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만류장의 비밀 (35/79)

제6장 만류장의 비밀

“뭐라고! 소백이가 천한 집안의 딸과 사귀는 것 같다고?”

감숙성 최고의 무관인 청무관의 관주이자 감숙성 제일가는 부자이기도 한 좌무성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좌소백이 천한 집안의 여자와 사귄다는 말을 듣고는 눈이 커져 반문했다.

“아비는 한주현 관부의 포장이고 오라버니는 성의 진시에 장원을 했다 하니 천한 집안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빈한한 집안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좌무성은 자신의 수제자이자 무관의 잡사 일까지 보는 성화용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쯧쯧쯧! 거지들이나 사는 한주현의 포장이나 나라의 진시도 아닌 성의 진시에 장원을 누가 알아준다더냐!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말해봐라.”

좌무성은 연경의 대단한 집안과 좌소백의 혼사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성사단계에까지 와 있었다. 그러자 좌무성은 여자 소문이 많은 좌소백의 주위를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는 성화용에게 좌소백과 사귀는 여인들이 누구 누구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을 내렸었다. 그 자신 역시 젊을 적 왈짜패들과 몰려다니며 많은 사고를 친 경험이 있었기에 여인이 한을 품으면 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을 신봉하고 있었다.

아무런 후환 없이 좌소백의 주위를 정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여자를 아예 제거하는 방법과 돈을 주어 떨어져 나가게 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그의 감숙성에서의 영향력을 따진다면 굳이 돈을 쓰지 않아도 간단하게 협박만으로도 정리를 할 수는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떼어놓을 경우에는 생각지도 않은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소백이가 그저 가지고 놀 생각으로 여자를 사귄 것 같은데 지금은 진짜로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말이냐?”

성화용의 보고를 들으며 좌무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소백이의 머릿속에 들어가 본 적도 없으면서 소백이가 여전히 그 계집을 가지고 놀려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를 어떻게 장담하는 것이냐?”

“좌 사제는 그동안 한 여자만 사귄 적이 없었습니다. 사제가 그러려고 그런 면보다는 여인들이 사제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거야 그럴 테지. 내 아들이기는 하지만 정말 잘생겼으니까…….”

이런 와중에도 자식은 예쁜지 아들 자랑을 하는 좌무성이었다.

“그런데 사제가 그 여인을 안 이후로는 갑자기 모든 여인과의 관계를 끊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친구들이 아무리 꼬드겨도 기루에도 안 갑니다. 그리고는 아침만 되면 한주현으로 달려가서는 길가에 서서 그 여인이 나올 때를 기다리는 장면을 여러 번 포착했습니다.”

“뭐야! 소백이가 그런 계집 때문에 그 마을에 가서 기다린다는 말이냐?”

좌소백은 좌무성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거기다 어릴 적부터 너무 예뻐서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기 때문에 버릇도 없고 참을성은 더 없었다. 좌소백을 잘 아는 좌무성으로서는 좌소백이 누군가를 길가에서 기다린다는 말이 더 놀라웠다.

“허허! 우리 좌씨세가가 드디어 감숙을 벗어나 중원으로 날개를 필 수도 있는 기회가 왔거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좌무성은 뭔가를 생각하더니 상화용에게 말했다.

“소백이를 불러오너라.”

“알겠습니다.”

‘소백이 그놈 성격에 구슬리기가 만만치는 않을 것 같고… 집이 빈한하다니 돈을 안겨주면? 아니야. 소백이 그놈은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은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놈인데 계집이 떨어진다고 포기할 놈이 아니야. 그것 참… 이걸 어떡한다?’

좌무성은 성화용이 나가자 고민에 빠졌다. 조그만 현의 포장 정도의 집의 여식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아니 포장인 그 아비까지도 그는 아무런 문제 없이 제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좌무성은 정파였다. 하지만 빈한한 집안 정도를 풍비박산 내는 것 정도로는 그들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그런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 * *

유성탄 일행이 대정현에 다시 나타난 것은 하후란에게 물건을 넘기고 거의 반달이 지난 후였다.

“하하하! 대형의 무용담은 정말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습니다.”

유성탄은 팔달채까지 완전 박살을 내고 말았다. 거기다 냉약원과 황달무까지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유성탄은 우선 냉약원의 두 다리를 다 부셔버렸다. 공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모르는 그로서는 무공을 못쓰게 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유성탄은 처음에는 황달무는 그냥 놔두고 가려 했었다. 그러나 힘을 썼으니 약간은 가져가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산채를 살피다가 놀라고 말았다. 팔달채 역시 청호채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잡혀온 여인은 수십을 헤아렸고 산채를 증축한다고 근처 마을에서 잡아온 남자들도 수십 명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그 몰골이 너무 형편없었다.

