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정자운과 화설군 (54/79)

제5장 정자운과 화설군

“아가씨! 찾았어요.”

앞서 가던 백리빙이 뭔가를 발견한 듯이 정자운에게 말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상당히 커다란 마차가 서 있었다.

“어? 찾는 사람이 저 애들이야?”

유성탄이 마치 안다는 듯이 말하자 정자운과 백리빙도 뭔가 수상스럽다는 눈으로 유성탄을 쳐다보았다.

“저 여자들 알아요?”

조금 전 유성탄의 큰 소리에 갑자기 여자 같은 모습을 보였던 백리빙의 목소리가 아주 살벌해졌다.

‘이거 목소리가 아까 같은 큰 소리는 먹히지 않을 것 같은데… 안다고 해야 좋은 거야, 모른다고 해야 좋은 거야? 헷갈리네…….’

“내가 이 마을의 포쾌야 포쾌! 당연히 저렇게 멋있게 치장을 한 마차가 들어왔는데 모르면 말이 안 되지!”

유성탄은 결국 여자들이 아닌 마차를 아는 것으로 얘기를 얼버무렸다,

“지금 저 마차가 멋있다고 했어요?”

“멋있잖아? 알록달록한 게……. 하하하! 멀리서 볼 때는 괜찮더니 가까이서 보니까 아니네.”

유성탄은 말을 하다가는 정자운의 눈초리까지 이상해지자 후다닥 말을 바꿨다.

‘휴유! 다음부터는 저렇게 생긴 색깔은 멋있다고 하면 안 되겠구나.’

사실 유성탄의 색상 감각은 형편없었다. 오로지 어둠만 존재하던 충동에서는 색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상에 나온 후 이따금 부잣집 마나님의 행차에서 아름다운 옷치장을 보기는 했다.

그런 유성탄에게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해 현란하게 치장한 천요궁의 마차가 무척 멋있게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 들어가서 만나보시겠어요?”

백리빙이 찾은 김에 아예 화설군을 만나고 갈지 아니면 배첩을 보내고 정식으로 만날 것인지를 물었다.

“궁 대 궁의 만남은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인 만남을 만들고 싶구나.”

정자운의 말의 뜻을 알아차린 백리빙이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뭔 말이야?’

유성탄은 정자운의 말에 백리빙이 움직이자 뭘 어떻게 이해하고 움직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됐건 유성탄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정자운인지 모르고 그녀의 중요부위를 만진 것이 내내 찝찝했던 그로서는 화설군을 만나 그녀가 만약 이상한 소리라도 지껄이면 정자운에게 완전히 찍힐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라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잠깐 어디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갑작스런 유성탄의 말에 의아한 눈으로 유성탄을 쳐다본 정자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도 자신과 화설군의 만남은 주위에 비밀로 하고 싶던 차였다.

“그러세요. 그럼 이제 못 보겠네요?”

유성탄은 깜짝 놀라 대답했다.

“못 보긴! 잠깐 갔다 온다니까. 내가 집까지 바래다 줄 거야.”

“호호호! 저희 집이 어딘지는 아세요?”

“신녀궁이잖아?”

“여기서 멀어요.”

“사나이 중의 사나이인 내가 멀다고 연약한 여인을 그대로 보낸다면 더 이상 유성탄이 아니지. 암! 그럼 이따 봐.”

백리빙이 마차가 서 있는 객점 안으로 들어갔고 유성탄이 정자운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백리빙이 교미향과 나오자 유성탄은 급히 말하고는 부리나케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 저자는?”

교미향도 무림의 일류고수였다. 재빨리 사라진다고는 했지만 그녀의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었고 당장 유성탄의 뒷모습에서 누구인지를 알아본 그녀가 중얼거리자 백리빙이 전음으로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요?]

[아니. 왜 너는 아는 사이니?]

유성탄과 신녀궁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굳이 그녀들과 유성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교 언니, 요새 하는 짓 영 마음에 안 들어요.]

[너도 전에 나한테 별 쌍욕을 다하더라.]

