

유성탄은 노인의 기가 순식간에 가까워 오자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기겁을 하며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노인이 똑바로 선 채 발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무지 빠르게 그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도망도 그리 간단치는 않았다. 사방에 포진하고 있던 군사들의 화살이 계속 유성탄을 향해 날아왔고 위협은 전혀 안 되지만 끊임없이 앞을 가로막는 군사들도 그의 걸음을 계속 더디게 하고 있었다.

“이거 이러다가 오늘 꼴까닥하는 것은 아니겠지? 안 되지… 아직 자운이도 그렇고 빙아도 그렇고 거기다 그 예쁜 화설군이도 아직 못 먹었는데… 안 돼! 힘내라, 유성탄.”

유성탄은 이상한 걸로 힘을 북돋우며 쉬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황금상자라도 던져버리고 뛰면 조금이라도 더 빨라질 것이었지만 유성탄에게는 전혀 그럴 마음은 없었다.

“청담, 저놈 보이느냐?”

높은 전각에서 유성탄이 뛰고 있는 모습을 보며 기룡왕이 청담을 보며 말했다.

“보입니다. 그런데… 저 노인은 누구십니까?”

기룡왕이 서 있는 전각은 놀랍게도 기룡왕부의 전경을 어디든지 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노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기룡왕은 유성탄에 대해 놀라고 있었지만 청담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 그 노인만큼 강한 자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함부로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저 포천망쾌라는 놈 하는 행동을 보니 오늘 저 분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을 것 같구나.”

청담은 더욱 놀란다. 기룡왕이 저분이라는 칭호를 붙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단하신 분입니까?”

“신경 쓰지 말고 저 놈이나 자세히 봐라. 화살을 벌써 몇 번이나 맞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전혀 이상이 없다. 거기다 저 분의 무형파열장에 벌써 세 번이나 맞았는데도 뛰어다니고 있다.”

“무형파열장! 아니 그렇다면 저 노인이 무영존……?”

“그렇다. 무림십대고수 중 가장 신비롭다는 무영존이 바로 저 분이다. 나 역시 저 분의 진면목을 모르지. 아마 지금 보이는 모습도 진짜가 아닐 것이야. 그것보다 저 놈 진짜로 돈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저 상황에서 저 무거운 황금상자를 저렇게 신주단지 모시듯이 들고 다닐 수가 있을까?”

기룡왕은 볼수록 유성탄이 신기한지 얼굴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전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군요. 연극을 한다 해도 저렇게까지 하기는 힘들 겁니다.”

“혹시 저 놈 말야 사방에서 돈을 뜯어내고 다녔다는 게 진짜 돈이 목적이었다면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한번 해 볼까요?”

“아니! 우선 조금 더 지켜보고.”

“영감, 자꾸 이러면 나 화 나!”

유성탄은 나름 빨리 뛴다고 뛰었는데도 어느새 무영존에게 앞을 막히자 으름장을 먼저 놓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큰소리는 잊지 않는 유성탄이었다.

“그래 화 한번 내 보거라. 나도 누가 내게 화를 내는 경우 어떤 마음이 되는지 한번 알아보고 싶었다.”

무영존은 유성탄의 말을 들으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마종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을 듣는 무림오마의 일인답게 유성탄의 말에 전혀 동요가 없었다.

‘에이 씨! 똥 밟은 게 아니고 완전 똥통에 빠져버렸네.’

무영존에게 앞을 막힌 유성탄의 주위는 이미 군사들과 무사들로 빠끔히 포위되어 있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본 유성탄의 얼굴은 완전 죽상으로 변해갔다.

“하하하! 이러지 말고 우리 협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이래봬도 특수포쾌거든요. 나 높은 사람 많이 압니다. 노인장께도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을 잠깐 끊은 유성탄은 아깝다는 표정으로 팔에 든 금궤를 보더니 조그맣게 다시 말했다.

“내가 여기 금에서 일 할 주리다.”

“일 할? 어처구니없는 놈이군.”

‘늙은이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이렇게 욕심들이 많은 거야. 씨!’

“이 할 주겠소! 더 이상은 바라지 마시오.”

“내가 여기서 너를 죽이면 그게 다 내 거가 될 텐데 뭐 하러 힘들게 협상을 하고 이 할만 가지겠나. 안 그런가?”

