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포구의 협행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냐?”
혈문오살 중 지정우와 나야종 그리고 전황이 유성탄 일행이 머물고 있는 포구에 도착하자 전화생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러자 지정우가 전화생에게 물었다. 지정우는 이곳에 도착하면 전화생은 이미 목표물을 찾아 떠나고 어디로 갔는지 표식만 남아 있을 걸로 예상했었던 것이다.
“그놈들이 갑자기 여기에서 멈췄다. 아직 이유는 모르지만 내 짐작이 맞다면 누군가와 접선을 하지 않을까 싶다.”
“접선?”
“고화월의 말이 일개 낭인 몇 명이서 마룡방을 건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거다. 아마 분탕질을 치고는 이곳에서 일을 시킨 자거나 아니면 조력자를 만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하더라.”
“고화월이 이곳에 있었냐?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먼저 이곳에 와 있었군. 어쨌든! 그놈들이 접선을 누구와 하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가 맡은 일은 그놈들의 목이지 그놈들의 배후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놈들은 어디에 있느냐?”
지정우는 여전히 권태로운 표정을 지으며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맡은 임무만 처리하면 될 것을 쓸데없는 데까지 머리를 쓰는 고화월이 귀찮았다.
“너 같은 돌머리를 우리들의 수좌로 삼은 혈문의 수뇌들이 나는 참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지정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에는 아주 화사한 옷을 입은 여인이 한 명 서 있었다.
“고화월, 너무 함부로 말하는구나.”
“왜? 가서 이르게? 이르려면 일러! 난 그런 거 전혀 겁 안 난다.”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하는 그녀는 얼굴이 오밀조밀한 귀여운 형이었다. 이미 나이가 이십대 후반이었는데 보기에는 마치 십대같이 보이고 있었다.
“지정우, 네가 언제나 정일호에게 뒤지는 이유가 바로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그 머리 때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냐?”
고화월이 정일호란 이름을 언급하자 지정우의 눈에 살기가 잠시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흥! 절대로 살기를 나타내서는 안 되는 살수가 살기를 나타내다니! 확실히 정일호가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구나?”
“고화월, 누가 정일호를 무서워한다는 거냐? 다시 한 번 그따위 망발을 하면 아무리 너라 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정일호는 혈문의 특급살수인 혈점사의 이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정우와 정일호는 수련을 받는 아이들의 대장으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지정우는 한 번도 정일호를 넘어서 본 적이 없었다. 현재의 지정우에게는 정일호야말로 진짜로 죽이고 싶은 살명부의 일호였다.
“언제까지나 살수 짓만 하고 살 거야? 우리도 뭔가 비상을 하려면 무림이 돌아가는 사정과 어떻게 처신해야 양지로 나설 수 있을지 정도는 이제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니겠냐? 이번 살행은 삼 개월의 시간을 받았다. 나는 우선 저자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뭔지 그리고 그럼으로써 저들이 얻으려고 하는 것이 어떤 건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행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다 알아낼 때까지는 우선 참도록 해라.”
지정우의 화를 너무 돋우는 것은 그녀로서도 꺼림칙했는지 그녀는 말을 돌리더니 어디론가 걸어가 버렸다.
“고화월의 말도 일리는 있다. 어차피 혈문도 이제는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무림사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유리할 것이고… 우선은 시간이 있으니 그놈들이 뭘 하려고 하는지 두고 보자.”
나야종이 지정우의 화를 풀어줄 겸 끼어든다.
“귀찮아! 정말 귀찮아! 열흘 시간을 준다고 해라. 그 안에 알아낼 것이 있으면 다 알아내라고 하고 만약 그때까지 못 알아낸다면 곧장 살행에 들어간다. 그리고 열흘 동안은 나를 찾지 마라.”
지정우는 말을 마치고는 어디론가 훌훌 걸어가 버린다. 열흘 동안 기루에서 진탕 놀려는 것이 분명했다.