결국 이곳에서도 한 푼도 못 건진 유성탄은 팔달채의 산적들도 모두 다리를 부셔버리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아우들과 만난 것은 헤어진 지 거의 열흘이 다 되어서였다.

그리고 유성탄은 엄청난 소리를 듣고는 까무러칠 뻔한다. 냉약원과 황달무 그리고 수뇌부들에게는 관부에서 내건 현상금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 액수가 녹림십팔채에 드는 산채의 주인들답게 상당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배는 떠나고 난 뒤였다. 물론 유성탄은 다시 팔달산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이미 며칠이 지나서 틀렸다는 말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유성탄은 대신 엄청난 뻥을 섞어가며 자신의 무용담을 떠벌였고 아우들은 대정현으로 돌아오는 동안 계속 감탄을 하며 유성탄의 기분을 맞춰주고 있었다.

“뭐야! 무려 반 달 가까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가는 나타나서 표물을 모두 산적들에게 빼앗겼다고!”

총관 배득칠은 집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습니다.”

이미 유성탄에게 한번 된통 당한 만류장의 호위장 태강룡이 보고를 했다.

만류장에 들어선 낭인칠웅과 방도들은 총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는 자신들이 얼마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는지 모를 거라며 표물을 다 잃은 이유를 떠벌이고 다녔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이 청호채와 팔달채의 산적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성탄이나 아우들은 호북제일상단의 정보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고 있었다. 특히 상인들이다 보니 산적들에 대한 소식은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고 있었다.

“지금 유성방의 방주 마질대형 유성탄이 청호채와 팔달채를 홀로 전멸시켰다고 소문이 쫘하게 퍼지고 있는데… 뭐! 산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겼다고! 이것들이 만류장이 무슨 동네 조그만 구멍가게인 줄 아나!”

“어찌할까요? 우선 모두 잡아 가둘까요?”

“뭐야! 그래 자신 있으면 해봐라. 혼자 청호채와 팔달채 오백 명이 넘는 산적들을 병신을 만들고 거기다 그 무섭다는 채주들까지 두 다리를 다 부셔놨다는 놈이 그놈이다. 부탁이니 제발 좀 잡아 가둬다오. 앙!”

배득칠의 말에 태강룡은 고개를 숙였다.

“형님 아무래도 무당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놈들을 장(莊) 안으로 들인 것은 큰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부장주이자 장주의 동생인 사도진철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대정현 거리의 상가를 보호하기 위해 낭인칠웅을 회유했는데 오히려 외환(外患)을 내우(內憂)로 바꾼 꼴이 된 것이다.

“무당을 불러들였다가 지금 꾀하고 있는 일을 들킨다면 낭인칠웅이란 놈들에게 받은 피해 정도가 아니라 만류장 자체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형님이 도대체 굳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내 욕심이 너무 과했다. 청담 그놈을 알게 된 것이 이렇게 천추의 한이 될 줄은 몰랐구나.”

사도진용은 말하면서 너무 괴로운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눈을 감았다.

‘형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형님은 제풀에 쓰러지실 겁니다.’

사도진철은 자신이 존경하는 사도진용의 괴로운 모습을 보자 더 이상은 이대로 끌려갈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 외로 만류장에서 자신들이 표물을 잃고 왔다는 말에 별 반응이 없자 유성탄은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리며 자기의 방에 누워 있었다.

‘이번에 엄청 손해는 봤지만 하후란이 그 물건들만 잘 처리하면 그 돈도 아마 꽤 될 거야. 그래 어차피 잃어버린 돈 가지고 마음을 태워봐야 내 몸만 축날 뿐이다. 잊자.’

유성탄이 흥얼거린 것은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쓰라린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 각도 안 되어 유성탄은 벌떡 일어섰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산적 두목을 놔두고 온 것만은 너무 아깝구나! 지금이라도 냄새를 쫓아가면 잡을 수 있을 텐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다리를 둘 다 부숴놓고는 현상금 때문에 다시 가서 잡아온다는 것은 너무한 것 같단 말이야.”

유성탄이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장우왕이 유성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형, 부장주님이 오셨는데요.”