무영존은 계속되는 어이없는 유성탄의 말에 장난이 동했는지 같이 맞장구를 쳤다.

‘씨! 똑똑하네. 그것도 눈치 채다니…….’

“나 유성탄의 인생에 오 할은 없었소. 하지만 노인장께는 내 인심 써서 오 할 드리리다.”

유성탄이 엄청난 인심을 쓴다.

“흠! 네가 일 할 갖고 내게 구 할을 준다면 한번 생각해보지.”

‘이런 날도둑놈! 내가 얼마나 힘들게 번 돈인데… 날로 먹을라고…….’

유성탄은 자신이 뭘 해서 힘들게 벌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억울한 거는 절대로 못 참는 성미였다.

“아이 씨! 내가 죽고 만다 씨! 난 그렇게는 못해! 그래 영감 당신이 죽나 내가 죽나 한번 해보자 씨!”

커다랗게 소리친 유성탄은 그대로 무영존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성탄은 무영존이 얼마나 강한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휘두르는 몽둥이에 처음으로 그의 전력이 담겨 있었다.

“아니! 이 놈이……?”

무영존은 전혀 내공을 느끼지 못했던 유성탄의 공격에서 생각지도 못한 거력을 느끼자 언뜻 놀랐다.

꽝!

엄청난 폭음과 함께 흙먼지와 자갈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유성탄의 몽둥이와 무영존의 장이 충돌하면서 생긴 충격의 여파였다.

“이 씨! 진짜 세네!”

유성탄은 부러진 자신의 몽둥이를 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놀라기는 무영존이 더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칠 성이 넘는 공력을 사용한 장에 유성탄은 단지 몽둥이 하나만 부러진 것이다.

“이놈이 바보인 척 하더니 아주 음흉한 놈이로구나. 그래 감히 단신으로 왕부에 들어와서 왕자를 잡아가려 한 배짱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 것 같다.”

‘배짱은 무슨 배짱? 그냥 대충 어떻게 되겠지 한 거지. 씨 이거 완전 망조가 난 것 같은데… 어쩐다?’

유성탄은 일부로 힘든 것처럼 숨을 헥헥 대며 곁눈질로 주위를 쳐다보았다. 도망갈 구멍을 찾기 위해서였다.

‘자식들이 밥 먹고 할 일도 없다. 겨우 나 혼자 있는데 뭘 이렇게 몰려와 가지고는…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굳이 저 늙은이하고 직접적으로 싸울 이유가 없잖아. 역시 난 천재야!’

유성탄은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다짜고짜 군사들이 창을 겨누고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자신의 특이한 신체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저 놈이… 참 특이한 놈이군. 황제의 황룡패를 가지고 있는 놈이 돈을 엄청 좋아하는 것도 이상한 판에 저 무공을 가지고 저런 치사한 짓까지 거침없이 행한다?”

무영존은 유성탄이 빽빽이 몰려 있는 군사들 사이로 뛰어들자 공격하려던 손을 내렸다. 군사들은 무림인이 아니었다. 만약 무영존이 유성탄을 죽이려고 그대로 공격했다가는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 씨! 옷 다 찢어지네. 비싸게 주고 산 건데…….”

황금 삼십 근이 들어 있는 상자를 들고는 동전 몇 문 주고 산 옷이 찢어지는 것을 아까워하는 유성탄이었다. 유성탄은 군사들 사이로 뛰어다니면서 군사들의 공격을 그대로 몸으로 받으면서 군사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군사들이 끙끙거리며 쓰러져 있었다.

‘요렇게 하니까 저 영감이 공격을 못하는군. 어쨌든 빨리 빠져나가야겠는데…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네…….’

유성탄은 싸우는 와중에도 무영존이 있는 곳을 수시로 쳐다보았다. 무영존만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도망을 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성탄이 군사들 사이를 계속 숨어만 다닐 수는 없었다. 유성탄에게 공격이 안 통하고 전면에 서 있던 군사들이 한 방에 다 쓰러져버리자 처음에는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던 군사들이 차츰 안정을 찾으며 대오를 정리하고는 체계적인 공격에 들어간 것이다.

“아 진짜… 이거 세게 쳤다가는 죽을 것 같고 환장하겠네.”

유성탄은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수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자 짜증이 났다. 그때서야 무공이 약해도 군대들과 싸우는 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였다.