“대형, 일주일이 지났는데요?”
“가만있어 봐!”
유성탄은 열심히 야바위 패를 뒤집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을 해도 다섯 번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씨! 아무리 봐도 오늘도 재수가 없을 모양인데… 제대로 돈을 받을 수 있을라나?’
“가자!”
유성탄은 야바위 점은 포기했는지 야바위 패를 품에 집어넣고는 가자고 소리쳤다.
“그런데 대형, 도대체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유성탄이 급하게 재촉하자 강태웅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히려 싸움이 나면 유성탄에 대한 걱정은 전혀 안 하는 강태웅이었지만 뭔가 일을 벌이는 것 같은 때는 왠지 모르게 무척 불안한 그였다.
“점박이 놈을 만나러 가는 거지.”
“점박이 놈이오? 그놈 아주 평판이 안 좋던데… 그놈은 만나서 뭐 하시려구요?”
그동안 유성탄의 명으로 점박이를 감시하던 표도행이 점박이에 대한 소문까지 들었는지 놀라 물었다.
“어떻게 안 좋은데?”
마동파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 자식 아주 악질 고리대금업자더라고요. 누구든 그놈에게 걸렸다 하면 완전 거지를 만들어 버린답니다. 특히 딸이나 아내가 예쁘장하다고 소문나면 어떡하든 엮어서 팔게 만든다는군요.”
“그놈 아주 죽일 놈일세! 이제 보니 대형께서 협행을 하시려고 그러시는군요.”
장우왕이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협행? 무슨 협행?”
“지금 점박이라는 놈이 아주 나쁜 놈이니 가서 혼 좀 내주시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놈이 나쁜 놈인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유성탄의 대답에 모두 어리둥절해서는 쳐다본다.
“그럼 그런 놈을 뭐 하러 만나시려는 겁니까?”
“히히히! 내가 이제 말해 주마. 내가 엄청난 사업을 하나 구상했거든. 뭐냐 하면…….”
유성탄이 걸음을 재촉하며 자신이 이제부터 벌일 사업에 대해 말해 주자 강태웅이 정색을 하며 반대한다.
“대형! 그건 안 됩니다. 대형께서는 영웅이 될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리대금업을 하시겠다는 말 아니십니까? 안 됩니다. 절대로 대형께서 그런 더러운 일에 손을 담그시는 것을 저는 묵과할 수 없습니다.”
‘에이! 내 이럴 줄 알고 얘는 안 데려가려고 그랬는데… 하여간에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유성탄이 강태웅의 반대에 어떡하나 잔머리를 굴리려고 하는데…….
“태웅 형님, 고리대금업을 하는 놈들에게 고리대금을 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닌 듯 싶은데요. 지금 대형께서는 선량한 양민을 고리대금으로 괴롭히시려는 것이 아니라 악질 놈에게 고리대금이 얼마나 나쁜지 가르쳐주시려는 것 같은데 저는 찬성입니다.”
황대산이 괜찮은 것 같다고 나서자 나머지도 찬성을 한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런 고리대금업을 해서 선량한 양민을 괴롭히는 놈들만 우리도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는 괴롭히는 겁니다. 저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마동파도 한마디 거든다.
“하하하! 역시 똑똑한 아우들이라 다르구나. 내가 그런 마음인 것을 어떻게 알았냐?”
유성탄은 기분 좋은 듯 황대산과 마동파를 쳐다보더니 강태웅을 흘겨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련한 아우는 언제나 설명을 해줘야 알아들으니 참!”
“그래도 안 됩니다. 대형의 위명에 누가 되는 일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가서 그놈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할 것이니 대형께서는 절대로 끼시면 안 됩니다.”
‘아 이게! 하여간에 똥고집은 씨!’
“알았다. 그런 나는 옆에서 구경만 할 테니 돈은 너희가 받아라. 하지만 너희들이 받아도 나는 한 푼도 못 준다. 그것은 우리 확실히 하도록 하자.”