“부장주? 그 사람이 왜 여기는 와? 물건 잃어버린 것은 하늘의 뜻이니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그래라.”

유성탄은 사도진철이 왔다는 말을 듣자 물건 값을 물어내라고 온 줄 알고는 죄없는 하늘을 물고 늘어졌다.

“오랜만입니다, 유 대형!”

유성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도진철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부장주라 해도 개인적인 사생활이 있는 법인데 이렇게 주인의 허락도 안 받고 방에 들어서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요?”

유성탄이 나름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어차피 들어왔으니 무게로 누르려는 심산이었다.

‘내가 얼마나 무거운 사람인지 알면 내게 물건을 책임지라는 소리는 못할 거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유 대형과 은밀히 애기할 것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무례를 저질렀소이다.”

‘무례를 저지른 것하고 실례를 무릅쓴 것하고 다른 점이 뭐야? 하여간에 부장주까지 되어 가지고 말하는 거 보면 나보다도 문장력이 없다니까.’

“은밀히 얘기하는 것까지는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유성탄은 말에 무게를 넣기 위해 하지만을 강조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잃어버린 표물에 대한 말은 받아들일 수 없음을 정중히 말하는 바입니다.”

유성탄은 자신이 말하고는 자신이 감탄하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유식이 뚝뚝 흘러나오는 말투를 보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물건은 이미 잊었습니다. 제가 온 것은 다른 문제를 의논하고자 온 것입니다.”

‘그게 아니었어? 괜히 쫄았네…….’

“이리 와 앉으시지요. 그 말이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 은밀하게 오지 않으셔도 됐는데… 헤헤헤!”

기분이 좋아진 유성탄의 입에서 대단히 경박한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좀 이상한 친구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나. 대화나 잘 될까 모르겠구나.’

사도진철은 순식간에 변하는 유성탄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나까지 불안하게 왜 저런 불안한 표정을 짓는 거지?’

유성탄은 자신 때문에 사도진철의 표정이 불안해졌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대형, 강태웅입니다.”

대화가 시작되려는데 밖에서 강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주가 갑자기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강태웅이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

“들어와라!”

유성탄은 재빨리 들어오라고 말했다.

* * *

“청오 사백님께서 그런 말을 남기셨다는 말인가?”

청무 진인의 명을 받아 만류장을 은밀히 조사하기 위해 나온 천성 진인은 먼저 대정현의 무당 지관장인 운종을 먼저 찾았다. 그리고는 운종으로부터 생각지 못했던 말을 들었다.

“청오 사백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낭인칠웅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단 말이지?”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알겠다. 사백님께서 그자를 직접 보시고 그런 말을 남기셨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터… 우선 낭인칠웅에 대한 조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만류장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었느냐?”

“특별하게 수상하다 하는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운종이 머뭇대자 천성 진인이 계속 말하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이게 수상한 점이 되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근래에 우리와의 접촉이 전혀 없었습니다.”

천성 진인은 운종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전에는 얼마나 자주 접촉을 가졌었나?”

“몇 년 전만 해도 일만 생기면 저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실지로는 도움을 청할 이유가 없는 일까지 도움을 청하고는 보답을 크게 하곤 했었지요. 그래서 제가 짐작하기를 도움을 달라는 말은 그냥 핑계고 무당에 자연스럽게 시주를 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

“근래에도 시주는 예전만큼 했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별로 수상한 점이라고 보이지는 않는군. 그런데 운종 너는 이상하게 봤다는 말인데…….”

운종은 원래 속가제자였다. 보통 속가제자는 무당의 지관장을 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운종은 속가제자로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었다. 대정현에서 가까운 우미현에서 태어난 운종은 상당한 부잣집 아들이었고 관례대로 그의 아버지는 상당한 재물을 무당에 시주하고는 운종을 속가제자로 무당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운종이 도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도사가 되기를 스스로 자청한 것이다.

그러나 무당의 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정해진 규율이 있었다. 무당의 본산제자에 들 수 있는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따금 아주 대단한 자질을 가진 아이를 장로 이상의 신분을 지닌 고위층에서 제자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이미 속가로 받아들여져 대충 배분이 정해진 그에게는 그런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열심히 도학을 익히고 속가치고는 무공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자 특별히 그를 도사로 받아준 것이다. 그러나 본산제자가 사용하는 항렬의 도호는 받지 못하고 그를 가르친 사부가 그냥 운종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어쨌든 속가 출신으로 무당의 정식 도사가 되고 지관장까지 되었다면 그도 보통 사람은 넘는 자질을 가졌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천성 진인은 운종을 어릴 때부터 보아와서 잘 알고 있었다.

