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정자운의 진면목 (53/79)

제4장 정자운의 진면목

“들어가 볼까요?”

대감도를 든 장한 대여섯이 기다리기가 지루한지 송삼구를 보며 물었다.

“안 된다. 루주님께서 그놈의 목적이 뭔지 다 알아내시면 나오신다고 했다. 어차피 그 약에 취하면 이틀은 정신을 못 차린다 했으니 좀 더 기다려보자.”

“하지만 벌써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장한의 말에 송삼구도 약간은 이상한지 고개를 갸윳거렸다.

반교련이 유성탄이 있는 밀실에 들어간 것이 어제 저녁 무렵이었다. 그런데 한밤이 다 지나고 벌써 동이 트고 있는데도 반교련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으니 그라고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다.

“니들 여기서 뭐 해?”

갑자기 밀실의 문이 열리며 유성탄의 모습이 나타났다.

“예! 아아 누가 포쾌님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할까 걱정이 되어 호위를 서고 있었습니다.”

송삼구가 유성탄을 보자 깜짝 놀라 대답했다.

“그래? 그럼 계속 수고해.”

송삼구의 대답을 듣자 유성탄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급히 사라져버렸다. 반교련이 깨기 전에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 * *

“뭘 좀 알아내셨어요?”

유성탄이 객점으로 돌아오자 하후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응! 엄청난 걸 알아왔지.”

“말해보세요.”

“넌 처녀애가 잠도 안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별걸 다 알려고 그런다. 너같이 어린애는 아직은 알면 안 돼!”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온 거예요? 제가 청담하고 청화루가 뭔가 관계가 있다니까 청화루에 심어 둔 첩자가 있다면서 나간 사람이 밤을 새고 들어와서는 뭘 알아냈냐니까 애들은 알면 안 된다니… 정말 뭘 알아오긴 알아온 거예요? 아니면 여자랑 놀다 온 거예요?”

‘아차! 내가 거기에 간 이유가 그거였구나. 에이 씨! 정말 귀찮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네게는 그게 일순위인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나만의 일순위가 있는 법. 한번 주지도 않으면서 자꾸 귀찮게 하지 마라.”

말을 마친 유성탄은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그래봐야 소 귀에 경 읽기예요. 여자만 보면 자기가 할 일이 뭐였는지 까맣게 잊어버린다니까요.”

숨어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화월이 모습을 나타내며 말하자 하후란도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유 대형께 모든 일을 맡긴다는 것은 무리일 것 같네요. 제가 최대한 빨리 청담의 행방을 찾아볼 테니 대신 고 여협께서는 제가 연락을 주면 곧장 유 대형을 모시고 달려와 주세요.”

“그럴게요.”

고화월의 대답을 들은 하후란은 얼굴의 면사를 펄럭이며 몸을 날려 사라져버렸다.

* * *

“뭐라고요! 살짝 나와서는 급히 사라졌다고요?”

반교련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후다닥 옷을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송삼구가 홀로 서 있다가 반교련에게 유성탄이 갔다고 말하자 반교련은 눈에 살기를 띠고는 소리쳤다.

‘이 양아치 같은 놈을……! 도대체 그놈의 약은 효과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또 어처구니없이 유성탄에게 몸만 주고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자 반교련으로서는 울화통이 터질 만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유성탄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더욱 화가 나는 그녀였다.

“청담 어른께 전해요. 약이 통하지 않는다고. 우리로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우니 청담님께서 직접 손을 쓰셔야 할 것 같다는 말도 잊지 말고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송삼구는 반교련의 말을 듣자 곧장 밖으로 나갔다.

* * *

“왜 자꾸 쳐다봐?”

방에 들어가 다시 한잠 자고 일어난 유성탄이 아침을 먹기 위해 객점 주루로 향하자 곧장 따라붙은 고화월은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와중에도 계속 유성탄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그러고 싶으세요?”

“뭘?”

“일하고 사적으로 노는 것과는 구별할 줄 아셔야 할 것 아니에요?”

“너는 일이 뭔데?”

“그거야…….”

“네 일은 방주인 나를 보필하여 심기가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자꾸 방주인 나를 제어하려고 하는 건데?”

생각지도 못한 유성탄의 똑똑한 말에 순간 고화월이 대답을 못 한다.

“도대체 이놈의 강호라는 데는 일하고 노는 것하고 뭐가 다른 건지 알 수가 없어.”