[그거야 언니가 욕먹을 짓을 했잖아요? 그러게 왜 감히 궁주님을 납치하니 뭐니 하며 까부는 거예요? 거기다 남자가 있는 데서 옷까지 훌렁훌렁 벗고 내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녔어요.]

[내가 언제 납치한다고 했니? 난 분명히 천요궁의 궁주님께서 정중히 만나고 싶어 하시니 같이 가달라고 했어! 거기다 어디를 언니한테 까부니 뭐니 버릇없이 그러는 거냐! 그리고 창피하면 내가 창피해야지 네가 왜 그래!]

[그게 납치지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인지도나 지위로나 당연히 천요궁의 화 궁주가 직접 와서 인사를 해야지요. 그리고 솔직히 무를 수만 있다면 의자매 맺은 거 무르고 싶다구요.]

[뭐!]

교미향의 목소리가 약간 올라가려고 하는데 정자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둘이 전음으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지 못했다.

백리빙과 교미향이 처음 만난 것은 약 삼 년 전 남궁세가의 노가주의 고희잔치 때였다.

백리빙은 정자운과 철장파파를 호위하고 남궁세가를 왔고 초대받지 못한 천요궁에서는 교미향만 정세를 탐지할 요량으로 왔었다.

당연히 교미향은 자신이 천요궁인이란 것을 내색하지 않았고, 백리빙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원체 걸걸하여 신녀궁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전에 아무도 믿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 시간이 생긴 백리빙이 안휘의 거리를 구경 삼아 나왔다가는 젊은 후기지수들과 시비가 붙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정파인인 그들은 백리빙에게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원체 입에 욕을 달고 사는 백리빙인지라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었다.

그런데 교미향이 끼어들더니 순식간에 남자들을 녹여버리고는 백리빙에게 사과까지 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둘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하루가 둘이 가장 가깝게 지냈던 하루였다.

헤어지며 의자매까지 맺은 그들은 다음날 고희잔치가 시작되고 곧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는 남들이 있을 때는 서로 모른 척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이후 둘은 서너 번의 만날 기회가 더 있었는데 회포는커녕 서로 원수같이 싸우고 헤어졌다.

물론 검을 상대의 가슴에 겨누는 상황은 없었지만 참 딱한 사이가 그 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교 당주님이시군요. 전에 한번 봤지요?”

“신녀를 뵙습니다. 호호호!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전에 초청할 때는 납치니 뭐니 하면서 엄청 우리를 나쁜 년을 만들더니 이렇게 직접 오실지는 몰랐습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지만 은근히 가시가 있었다.

“호호호! 교 당주도 천요궁이 나쁜 년인 거는 아시는군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제대로 옷 좀 갖춰 입고 다니세요.”

듣던 백리빙이 년 자를 강하게 발음하며 말하자 정자운이 급히 그녀의 팔을 쳤다.

하지만 성격상 빈정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고 있을 백리빙이 아니었다.

[너 이따 보자!]

[언제라도 상대해 줄게요!]

* * *

“뭐! 면사를 썼다고? 흥!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화설군은 정자운이 면사를 쓰고 있다는 말에 입을 삐죽거렸다.

“하여간에 너희들도 대천요궁의 궁도답게 꿀리지 마라!”

화설군은 자신의 호위녀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하고는 정자운과 만나기로 한 별채로 들어갔다.

‘정말 아름답구나!’

‘씨! 여우가 예쁘기는 예쁘네.’

들어오는 화설군을 보며 정자운과 백리빙은 자신들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을 했다.

미(美)란 약간은 주관적인데도 있는 법이어서 누구에게는 예뻐 보여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중 누구나 봐도 예쁘다 할 정도의 미모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는데 화설군의 미모는 확실히 달랐던 것이다.

“정자운이에요.”

“화설군이에요.”

간단하게 통성명을 한 후 자리에 앉은 화설군은 면사 속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자 약간 기분 나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면사를 쓰고 있는 것은 나에 대한 실례가 되겠지요?”

“호호, 미안해요. 버릇이 되어서…….”