‘왜 왕부랑은 싸우면 안 된다고 하는지 알겠다. 씨! 피해야 할 것 중에 군대도 추가다.’

“무슨 외공이지 저게……?”

무영존이 지금 공격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군사들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공격에 몇 번이나 격중되고도 끄떡없는 유성탄의 움직임을 좀 두고 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영존답게 모든 것이 유성탄의 이상함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창끝에 확실하게 찔렸는데도 창이 튀어나오고 검에 제대로 찔려도 피 하나 안 나고 도에 베었는데 상처 하나 없다. 도대체 저런 외공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놈을 죽이려면 내공으로 내부를 완전 박살내는 수밖에 없다는 얘긴데… 파열장에도 끄떡없다는 말이야.”

무영존은 천하가 인정한 최고의 고수 중의 하나였다. 그 역시 흑혈신마와 마찬가지로 유성탄을 죽인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몇 번의 격돌을 겪은 후 곧 알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야 죽일 수 있는 놈인데…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나 모르겠군.’

무영존은 지금 수천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잘못하면 자신의 명성에 오점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겨도 전혀 자랑스러울 것이 없고 만약 죽이지 못하면 모양새가 이상해질 상황에서 끼고 싶지가 않았다.

거기다 그가 빠진다 해도 희생이 좀 있기는 하지만 유성탄이 도망을 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교중 왕자! 난 이 정도 했으니 이만 돌아가겠다. 내 모습을 너무 오래 나타낸 것 같다.]

[그렇게 하십시오. 도움 감사합니다.]

교중 왕자도 상황을 낙관했는지 무영존의 무슨 의미로 그러는지는 전혀 짐작도 못하고 그러마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무영존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으잉! 저 영감이 왜 그냥 가지? 그러면 이제 걱정할 게 없지. 저 왕자 놈부터 다시 잡아야겠다.’

유성탄은 무영존이 사라지자 갑자기 힘이 나는지 멀찌감치 서서 상황을 주시하며 명령을 내리고 있는 교중 왕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군사들이 쓰러졌다. 때린 것도 아니고 그냥 몸으로 부딪치기만 했는데도 군사들은 우수수 쓰러지고 있었다.

무영존의 무형파열장은 내장만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내가장력이었다. 거기다 마지막에 마주친 무영존의 장력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었다. 당연히 유성탄의 내장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러자 유성탄의 선천강기는 어느 때처럼 유성탄의 장기를 보호했다. 그리고 그것은 유성탄에게 선천강기를 온몸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하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하니까 아픈 것도 없고 좋네. 좋아, 아프지만 않으면 겁날 게 없지. 이제 니들 다 죽었어 씨!”

“정말 이해가 안 가는 놈이구나. 청담 봐라. 더욱 강해진 것 같다. 저게 가능한 것이냐?”

유성탄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던 기룡왕의 입에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 저자가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면 연기력이 대단한 자로군요. 무영존이 있을 때까지는 마치 곧 죽을 것 같이 하더니 무영존이 떠나자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봐라. 군사들이 저자의 몸에 부딪쳐서 쓰러지는 게 아니다. 닿기도 전에 쓰러지고 있어. 그 말은 초절정 고수들이나 펼칠 수 있다는 반탄강기를 저자가 펼치고 있다는 말이 아니냐?”

기룡왕은 놀랍게도 그 먼 곳에서 조그맣게 보이는 유성탄의 행동을 마치 눈앞에서 보듯이 자세히 보고 있었다. 그 말은 기룡왕 역시 대단한 고수임에 분명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저자를 잡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방법을…….”

“이미 명을 내렸다. 곧 다른 방법을 시작할 것이다.”

‘옳지. 길이 뚫렸다. 우선 왕자도 왕자지만 나부터 피하고 보자. 아이구, 지겹다.’

유성탄이 군사들을 쓰러뜨리면서 교중 왕자 쪽으로 달려가자 교중 왕자가 급히 몸을 피하고 군사들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쪽으로 군사가 몰리면서 포위망에 구멍이 뚫리자 유성탄은 교중 왕자를 잡는다는 계획을 순식간에 바꾸고 먼저 몸부터 피하기로 결정한다.

[왕자님, 계획대로 저 놈이 저쪽으로 갑니다.]