“하지만 일에는 어떤 목적이 있고…….”

“내가 뭔가를 할 때는 다 목적이 있는 거야.”

“여자하고 만날 그 짓만 하는 게 무슨 목적이 돼요?”

“얘가 참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너 충동에 벌레들을 보면 걔들은 일생을 오로지 먹는 거하고 그거 하는 것밖에 몰라.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말이야.”

“사람하고 벌레하고 어떻게 같아요?”

“뭐가 달라? 그래서 이런 말도 있잖아.”

고화월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유성탄을 빤히 쳐다보았다.

“벌레보다 못한 놈, 벌레보다 잘난 놈, 벌레 같은 놈!”

* * *

“아가씨! 우리만 살짝 나왔다고 파파님들께서 화 안 낼까요?”

“화설군이 절강성에 나타났을 때 만나보는 게 좋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괜히 천요궁과 소모적인 다툼만 계속하게 될 거야. 난 이번 기회에 천요궁과의 악연의 고리를 끊어버릴 생각이다.”

정자운의 단호한 말에 백리빙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중원에 무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여러 곳이 있었다. 그중 신녀궁이 있는 무산은 절강성의 동쪽에 있었고 운하현과는 하루거리였다.

화설군이 절강성에 들어섰다는 정보가 신녀궁에 들어온 것은 약 삼 일 전이었다. 정자운은 화설군이 무림의 후기지수들에게 신랑을 구한다고 초청장을 보낸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신녀궁이 전통적으로 신녀의 신랑들을 그런 식으로 구해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녀가 자신이 초청장을 보낸 사람들을 직접 보기 위해 강호에 나왔던 것도 그저 이름만으로 자신의 남편감을 구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화설군까지 그랬다는 말을 듣자 정자운은 이상하게 여자가 상품화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백리빙은 계속 자신을 물 먹이기 위한 물 타기 작전이라고 하지만 화설군의 아름다움은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신녀궁은 초청장을 누가 받았는지 전혀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화설군은 대놓고 초청장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초청장을 받았다 안 받았다 하는 문제가 자존심 싸움으로 변하면 후기지수 간에 알력이 생길 확률이 많았다.

백리빙의 말대로 오로지 자신과 신녀궁을 물 먹이기 위해서라면 한 번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운하현이 아름답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구나!”

정자운은 안개가 살포시 내린 운호와 그 주위를 둘러싼 아름다운 전각들을 보며 감탄을 했다.

“하지만 운하현은 아주 지저분한 동네라고 들었어요. 더구나 아가씨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들어가면 문제가 커질지도 몰라요.”

“면사까지 썼는데 무슨 일이 있겠니?”

정자운은 강호출입을 할 때면 언제나 변장을 하곤 했다. 유성탄이 정자운을 처음 보았을 때 별로라고 본 것도 그녀가 변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급히 나오느라 변장을 할 새가 없었다.

신녀궁에서는 의술을 이용한 변장술도 무척 발달해 있었다.

하지만 인피면구를 이용하지 않는 변장은 끓여서 붙이고 다시 굳고 거기에 색소를 집어넣고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거기다 한번 변장을 하고 다시 떼어내는데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정자운은 잠깐 만나고 올 생각으로 그냥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온 것이다.

* * *

“아 심심하다! 뭐 이러냐? 시비 걸 놈들도 없고 어제 너무 힘을 빼서 그러나 움직이기도 귀찮고… 에이!”

유성탄은 밖이 보이는 창가의 식탁에 앉아 탁자에 얼굴을 묻고는 기지개만 계속 켜고 있었다.

오살은 모두 유성탄의 명으로 사건이 있나 없나 본다고 나갔고, 하후란 역시 청담의 종적을 찾겠다고 사라졌다. 평시 같으면 좀이 쑤셔서라도 움직여야 할 그였지만 반교련과 밤을 새우고 와서 그런지 움직이기도 귀찮은 유성탄이었다.

‘아! 어제 그 벌거벗고 뛰어 다니던 걔 정말 예뻤는데… 한번 찾아볼까? 아니야. 잘못하면 여자 희롱했다고 걸릴지도 몰라.’

유성탄은 엄마인 강추화로부터 절대로 여자를 희롱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었다.