“태룡아, 아무래도 네가 개방에 좀 다녀와야겠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무엇을 알아오면 되겠습니까?”

천성 진인의 제자인 태룡 진인이 물었다.

“이곳 개방분타에 가면 만걸개(慢乞쾬)라는 분이 계실 것이다. 그분에게 내 이름을 대면 도와줄 것이다. 가서 요 몇 년간 만류장에 이상한 점이 있었는지 만약 있었다면 어떤 점이 이상했는지 알아오너라.”

“알겠습니다.”

드디어 강태웅이 원한 대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사도진철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왔으면 말을 해야지 뭐 하시는 거요?”

성질 급한 유성탄이 계속 사도진철이 뜸을 들이자 못 참고 묻는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사도진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뭐요? 약속! 난 그런 거 못하니까 그냥 가시오. 거기다 나는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조건을 거는 것을 가장 싫어하오.”

약속 같은 것을 싫어하는 유성탄이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거절했다.

“우선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고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태웅이 빙그레 웃으며 유성탄에게 물었다. 유성탄 같은 성격은 누구나 대화를 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데는 좋은 때가 더 많았다. 이번에도 유성탄의 한마디에 오히려 다급해진 것은 사도진철이 되고 말았다.

“태웅이가 간곡하게 부탁하니 한번 들어는 봅시다. 하지만 나는 싫은 것은 죽어도 못하는 사람이오!”

‘아예 자기의 마음에 드는 말만 하라고 깔고 들어가는군.’

어려서부터 형인 사도진용을 따라다니며 장사로 잔뼈가 굵은 사도진철이었다. 그의 경험상 유성탄 같은 사람이 가장 대화하기 어려운 부류였다.

“먼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엄청난 비밀이니 아무에게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시오.”

‘응! 겨우 그거였어? 만류장 정도에서 엄청난 비밀이라고 한다면… 대박이다!’

“걱정 마시오. 나 유성탄이 딴 거는 몰라도 입 하나는 엄청 무거운 사람입니다.”

하후란에게 정보는 곧 돈이라는 말을 들은 유성탄이었다. 만류장의 비밀 정도라면 분명 돈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 유성탄은 우선 들어놓고 사방에 팔 생각부터 한다.

“나 강태웅이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저거! 또 초 치네. 씨! 도대체 도움이 안 된다니까!’

강태웅이 목숨까지 걸자 유성탄은 비밀을 팔아먹는 것은 물 건너갔다는 것을 느꼈다. 아우가 목숨을 건다는데 돈 때문에 죽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유성탄은 갑자기 비밀을 듣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습니다. 만류장을 구해주시오.”

‘뭐야? 그럼 그냥 놔뒀어도 어차피 망할 거를 내가 와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에이 씨! 하는 일마다 헛발질만 하고…….’

유성탄은 자신이 만류장을 없애려고 왔는데 오히려 도와달라고 하는 사도진철이 조금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알기론 만류장은 지금이 최고의 전성기라고 들었는데 아니었습니까?”

하후란에게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지금 만류장의 사업은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했다. 강태웅은 사도진철이 하는 말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야 태웅아! 장사란 게 보기와는 다른 거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질 수도 있는 거야. 만류장도 보기에는 잘 나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뒤로 밑지고 있었던 거지.”

의젓하게 자신이 다 안다는 듯이 강태웅을 타이른 유성탄은 사도진철을 보며 말했다.

“어려워하는 것은 알겠지만 우리도 지금은 개털이 돼서 도와줄 만한 돈이 없시다.”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오. 현재 만류장은 금전적으로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유성탄의 눈이 번쩍 띄었다.

‘금전적으로는 어려움이 없다고? 그렇다면…….’

유성탄이 또 이상한 공상을 하려고 하자 강태웅이 급히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그대들이 대정현에 나타난 이유를 알고 싶소?”

“무슨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나 유성탄은 이유를 가지고 나타나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나는! 내 맘대로 나타나는 사람이오.”

사도진철은 유성탄의 말을 듣자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일은 서로간의 진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할 말은 잘못하면 만류장이 망할 수도 있는 크나큰 일입니다. 그런데 낭인칠웅께서는 자신들이 이곳에 나타난 진짜 이유를 말해주시지 않으니 내가 어찌 믿고 속마음을 말하겠습니까? 오늘 내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사도진철의 말을 들은 유성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쭈! 이게 제법 세게 나가네. 저게 저러니까 궁금해지잖아?’

