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황대산의 고향 (27/79)

제9장 황대산의 고향

아침에 일어난 유성탄은 마음이 한결 가벼운 것을 느꼈다. 사실 마룡방은 계속 상대를 하다가는 사람을 죽여야 할 것 같아서 도망친 면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흑혈신마는 정말 무서워서 도망을 쳤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유성탄으로서는 이길 수 없는 존재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가장 꺼려하던 흑혈신마가 더 이상 자신을 건드리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았다. 그렇다면 유성탄이 진짜 무서워서 도망칠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이제 가장 무서운 늙은이가 사라졌으니 우리가 어디론가 움직이면 더 이상 나를 찾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천천히 야바위나 하면서 부모나 찾아야겠구나.’

유성탄은 이제 다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대형, 일어나셨습니까?”

장우왕의 급한 목소리가 유성탄의 평온한 아침을 깨뜨렸다.

“아침부터 웬 소란이야?”

“대산이와 동파가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으면 됐지 왜 깨우고 그러냐?”

“그게… 많이 다쳐서 왔습니다.”

“뭐야!”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유성탄이었지만 황대산과 마동파가 다쳐서 돌아왔다는 말에 윗옷도 입지 않고 뛰어나왔다.

“어떤 놈이 감히 나 유성탄의 아우들에게 상처를 입힌 거냐? 누구야!”

“아직은 모릅니다. 둘 다 상당한 중상인데다가 먼 거리를 달려왔는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어디 있냐?”

“지금 태웅이 방에 눕혀놓았습니다.”

“태웅이는?”

“의원을 데리러 갔습니다.”

“가자!”

세상에 걱정이 없을 것 같던 유성탄의 얼굴에 걱정이 들어 있었고 말투도 언제나 하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미 유성탄의 가족이 된 황대산과 마동파가 상처를 많이 입었다는 말에 처음으로 마음의 평정을 잃은 것이 눈에 보였다.

“얘들 왜 이러냐? 혹시 죽은 거 아니냐?”

유성탄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가장 대형을 존경한다고 큰소리치던 마동파와 면상이 못생겼다고 타박을 받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황대산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유성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왔다.

“죽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탈진을 해서 정신을 잠깐 놓은 듯합니다.”

“어떤 놈들인지 이제 죽었어! 감히 내 아우들을 건드려 이 씨!”

유성탄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대형, 너무 걱정 마십시오. 원체 튼튼한 사람들인지라 곧 괜찮아질 겁니다.”

마동파의 상처에 무산신녀 정자운에게서 받은 금창약을 발라주던 표도행이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도행 아우 말이 맞습니다. 대산 형님께서는 용병 일을 할 때 전장에 나가서는 이것보다 더한 상처에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까짓 것은 대산 형님의 덩치에 비한다면 상처도 아닙니다.”

역시 황대산의 몸에 금창약을 바르던 철패도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내가 너희들 이렇게 만들어줄까? 괜찮나 보게!”

“대형도 참!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야지 그걸 쟤들만 보냈냐?”

강태웅으로부터 황대산의 사연을 전해들은 유성탄이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죽은 아내의 무덤이나 보고 올 줄 알았습니다.”

“의원 말은 뭐라고 하더냐?”

“원체 몸이 튼튼해서 괜찮을 거라고 합니다.”

“언제쯤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더냐?”

“열흘 안에 몸을 추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흠… 내가 싸우는 것은 정~말 싫지만 이놈들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쟤들이 몸을 추스르면 당장 그곳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강태웅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낭인칠웅은 형제를 건드린 자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대형의 결정이시다. 대산 아우와 동표 아우가 몸을 추스른 후, 대산 아우의 복수를 하러 간다.”

강태웅의 말에 아우들의 얼굴에 전의가 일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무당산과 아주 가깝습니다. 괜찮을까요?”

표도행의 말에 전부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무당과 척을 지는 것은 마룡방과 싸우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마룡방은 그래도 성이라도 넘어가서 도망치면 피할 수도 있지만 무당과 척을 지면 그 순간 천하 전체와 싸우는 셈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무림에서의 무당의 영향력은 소림과 함께 엄청났다.

“무당 같은 대문파에서 용역 같은 자들과의 싸움까지 상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빨리 못 기어!”

생각 외로 황대산과 마동파는 삼 일 만에 몸을 추슬렀고 유성탄은 뭐가 그리 급한지 당장 출발을 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산속으로 길을 잡았다. 자신이 없으면 어디 가서 맞아 죽을지 모르는 아우들 때문에 자신이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빡센 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새로 영입한 십여 명의 방도는 엉성한 판자로 임시 가마를 만들어서는 황대산과 마동파를 싣고 가게 했다. 그리고 판자에 누워 가는 그들은 손으로 입을 막고는 웃음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자신들이 당할 때는 힘들었지만 남들이 당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 떠났습니다.”