유성탄의 말에 아우들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유성탄은 돈에 걸신이 들린 것같이 행동을 하지만 이상하게 불쌍한 사람을 그냥 보지를 못했다. 그동안에도 거지 같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아까워서 손을 발발 떨면서 돈을 꺼내서 주곤 하는 것을 여러 번 본 그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자기는 거지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욕하곤 했다.
“몇 놈이라고?”
“모두 일곱 놈입니다. 낭인들 같은데 아무리 봐도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 같습니다.”
토룡방에서 무사 삼십 명을 끌고 나온 외당 당주 건철부는 손으로 턱수염을 만지며 점박이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까짓 낭인 일곱에 우리까지 불러야 했다는 말이냐?”
“그냥 낭인들이 분명히 아니라니까요!”
건철부는 점박이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비록 사파이기는 하지만 점박이가 하는 짓은 그 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맡은 구역의 크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많은 상납을 하는 그를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았다. 지금 당장 가서 그놈들을 끌고 와라. 내 물고를 내주마.”
건철부의 말에 점박이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가서 끌고 올 수 있었다면 그냥 그들이 처리하지 뭐 하러 상당히 많은 돈이 나갈 것을 뻔히 알면서 토룡방에 도움을 청했겠는가.
“그게…….”
“됐다. 그놈들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라. 내가 직접 끌고 오겠다.”
건철부는 이미 점박이가 그들을 끌고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조금 더 자신들의 도움이 빛이 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는 한 번 해본 소리였다.
점박이가 안내를 맡고 건철부와 토룡방의 방도 삼십 명이 위풍당당하게 점박이의 본부를 나섰다. 그리고 점박이의 부하 이십여 명이 손에 갖가지 연장들을 들고는 뒤를 따라나섰다.
‘아무리 봐도 보통 낭인인데……?’
고화월은 유성탄과 아우들이 점박이를 만나러 길을 떠나자 그 뒤를 따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고화월은 대단히 똑똑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 머리 덕에 혈문오살이라는 일급 살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납치되어 왔는지 모두 잊어버렸다. 완벽하게 혈문의 주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주구로 만족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혈문을 자신이 접수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무공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체득했다. 그녀는 살수행을 하면서 살수로서는 금기사항인 의뢰인에 대한 것과 그가 왜 청부대상을 죽이려 하는지 등등 모든 것을 기록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치부책에는 무림인들이 알면 경천동지할 사실들이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치부책이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청부를 받고는 그녀는 가장 먼저 느낀 것이 대마룡방의 두 개 무력집단을 괴멸시킨 낭인칠웅이라는 낭인들에 대한 흥미였다.
낭인이란 살수보다도 더 천대를 받는 족속들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낭인들이 무림의 대파인 마룡방에 시비를 걸고 오히려 그들의 무력집단을 이겼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된다면 그들을 포섭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 보이는 낭인칠웅의 모습은 실망스럽기만 했다.
“어라!”
“뭐가 보이십니까?”
눈이 좋은 유성탄이 뭔가를 보더니 우뚝 섰다. 그러자 바로 옆에 서 있던 장우왕이 물었다.
“점박이 그놈 보기보다는 신용이 있는가 보다. 빌린 돈을 주려고 오고 있었나 본데?”
유성탄의 말을 들은 강태웅은 눈을 치켜뜨더니 말했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해라.”
그리고 나머지 아우들도 상황을 눈치 챘는지 손목부터 풀기 시작했다. 유성탄은 돈을 주려고 온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경험적으로 점박이 같은 놈이 먼저 돈을 주려고 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여간에 태웅이 얘, 은근히 호전적이라니까…….’
돈을 주러 오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싸울 준비부터 하라는 강태웅의 말에 유성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놈들입니다. 그리고 저기 삐쩍 마르고 산적같이 생긴 놈이 우리에게 시비를 건 놈입니다.”