몇 번 유성탄과 같이 한주현의 저잣거리에 나갔던 강추화는 유성탄이 여자 엉덩이 쪽을 무척 자주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는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저럴까 안쓰러우면서도 아무래도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성희롱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 장시간에 걸쳐 교육을 했었다.

그리고는 만약 여자를 희롱해서 걸려가지고 집안을 망신시키면 그 순간 너 죽고 나 죽을 거라는 뻥도 잊지 않았다.

‘에이 씨! 너 죽고 나 살자도 아니고, 너 살고 나 죽자도 아니고, 너 죽고 나 죽고란 말이야.’

혼자 중얼거리던 유성탄의 고개가 갑자기 빳빳하게 세워졌다.

“뭐야 저건! 이놈의 동네는 예쁜 여자들이 뭐가 이렇게 많아?”

유성탄의 눈에 너무나도 고상한 모습의 여인이 보인 것이다.

하늘하늘한 몸매에 그저 단순한 마의를 걸친 것뿐인데도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거기다 얼굴에는 하후란이 쓰고 다니는 것 같은 면사가 씌워져 있었는데 바람이 살랑 불 때마다 그 모습이 더욱 고혹스러웠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유성탄의 눈에는 보인다는 것이었다.

‘어제 본 그 벌거벗은 여자애만큼 예쁘다. 저런 애는 당연히 내 거가 되어야 되는데…….’

어째서 예쁜 애는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도 없이 유성탄은 침부터 흘리고 있었다.

“안 되겠다. 내려가서 침이라도 발라 놓고 와야겠다.”

유성탄은 한번 작업이라도 걸어 볼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아가씨! 아주 촌스런 색깔의 마차를 보았다는 사람을 만났어요. 분명 천요궁의 화설군이라는 그 여우가 타고 다닌다는 춘화차(春花車)일 거예요.”

잠깐 천요궁에 대해 알아보러 갔던 백리빙이 돌아온 것이다.

‘으아! 빙아다. 흐흐흐! 잘하면 손 안 대고 코풀게 생겼구나. 히히히!’

유성탄은 백리빙을 보자 정자운을 꼬드기기가 더 쉬워졌다고 느끼고는 기분이 좋아서 창가를 통해 커다랗게 백리빙을 불렀다.

“야 빙아야!”

“뭐야 저 자식은?”

백리빙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포쾌 모자를 쓴 남자를 보고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 분명 자신을 부른 것 같기는 한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야 그쪽이 아니고 너! 백리빙! 너 부르는 거야!”

“저 자식이! 아가씨, 잠깐만요. 저놈의 눈알을 뽑아 놓고 오겠습니다.”

어리둥절해서 다른 사람을 부르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백리빙은 자신을 부른 것이 분명하자 눈에 살기를 띠며 정자운에게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놈이 감히 자신의 이름을 마치 기녀 부르듯이 대로변에서 부르는 것이 아닌가!

“잠깐만 기다려라.”

정자운이 백리빙이 또 사고를 칠까 급히 말렸다.

“기다릴게 뭐가 있어요? 저런 놈은 그냥!”

“그래도 저 사람 하는 행동을 보니 진짜 반가워하는 것 같지 않느냐? 거기다 네 이름까지 확실하게 아는 것을 보면 분명 너를 아는 사람일 것 같구나.”

“나 저런 놈 몰라요.”

“야 백리빙, 우리 서로 살까지 부빈 사이면서 그런 말 하면 못쓰지!”

“저놈이!”

백리빙은 얼굴이 하얘지며 당장 검을 뽑을 자세를 잡았다.

백주대낮에 아무리 무림의 여인이라 해도 듣기에 따라 아주 민망한 말을 꺼내는 유성탄이었다.

“참아라! 저 거리에서 우리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면 보통 고수가 아니다.”

정자운은 자신들이 조그맣게 한 소리를 유성탄이 다 들은 것 같자 신중하게 백리빙을 잡았다. 그리고 백리빙도 유성탄을 한번 보더니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산 신녀궁의 제일 고수라는 소리를 그냥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정자운의 말을 듣자 곧 마음의 평정을 찾고는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봤다.

“다른 패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한번 올라가 보자.”

정자운도 주위를 살펴보고는 함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도대체 누구기에 이렇게 막돼먹었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빙아야!”

유성탄은 정자운과 백리빙이 주루의 이층으로 올라오자마자 백리빙을 안을 듯이 달려들었다. 반가운 척 하며 한번 안아볼 심산이었다.