용호사노 중 한 명의 전음을 받으며 교중 왕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편치 않았다. 방금 유성탄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 때 자신도 모르게 겁에 질렸던 것이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겁을 먹기는 처음인 그였다.

“반드시 저 놈의 살가죽을 벗겨야 한다.”

“함정에 빠지면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왕자님 뜻대로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에이 씨! 치사한 놈들. 이따위 함정이나 만들고… 나 이런 데 엄청 싫어하는데…….”

유성탄은 포위망이 뚫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함정에 빠져버렸다. 기룡왕부의 지하에는 만약을 위한 비밀통로와 침입자나 왕부를 공격하는 세력을 막기 위한 함정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었다. 평상시는 그냥 걸어 다니는 길에 깔린 청석판에 불과했지만 지금처럼 기관을 작동시키면 침입자가 밟으면 그대로 밑으로 꺼지게 되어 있었다.

유성탄이 빠지자마자 청석판은 다시 닫혀버렸고 함정 안은 불빛 하나 없는 완벽한 어둠으로 덮여 버렸다.

“에이 씨! 꼭 충동에 다시 빠진 것 같네. 에이!”

유성탄은 함정에 빠진 게 겁나는 게 아니라 충동 같은 함정의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아직도 금궤가 실린 상자가 들려 있었다. 대단한 집착이었다.

“계획대로 함정에 빠졌다는구나.”

기룡왕의 말에 청담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전음도 보내는 것 같지 않은데 명령을 내리고 보고를 받는 기룡왕 때문이었다.

“잘하면 생포도 가능할까요?”

“모르지. 그래도 좀 이상해. 엄청 고수가 분명한 것 같았는데 첫 번째 함정부터 간단히 빠지다니 말이야. 정말 수수께끼 같은 놈이야. 하여간 이제부터 그 놈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살아난다면 그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우리가 제거하든가 아니면 회유를 해야겠지.”

“뭐야! 이건 또?”

유성탄은 통로를 따라 걷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뱀들을 보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뱀을 못 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뱀은 정말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물리기만 해도 즉사한다는 맹독을 가진 독사들이 모두 망라된 것 같았다.

“다행이네. 벌레들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이놈들이라도 있으니 굶어죽을 염려는 없겠구나.”

함정으로 만든 뱀들을 보고 한 끼 식사로 생각하는 유성탄의 말을 기룡왕부의 사람들이 들었다면 어이가 없었을 것이었다.

유성탄은 달려드는 독사 중에 가장 빨리 다가선 한 마리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입에 넣고는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다. 한참 싸웠더니 그렇지 않아도 허기가 지던 유성탄이었다.

“한 마리론 안 되겠다.”

한 마리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유성탄은 황금상자를 옆구리에 끼더니 양손으로 한 마리씩 잡고는 다시 씹기 시작했다.

“은근히 맛있네…….”

유성탄은 통로를 계속 걸으며 자신의 발에 달라붙는 뱀들을 계속 먹어치웠다.

잠시 걷던 유성탄은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나더니 뱀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자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뱀들이 다음 통로로 갈 수 없게 뱀이 싫어하는 약초를 뿌려 놓은 것이다.

유성탄은 아쉬운 표정으로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는 뱀들을 쳐다보더니 계속 통로를 걸어갔다.

“뭐야 이건 또? 얘들이 내 식성을 아나? 나 좋아하는 것만 모아놨네.”

통로를 어느 정도 걷던 유성탄은 갑자기 유성탄이 나타나자 급히 도망을 치는 독충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뱀들보다 더 무섭다면 무서울 수도 있는 독충들이었지만 유성탄에게는 한 끼 식사 감이었다. 거기다 무엇이든 보면 공격부터 하는 독충들이었지만 지룡봉의 향기를 풍기는 유성탄을 만나자 서로 도망가기 바빴다.

“니들은 이따 배고프면 다시 오마. 지금은 좀 배가 찼다.”

유성탄은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시고는 두 번째 함정도 유유히 빠져나갔다.

쿵!

다음 통로로 향하던 유성탄이 뒤를 쳐다보았다. 조그만 광장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자신이 지나온 통로가 위에서 돌문이 하나 떨어지더니 막힌 것이다.

“얼라? 일용할 양식이 있는 문이 닫히면 안 되는데… 뭐야 저건 또……?”