점박이가 유성탄을 가리키며 원한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저 자식이……!”
유성탄이 점박이가 하는 말을 듣고 확 달려들려고 하자 강태웅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 정도 작은 고을의 흑도패 정도는 우리에게 맡기십시오.”
“저놈은 놓치면 안 된다.”
유성탄이 점박이를 가리키며 소리치자 점박이의 눈에 공포가 언뜻 비쳤다. 아직까지도 유성탄의 주먹은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디서 무게 잡던 놈들이관데 감히 토룡방이 관리하는 곳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냐?”
우선 건철부가 기세를 잡기 위해 소리쳤다. 그리고 그 외침을 신호로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싸움구경도 구경 나름이었다. 비록 남궁세가의 입김이 강한 안휘인지라 큰 사파는 없었지만 그래도 토룡방이라면 이 근처에서는 악명을 떨치는 사파였다. 구경하다가 엄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모험을 할 양민들은 없었다.
“토룡방? 표 아우! 이 지역 흑도라고 하지 않았나?”
뜬금없이 무림의 방파 이름이 나오자 강태웅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표도행을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별 볼일 없는 이 지역 흑도입니다. 아마 토룡방과 수직관계를 맺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표도행의 말에 강태웅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또다시 무림방파와 시비가 벌어지게 생긴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강태웅이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거기 점박이라는 친구가 우리에게 돈을 빌려갔소. 갚을 때가 됐기에 받으러 온 것뿐 토룡방과 시비를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강태웅은 이렇게 된 이상 아예 협행을 하는 낭인칠웅으로 자리매김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마룡방과는 상대도 안 되는 조그만 토룡방 정도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강태웅도 이 정도 말에 토룡방이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축적을 위해서는 한마디 해놓아야 했다.
“돈을 빌렸다… 하하하! 재미있구나. 여기 홍두령이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돈을 빌렸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건철부는 말을 하면서 점박이를 쳐다보았다. 진짜냐고 묻는 것이었다. 만약 진짜 채무관계에서 시작된 시비라면 그들은 끼어들 수 없었다. 점박이의 고리대금으로 고생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부나 무림정파에서 끼어들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리대금은 합법이었고 돈을 갚지 않는 자가 죄인인 시절이었다.
“전 절대로 돈을 빌린 적이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돈밖에 없는데 뭐 하러 돈을 빌린단 말입니까?”
점박이의 항변에 건철부가 미소를 지으며 강태웅을 쳐다보았다. ‘어떠냐!’ 하는 표정이었다.
“저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유성탄이 흥분해서 나서려 하자 강태웅이 먼저 소리쳤다.
“그대가 우리에게 돈을 빌려간 것을 본 사람이 여럿이 있소. 증인이 필요하다면 증인을 데려오겠소.”
“채무관계에 증인은 아무런 효과도 없고 증거능력도 안 된다. 내가 수결을 한 서류가 있으면 내놔봐라!”
점박이가 강태웅의 말에 직접 반박을 하자 강태웅은 슬쩍 유성탄을 쳐다보았다. 혹시 종이를 받은 것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 얼굴이었지만 유성탄의 어리둥절한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곧 포기하고는 다시 점박이를 쳐다보며 외쳤다.
“돈을 빌려가고도 갚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린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우리는 취할 수밖에 없소. 관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겠소.”
강태웅의 말에 이번에는 건철부가 말을 받았다.
“안휘의 서쪽지역에서 토룡방은 그럭저럭 힘 좀 쓰는 문파다. 일개 낭인들치고는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있구나.”
“뭐라고! 이것들이 두고 보자 보자 하니까 우리를 완전히 물로 보네! 우리가 마룡방과 정면으로 맞짱을 뜨고 있는 낭인칠웅이다. 토룡방 너희들이 이 일에 끼어들면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개기기 잘하는 장우왕이 다시 개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응이 좀 달랐다. 건철부의 안색이 확 변한 것이다. 이미 낭인칠웅의 이름은 절강에서부터 안휘의 서쪽 끝인 이곳까지 퍼져 있었다.
