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정자운과 백리빙 (17/79)

제8장 정자운과 백리빙

“대형, 뭐 걱정이라도 계십니까?”

생각지도 않게 마룡방의 청룡대까지 작살을 내게 된 낭인칠웅의 사기는 하늘까지 올라 있었다.

자신들이 어느 정도 늘었다고는 생각했지만 무려 그들보다 다섯 배가 넘는 수의 청룡대와 싸워 이긴 것이다.

물론 유성탄의 힘이 가장 컸지만 그들도 최소한 두 명씩은 맡아서 싸웠다.

비록 여러 군데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청룡대원들의 무공이 거의 일류에 가깝다는 소문이 맞다면 상대적으로 그들의 실력이 무림의 일류고수의 실력을 넘어섰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낭인들의 필수품 중 금창약은 가장 중요했다. 그만큼 상처를 자주 입는다는 말도 된다.

대충 약을 바르고 상처를 묶은 그들은 빨리 사천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유성탄의 얼굴이 영 밝지가 않은 것이다. 보다 못한 표도행이 물었다.

“아까 그놈… 거기 대장 놈 말이야, 내가 엄청 세게 쳤는데 죽지 않았나 몰라!”

“죽으면 잘된 건지 뭘 걱정하십니까?”

“야! 아버지께서 그러셨단 말이야.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안 된다고.”

“아버님께서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데 그냥 참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 아버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유성탄의 말에 강태웅이 급히 달래듯이 말하자 유성탄이 강태웅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무식하게 말하는 놈이 제일 싫다.”

유성탄의 말에 강태웅이 아차 하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있다는 말입니다.”

‘불가항력이 그런 뜻이란 말이지. 다음에 써먹어야지.’

유성탄은 강태웅의 설명을 듣자 입으로 다시 한 번 외더니 머리에 집어넣었다.

“또 만나네요!”

완전 거지꼴에 이제는 몸에 온통 피까지 묻혀 흉측한 몰골로 변한 그들 앞에 갑자기 백리빙이 나타났다.

“하하하! 우리 인연이 있나보다.”

유성탄이 방금까지 꿀꿀하던 생각을 잊어버렸는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서 가까이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어쭈! 말이 갑자기 짧아져! 확 눈을 빼버려 말아? 에이, 참자.’

백리빙은 유성탄이 은근슬쩍 말을 놓자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말했다.

“어디서 싸웠어요?”

모른 척하며 묻는 그녀는 코를 실룩하더니 유성탄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악취가 풀풀 풍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남자 몸에서 이렇게 달콤한 냄새가 나지?’

지룡봉의 꿀은 여인을 유혹하는 최고의 상품이기도 했다. 온몸에서 풍기는 유성탄의 달콤한 냄새에 백리빙은 새삼스레 유성탄이 달라 보이고 있었다.

“싸우다니? 우리가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데… 헤헤헤, 그래 나와 친해지고 싶어?”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왜 댁 같은 사람하고 친해지고 싶어요?”

“아니야? 그럼 말고… 야! 가자.”

유성탄의 감각에 백리빙의 변화가 감지됐지만 유성탄의 말은 그녀가 잠시 품었던 유성탄에 대한 관심을 다시 도망가게 만들었다.

도대체 언제 봤다고 여자보고 친해지고 싶냐고 묻는단 말인가.

하지만 포기도 무척 빠른 유성탄은 아니라는 말에 당장 안면을 몰수하더니 아우들에게 가자고 하더니 백리빙의 옆을 지나쳐 버린다.

“이것 봐요!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라고요.”

백리빙이 그냥 지나치는 유성탄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내게? 나랑 친해지고 싶지 않다며?”

“뭐예요! 당신은 할 얘기가 그것밖에 없어요?”

“응.”

유성탄의 대답에 백리빙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네. 지금 어디로 가시는 중이에요?”

“우리? 우리 사천으로 가는데.”

유성탄이 생각 없이 목적지를 말하자 강태웅이 급히 막으려 했지만 이미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사천이요? 잘됐네! 지금 아가씨하고 제가 사천으로 가는 길이거든요. 어때요? 우리 경호를 맡아주면 후사할 텐데.”

“후사(後謝)? 후사면 일이 끝난 다음에 사례하겠다는 말 아닌가?”

유성탄이 오랜만에 아는 말이 나왔는지 중얼거리더니 다시 아우들을 보며 말했다.

“가자!”

유성탄이 흥미가 없다는 듯이 돌아서자 백리빙이 급히 다시 불렀다.

“이봐요! 싫다는 거예요?”

“전사(前謝)하면 생각해 본다. 하지만 후사는 나 유성탄에게는 없는 말이다.”

‘전사? 뭐야… 먼저 사례하라는 말인가 본데… 그런 말도 있었나?’

“알았어요. 전사할게요.”

“얼마 줄 거냐?”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성탄이 후딱 돌아서더니 거래에 들어갔다.

“얼마나 원해요?”

“많이 원한다.”

“정말 많이만 주면 되는 거예요?”

“물론이다. 많이만 주면 사천까지 내가 안전하게 데려다줄 것이다. 약속한다.”

처음으로 그가 말하는 많이라는 말을 알아듣는 백리빙을 유성탄은 입맛까지 다시며 쳐다보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배고파요?”

“왜?”

“왜 저보고 입맛을 다시는 거예요?”

“아! 그냥 먹고 싶어서.”