“대형, 말해도 되겠습니까?”

“말하고 싶으면 말해라.”

사도진철은 유성탄과 강태웅의 대화를 듣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 * *

“낭인칠웅이 만류장으로 돌아갔더란 말이냐?”

“예,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빈손으로 나타나서는 산적들에게 표물을 다 빼앗기고 몸만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한답니다.”

청담은 말을 듣자 얼굴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짜증나게 하는 놈들이군. 강태웅은 그런 짓을 못하는 놈인데… 누구의 생각인지 간교하군.”

“어찌할까요?”

“대정현으로 돌아갔다면 당장은 어찌할 방법은 없다. 큰일이 남아 있는데 무당에 꼬리를 잡힐 수는 없지. 지금 당장 감숙과 금모전에 연락을 해라. 아무래도 변수가 나타난 것 같으니 좀 더 빨리 일을 진행시켜야겠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수하가 복명을 하고 나가자 청담의 몸에서는 엄청난 거력이 뿜어져 나왔다. 낭인을 넘어 일류고수가 아니라 최소한 무림백대고수의 상위에 들 정도로 대단한 기운이었다.

* * *

“그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사도진철은 강태웅에게 장도현의 동(銅) 광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듣자 경악을 했다.

‘어라?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사도진철의 반응이 유성탄의 육감은 거짓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광산의 채굴권은 만류장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형님은 모르지만 저는 분명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동광산의 대리인으로 만류장이 선정된 것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처참한 짓을… 거기다 금모전이라니요? 그리고 제가 형님에 대해 압니다만, 만약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절대로 묵과하실 분이 아닙니다. 만류장은 지금도 충분히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하여 만류장을 위험에 빠뜨릴 이유가 없습니다.”

강태웅은 사도진철의 말을 듣자 타당성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용역을 시켜 마을 사람을 쫓아낸 것은 알 것 아니오?”

유성탄은 오랜만에 핵심을 찌르는 말을 했다. 그러자 사도진철은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실지로 장사를 하다 보면 그런 일은 비일비재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용역을 사용하는 일은 법에 저촉이 안 됩니다.”

“당신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법에 저촉만 안 되면 무슨 일이든 돈만 되면 한다는 말 아니오?”

“하지만 우리는 충분하게 보상을 하라고 했습니다.”

“충분히라는 것의 기준이 뭐요?”

너무 똑똑하게 묻는 유성탄을 보며 강태웅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갈수록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을 보여주는 유성탄이었다.

“우선 그 일은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만류장에서 바라는 도움이 뭔지 알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까?”

사도진철 역시 사도진용과 청담 사이에 어떤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지는 못했다.

약 육 년 전, 만류장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새외와의 무역을 위해 떠났다가 표물을 강탈당한 것이다. 만류장의 장주인 사도진용이 직접 전장들을 찾아다니며 급전을 빌려야 할 정도로 자금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청담을 만나게 된다.

사도진철에게 들은 청담과 사도진용의 만남은 약간은 극적인 데가 있었다. 간신히 급전을 빌려 장으로 돌아가던 사도진용을 괴한들이 습격한 것이다. 사도진용을 호위하던 호위무사들이 모두 죽고 괴한들의 칼에 사도진용의 목이 떨어지려는 찰나, 청담이 나타나서 그를 구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강태웅은 갑자기 너무 인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사도진용은 청담을 생명의 은인으로 극진히 대우했고 이후 청담이 자신이 모은 돈이라며 상당히 큰돈을 만류장에 투자를 하면서 둘의 사이는 서로의 속을 다 털어 놓을 정도로 친해진다.

그리고 얼마 후 청담과 대화를 나누던 중 청담이 슬쩍 만류장이 장사를 하는데 가장 큰 애로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사도진용은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냈다. 당시 호북의 삼대(三大) 상단 중 두 개만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청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도진용에게 귀가 솔깃하는 제안을 했다.

자신에게 두 개 상단을 제거할 좋은 방법이 있는데 만약 성공한다면 생기는 이익의 십분지 일은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호북제일상단이 되면 생길 이익에 비하면 정말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고 할 수 있는 제안이므로 사도진용은 청담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만다. 그리고는 청담이 원하는 대로 계약서에 수결을 했다.

“그 수결이 족쇄가 됐나보군요?”