‘뭐야? 이거 정말 낭인칠웅이면 잘못하면 저 점박이 놈 하나 때문에 방 전체가 흔들거릴 수도 있는데…….’
건철부는 판단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마룡방이 자랑하는 무력집단을 괴멸시켰다고 소문난 그들이었다. 정말로 소문이 사실이라면 토룡방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건철부는 점박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낭인칠웅이라는 이름을 듣고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고 한다면 토룡방을 따르는 흑도들이 전부 돌아설 수도 있는데…….’
건철부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갈등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강태웅은 즉시 장우왕의 으름장이 먹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잠시 기다려주기로 했다.
“당주님! 뭘 생각하십니까? 당장 저놈들을 쓸어버리지 않으시구요!”
점박이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자 급히 재촉을 하고 나섰다.
“가만있어라! 너도 알다시피 양민들의 채무관계에 무림세력이 끼어드는 것은 불가사항이다!”
건철부는 아무래도 낭인칠웅과 시비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이유를 채무관계에서 찾았다.
“저놈들과 나는 채무관계가 없습니다!”
점박이는 놀라서 커다랗게 외쳤다.
“낭인칠웅에 대한 이름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소이다. 본 토룡방은 채무관계에 끼어드는 것은 아주 싫어하오. 그래서 우선 이 일에 대해서는 여기서 손을 떼겠소. 하지만 만약 채무관계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우리로서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건철부는 점박이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냥 물러날 수는 없는 법! 입에 발린 소리를 한마디하고는 부하들을 보고는 외쳤다.
“우리는 그만 돌아간다!”
“당주님! 당주님 그냥 가시면 저는……!”
점박이가 놀라서 소리쳤지만 건철부와 그 부하들 삼십여 명은 무정하게 사라져버렸다.
“이 나쁜 놈들! 뭘 보고 있는 거냐? 쳐라!”
점박이는 사라지는 건철부를 보며 욕을 한마디 하더니 남은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지 못한 왈짜패들로서는 낭인칠웅을 당할 수는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토룡방의 건철부가 사라지고 점박이와 그 부하들이 강태웅을 비롯한 아우들에게 곤죽이 되게 맞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점박이와 그 부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고을 사람들로서는 너무 후련한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게 뭐냐?”
유성탄이 점박이가 내놓은 금자 한 냥을 보면서 물었다.
“저번에 빌린 돈입니다.”
“우하하하하하! 정말 웃음밖에 안 오는구나. 우하하하하!”
입을 크게 벌리며 호탕하게 보이기 위한 웃음을 터트렸지만 품위만 떨어뜨리고 있는 유성탄이었다.
“너 나 놀리냐?”
“으악!”
크게 웃어젖힌 유성탄이 주먹으로 한 대 갈기자 점박이는 비명을 지르며 땅을 긴다. 그리고 갑자기 사방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히히! 때리면서 박수 받기는 처음인데… 그냥 사정없이 더 때려?’
“대형, 무게를 잡으십시오.”
유성탄의 갈등을 눈치 챈 강태웅이 급히 자리를 잡아주었다. 원래는 유성탄은 놔두고 강태웅이 모두 다 처리하려고 했지만 그들이 점박이의 부하들과 점박이를 꿇어앉히자 고을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들의 얼굴에서 통쾌함을 본 강태웅은 유성탄을 올리기 위해 심문을 유성탄에게 맡긴 것이다.
“너한테는 돈 빌려주고는 받는 법이 있잖아! 그런데 왜 나는 그냥 한 냥만 돌려주는 거냐?”
“그럼 얼마나……?”
“하루에 두 배씩이니까… 이틀이면 두 냥, 사흘이면 네 냥, 나흘이면 여덟 냥, 닷새면 수십 냥, 엿새면 수백 냥, 그리고 이레니까… 모두 몇 냥이냐?”