닫힌 돌문을 한번 밀어본 유성탄이 중얼거리며 앞을 쳐다보는데 광장에는 엄청난 나무들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나무들을 이렇게 여기 쌓아놨지?”

유성탄이 나무들을 보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뒤쪽으로부터 불길이 일더니 나무에 불이 붙었다.

“이 놈들이! 아예 나를 통닭을 만들라고… 이제 봤더니 왕자인지 뭔지 하는 놈만 변태가 아니고 이놈들 전부가 이상한 놈들이구나. 사람을 구워먹는 놈들이라니…….”

유성탄의 안색이 확 변했다. 자신의 특이한 신체에 대해서는 이제 어느 정도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을 거라는 자신이 붙을 정도로 알게 되었지만 불공격은 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후! 후!”

유성탄은 우선 입으로 바람을 불어보았다. 하지만 나무에는 이미 기름을 듬뿍 묻혀놨는지 순식간에 활활 타오는 것이었다.

“이거 큰일 났네. 어떻게 끄지?”

유성탄은 불길이 세지면서 자신의 몸이 뜨거움을 느끼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신체도 불은 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유성우와 유성화의 얼굴이 생각났다.

“아직 장가도 못 가고 죽으면 안 되는데… 나 죽으면 나를 사랑하는 그 많은 여자들은 또 어떡해!”

누가 자신을 사랑하는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많은 여인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유성탄으로서는 그 여자들을 놔두고 죽는다는 것은 황금상자를 버리고 가는 것보다 더 아까운 일이었다.

“안 돼!”

눈앞에서 정자운과 백리빙 그리고 화설군의 얼굴이 교차되면서 유성탄은 입으로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터트리며 머리를 바닥에 박고 몸을 웅크렸다. 웃기는 이유지만 최대한 불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처녀의 상태로 놔두고 죽을 수는 없다는 그의 절실한 마음이 갑자기 그에게 힘을 주기 시작했다. 유성탄이 거의 죽어가는 모습이던 아버지 유정삼을 만났을 때 나타났던 거력이 갑자기 유성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구어져 가던 작은 광장은 유성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대한 선천강기가 휘몰아치면서 불에 타던 나무들을 조각조각 내며 공중으로 흩날리더니 그대로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그러자 가루로 변한 나무들은 작은 불꽃으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더니 순식간에 불은 사그라져 버렸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뜨겁던 주위가 정상으로 돌아가자 웅크린 채 머리를 감싸고 있던 유성탄은 고개를 들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이제는 불까지도 나를 알아보는구나. 하하하! 역시 난 분명 난 놈이라니까…….”

한참을 웃던 유성탄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처음 불이 시작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불이 시작됐단 말이야. 그렇다면 누군가 불을 붙였다는 말인데… 어디 보자.”

유성탄은 그냥 벽으로만 보이는 곳으로 가더니 귀를 벽에 대었다.

“여기는 아니고… 여기도 아니고… 옳지 여기다! 이 자식들 나가기만 해봐. 씨! 감히 나를 통닭을 만들려고 그랬지.”

동굴에도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있는 법이었다. 벽 뒤가 막힌 곳은 어떤 소리도 안 나지만 벽 뒤에 공간이 있다면 충동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유성탄은 그 공간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유성탄은 주먹을 들어 휙휙 돌리다가는 그대로 벽을 주먹으로 갈겼다.

“아이구! 아이구! 아구 아파라. 이것들이 씨 골고루 약 올리네.”

유성탄의 주먹을 벽은 견디지 못했고 부서졌다. 하지만 벽은 겉만 돌이었을 뿐 속은 쇠로 되어 있었다. 그냥저냥 한 벽인 줄 알고 맘껏 후려친 유성탄의 주먹이 아무리 특이하다 해도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놀란 것은 벽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더 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뚫을 수 없다고 믿었던 철벽이 그대로 구멍이 난 것이다.

“막아라!”

먼지 속으로 유성탄의 모습이 나타나자 함정을 조종하던 무사들이 크게 소리치며 달려들었지만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유성탄의 주먹에 개구리처럼 쫙 뻗어버리고 만다.

“까불어 씨! 아 황금! 큰일 날 뻔했네.”

무사들을 모두 때려눕힌 유성탄은 벽을 부수면서 잠깐 놔두었던 황금상자를 생각하고는 급히 돌아가서는 상자를 들고 나왔다.