“맞습니다. 그로부터 반 년도 안 되어 두 개 상단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정도의 상단이 그렇게 갑자기 망할 수도 있습니까?”

“그럴 리가요. 상단의 주인들이 갑작스런 급변을 당했지요. 후계자가 될 자식들까지 모두 죽었으니 상단은 주인을 잃었고 그 밑의 행수들이 각자 상단을 나눠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눠진 상단은 더 이상 큰 거래를 하기는 어려웠지요. 곧 상당 부분이 만류장에 흡수되었습니다.”

“흠! 거 청담이란 놈 아주 나쁜 놈이네?”

유성탄은 사도진철의 말을 듣고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청담을 깎아내렸다. 아우들에게 청담을 존경하느니 낭인들의 영원한 대형이나 하는 말을 들은 유성탄은 청담이 무조건 싫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강태웅이 유성탄의 말을 듣고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난 탁 들으면 그냥 척 안다. 청담이란 놈이 한 짓이 아니라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 마.”

유성탄의 말을 들은 강태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도진철에게 물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면 당연히 만류장이 배후로 지목당하셨을 것 같은데 괜찮으셨습니까?”

“누구라도 만류장을 의심할 상황이었소이다. 하지만 관부의 조사에 이어 무당과 개방까지 나서 샅샅이 조사를 했지만 아무런 혐의점도 우리에게서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진실로 우리는 그 일에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두 개의 상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당과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는 상당히 강도 있게 진행되었고 조사가 진행되면서 우리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범인을 잡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후에도 청담은 단지 만류장에 이따금 들러 안부나 물을 뿐 약속한 십분지 일의 돈도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후 만류장의 사업은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물론 그 이유는 몇 년 후 알게 되었다. 청담이 만류장의 사업에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두 알게 모르게 처리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약 삼 년 전이었습니다. 청담이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청담이 약간의 물품을 옮기는데 만류장의 상단을 좀 이용할 수 있겠느냐고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당연히 형님께서는 흔쾌히 승낙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상단의 정보망이라는 것이 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합니다. 곧 이상한 정보가 우리에게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청담이 옮겨달라는 물품을 가져간 고을마다 마약(痲藥)이 범람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완전히 망쳐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이 청담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 그 소식을 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후 형님께서는 청담에게 전에 약속한 대로 돈을 줄 테니 물건을 옮기는 것은 표국을 이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였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때부터 청담이 우리를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장주의 아드님을 무당의 속가제자로 들일 정도로 무당과 가깝다고 들었는데 어찌 빨리 무당에 도움을 청하지 않으셨습니까?”

“청담에게 써준 계약서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지요. 청담은 형님의 명으로 두 상단의 가족을 죽였지 않느냐고 협박을 시작했습니다. 형님께서 언제 그런 명을 내렸냐며 극구 부인했지만 결국 형님께서 그의 협박에 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청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산의 대리인으로 만류장이 들어간 것도 청담의 협박 때문에 이름만 빌려준 것입니다.”

“난 누구한테 협박받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가더라? 그래, 우리에게 도와달라는 것이 뭐요? 청담을 죽여달라는 거요?”

“죽이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가 가진 계약서만 빼앗아 줘도 충분합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관계에는 반드시 조건이 들어간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사도진철도 당연히 이런 부탁을 그냥 들어줄 리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찾아올 때부터 이미 그도 이 일에 상응하는 보답을 할 생각은 했다. 그러나 유성탄이 조금 전 자기는 인간관계에 조건을 붙이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말이 완전히 다르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보기에는 계약서를 뺏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워 보입니다. 호북제일상단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닐 리도 없고 결국은 청담을 잡아 알아내야 한다는 말인데 간단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군요. 거기다 만류장이 정말 이 일에 상관이 없는지도 알 수 없구요.”

“제 말에는 거짓은 없습니다.”

“부장주님의 말씀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장주님의 행동에 미심쩍은 점이 너무 많아서 그럽니다. 아까 부장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이런 일에는 서로의 진정이 중요합니다. 지금 만류장에서 청담과 함께 꾀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말을 안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일이 잘못되면 만류장은 끝장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주실 거요?”

유성탄은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나는 많이를 원하오.”

사도진철은 유성탄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청담을 죽이면 금자 천 냥을 드리겠소. 그리고 계약서를 빼앗아온다면 금자 삼천 냥을 드리겠습니다.”

“금자 삼…천 냥! 정말… 많다.”

유성탄이 처음으로 진짜 많다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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