“그래요. 호호호! 드디어 마질대형 유성탄의 신화가 무림을 울리기 시작하겠군요.”

하후란은 마효춘의 보고를 받고는 뭐가 좋은지 크게 웃었다. 이미 강태웅과는 얘기가 다 되었고 이제부터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을 총동원하여 유성탄의 신화를 만들어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유 대형을 쫓던 자들의 정체는 알아내셨나요?”

“세 부류였습니다. 한 세력은 구룡회였고 또 하나는 상관세가였습니다. 하나는 살수들이었는데 이미 만나셨으니 상관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호호! 상관세가와 구룡회라… 소호쟁탈전을 벌이는 세 세력이 다 따르고 있군요.”

“그런데 또 한 명이 있었는데 너무 무서운 고수인지라 저희로는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이미 누군지 알았으니까요.”

하후란은 미리 강태웅으로부터 흑혈신마와 유성탄이 화해했다는 말에 자신의 기대가 맞았다는 생각을 했고 꼭 유성탄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와 유 대형이 만난 것을 봤을 텐데…….”

“걱정 마십시오. 아마 그들은 아가씨가 홍루여인인 줄 알 것입니다.”

“뭐라구요! 미쳤어요. 하필…….”

“죄송합니다. 상황이 급해서…….”

“아이 참! 잘못하면 혼인길 막히게!”

* * *

“도대체 오살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으니 어떻게 된 거냐?”

혈문사자는 오살을 보내면서 쉽게 일이 처리가 될 줄 알았다. 그만큼 오살을 믿는 마음도 컸다. 그런데 이미 떠난 지 한 달이 되도록 중간 연락조차 없자 슬슬 불안해지고 있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냥 낭인들이 아니었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냥 낭인이 아니라 해도 오살이면 무림 백대고수라 해도 해볼 만하다! 그들이 설마 백대고수보다 더 강할 리는 없지 않겠느냐?”

“혈점사를 보낼까요?”

“혈점사는 우리 혈문의 마지막 병긴데 이 정도에 어떻게 내보낸단 말이냐! 거기다 혈점사를 보낸다고 마룡방에서 돈을 더 줄 리도 만무 아니냐?”

“그렇다면 다른 응원군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혈문사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는 말했다.

“십사를 보내라.”

* * *

“분명 이것을 남긴 자가 흑혈신마가 분명하냐?”

“앞에 서 있기만 하는데도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분명했습니다.”

상관무청은 황노의 말을 들으며 눈이 커다래졌다.

“도대체 일개 낭인에 불과한 그자와 흑혈신마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우리에게 그런…….”

흑혈신마는 유성탄과 헤어지면서 그를 뒤따르는 떨거지들을 다 처리해 주기로 결정했다. 단 며칠이었지만 생각 외로 유성탄을 따르는 자들이 꽤 많았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상관무청은 고민스럽다는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일어서며 말했다.

“우선 철수한다. 아무리 저자에게서 뭔가를 얻는다 해도 흑혈신마와 척을 지는 것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한 달 가까이 유성탄을 쫓아다녔지만 알아낸 것은 유성탄이 홍루의 여인을 자주 만난다는 것 정도였다. 흑혈신마는 유성탄에게는 이미 자신의 흑혈탈혼기가 전해졌으니 더 이상 상관하면 자신과 척을 질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고 상관무청은 우선 유성탄을 따라다니다가 기회를 보아 포섭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만다.

* * *

“돌아간다. 한 명도 저놈들의 주위를 배회하지 못하게 해라.”

구룡회의 순찰영주 임기만은 아직도 몸이 떨리고 있었다. 상관무청은 그래도 잠시 객잔을 비우는 바람에 흑혈신마를 만나지 않았지만 임기만은 재수가 없으려니 흑혈신마를 직접 만난 것이다. 그리고 무림십대고수라는 것이 어떤 인물들인지 확실히 각인할 수 있었다. 구룡회에도 무림 백대고수에 드는 인물이 셋이나 있었다. 그러나 흑혈신마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임기만은 아직도 그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간단히 철수를 결정했다. 그리고 당장 회주에게 유성탄을 주시해야 한다고 건의할 생각이었다. 흑혈신마는 임기만에게도 상관세가에 전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나 임기만은 사파였고 경험이 많았다. 흑혈탈혼기를 전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죽인다는 뜻이었고 하나는 보호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흑혈신마의 성격상 이곳까지 와서 죽일 사람을 죽이지 않고 흑혈탈혼기만 주고 갈 리가 없다는 것이 임기만의 생각이었다.