점박이는 유성탄의 계산법에 눈이 동그래졌다.
“여덟 냥이 어떻게 하루 만에 수십 냥이 됩니까?”
“안 되는 거야?”
“예! 으아악!”
대답을 하던 점박이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나왔다.
“안 된다면 왜 안 될까~요?”
“으아악! 아악! 됩니다! 분명히 됩니다!”
점박이는 언제나 그가 신봉하는 ‘주먹은 무엇보다도 가깝다’는 진리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동안과는 위치가 바뀐 것이 문제였다.
“네가 된다고 했다. 전부 다 봤겠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분명히 네가 된다고 한 거다.”
“예, 제가 된다고 한 겁니다.”
“그럼 칠 일이면 얼마냐?”
“으흐흑! 제가 가진 돈이 모두 금자 오십 냥입니다. 모두 드리겠습니다.”
“금자 오십 냥이라……! 너 내가 애들 코 묻은 돈 먹겠다고 여기서 일주일이나 기다린 줄 아는 모양인데 좋다, 오늘부터 칠 일간 나한테 맞으면서 살자.”
유성탄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으아악! 아니고 나 죽는다.”
점박이도 돈에 대한 집착은 유성탄에 절대 지지 않는 자였다. 하지만 유성탄의 주먹은 너무 아팠다.
“솔직히 제가 비상용으로 꼬불쳐 놓은 돈까지 다 하면 금자 백 냥은 됩니다. 다 드리겠습니다.”
‘으잉! 금자 오십 냥이 몇 대 맞더니 백 냥이 되네? 그렇다면 더 때리면 이백 냥 또 때리면 우와, 천 냥! 더 때리자.”
“우리는 낭인칠웅이라고 불리는 무림인입니다. 오늘 저희 대형이신 유성탄 대협께서 여러분을 괴롭히던 악덕 고리대금업자 겸 왈패인 점박이란 놈을 징치하고 이곳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에게서 빼앗은 돈은 모두 여러분에게 나눠 드릴 것입니다.”
갑작스런 강태웅의 외침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고을 사람들에게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아니 저게! 자기 돈도 아니면서 누구 마음대로… 이 씨!’
유성탄은 점박이로부터 모든 돈을 긁어내는데 성공했다. 심지어는 그가 머물던 본부의 집문서까지 빼앗은 그는 마음이 흡족했다. 적어도 금자 삼백 냥은 넘을 듯싶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호랑말코 같은 소리란 말인가.
왜? 내가 피 같은 내 돈을 알지도 못하는 고을 사람들에게 나눠 준단 말인가! 유성탄은 분연히 일어나서 아니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나 유성탄은 아낌없이 여러분에게 돈을 나눠 줄 것입니다.”
“와! 유성탄 대협 천세! 낭인칠웅 천세!”
하지만 환호하며 기뻐하는 고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유성탄은 속마음과는 다른 말이 입에서 나오고 만다.
‘에이 씨! 힘들게 죽 쒀서 남 줘버렸네. 내 돈 삼백 냥 아까워라!’
* * *
드디어 내 인기가 하늘까지 오르기 시작했지. 그때 난 느꼈어. 역시 하늘을 착한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을 말이야! 하긴 나같이 통 큰 사람도 보기 힘들지, 단칼에 금자 수천 냥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다 나눠 줬으니 말야!
* * *
‘이상하네? 분명 뒤에 누군가가 있을 것으로 봤는데…….’
고화월은 낭인칠웅이 하는 짓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녀의 경험상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일을 행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흥미로워. 호호호! 잘하면 뭔가 건질지도 모르겠는걸. 아니면 그냥 죽이는 거지 뭐!’
“대형, 어째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마동파가 유성탄의 얼굴이 별로 편해 보이지를 않자 은근슬쩍 물었다.