“아이쿠!”

유성탄은 코에 백리빙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고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빙아!”

정자운은 놀라 급히 백리빙을 불렀다. 그녀의 손속으로 정통으로 코를 맞았다면 코가 문드러지는 것은 둘째 치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정자운은 후다닥 유성탄에게로 달려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상하다? 빙아의 주먹을 그렇게 정통으로 맞았으면 하다못해 코피라도 흘려야 정상인데… 어머나!’

중얼거리던 정자운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급히 몸을 날렸다. 면사로 가려져 있었지만 얼굴은 이미 빨개져 있었다.

“왜 그러세요?”

백리빙이 뭔가를 느낀 듯 급히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유성탄의 손이 그녀가 그의 얼굴을 살펴보는 동안 그녀의 중요한 부분을 주무른 것이다.

하지만 정숙과 고상으로 뭉친 정자운으로서는 그 말을 차마 자신의 입으로 할 수는 없었다.

‘옳지! 딱 걸렸어. 내가 정통으로 만졌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겠다. 이제 너는 내 거다.’

유성탄은 눈을 감은 채 기절한 척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니까 그만 연극하고 일어나세요.”

곧 마음을 가라앉힌 정자운이 약간은 싸늘한 음성으로 차갑게 말하자 유성탄이 주섬주섬 일어서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구, 어찌나 아픈지 잠깐 기절했네 씨! 야 백리빙, 오랜만에 만난 서방님의 얼굴을 그렇게 쳐도 되는 거냐?”

“이놈이 정말 눈알을 뽑아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백리빙이 드디어 검을 뽑아 들자 유성탄이 급히 정자운의 뒤로 숨었다.

“야! 너 그 검으로 나를 죽이려고 그러냐?”

유성탄은 그러면서 은근히 정자운의 허리를 손으로 잡았다.

“정말 손버릇이 못쓰겠군요!”

정자운은 유성탄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잡자 놀라서는 신녀궁 특유의 금나수법으로 유성탄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던져버렸다.

유성탄의 못된 손장난에 화가 무척 많이 난 그녀였지만 이상하게 유성탄에게서 사악한 느낌을 받지 못하자 정말 우연히 닿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그녀는 유성탄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잡자 분명 알고 한 행동이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버릇을 고쳐 줄겸 조금은 혹독하게 던진 것이다.

우당탕!

유성탄은 그대로 식탁 위로 떨어지더니 식탁을 부수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는 유성탄의 목에 백리빙의 검이 닿았다.

“정체가 뭐냐? 내 이름을 아는 걸로 봐서는 내가 누군지도 안다는 건데 감히 나를 희롱해!”

“헤헤헤! 빙아야… 그냥 장난 좀 한 건데… 나야 나 유성탄!”

유성탄이 손가락으로 검을 치우며 말하자 정자운과 백리빙이 깜짝 놀라 유성탄을 쳐다보았다.

“내가 멋있어졌지? 전에 나를 알던 사람들이 모두 나만 보면 깜짝 놀라더라고.”

“유 대형께서 여기는 어떻게? 거기다 복장은?”

정자운이 놀라 묻자 유성탄도 깜짝 놀란다.

“어? 자운이었어! 억! 이거 왜 이래?”

“내가 전에 그랬지요. 아가씨 이름은 당신이 함부로 부르면 안 된다고!”

유성탄이 정자운의 이름을 부르자 백리빙의 검이 유성탄의 목을 제법 깊이 찔렀다. 물론 그녀는 그 정도로 유성탄이 끄떡도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한 행동이었다.

“내가 너무 반가워서 말이야. 조심할게. 조심한다구!”

그러면서 유성탄은 면사 속의 정자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전에 하고 얼굴이 많이 달라졌는데?”

유성탄이 일어서며 말하자 정자운과 백리빙의 눈이 동그래진다.

“지금 제 얼굴이 보이세요?”

“그럼 얼마나 잘 보이는데.”

예전에 유성탄과 같이 여행을 할 때 유성탄이 정자운의 면사를 뚫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후 정자운은 면사를 천잠사로 꼬아 약물처리까지 해놓았다. 유성탄에게 보였다면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눈 쪽만 빼고는 절대로 볼 수 없으리라 믿었던 면사를 유성탄이 보인다고 하니 그녀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유 대형께서는 무공으로 면사를 뚫고 보는 것이 아닌 것 같군요.”