흑혈신마와 엮였다는 하나만으로도 유성탄의 이름은 천하에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름을 무섭게 각인을 시킬 수는 있었지만 유성탄까지 흑혈신마의 이름에 묻혀 마인으로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 * *

“저기냐?”

유성탄은 상당히 깊은 골짜기에 이루어진 커다란 촌락을 보며 황대산에게 물었다.

“제 고향입니다.”

며칠간 편하게 가마를 타고 온 황대산과 마동파는 이미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몸을 추스른 상태였다.

“저기에 상당한 고수들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간신히 도망쳐 왔습니다.”

마동파가 끼어들며 말했다.

“산골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큰 마을이 있지?”

유성탄이 흰소리를 하며 앞으로 나섰다.

“여기는 채광(採鑛) 마을입니다.”

정보통인 표도행이 아는 척을 나섰다.

“채광 마을? 그건 뭐냐?”

“이곳에 광산이 있습니다.”

“광산? 광산은 또 뭐냐?”

“광산이란 광물이 많이 있는 산을 말합니다.”

“광물? 광물은 또 뭐냐?”

표도행은 유성탄의 세 번째 질문에 자신의 입방정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이놈의 입방정이 문제라니까… 이거 또 끝 간 데 없이 질문이 이어질 텐데…….’

“모르냐?”

“그게 설명이 좀 어렵습니다.”

“무식한 놈! 그것도 설명을 못 하다니……. 공부 좀 해라, 공부 좀! 광물이 뭐냐 하면 빛나는 물건을 말하는 거야. 알았어? 내가 어쩌나 보려고 물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무식한 티를 내요.”

광물(鑛物)을 광물(光物)로 해석하는 유성탄의 말에 모두 피식 웃는다.

“그런데 강태웅!”

“예.”

“얘들이 계속 나보고 방주라고 하는데 무슨 방이냐?”

“아직 결정을 지은 것은 없습니다. 대형이라고 하기에는 대형께서 너무 높으시다고 방주라 부르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방의 이름을 지어서 가자.”

유성탄은 쳐들어가서 커다랗게 무슨 방의 방주 유성탄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낭인방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장우왕이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얘는 여기까지 와서도 촌티를 못 벗네. 낭인이라고 사방에 티 낼 이유 있냐?”

유성탄의 타박에 장우왕이 머리를 긁으며 빠졌다.

“유성방 어떻습니까?”

철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성방! 하하하하! 철패가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거 좋다. 너희들은 어떠냐, 유성방!”

유성탄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이름을 넣고 싶었는데 아우들의 말에 포기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유성방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유성탄이 너무 좋아하자 아우들은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반대를 했다가는 유성탄에게 미운 털 박힐 각오를 해야만 할 것이었다.

“유성방! 저도 마음에 듭니다. 하늘을 흐르는 별들의 방이라 너무 좋습니다.”

강태웅이 찬성을 하자 더 이상의 반대는 있을 수 없었다.

몽둥이를 어깨에 걸치고는 촌락 안으로 들어선 유성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뒤로는 아우들이 그 다음으로는 방도들이 쫙 늘어서 뒤를 따랐다. 유성탄이 좋아하는 뽀다구는 확실히 나고 있었다.

“뭔 일이 일어났나?”

유성탄은 다짜고짜 부술 생각을 했지만 강태웅은 먼저 우연히 들른 것처럼 하자고 했다. 무조건 싸웠다가 핵심인물들이 도망을 치면 황대산의 원수의 실체를 찾기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마을은 사방에 칼을 들고 설치는 흉악하게 생긴 장한들로 꽉 차 있었다.

“저것들이 왜 우리를 꼬나보는 거냐?”

흉악한 모습으로 따지자면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꿇릴 게 없는 낭인칠웅이었으니 그들의 눈이 고울 리 없었다.

“짜식들이 우리 앞에서 무게를 잡으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요.”

마동파가 웃기지도 않는 듯한 말투로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서로 꼬나보는 기세싸움에는 도가 튼 낭인출신들이 그들이 아니었던가.

“보아하니 무림고수도 아니고 우리랑 비슷한 낭인용병들 같은데요.”

표도행이 유심히 그들을 쳐다보고는 누군가에게 고용된 낭인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놈들이 한 명 정도는 있을 텐데…….”

장우왕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뭐야? 밖에는 흉악하게 생긴 놈들이 우글거리는데 여기는 왜 이렇게 한가한 거야!”

그 안에도 객잔은 있었다. 그들은 우선 싸우기 전에 먹기로 했다. 그런데 주점 안은 상당히 넓었지만 몇 좌석을 빼놓고는 비어 있었다.