“허허! 정말 어이가 없군. 사진(蛇陣)과 충진(蟲陣)을 아무런 일도 빠져나오고는 화진(火陣)까지 간단히 파괴하고는 무쇠 벽을 무기도 없이 주먹만으로 부서뜨리고 지금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있다니…….”

“전하, 도대체 이해가 안 됩니다. 사진이나 충진도 인간이라면 그렇게 쉽게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하물며 화진은 사람의 몸으로는 절대로 견딜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공의 고하가 문제가 안 됩니다.”

기룡왕의 참모 격인 내시 표충의 말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그놈의 척살이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 같구나.’

표충과 기룡왕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 그 놈은 지금 어디로 움직이고 있느냐?”

“그게… 지하 함정은 위험도도 위험도지만 그 설계가 진과 기관을 같이 병행하여 지도가 없이 들어갔다가는 길을 못 찾고 굶어죽기 딱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 놈은 마치 지도를 가진 놈같이 거의 똑바로 출구를 찾아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무영존은 어디 계시냐?”

“떠나셨습니다.”

기룡왕은 무영존의 도움을 다시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물었지만 무영존은 어느새 떠나고 없었다.

“다시 불러봐라.”

“아시다시피 그 분은 부른다고 오시는 분이 아니신지라…….”

“하긴 그렇지.”

청담은 기룡왕과 무영존의 관계가 궁금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영존이 기룡왕과 관계가 있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그가 생각했던 기룡왕의 힘을 두 배로 상향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표충, 그 놈이 나오는 속도로 보아 한 시진 안에 함정에서 나올 것이다. 앞에서 기다리다가…….”

“알겠습니다.”

기룡왕의 명을 들은 표충이 허리를 굽히고 밖으로 나가자 청담이 물었다.

“어찌하시려구요?”

“그 놈의 본질을 한번 알아보려고 한다.”

쾅!

“다 죽었어! 씨!”

함정의 출구를 막은 문이 박살이 나더니 흙먼지를 뒤집어쓴 유성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유성탄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앞에 서 있는 수염 하나 없는 매끈한 표충을 보더니 눈에 살기를 띠며 소리쳤다.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 넌 또 뭐야?”

표충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거세를 하고 내시가 된 이후 별별 말을 다 들어봤어도 기생오라비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그였다. 하지만 기룡왕의 명을 받은 그로서는 안색을 계속 붉히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진짜 입이 완전 걸레 같은 놈이로구나.’

“기룡왕 전하께서 포천망쾌 어르신의 노고를 치하하신다며 상을 내리셨습니다.”

“뭐! 이게 지금 약 올리나? 사람을 불에 구워 죽이려고 해 놓고 상을 줘! 이것들이 지금 나를 핫바지 호구로 아나!”

“기룡왕 전하께서 우선 황금 백 근을 상으로 내리셨습니다.”

“내가 돈을 좀 좋아한다고 돈이면 다 해결이 될 줄 아는 모양인데… 그런데 지금 뭐라고 했지?”

“황금 백 근입니다.”

“하하하! 하긴 그 정도 성의를 받고 해결이 안 된다면 그것도 좀 이상하지? 그런데 황금 백 근은 어디 있는데?”

“너무 무거워서 저는 들지를 못하고 곧 가져올 것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흐흐흐, 땡 잡았구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거에다가 저것까지 합치면… 가만? 그러고 보니 우선이라고 했는데…….’

유성탄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는 갑자기 표충의 말 중 중요한 단어 하나를 찾아냈다.

“그런데 우선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럼 우선 다음은 또 뭔가?”

‘정말 전하 말대로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로구나. 저 강함에 저 욕심은 또 뭐야?’

“전하께서 오늘 일을 전부 없던 일로 하고 싶으시답니다. 물론 왕자 저하에 대한 것도 포천망쾌 어르신께서 잘 처리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다 처리가 되면 더 후사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난 말이야… 후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심리가 이해가 안 가? 도대체 누구야! 후사란 말을 만든 놈이 누군지 알아야 작살을 내든지 하지. 씨!”

‘완전 무식한 놈 아니야?’

표충은 유성탄의 이어지는 말에서 유성탄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판단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 나만 믿으시오. 내가 눈 감으면 그게 일이 해결된 거니까… 하하하!”