유성탄을 진맥하여 유성탄의 숨겨진 힘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정자운이었지만 이번만은 정말 놀라웠다.

“이리 앉아.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재미있게 놀자고.”

“우리가 아저씨하고 재미있게 놀 일이 뭐가 있어요?”

“얘가 또 그러네? 나 아저씨 아니라니까! 그리고 나 엄마 아버지도 찾았다.”

“어머, 축하해요. 빙아, 자꾸 그러지 말고 앉자. 유 대형이시라면 우리와는 이미 남도 아니지 않니?”

‘으힉! 하하하! 남도 아니란다. 이건 분명 나한테 완전히 꽂힌 거야.’

정자운은 그저 이미 상당히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고 실지로 정자운으로서는 처음으로 자꾸 생각나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사랑이라거나 연인 같은 감정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유성탄은 특기대로 김칫국물부터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만나시고 아버님의 부탁으로 포쾌가 되셨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내가 원체 난 사람이다 보니 단숨에 우리 집안이 내 덕에 불같이 일어난 거지…요.”

말하던 유성탄은 백리빙이 눈을 부릅뜨자 슬쩍 요 자를 붙였다.

“도대체 부모님도 만나고 그랬으면 뭔가 달라진 게 있어야지. 어떻게 겉모습은 달라졌는데 아직도 하는 행동은 그렇게 개차반이에요?”

백리빙이 타박하듯이 유성탄에게 말하자 정자운이 백리빙의 허리를 쿡 찌른다.

“아가씨도 보세요. 우리가 여기에 올라와서 저 식탁까지 부쉈는데도 아무도 안 와요. 그게 무슨 말이겠어요. 이자가 얼마나 행패를 부렸으면 이 넓은 주루에 한 사람도 안 나타나겠냐구요!”

백리빙의 말에 유성탄도 새삼스럽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만 나타나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나가버리곤 했었다.

저벅저벅!

그때였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와 함께 온통 흑의로 감싼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한 명은 등에 검을 차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손에 채찍을 감고 있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앉으세요.”

백리빙이 급히 일어서더니 정자운의 자리를 옮기게 하고는 자신이 그 사이에 앉았다. 올라서는 즉시 그녀는 그들이 대단한 고수라는 것과 풍기는 기운이 좋지 않다는 것을 당장 느낀 것이다.

그녀가 비록 정자운과 자매처럼 지내지만 그녀는 정자운을 보호하도록 키워진 정자운의 호위녀였다. 그녀는 만약 그들이 암습을 하더라도 몸으로라도 막고 정자운이 재빨리 피할 수 있도록 자리를 옮긴 것이다.

물론 정자운도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대로 자리를 옮겼다. 백리빙이 이상을 느끼고 행동을 취하면 정자운은 무조건 그녀의 말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왜 그래? 저놈들 때문에?”

“조용히 해요!”

유성탄이 크게 말하자 백리빙이 급히 손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들 정도의 고수가 그렇게 커다랗게 말한 유성탄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지금 우리보고 한 소리냐?”

손에 채찍을 감은 자가 유성탄을 쳐다보며 말했다.

“까불지 마라!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바로 그 유명하신 포천망쾌님이시다. 지금은 손님이 있어서 그냥 놔두지만 까불면 된통 맞는 수가 있다.”

유성탄의 기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유성탄이 다짜고짜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유성탄에게 살기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유성탄은 그들이 처음부터 자기를 노리고 들어왔다고 느꼈다.

“하하하! 듣기보다 더 망둥이 같은 놈이군. 하긴 착한 포쾌를 죽이는 것은 우리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유성탄의 말을 듣자 그자는 파안대소를 터트리더니 그대로 손을 뿌렸다. 그러자 손에 감겨 있던 채찍이 마치 살아 있는 뱀이라도 되는 듯이 꿈틀대며 날아오더니 유성탄의 목을 그대로 감아버렸다.

‘이 씨! 오랜만에 예쁜 자운이도 보고 귀여운 빙아도 봤는데 이게 무슨 쪽이냐…….’