“에이! 그래도 여자들이 좀 앉아 있어야 밥맛이 나는 법인데…….”

“손님, 준비되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산속에서 뒹굴며 수련하면서 온 유성탄 일행의 몰골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서 남들이 보면 딱 산적이 산에서 내려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점소이는 겁이 나는지 쭈뼛거리며 다가와서는 조그맣게 말했다.

“뭐, 뭐 되는가?”

강태웅이 물었다.

“만두 종류하고 소채 그리고 소면은 됩니다.”

푸짐하게 먹을 생각을 하던 모두의 얼굴에는 실망이 떠올랐다. 하지만 건식보다는 나으니 별수 없이 그거라도 시켰다.

“술은 있냐?”

철패가 그게 가장 먹고 싶었는지 물었다.

“죽엽청하고 호북 소주가 있습니다.”

“뭘로 할까요?”

“죽엽청으로 하자.”

“죽엽청 두 동이!”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황대산이 주문을 받고 돌아서려는 점소이를 불러 세워 물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점소이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하고는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야! 황대산, 너는 인상이 더러워서 안 돼! 네가 말만 걸면 다 도망가잖냐? 너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대형도 인상으로 따지면 만만치 않습니다.”

유성탄 일행이 열심히 마시고 먹는 사이 주점은 흉악하게 생긴 장한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한 것이 위에 보고가 되었고 누군지 알아보라는 명이 내려온 것이다.

“저놈들이 왜 우리를 포위하고 있을까요?”

철패가 만두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두고 보자! 시비를 걸면 싸움이 좀 일찍 시작되는 거고 안 걸면 다 먹고 시작하는 거다.”

강태웅도 신경이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굳이 먼저 반응해서 시끄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너희들 여기 와서 싸운 거는 맞냐? 어떻게 너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냐?”

“그때는 얼굴에 두건을 쓰고 있었습니다.”

“조장님, 그냥 보고만 있을 겁니까?”

이곳의 중간 책임자인 공칠룡은 보고를 받고는 부하들을 끌고 주점을 포위하고 안에 들어왔지만 그냥 식탁에 앉아서 유성탄 일행을 쳐다볼 뿐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부하 하나가 어찌할 것인지 물었다.

“밥 먹고 있잖냐! 좀더 기다려주자.”

공칠룡의 평소 성격이라면 밥 먹는다고 봐줄 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성탄 일행에게서는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죽음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특히 강태웅의 기도는 공칠룡으로 하여금 신중하게 행동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니! 이거 표도행 형님 아니십니까?”

공칠룡의 옆에 서 있던 장한 하나가 아까부터 고개를 갸웃대다가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표도행은 자기를 아는 듯한 말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저 기억 안 나십니까? 대정방의 용병시절…….”

“아! 그래 기억난다. 그래, 그동안 잘 있었냐?”

“예, 조장님. 이분이 제가 이따금 말씀드렸던 형님이십니다. 귀주지방에서는 최고로 치는 낭인이셨지요.”

공칠룡도 표도행에 대해서는 들어봤는지 몸을 일으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이름은 많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호서의 공칠룡이라 합니다.”

호서의 공칠룡이라는 말에 표도행도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공칠룡이라면 대형 축에는 못 끼어도 전국구에는 드는 낭인이었던 것이다.

“표도행이요. 그리고 여기에 계시는 분들은 나와 형제의 의를 맺으신 유성탄 마질대형과 강태웅 형님, 그리고 장우왕 형님, 황대산 형님, 철패 형님, 마동파 형님이오.”

공칠룡의 얼굴이 확 변했다. 이 산골에 들어온 지 이미 두 달이나 되어 유성탄에 대한 소문은 아직 못 들었지만 강태웅이나 장우왕 그리고 황대산은 낭인 세계에서는 짜하니 이름이 퍼진 유명인사였다.

“이거 오늘 공 모가 정말 대단한 분들은 뵙는군요. 그런데 이곳까지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공칠룡은 그들같이 낭인들로서는 전국구에서도 대형급에 해당하는 거물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곳에서 용역 일을 보는 중입니다. 낭인의 법칙을 아시겠지만 용역 일이 비밀이란 것은 아시겠지요?”

공칠룡의 말에 모두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천하는 여러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들은 서로 하는 일이 전부 달랐다.