말을 마친 정자운이 면사를 벗자 화설군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씨! 진짜 예쁘잖아? 누구야!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한 년이!’

화설군은 자신보다 예쁜 여자는 세상에 절대로 없다는 궁도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의 미모에 정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정자운의 얼굴을 보자 약간 당황하고 만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얼굴이었지만 저절로 나타나는 고아한 기품과 얼굴 전체에 흐르는 단아함은 그녀에게는 없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하신 신녀궁의 궁주께서 제가 보자고 할 때는 그렇게 빼시더니 갑자기 제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오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때는 뺀 것이 아니고 이유를 몰라서 거절한 것뿐이에요.”

“그럼 이제는 이유가 생겼나 보지요?”

“그래요. 이번에 여러 문파의 후기지수들에게 혼인상대를 구한다고 초청장을 보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요? 신녀궁은 신녀의 상대를 언제나 그렇게 뽑으면서 천요궁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아니면 내가 먼저 했는데 따라하면 안 된다는 기득권이라도 주장하실 생각인가요?”

“둘 다 아니에요. 천요궁에서 어떤 방법으로 궁주의 반려자를 찾건 거기에 무슨 기득권이 있겠어요. 하지만 신녀궁에서는 누구에게 초청장이 갔는지 절대로 비밀로 하고 있어요. 지금 천요궁에서 하는 방법은 아주 위험한 방법입니다. 자신에게 초청장이 안 온 이유로 천요궁을 해코지 하려는 사람도 분명 생길 수 있다는 말이지요.”

“호호호! 정말 고맙군요. 신녀궁의 궁주님께서 하찮은 천요궁의 안부까지 걱정해 주다니 말이에요.”

화설군은 웃기지 말라는 투로 말을 받았다.

“천요궁의 안부 때문에 개인적으로 만남을 원한 것은 아니에요. 화 궁주님을 오늘 처음 만나고 정말 놀랐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있구나 하구요.”

화설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여인에게 예쁘다는 칭찬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분명 있었다! 하지만 화설군에게는 예쁘다는 칭찬이 가장 좋았다.

“그런데요?”

“솔직히 저는 지금 신녀궁에서 무림의 후기지수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어 제 배우자를 찾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화 궁주께서도 그렇지 않은가요? 왜 우리가 마치 상품이라도 된 듯이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고 오로지 거기에서만 배우자를 구해야 하지요? 저야 신녀궁의 전통이 그래왔으니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지만 화 궁주님같이 아름다우신 분이면 얼마든지 최고의 신랑을 구하실 수 있는데 무엇 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남자를 불러들이느냐 하는 거예요.”

화설군은 정자운의 말을 듣자 약간 솔깃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상품이 된 것이 아니라 남자가 상품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부른다고 냉큼 오고, 당신으로 정했소 그러면 넙죽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아요. 신녀궁에서 초청장을 보내도 진짜 영웅다운 후기지수는 오지 않았어요. 거기다 신녀가 아름다우면 모르지만 예쁘지 않은 경우에는 거의가 다 거절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하고 싶어요.”

“그럼 그러면 되잖아요?”

“하지만 천요궁에서 끝까지 지금 방식을 고집한다면 궁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 되고 말 거예요.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서로 얼굴을 사방에 보이고 내가 더 예쁘다. 그러니 우리한테 오세요 하며 사정해야 하는 아주 치욕적인 꼴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화설군은 정자운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자운이 얼굴을 내놓고 누가 예쁜지 견주어보자 한다면 그래서 자신이 진다면 그거야말로 그녀에게는 악몽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천요궁의 전통대로 남자에게 웃음을 보이며 유혹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그럼 신녀의 생각이 뭔지 한번 얘기해 봐요.”

“우선 천요궁과 신녀궁의 적대적인 관계부터 개선하고 싶어요. 솔직히 둘밖에 없는 여인 문파끼리 서로 돕지는 못할망정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봐요. 그리고 이번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 보낸 초청장은 우선 취소시키고 직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그 사람들에게만 초청장을 보내는 거예요. 물론 그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면 가장 간단하겠지요.”