지금의 유성탄의 실력은 거의 무림의 십대고수와 싸워도 제법 해볼 만한 정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다 사용을 못 하고 있었고, 수많은 싸움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방심이라는 적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약점이 여기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채찍이 날아오면 다른 사람은 우성 피하고보는 법이었다. 그러나 유성탄은 피하기보다 우선 흥미를 느끼고는 오히려 자세히 쳐다본 것이다. 그리고 느린 듯하던 채찍은 유성탄의 몸 가까이 오자 갑자기 전광석화같이 유성탄의 목을 감아버린 것이다. 유성탄으로서는 또 하나 배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채찍을 던진 자와 같이 온 자가 검을 빼들어 유성탄을 쳐 왔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를 백리빙이 쳐 갔다.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챙챙챙!

순식간에 검 부딪치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려왔다.

“어린 계집이 제법이구나.”

검을 든 자는 자신의 검이 백리빙에 의해 막히자 뜻밖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어린 계집? 이 자식이! 눈알을 빼 줄까?”

‘아휴! 저거는 아는 말이 저 말밖에 없나?’

유성탄은 채찍이 목을 감고는 그의 목을 계속 조여오고 있건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얍!”

백리빙과 검을 든 자가 다시 한바탕 붙자 정자운이 곧장 채찍을 품에서 꺼낸 소도로 잘라갔다.

그녀가 보기에 유성탄의 목숨은 지금 풍전등화와 같았다.

채찍은 보통 채찍이 아니었다. 중간 중간에 사금파리가 박혀 있는 삭편(削鞭)이었던 것이다. 채찍을 가진 자가 채찍을 당기면 유성탄의 목은 그대로 잘라질 상황이었다.

“어림없는 수작!”

채찍을 든 자는 정자운이 기습적으로 채찍을 잘라갔지만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가볍게 채찍을 흔들었다. 그러자 정자운의 소도는 채찍을 자르지 못하고 오히려 퉁겨져 버렸다.

무산의 신녀는 무공보다는 의술로 그 이름이 높았다.

물론 정자운의 실력도 초절정까지는 아니지만 절정고수 소리는 들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채찍을 든 자는 백리빙과 싸우는 검을 든 자보다도 한 수 이상 높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죽어라!”

채찍을 든 자는 정자운을 물리치자 곧 채찍을 잡아당겼다. 생각 외로 정자운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는 속전속결로 가려고 한 것이다.

“응! 이익……!”

채찍을 든 자는 채찍을 잡아채다가는 채찍이 끄떡도 하지 않자 순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수많은 싸움을 했던 그의 경험에 의하면 상대의 목을 채찍으로 감기가 어렵지 감기만 하면 누구도 그의 손속을 빠져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성탄의 목을 채찍이 감자마자 쾌재를 부르며 잠시 유성탄을 괴롭히며 놀 생각까지 했었다.

“괴물 같은 놈이니 조심하라고 하더니 한 수가 있는 모양이구나!”

말을 마친 채찍을 든 자는 공력을 일으켜 채찍에 주입했다. 그러자 채찍이 갑자기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거 신기하네? 곡마단에 취직했으면 돈 좀 벌었겠다.”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순간에 돈 벌 방법을 상대에게 가르쳐준 유성탄은 그대로 채찍을 든 자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채찍을 잡아당기고 있던 터라 그 반동까지 이용한 유성탄의 달려드는 속도는 다른 때보다도 더 빨랐다.

“이놈이 교활한 수를……!”

채찍을 잡아당기며 채찍에 공력을 주어 진동을 만들었던 그는 진동이 유성탄의 목에 감긴 채찍에 도착하면 결국 유성탄의 목이 바닥에 구를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채찍이 헐렁해지더니 유성탄이 달려들자 놀라 채찍을 옆으로 뉘었다. 유성탄을 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으윽! 이게……?”

팍!

채찍을 든 자는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뭔가가 내리치자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더니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상당히 세게 쳤는지 머리가 팍 터지는 소리까지 났다.

“짜식이 까불어!”

유성탄은 정자운에게 팔린 쪽을 만회하기 위해서 최대한 멋있는 자세로 채찍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채찍은 어떻게 꼬였는지 풀리지를 않았다.

‘이 씨! 이게 또 왜 안 풀리는 거야! 에이!’

“가만 계세요. 제가 풀어드릴게요.”

유성탄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는데 정자운이 유성탄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채찍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성탄은 정자운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채찍을 풀기 위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목 밑의 가슴을 보며 채찍이 빨리 안 풀리기를 바랐다.