우선은 관부를 대표하는 황실이 있었다. 누구라도 인정하는 권력의 핵심부였다. 그리고 세인들이 무림이라고 부르는 무공을 배운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 도가나 불교로 대표되는 종교를 기반으로 한 대 문파(門派)와 혈연으로 이어진 세가(世家) 그리고 뜻이 맞는 사람들의 모임인 방(房)이 있었다. 상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가 무림문파화한 회(會)와 역시 서로간의 세력 확대나 공조를 위해 모인 맹(盟)과 련(聯)이 있었다. 또한 무공을 돈을 받고 가르치는 무관(武官)과 오로지 무공만을 가르치기 위해 사비로 제자를 들여 가르쳐서 세력화한 문(門)도 무림에 속해 있었다. 무림은 정파와 사파로 나누어져 있으나 그들이 양민들의 싸움에 직접 끼어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뒤에서 조종을 하는 세력으로서 관부 다음의 권력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림인이면서도 무림인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흑도와 낭인이었다.

물론 흑도 중에는 녹림십팔채나 장강의 수로채 같은 도적 집단도 흑도에 들어간다. 하지만 보통 말하는 흑도는 고을이나 도시의 어두운 밤을 지배하는 왈짜패들을 말한다. 흑도는 인간으로서는 하기 힘든 모든 나쁜 짓을 도맡아 하면서 무림세력으로부터는 별로 간섭을 받지 않았는데 혹자는 모든 흑도의 뒤에는 무림세력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세력이 낭인이었다. 낭인들은 흑도는 아니지만 역시 무림세력에 기생해서 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세력화 하지는 못하고 나쁜 짓을 찾아서 하지는 않지만 돈에 의해 고용이 되면 나쁜 짓도 서슴지 않고 하는 양면성이 있었다.

낭인들의 주수입은 용병이라는 돈을 받고 대신 싸워주는 일과 용역이라는 역시 돈을 받고 의뢰인이 원하는 일을 해주는 일이 있었다. 용병은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일을 하니 하루에 받는 수입이 상당히 센 편이었지만 용역은 죽고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수입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낭인 중에는 용병보다는 용역 일만 전문으로 하는 자들이 더 많았는데 용병을 하는 낭인들은 용역을 하는 낭인들을 아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내답지 못하다는 것과 무공을 모르는 양민들을 괴롭힌다는 것 때문이었다.

“공 형에 대해서는 나도 얘기를 들은 적이 있소이다. 낭인 중에서는 상당히 대가 세고 자존심도 강한 사내라고 들었는데 용역이라니 뜻밖이군요.”

강태웅이 일어서며 말했다. 황대산이 일을 당한 것은 이미 여러 해 전이었으니 공칠룡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강태웅의 말이 곱지는 않았다.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용역 일은 호북의 청담 대형의 부탁인지라 나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는 일이었소.”

유성탄을 제외한 나머지 낭인칠웅의 얼굴에 살짝 놀라움이 나타났다. 호북의 청담이라면 낭인 중에서는 대형 중의 대형으로 불리는 자였다. 용병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이 무려 백여 번이었고 낭인들의 권익을 위하여 무림세력과 번번이 맞장을 뜨면서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낭인의 신화 같은 자로 나이도 이미 오십은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청담 대형에 대한 소문은 나도 들었소이다. 하지만 아무리 청담 대형의 부탁이라 해도 공 형 같은 분이 용역 일은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소이다.”

강태웅은 용역 일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맞아! 낭인이라면 죽건 살건 무조건 용병이지, 용역 같은 치사한 짓은 진정한 남자가 할 일은 아니다.”

장우왕도 이들이 용역을 나온 낭인이라는 말에 기분이 나쁜지 또 개기는 말투로 말한다.

그리고 사방의 낭인들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태웅과 장우왕이라면 낭인들에게는 하늘같은 이름이었다. 기분은 나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리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외다. 하지만 맡은 일은 확실하게 처리한다는 것이 또한 나의 신조이니 만약 정말 우연히 이곳에 들르게 되셨다면 식사만 하시고 떠나주셨으면 좋겠소이다.”

공칠룡은 더 이상의 대화는 서로간의 기분만 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말을 마치자 부하들을 데리고는 나가버렸다. 문제는 그가 유성탄 대형이라는 말을 그냥 무의식적으로 스쳐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대형께서 가만히 계십니다그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도 열심히 죽엽청만 입 안에 털어 넣고 있던 유성탄을 보며 황대산이 말했다.

“저놈들 낭인이라며? 그래도 얼마 동안은 나도 낭인이었잖냐! 한번 봐준 거지 뭐! 그런데 청담이라는 놈은 누구냐?”

“대형!”

“왜?”

“청담 대형은 낭인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아무리 없는 자리지만 욕은 좀…….”

“장우왕!”

“예.”

“너 바보냐?”

“예?”

“생각해 봐라. 황대산이 여기서 아내를 잃고 겨우 목숨을 건져서 나왔다고 했다. 거기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쫓아내고 저놈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청담이라는 놈의 명이란다. 그러면 딱 떠오르는 거 없냐? 이놈들의 배후에 분명 그놈이 있는 거야!”