‘다음에 또 와서 눈감았는데도 해결이 안 됐다고 하고 더 뜯어내야지.’

유성탄이 야무진 꿈을 꾼다.

“전하께서 나으리를 좀 만나뵙기를 원하시던데 가시겠습니까?”

“이런 선물까지 받았는데 굳이 만날 것까지야 있겠소? 하지만 왕자에게는 전해주시오. 진수진을 더 이상 찾지 말 것이며 그 애를 다시 괴롭히거나 만약 그 아이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다시 왕자를 잡으러 올 수 밖에 없다고 전해주시오.”

유성탄은 말을 마치자마자 황금 백 근이 든 상자를 다른 팔에 안고는 물었다.

“어디로 가면 나갈 수 있소?”

“그 자를 그냥 보내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청담은 유성탄이 나가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는 알 줄 알았다.”

“저따위가 어찌…….”

“저 놈을 죽이려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어야 할지는 생각해보았느냐?”

기룡왕의 말에 청담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저 놈을 죽이려면 무영존이 다시 오거나 아니면 우리의 숨은 힘을 꺼내는 수밖에 없는데, 만약 그게 황제가 원하는 일이라면 어찌할 것이냐?”

“저도 그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위험한 자입니다.”

“그럼 너는 저 놈을 죽일 방법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지하함정에는 화약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청담의 말에 기룡왕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반문했다.

“화약을 터뜨리면 저 놈은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십만 금을 주고 만든 지하함정은 다시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질 것이고 곧 가까운 군부에서 조사를 나올 것이다. 물론 어떡하든 무마는 시킬 수 있겠지. 그러나 만약 무마가 안 된다면 나는 화약의 출처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잘못하면 반역으로 몰리겠지. 나는 저 놈이 그 정도의 위험을 내가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화약은 황제의 명이 없이는 누구도 소지를 금하는 금지물품이었다. 황제가 모르게 화약을 숨기고 있다가 걸리면 거의 백이면 백 다 반역으로 몰리게 마련이었다.

“전하!”

유성탄을 배웅하고 온 표충이 돌아왔다.

“들어와라.”

들어온 표충은 청담을 흘낏 한 번 쳐다보고는 유성탄이 한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엄청 무식한 자였습니다. 거기다 확신은 못하겠지만 돈을 좋아하고 법을 우습게 아는 꼴이 절대로 정의감이 투철하거나 그런 자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기룡왕은 표충의 말을 듣자 입에 야릇한 미소를 띠더니 다시 물었다.

“아이들은 붙여 놓았느냐?”

“예, 이제 절대로 우리의 눈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표충은 다시 한 번 청담을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해라.”

“그 자가 왕부를 나가면서 다른 것은 다 눈감아주겠는데 청담을 계속 끼고 돌거나 숨기고 있는다면 다시 올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자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오?”

“그거야 모르지요. 하지만 말투가… 알지 못하고서야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청담의 안색이 변했다. 유성탄을 두려워할 그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기룡왕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문제는 달랐다.

“그 자가 절대로 혼자서는 저의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를 돕는 대단한 정보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계획을 좀 미루는 것이 어떻겠느냐?”

기룡왕의 말에 청담이 고민에 빠진다. 십 년을 준비한 계획이었고 그 계획이 성공하면 그가 모시는 천주가 세력을 끌고 중원으로 쳐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벌써 두 번이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마약을 이용한 사회혼란과 황실의 금을 훔쳐 경제를 마비시키고 황실의 재정을 어렵게 할 계획은 순식간에 실패로 돌아갔고, 마지막으로 무림을 흔들어 치안을 마비시키고 그렇지 않아도 무림을 사시로 보는 황제를 자극해 무림과 황실의 분란을 일으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

“안 됩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황제는 지금 황태자의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나오는 여러 가지 정책을 보면 황제가 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무림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판단이 흐려진 황제는 분명 무림을 이번 기회에 평정해 버릴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룡왕은 청담이 말하는 동안 눈을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청담의 말이 끝나자 눈을 뜨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끌지 말고 빨리 시작해라. 그리고 포천망쾌는 무림인들이 처리하도록 유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청담은 기룡왕의 말에 입술을 굳게 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게 화약을 좀 주십시오. 물론 화약의 출처는 절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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