“아가씨, 비키세요.”

유성탄이 몽롱한 눈으로 정자운만 보고 있는데 백리빙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유성탄의 목에 감긴 채찍을 검으로 쑥닥 잘라버렸다.

황홀한 순간이 무참하게 깨지자 유성탄은 아쉬운 듯이 정자운의 목을 쳐다보았다.

“괜찮니?”

“저는 괜찮아요. 그자는 이자가 쓰러지자 그대로 도망갔어요.”

“유 대형! 이자들 아세요?”

“몰라. 내가 이런 흉악한 놈들을 어떻게 알아.”

“내가 보기에는 아저씨가 더 흉악하거든요!”

백리빙은 유성탄이 말하자 눈에 살기를 띠고는 유성탄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검으로 유성탄의 목에 걸린 채찍을 잘라버린 것도 유성탄이 정자운의 가슴속을 보려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씨! 뭔가 꼭 죄지은 것 같네. 찝찝하게.’

유성탄은 뭔지는 모르지만 백리빙의 말에서 가시를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방금 사용하신 수법이 뭐였는지 말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채찍을 든 자는 머리가 깨졌지만 죽지는 않았다. 정자운은 침을 꺼내더니 그자의 견정혈에 박아 넣은 후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유성탄에게 물었다.

“아무 수법도 안 썼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자가 얼마나 고수였는지 알아요? 그런데 이런 자를 아무런 수법도 안 쓰고 단숨에 제압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백리빙이 톡 끼어들더니 면박을 준다.

“얘가 강한 거야? 이상하네. 저쪽으로 가면 송림이라고 있는데 거기서 아주 흉악한 놈들을 만났었거든. 여자를 홀랑 벗겨가지고 먹으려고 드는데 내가 구해줬지. 그런데 그놈들이 이놈보다 더 강했는데…….”

“여자를 벗겨서 먹으려 했다고요? 좀 뻥 좀 그만 쳐요. 무슨 식인종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을 먹어요!”

“먹는 게 그런 먹는 게 아니고…….”

“그자들이 누구였는지는 아세요?”

유성탄이 설명하려 했지만 정자운은 유성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고는 그자들이 누구였는지를 물었다.

“황음삼마라고 하던데…….”

“황음삼마!”

정자운과 백리빙은 유성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자들이 강하다고는 해도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황음삼마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정말 황음삼마라고 하던가요?”

“응! 내가 이 몽둥이로 기절을 시키고 나왔는데… 이상하게 그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더라고. 난 절대로 안 죽였어!”

“믿어요. 그리고 그자들은 죽어도 마땅한 자들이니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요. 유 대형께서는 너무 마음이 여리셔서 마음이 안 좋으시겠지만 죽어 마땅한 자들은 죽어야겠지요.”

‘내가 마음이 여려? 가만있자… 여자들은 마음이 여린 남자를 좋아하나, 싫어하나?’

유성탄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정자운이 다시 물었다.

“제가 전에 무공을 배우면 위험하다고 했는데 무공을 익히셨나요?”

“아니! 난 무공에는 아예 가까이 가지도 않았어.”

유성탄은 정자운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린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그런 유성탄을 보며 정자운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다.

* * *

“내가 책임진다니까! 걱정 마. 이 동네는 이제 내가 꽉 잡고 있어. 아까 봤지? 주루를 그렇게 부셔놔도 아무도 말 안 하잖아.”

“그래도 선량한 양민의 재산을 부수면 물어줘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유 대형께서 주루 주인에게 돈을 준 것은 참 잘한 행동이에요. 대협이 되실 겁니다.”

정자운과 백리빙이 누군가를 찾아왔다는 말에 자신이 안내를 하겠다며 일층으로 내려온 유성탄은 손님이 하나도 없는 주루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 주인과 점소이의 모습에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들어 피 같은 금자 한 냥을 꺼내 주었다.

물론 주인으로서는 횡재를 했다. 열흘 내내 주루가 꽉 차야 벌 수 있는 돈이 금자 한 냥이었다. 당연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성탄을 저주하던 그들은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유성탄을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계속 너무 많이 준 것은 아닌가 고민을 하며 금자 한 냥을 아까워하던 유성탄에게 정자운의 말은 금자 한 냥이 전혀 안 아깝다는 생각을 하도록 바꾸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포쾌님!”