유성탄은 청담이라는 이름에 아우들이 놀라는 것도 싫었고 대형 소리를 듣는 것도 싫었다. 그는 청담을 원흉으로 몰아가기로 했다.

“저도 청담 대형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느낀 걸로는 이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셨는데 이해가 안 갑니다.”

강태웅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당시 처음 쳐들어온 놈들은 낭인이 아니었습니다.”

황대산이 부언하자 표도행이 잇는다.

“흑도 놈들은 용역 일도 아주 잔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빨리 일을 끝내지요. 대신 비쌉니다. 아마 마을 사람들을 모두를 쫓아낸 후에 낭인들로 바꾸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왔을 때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마동파가 창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무슨 일이 여기에 있거나 아니면 너희들이 침입했던 사건 때문에 몰려왔을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보통 광산촌과는 좀 다른 것 같다.”

강태웅도 신중하게 말했다.

“니들 뭐 하냐?”

“예?”

유성탄의 말에 모두 유성탄을 쳐다보았다.

“여기에 일이 있건 없건 애들이 침입해서 그랬건 말건 무슨 상관이 있느냔 말이다. 난 다 먹었으니까 시작하겠다.”

“대형 성격에 수십이 넘는 용역들과 싸울 분이 아닌데 왜 저러실까요?”

“글쎄 말입니다. 상대의 수가 많으면 금자 백 냥도 그냥 포기하시는 분 아니십니까?”

마동파와 표도행이 번갈아 가며 형제들을 보며 말하자 말없이 가만히 있던 강태웅이 입을 열었다.

“그게 대형이시다. 대형께서는 언제나 말로는 의리를 찾아서 뭐 하냐고 하시지만 실제로 행동은 우리를 위해 희생해 오셨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기 두 아우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신 것이다. 그리고 대형께서 점점 달라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맞습니다. 사실은 저도 이따금은 대형이 정말 몰라서 저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충동에 계셔서 좀 정신연령이 낮아 보일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너무 세상을 몰라서 그런다 치더라도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얘기조차도 기억하고 계시다가는 써먹습니다. 물론 잘못된 상황에서 쓰시는 바람에 이상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배우신 것을 써먹으려고 노력하신다는 말입니다.”

표도행이 자신도 이미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그래요. 무식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낭인 중에 대형보다 더 무식한 놈들도 수두룩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많은 싸움에서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주 신기하단 말입니다. 안남에서의 용병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수많은 시비가 있었지만 때려서 아프게는 했지만 그 이상은 한 적이 없거든요, 거기다 더욱 이상한 것은 대형이 막무가내이기는 하지만 양민들을 건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겁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황대산이 부언하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황대산의 말대로 유성탄은 그 제어하기 힘든 성격으로 많은 시비를 만들고 싸움도 많이 일으켰지만 무공을 모르는 양민들을 괴롭힌 적은 없었다.

“잘 봤다. 나도 그 점이 전부터 이상해서 대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일어난 시비를 봐도 사파나 흑도들하고만 시비가 일어났지 정파의 무사들과는 시비가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강태웅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느낀 점을 말했다. 그러자 모두는 창가로 달려가 유성탄이 뭘 하나 보기 시작했다.

“태웅 형님! 지금 대형이 뭘 하려고 하시는 걸까요?”

표도행이 유성탄의 행동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용역들을 물리쳐 달라는 일이었으니 유성탄의 원칙대로라면 무조건 달려가 두들겨 패야 정상이었는데 유성탄은 지금 야바위 판을 벌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유성탄의 대나무로 만든 간이 야바위 탁자를 가지고 다녔다. 전에 야바위 패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돌돌 말아서 등에 매면 마치 검을 맨 것같이 보였다.

“저놈은 뭐야?”

공칠룡이 위로 올라간 후 마을을 지키는 용역들을 책임지고 있던 차동석은 유성탄이 나오더니 갑자기 야바위 판을 펼치고는 그 옆에 빛이 번쩍거리는 금자를 열 냥이나 내놓자 눈이 동그래져서 다가갔다. 금자의 위력은 대단해서 순식간에 유성탄의 야바위 판은 용역들로 포위되다시피 했다.

“뭐요?”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자, 여기 패에 점이 보이시죠? 돈을 거시고 이 점을 맞추면 열 배를 드립니다. 한번 해보세요. 순식간에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보통은 두 배나 세 배인데 유성탄은 떡밥을 크게 던졌다. 그리고 용역을 나온 낭인들의 전낭에는 용역 품삯으로 받은 돈들이 있었다.

그동안의 피나는 연습 덕인지 유성탄의 야바위 패 돌리는 손길은 엄청 빨랐다. 그리고 낭인들은 계속 돈을 잃었다. 그러자 슬슬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한 번도 맞추지 못하는 거야?”