“천요궁은 권모술수가 특기인데 어떻게 우리를 믿으시겠어요?”

그러기로 하고 신녀궁만 취소하고 자신은 취소하지 않으면 어찌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아름다운 분들은 거기에 맞는 자존심이 있다고 봐요. 화 궁주님같이 예쁜 분이 뭐가 아쉬워서 스스로 짝을 고르지 않고 한정된 사람 속에서 찾으려고 하시겠어요? 저는 화 궁주님께서도 원하시는 방법일 거라고 믿어요.”

생각 외로 얘기가 잘 풀리자 정자운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면사를 다시 쓰고는 일어섰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물어보세요.”

[지금 묻는 말은 서로 간에 비밀로 해요.]

화설군이 전음을 날리자 정자운은 뭔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전음으로 대답했다.

[약속할게요.]

[신녀께서는 만약 어떤 남자가 신녀의 알몸을 보았다면 어찌 하시겠어요?]

정자운은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에 잠시 화설군을 쳐다보더니 미소를 짓고는 대답했다.

[여러 가지 해결책이 있다고 봐요. 만약 그 사람이 마음에 든다면 그리고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죽어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혼자 살거나, 스스로 자진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면요?]

[그렇다면 그자를 죽여야겠지요. 자신의 알몸을 본 남자를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 * *

“무슨 말을 하셨어요?”

“비밀이야. 참 아름다운 여자더구나. 거기다 천요궁에서 자랐는데도 아주 순수하고…….”

정자운은 화설군의 질문에서 화설군의 마음가짐을 알 것 같았다. 요녀들의 집단이라는 천요궁의 궁주가 그런 순진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 무척 신선하게 그녀의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런데… 난 어떡하지?’

화설군의 말을 듣자 정자운은 갑자기 유성탄을 생각하게 되었다.

알몸을 보인 것과 중요부분을 만진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유성탄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자신의 몸을 건드렸었다.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그렇다고 유 대형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도 말이… 말이 안 될 것은 없지만…….’

생각하던 정자운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혼인에 대한 환상은 그녀 역시 여자이니 없을 리 없었지만 어떤 특정 남자를 자신의 배우자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유성탄을 자신의 배우자로 생각해 본 것이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웠다.

* * *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교미향 역시 마지막에 정자운과 화설군이 나눈 전음이 궁금했는지 은근슬쩍 물었다.

“교 당주! 그 포쾌 놈 말이야!”

“예! 갑자기 그 포쾌 놈은 왜?”

“그놈을 어떡하든지 죽여야겠는데… 방법이 없을까?”

“궁주님, 남자한테 몸 한 번 보여줬다고 세상 달라지는 거 없습니다.”

“몸만 본 게 아니잖아. 그놈이 감히 내 가슴을 만졌고, 거기다 뽀뽀까지 했다고!”

“그거야 단지 순간적인 사고였을 뿐입니다. 천요궁의 궁도 중에 남자에게 그 정도 안 당해본 궁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천요궁의 궁도들은 무공을 다 익히고 나면 그들이 직영하는 기루에 가서 몇 년간 손님을 받는 의례적인 절차가 있었다.

당연히 처녀로 돌아오는 궁도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심지어는 얼마나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었는지가 자랑인 궁도도 있었다. 그것은 천요궁의 무공이 남자를 알아야만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색공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랬지! 난 궁주야! 궁주는 궁도와는 달라!”

‘큰일이네…….’

“하지만 황음삼마를 간단히 처리한 자입니다. 우리가 그자를 처치하려면 궁의 기반까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아이 씨! 난 혼인하고 싶단 말이야!”

“혼인하시면 되잖습니까? 궁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남자들이 천리는 줄을 설 텐데 뭐가 걱정이세요.”

“그런 놈이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는데 다른 남자와 혼인하면 신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화설군은 정자운이 한 말을 그대로 교미향에게 전하자 교미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궁주님! 전전대 궁주님께서는 신랑이 무려 네 분이나 되셨습니다. 거기다 심심하면 두들겨 패시기도 하셨어요. 남자한테 예의 같은 것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도 하셨고요.”