“왜 오늘은 이쪽을 안 도세요? 제발 이쪽도 한 번씩 와주십시오.”

유성탄이 정자운을 모시고(?) 저잣거리를 나서자 놀랍게도 사방에서 유성탄을 아는 척한다.

유성탄이 운하현에 나타난 지 이제 한 달 남짓, 그런데 놀랍게도 상인들을 괴롭히던 흑도파와 왈패들을 모두 소탕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상인들로서는 유성탄이 가장 훌륭한 포쾌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자생한다는 잡초 같은 흑도가 이렇게 말끔히 청소된 것은 운하현 역사상 처음이었다.

독종 중의 독종이라는 삭도(削刀)파의 두목 풍구란 자까지도 유성탄에게 반 시진을 맞고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저놈에게 다시 맞는 것은 너무 무섭다’며 그날로 운하현을 떠나버렸다.

거기다 흑도를 봐주던 마룡방의 무사들까지도 유성탄에게 반병신이 되어 옥이 갇히니 유성탄만 떴다 하면 전부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숨어버리는 실정이었다.

“유 대형을 대단히 존경하는 것 같네요?”

정자운이 상인들의 말에서 유성탄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유성탄에게 말했다.

“하하하! 이 세상에 나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하!”

최대한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유성탄의 모습에서 정자운은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자 스스로 놀라고 만다.

“잘난 체 좀 그만해요! 어떻게 입만 열면 뻥 아니면 잘난 체이니……!”

“빙아, 너 내가 예뻐해 줄 때 조신하게 굴어라. 자꾸 남자의 말에 초치면 매력 없어진다.”

“너!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

“백리빙! 너 자꾸 나한테 까불면 이제부터는 너 아는 체 안 한다!”

백리빙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손을 비비던 것이 겨우 반 년 전이었는데 갑자기 세게 나오는 유성탄을 보며 백리빙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아는 체 안 한다고 하면 무서워할…….”

“내가 남자로서 말하는데 너 끝까지 말하면 그때부터는 너와 나는 완전 남이다.”

“그럼 우리가 남이지…….”

“분명히 말했어! 나하고 남이 되면 넌 영원히 나하고는 말도 못 하는 거야!”

“말…….”

“내가 그랬지. 만약 이번에도 말대꾸하면……!”

‘씨! 어쩔 건데? 에이…….’

처음의 기세등등하던 기운은 어디로 갔는지 차츰 수그러들던 백리빙의 목소리는 유성탄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다물어졌다. 속으로는 항변했지만 더 이상 말대꾸할 용기를 잃은 것이다.

“그렇지! 여자가 남자 말을 잘 들어야지 귀여움 받는 거야. 그래야 빙아도 착하구나 하는 말도 듣는 거고.”

백리빙의 대꾸가 점점 짧아지다가는 입을 닫자 유성탄은 자신의 큰소리가 먹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는 목소리를 깔며 한마디 더 했다. 그러자 당장 검으로 손이 갈 듯 움찔하던 백리빙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왜 이러지?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에이!’

놀랍게도 백리빙은 유성탄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해지자 결국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것이다.

“호호호! 무산의 호랑이도 무서워서 도망친다는 무산독봉 백리빙이 임자를 만난 것 같네요.”

처음 보는 백리빙의 모습에 정자운이 신기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런데 농담처럼 웃으며 말하기는 했지만 백리빙의 모습에서 그녀는 마음속에 뭔가 모를 야릇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 이게 먹히네? 그렇다면 자운이에게도 한 번 해봐?’

생각지도 않게 뭔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유성탄은 정자운을 슬쩍 쳐다보며 같은 방법을 한 번 써볼까 하는 유혹에 빠졌다.

하지만 면사 속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착해 보여서 유성탄은 자신의 생각을 포기한다.

‘에이, 저 얼굴에 어떻게 그렇게 세게 밀어붙이냐? 저 애는 아무래도 부드럽게… 맞았어! 정자운 저 애에게는 부드러운 남자의 모습이 잘 통할 거야.’

속으로 중얼거린 유성탄은 백리빙을 쳐다보았다,

‘히히히! 아무리 봐도 귀엽단 말이야. 거참 떡 두 개가 내 손에 있는데 어느 걸 먼저 먹어야 잘 먹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 감이 안 오네.’

여전히 김칫국부터 열심히 마시는 유성탄은 공상에 빠져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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