“아무래도 당신 속임수 쓰는 거 아니야?”

한 명 두 명씩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금자 열 냥은 누런빛을 빛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용역 낭인들의 돈이 쌓이고 있었다.

“잠깐 멈춰봐라!”

이미 은자 세 냥을 잃은 차동석이 패를 돌리는 유성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왜 그러시는지요?”

“손을 한번 펴봐라!”

차동석은 유성탄이 분명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패에 돈을 건 자가 수십인데 한 명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패를 돌리는 손을 펴보라고 하는 것은 야바위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유성탄은 고객을 위하는 마음으로 공손히 대답했다.

“잔소리 말고 손을 펴라!”

차동석은 유성탄이 미적거리자 분명 속임수를 쓴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잡는 즉시 유성탄을 작살내고 금자 열 냥을 자신의 전낭 안으로 집어넣어야겠다는 달콤한 생각을 했다.

“말이 너무 짧다.”

유성탄은 고객을 위한 친절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두 번씩이나 반말지거리를 받아줄 그가 아니었다.

“이놈이!”

차동석의 입에서 드디어 욕이 나오자 유성탄이 손바닥을 펴서 들어 보였다. 잠깐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주섬주섬 돈을 전낭에 집어넣은 유성탄은 야바위 판을 접어서는 등에 맸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 자식들이 감히!”

유성탄은 야바위 판을 챙기더니 크게 소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싸움은 일 각도 안 되어 끝났다. 보고 있던 아우들의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유성탄은 너무 간단하게 삼십이 넘는 용역들을 단숨에 고꾸라뜨린 것이다.

“빨리 걸어, 자식들아! 이 자식들이 감히 누구 돈을 떼어먹으려고……!”

모두 무릎을 꿇게 한 유성탄은 한 명씩 나오게 해서는 가진 돈 모두를 야바위에 걸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떼어먹힌 돈이 뭐가 있는지 계속 자기 돈을 떼어먹으려고 했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명씩 빈털털이가 되면 당장 마을을 떠나게 했다.

‘흠! 이런 장사도 괜찮군.’

유성탄이 중얼거리는데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뭐 하는 짓이냐?”

산 위로 올라갔던 공칠룡이 보고를 받고는 급히 내려오다가는 모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자 놀라 소리쳤다.

“지금 나한테 한 소리냐?”

앞에 선 낭인에게 패를 돌리던 유성탄이 공칠룡을 흘낏 쳐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유성탄 대형이라고 소개를 받고도 자신을 아는 척도 안 한 것이 괘씸하던 중이었다.

“아니오.”

공칠룡은 유성탄의 말을 듣자 순간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했다가는 뭔가 안 좋을 것 같은 느낌을 콱 받은 것이다.

“그럼 됐고. 너도 한번 낄래?”

공칠룡은 계속되는 유성탄의 반말에 인상이 찌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이십여 명의 부하들은 즉시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공칠룡이 손을 들자 덤비지는 않았다.

“태웅 대형과 같은 일행이라고 알고 있소. 그렇다면 우린 같은 식구나 마찬가진데 어찌 이런 행패를 부리시는지 모르겠소이다.”

“태웅이하고 나하고 같은 일행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거기다 왜 내가 너랑 같은 식구냐?”

공칠룡은 강태웅의 이름을 부하 부르듯이 말하는 유성탄을 보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낭인들은 둘만 모여도 서열이 정해지고 한번 정해지면 무조건 복종과 공경이 따르는 법이었다. 그런데 유성탄의 말투를 따지면 강태웅이 유성탄의 밑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공칠룡은 자신이 흘려들었던 마동파의 말이 생각났다.

‘이런, 큰 실수를 했구나. 강태웅에게 형님이라고 하고 저자에게 대형이라고 했는데… 제대로 듣지를 않았구나.’

공칠룡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내가 아까는 제대로 듣지 않아서 실수를 한 것 같소. 유성탄 대형이라고 하셨지요?”

“그건 상관없고 지금 문제는 이놈들이 내 돈을 떼어먹으려고 했다는 거야!”

“아닙니다! 저희는 절대로 돈을 떼어먹으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차동석이 급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등에 유성탄의 주먹이 떨어졌다.

“으아악!”

사람의 몸에서 가장 신경이 둔한 곳이 엉덩이였고 다음이 등이다. 그런데 낭인으로 잔뼈가 굵은 차동석이 등에 한 대 맞고는 엄청난 비명을 지르자 공칠룡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짜식이… 까불어! 지금 니들이 감히 나 마질대형을 건드렸다. 그건 정말 엄청난 실수인거야.”