“뭐! 네가 점쟁이냐? 내가 편한지 안 편한지 네가 어떻게 알아!”
유성탄의 말을 들으며 마동파가 슬쩍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안 편한 게 맞구먼! 대형은 괜히 나한테…….’
‘야바위 점이 계속 두 개 아니면 세 개밖에 안 나오기에 내 오늘 재수 없을 줄 알았지만 어떻게 내가 빌려준 한 냥까지 회수를 못 하다니… 유성탄 최악의 날이다.’
유성탄은 돈을 못 번 것은 차치하고 점박이한테 빌려주었던 금자 한 냥은 회수해야 했는데 그것까지 고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돈에 묻어서 사라져버리자 심통이 확 나 있었다.
그리고 유성탄의 기분이 그러니 전부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두의 가슴에는 이상한 감동이 흐르고 있었다. 언제나 천대받던 그들이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천세 삼창까지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형, 이제 떠나야지요?”
강태웅이 유성탄을 보며 말했다.
“당연히 떠난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배 안 탄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빡센 수련에 들어갈 것이니 알아서들 해라.”
드디어 수련을 핑계로 아우들을 괴롭히기로 작정한 유성탄을 보며 모두 피식 웃는다.
“언제까지 저놈들 미친 짓을 보며 따라갈 것이냐?”
유성탄과 아우들이 다시 뛰기 시작하자 지정우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고화월에게 물었다.
“사람이 좀 진득해 봐라. 너는 모든 것이 좋은데 참을성이 없어서 대장이 못되는 거다.”
고화월이 다시 지정우의 속을 긁는 소리를 하며 낭인칠웅을 쳐다보았다. 나머지 삼살은 둘의 싸움에 끼기 싫은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고화월이 낭인칠웅이 떠나니 빨리 나오라는 말에 건식도 별로 준비하지 못하고 낭인칠웅을 따라나선 혈문오살은 벌써 삼 일째 굶고 있었다. 살수 수업 중에는 한 달 이상 굶는 훈련도 있었으니 삼 일 굶은 것이 그들에게는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성탄은 아우들을 산으로만 끌고 다니면서 엄청 굴리고 있었는데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생각 외로 고역이었다.
“저따위 허접한 수련으로는 고수가 될 수 없다. 그 말은 저들이 그리 특별한 자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쩌자고?”
지정우의 말에 고화월은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반문한다.
“여기서 다 처치하고 돌아가자.”
“네가 우리 중에서는 대장이니 네가 그러자고 하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이후로는 내 도움은 바라지 마라.”
고화월의 말이 떨어지자 지정우는 입을 닫았다. 혈문오살이 지금까지 살행에서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데에는 고화월의 머리가 대단히 중요한 일을 했기 때문에 지정우로서는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형, 좀 쉬지요. 이러다 죽겠습니다.”
장우왕이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성탄에게 사정했다.
“저도 죽겠습니다.”
다른 아우들까지 죽겠다고 나오자 유성탄은 강태웅을 슬쩍 쳐다보았다. 강태웅이 마음대로 돈을 나눠 준 것에 대한 징치의 의미가 있으니 강태웅이 죽겠다고 해야 하는데 강태웅은 아직도 견딜 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웅, 저걸 더 굴려야 하는데… 에이, 이러다 진짜 죽으면 골치 아프다.’
“쉰다!”
유성탄의 말에 모두 살았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벌렁 누워버린다.
‘이상하단 말야? 분명 무언가가 우리를 쫓아오는 것 같은데… 보면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유성탄은 혈문오살이 은잠술로 숨어 있는 곳을 흘깃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혈문오살의 은잠술은 여간한 고수는 알아채기 힘든, 살수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절기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무려 오십여 장이 넘게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데 알아채는 유성탄이었다. 처음 충동에서 나왔을 때와는 완전하게 달라진 그였다. 물론 그것은 흑혈신마의 덕이었지만 유성탄은 죽을 때까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