“그러니까 만날 천요궁이 신녀궁한테 지지! 난 신녀보다 더 고상하고 성스러운 여자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교미향은 화설군의 말을 듣자 유성탄을 잡아 죽이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아이 씨!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가려운 거야? 어! 나온다. 히히히!”

밖에서 서성거리던 유성탄은 정자운과 백리빙이 나타나자 어깨에 힘을 주고는 좋아서 다가갔다. 어깨에 힘을 주면 조금 멋있어 보이는 줄 아는 유성탄이었다.

“얘기 잘 끝났어?”

“잘 됐어요. 고마워요. 유 대형 아니었으면 찾는데 애 좀 먹었을 거예요.”

“내가 그랬잖아. 내가 끼면 안 되던 일도 된다고. 하하하!”

“솔직히 도움 된 것도 없잖아요. 그냥 걷다가 내 눈에 띈 건데…….”

말하던 백리빙은 유성탄이 쳐다보자 입을 닫았다.

‘왜 자꾸 저치가 쳐다보면 주눅이 드는 거야.’

백리빙은 갑자기 유성탄에게 함부로 하기가 어려워지자 짜증이 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좋아하는 남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여인의 마음이었지만 백리빙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유성탄을 좋아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자신의 성격은 유성탄 같은 부류를 제일 싫어했다.

“이제 저희는 떠나야 할 것 같은데…….”

“떠나기는 어딜 떠나! 여기 운하에 운호라고 아주 예쁜 호수가 있거든 거기가 연인이 가면 꼭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대요. 어때, 우리 한번 가보는 게?”

연인이 가면 꼭 이루어진다는 곳에 여자에게 같이 가자는 속셈이 뭘까?

“호호호! 유 대형께서는 여전히 농담을 잘하시네요. 그런 곳은 유 대형의 연인하고 가야지 우리하고 같이 가서 뭐 하게요.”

‘얘는 다 좋은데 눈치가 엄청 없단 말이야. 척하면 탁 아닌가?’

“거기에 또 다른 전설이 있는데 그냥 여자하고 같이 가면 그 여자랑 연인이 된다는 전설도 있더라고!”

“그렇다면 아무 여자나 하나 골라서 가야지. 우리 둘을 다 데려가서 뭐 하게요!”

유성탄의 말도 안 되는 수작을 견디지 못한 백리빙이 결국 타박을 했다.

“둘을 데려가면 둘이 연인이 되고 셋을 데리고 가면 셋이 연인이 되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이씨 실수다. 여자에게 본심은 숨기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속을 너무 보였나보다.’

“내가 그런다는 게 아니고 전설이 그렇다고!”

슬쩍 말을 바꾼 유성탄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변신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여자를 꼬드기는 지론이었다.

“갑자기 웬 심각? 흥! 웃기지도 않아!”

백리빙이 다시 코웃음을 치자 유성탄이 째려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먹히지를 않는다. 당연한 것이 유성탄이 전과는 달리 정자운의 진면목을 보고는 정자운에게 더 신경을 쓰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 그대로 보이니 그녀로서도 빈정이 안 상할래야 안 상할 수가 없었다.

‘쟤가 갑자기 왜 저럴까? 아이 씨, 잘 풀리다가 이상하게 되어가네.’

유성탄의 성격상 귀찮으면 백리빙을 어떻게든 떼어놓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지금 두 토끼를 한꺼번에 노리는 그로서는 백리빙의 비위도 너무 거슬릴 수는 없었다.

“그럼 아무런 전설도 없는 곳으로 가자고, 운호에는 아무런 전설도 없는 곳도 많더라.”

유성탄은 우선 다 포기하고 그녀들과 노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고 한 말이지만 그녀들로서는 실소가 터지는 말이기도 했다.

[방주! 수상한 곳을 발견했답니다.]

지금 한창 작업을 하느라 바쁜 유성탄의 귀에 전화생의 전음이 들려왔다.