“잠깐! 내가 아까는 잠시 실수를 했지만 같은 낭인으로서 일을 방해하는 것은 낭인들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은 아실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소?”

“내가 언제 네 일을 방해했는데? 나는 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내가 속임수를 썼느니 뭐니 하면서 강압적으로 내 돈을 빼앗으려 했다. 누가 잘못이냐?”

“놀랍군요. 대형이 정말 저런 생각을 하시다니…….”

마동파가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자 감탄을 했다. 유성탄은 분명 시비를 걸었지만 용역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나 역시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래 돈 때문에 생긴 시비니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겠지.”

강태웅도 유성탄이 정말 저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한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은 낭인으로 용역 일을 하는 낭인을 방해한다는 것은 낭인세계에서는 욕먹을 일이었지만 분명 지금의 싸움은 용역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적인 돈 싸움이 된 것이다.

공칠룡은 유성탄이 시비를 걸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가는 자신의 부하들이 먼저 돈을 빼앗으려 했다는 말에 순간 멈칫하더니 무릎을 꿇고 있는 부하들을 죽 둘러보았다.

“이 공 모가 비록 일개 낭인이기는 하지만 일을 시작하면 나름대로 규율은 똑바로 잡소이다. 난 내 아이들이 잡배들같이 돈을 빼앗으려 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소!”

유성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공칠룡을 쳐다보았다.

“지금 네 말인즉슨 내가 거짓말을 쳤다 이 말인데… 나 유성탄은 한번 입 밖으로 뱉은 말은 언제나 책임을 져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보고 황금의 입을 가진 사나이라고 하지. 그런데 너는 지금 나를 모욕하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유성탄이 하는 말을 들으며 아우들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너무 말을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공칠룡과 그를 따르던 이십여 명의 부하들도 곧 유성탄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대형! 공칠룡은 낭인들 사이에서는 형님 소리를 듣는 자입니다. 이런 식의 대접은 하시면 안 됩니다.”

강태웅은 싸움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어나오더니 유성탄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칠룡 정도 되는 사람을 많은 낭인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한다는 것은 너무하다 싶었던 것이다.

“왜? 이놈이 화정보다 더 유명한 놈이냐?”

“그건… 아닙니다.”

“화정도 내 앞에서 살려달라고 빌었는데 그것보다 못한 놈을 내가 왜 사정을 봐주냐?”

유성탄의 주먹에 머리를 맞은 공칠룡은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화정이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했다는 말은 귀에 들어왔다. 화정은 공칠룡과는 격이 다른 대형이었다. 그런 화정이 유성탄에게 그렇게 당했다면 자신이 실수를 해도 엄청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태웅, 너도 조용히 해! 자꾸 말리면 너도 죽인다.”

유성탄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강태웅도 입을 닫았다.

“나 오늘 무지 기분이 안 좋거든. 그래서 너희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그런다. 하지만 니들이 당장 이 마을에서 사라진다면 한 번은 봐주마. 그리고 청담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 가서 전해라. 천하의 낭인 중에 대형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유성탄뿐이다. 만약 다시 또 대형 행세를 한다는 말이 들려오면 내가 턱주가리를 날려버릴 거라고 말해라.”

무릎을 꿇고 있던 오십여 명의 낭인 용역들은 다 죽인다는 말에 가슴이 덜컹했다가는 당장 마을을 나가면 봐준다는 말에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열을 셀 때까지 한 놈이라도 이 마을에 남아 있는 놈들이 있으면 알아서들 해라. 당장 가라! 하나! 둘! 셋!”

유성탄이 셋까지 세자 낭인들은 꽁지가 빠져라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강한 공칠룡에 소문으로만 듣던 화정까지 작살을 낸 유성탄에게 반항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대형,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내가 사실은 머리가 천재거든! 그동안 나의 특출 남을 알리기 싫어 그냥저냥 지냈지만 이제부터는 나의 진면목을 좀 보여도 될 것 같아서 생각 좀 했지.”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전에 도박장에서 나한테 시비 건 놈들이 있었거든. 그때 내가 그놈들을 상대로 해서 짭짤했었어. 이 자식들이 보기와는 달리 돈을 꽤 가지고 다니더라고. 그런데 그게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거야! 그래서 저놈들을 상대로 돈을 벌고 시비도 걸면 괜찮겠구나 했지.”

“생각하셨다는 것이 그거였습니까?”

“그럼! 니들은 내가 뭘 생각했기를 바라는 건데?”

“아닙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을 하셨습니다.”

유성탄의 말에 모두가 크게 웃어젖혔다. 그들이 생각한 이유와는 달랐지만 어쨌든 별 탈 없이 시작은 깨끗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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