‘얘들이 정말 눈치가 없네? 지금 이 순간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다고…….’

유성탄은 못 들은 척 하기로 한다.

“자, 가자고!”

“잠깐만요! 유 대형께서 저희들을 위해 이곳 구경을 시켜주시려는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요. 하지만 정말 우리는 이만 가봐야 해요. 말도 안 하고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늦으면 많은 제자들이 우리를 찾기 위해 수고를 하게 된답니다. 궁주가 되어 가지고 궁도들을 힘들게 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나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하하하! 당연하지요. 역시 자운 궁주께서는 다른 사람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네요.”

속이 울렁거릴 소리를 막 내뱉는 유성탄을 보며 백리빙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가시는 곳이 어딘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갈 곳은 여기서 이백 리가 넘습니다.”

“하하하! 제가 이따금 친한 사람을 바래다 줄 때 평균거리가 이천 리였습니다. 이백 리라면 저한테는 식후 산책 거리에 불과하지요. 가시죠.”

[방주님! 방주님!]

전화생이 애타게 불렀지만 유성탄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정자운과 백리빙을 따라 사라졌다.

* * *

“진짜 못 말릴 사람이라니까… 간신히 청담의 은신처를 찾았건만…….”

하후란은 자신의 정보망을 다 가동하여 청담이 있는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신출귀몰한다는 청담을 그렇게 빨리 찾아낸 것도 행운이었지만 청담이 식사 중이라는 것도 행운이었다. 최소한 반 시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운은 청담이 더 좋았다. 청담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곧 오살을 찾았지만 오살 역시 청담을 멀리서 보기만 하고도 고개를 흔들었다. 무엇보다도 고수의 낌새를 잘 알아차리는 살수들인 그들은 청담이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안 것이다.

결국 전화생이 유성탄을 찾아 떠났지만 유성탄은 오히려 운하현을 벗어나고 있었다.

“도대체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모르겠네요.”

돌아온 전화생이 유성탄이 아주 귀엽게 생긴 여자하고 늘씬한 여인 하나를 끼고는 어디론가 갔다는 말에 하후란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 * *

‘청담이야 일찍 잡으나 늦게 잡으나 금자 삼천 냥이지만, 오늘 얘들을 놓치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데… 하여간에 자식들이 뭐가 중요한지를 몰라요.’

전화생의 전음을 듣고도 모른 척 떠나기는 했지만 뭔가 찝찝한 감정을 떨치지 못한 유성탄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아까 주루에서 그자들이 누군지 아세요?”

운하현을 벗어난 소로에서 정자운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런 흉악한 놈들을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저는 정말 똑바른 사람들만 사귑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하여간에 말이 안 통해.’

백리빙이 유성탄의 동문서답에 핀잔하듯이 끼어들었다.

“니가 말이 안 통한다. 자운 궁주가 나보고 누군지 아냐고 물었고 나는 그런 자들을 본 적도 없으니 모른다고 했는데 뭐가 말이 안 통한다는 거야?”

“아이, 관둬요!”

“빙아, 너 잘못했으면 인정도 할 줄 알아야지 그러면 못쓴다.”

“호호호호호!”

정색을 하며 말하는 유성탄의 말에 정자운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군요. 유 대형하고만 대화를 나누면 참 즐거운 것 같아요.”

“하하하! 여자마다 다 그럽니다.”

잘난 체한다고 말을 꺼낸 유성탄은 정자운의 웃음이 딱 그치자 또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미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제 엄마하고 제 여동생 얘깁니다.”

“유 대형께서는 예쁜 여자를 좋아하시나 봐요?”

“세상에 예쁜 여자 싫어하는 놈 있으면 데려와 보십시오. 제가 죽도록 패줄 테니.”

“예!”

“그런 놈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하하!”

아까부터 갑자기 계속 존댓말만 쓰는 유성탄이었다.

“그럼 제가 못생겼으면 이렇게 배웅도 안 해주셨겠네요?”

‘이것 봐라! 상당히 심오한 질문을 하네? 이럴 때는 공격적으로…….’

“그럼 자운 궁주께서는 저를 왜 좋아하십니까?”

“예?”

“솔직히 이 유성탄이 얼굴도 잘생겼고 키고 크고 거기다 자상하기까지 하니까 좋아하시는 것 아닙니까?”

“저 그게…….”

다짜고짜 자기가 유성탄을 좋아한다고 몰아가자 정자운은 갑자기 대답할 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성탄을 좋아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말씀해 보세요. 저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이유가 뭔지요!”

“에라, 이 못된 놈아!”

“아이쿠!”

듣고 있던 백리빙이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유성탄의 코를 냅다 후려쳤고 유성탄은 비명과 함께 그대로 넘어갔다.

“얘가 또 코를… 아이구!”

“아가씨, 가요! 이 작자가 갈수록 음적이 되어 가는 것 같네요. 어디서 감히 아가씨한테 수작이야, 수작은!”

백리빙은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정자운의 손을 잡더니 몸을 날렸다. 그러자 코를 잡고 뒹구는 유성탄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정자운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자꾸 유성탄에게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화를 내며 유성탄을 친 백리빙의 얼굴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아니, 눈에 눈물까지 살짝 비치고 있었다.

‘색마 같은 놈! 나한테 그렇게 치근대 놓고는 이제 와서 아가씨까지 넘봐!’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유성탄에 대한 이유 모를 원망이 들어 있었다.

코를 잡고 뒹굴던 유성탄은 둘이 급작스럽게 떠나버리자 금방 벌떡 일어났다.

“에이 씨! 다 된 밥에 코 빠뜨렸나본데… 작전 실패다. 한꺼번에 꼬드기려니 힘드네. 다음부터는 일 대 일로 꼬드겨야겠다.”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턴 유성탄은 고개를 한번 빙 돌리고는 다시 중얼거렸다.

“어쨌든 느낌이 좋아! 청담만 잡으면 무산으로 놀러가야지.”

분명 꼬드기려는 여인들이 그를 치고 사라진 어찌 보면 최악의 상황이 온 것인데도 유성탄은 전혀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유성탄 특유의 육감 때문이었다. 백리빙이 주먹을 날렸음에도 정자운이 백리빙에 이끌려 결국 그냥 가버렸음에도 그녀들에게서 그가 느낀 것은 아주 좋은 감정뿐이었다.

* * *

‘어? 뭔 일이 생겼나?’

방망이를 건들거리며 운하현 안으로 들어서던 유성탄은 한 명의 포쾌가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을 보더니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듯이 따라붙었다.

“뭔 일이야?”

“살인사건이라네.”

“살인? 어디서?”

사건현장으로 뛰어가며 대답을 하던 포쾌가 귀찮은지 유성탄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디 소속이요? 못 본 것 같은데…….”

“너야말로 어디 소속이냐? 내가 바로 포천망쾌거든. 날 몰라본다는 것은 네가 운하현 포쾌가 아닌 것이 분명하구나!”

“예에! 포천망쾌시라고요? 아이구, 제가 나으리를 몰라 뵙고 죄송합니다. 제가 계속 내근만 하다 보니… 청화루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성탄이 포천망쾌라고 하자 갑자기 달라진 포쾌는 아첨이 잘잘 흐르는 말로 급히 말했다.

그는 사건 현장의 증화(證畵)를 그리는 포쾌로 말만 포쾌지 사실은 그림쟁이였다. 그러다 보니 밖에 나오는 경우가 이런 식의 사건이 일어날 때뿐이다 보니 유성탄에 대해 말만 들었지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뭐어! 청화루?”

유성탄은 청화루라는 말에 더 듣지도 않고 먼저 앞으로 달려가 버렸다.

“세상에! 뭔 걸음이 저렇게 빠른 거야?”

뛰어가던 포쾌는 유성탄이 먼지 하나 안 날리고 순식간에 사라지자 그대로 멈춰 서더니 멍한 얼굴로 유성탄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청화루란 말에 갑자기 흥분한 유성탄이 자신도 모르게 선천지기를 발에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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