‘아까 보니까 엄청 먹더구먼.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다행히 유성탄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백리빙이었다. 아마 알아들었다면 유성탄의 눈을 뽑아버리려고 당장에 달려들었을 것이었다.

“대형,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백리빙이 정자운을 부르러 간 사이에 강태웅이 조심스럽게 유성탄에게 말했다.

“뭐가?”

“지금 우리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경호를 부탁할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염집 처자로 보이는 여인들이 우리에게 호위를 부탁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를 않습니다. 거기다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것도 뭔가 찜찜하구요.”

“맞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보통 여자들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뭔가 우리에게 노리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마동파도 뭔가 이상하다는 투로 말을 했다.

“우리에게 노린다? 야! 우리가 가진 거라고는 X알 두 쪽밖에 없는데 그걸 노리는 거면 참 좋겠는데… 그지?”

전혀 심각하지 않은 유성탄의 대답에 아우들은 모두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약입니까?”

강태웅을 비롯한 아우들은 정자운이 나눠 준 약을 상처에 바르고는 놀라서 물었다.

쓰리고 아프던 상처가 그녀가 건네준 약을 바르자마자 순식간에 아문 것처럼 나아버린 것이다.

“유 대형께서는 다치신 곳이 없으신가요?”

마치 금방울이 울리는 듯한 정자운의 목소리에 백리빙의 엉덩이만 쳐다보고 있던 유성탄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나는 쟤들같이 허약한 사람이 아니오. 난 정말 강합니다. 특히 어두운 밤에 으슥한 방에서는 정말 강해요.”

유성탄은 누구에게 들으라는 듯이 쓸데없는 소리까지 붙여서 대답한다.

정자운은 유성탄이 말하는 뜻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아무 말도 없이 일어서더니 백리빙의 옆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면사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휴! 대형께서 말할 때마다 조마조마합니다. 거기서 밤에 특히 방에서 강하다는 말은 왜 강조를 하시는 겁니까?”

옆에 있던 마동파가 조그맣게 유성탄에게 물었다.

“네가 그랬잖아. 여자들은 밤에 강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아 그거야… 그게…….”

마동파는 또 자신의 입방정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돈 안 주냐?”

유성탄이 그답지 않게 무지 부드럽게 말하자 백리빙이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돈이요?”

“아까 우리가 호위를 하면 많이 주기로 했지 않냐? 그걸 줘야지!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아닌 거다.”

목소리가 확 바뀌는 유성탄이었다.

“아, 그거요? 알았어요. 손 내밀어요.”

‘얼마나 많이 주려고… 손을 크게 벌려야지.’

유성탄은 손바닥을 크게 펴고는 손 사이도 약간 벌렸다. 크게 하면 더 많은 돈이 들어올 거라는 단순함의 극치였다.

“자요. 많이……!”

백리빙이 유성탄의 손 안에 동전 다섯 문을 올려놓았다.

“잉! 이게 뭐냐?”

“돈이잖아요?”

“그건 아는데… 우리 약속은 많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 많이 줬잖아요.”

“너 지금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치려고 하는 모양인데, 동전 다섯 문 가지고 많다고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맞아요. 나는 동전 다섯 문이 무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약속할 때 얼마라고 했나요?”

유성탄은 그녀의 말에 눈만 꺼벙하게 깜빡댄다.

“아니죠? 그냥 많이라고만 했어요. 그래서 제가 좋다고 했고 지금 많이 줬어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백리빙의 말은 전혀 틀린 것이 없었다.

‘키키! 대형이 드디어 임자를 만났군.’

둘을 보는 아우들이 모두 입을 가린다. 잘못해서 웃는 소리라도 나면 화풀이의 대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니 여자들은 왜 하나같이 사기꾼밖에 없냐?”

“뭐라고요!”

유성탄이 한탄하듯이 말하자 백리빙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내가 순진하다고 이런 식으로 등을 쳐 먹으려고 하면 안 되지! 나 세상물정 정말 모른다. 그래서 네 말에 진짜 무지 많이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람의 뒤통수를 친다면 내가 이제 어떻게 여자의 말을 믿겠냐?”

“킥!”

뒤에 서 있던 정자운이 드디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 말았다.

유성탄이 무지 불쌍한 표정과 목소리로 신세타령하듯이 말하는 것이 너무 우스웠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건수가 잡히고 만다.

“난 이번 호위는 없던 걸로 한다.”

“뭐라고요? 방금 직접 그랬지요.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아니라고요.”

“난 되도록이면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저 여자가 킥 웃는 소리 너도 들었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너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상관이 있다. 중요한 대화를 하는 자리에서 누가 킥 웃으면 그건 부정을 탄 거나 마찬가지다. 부정을 탄 약속은 난 안 지킨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약속을 깨는 유성탄을 보며 아우들의 얼굴에는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고 백리빙과 정자운의 얼굴에는 어이없는 기색이 나타났다.

그리고 결정타!

“그리고 난 사람이 아니다.”

“알았어요. 금자 열 냥이면 돼요?”

자신이 사람이기를 포기하며 돌아서는 유성탄을 보며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감지한 백리빙이 결국 돈을 올렸다.

“난 이미 사람이 아니다. 금자 열 냥으로 다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뭐 저런 작자가 다 있어? 정말 밉상이네.’

“얼마면 돼요?”

“금자 백…….”

“아가씨, 가요!”

“금자 오십…….”

“아가씨, 가자니깐요!”

“금자 이십 냥. 더 이하는 안 된다.”

눈치를 보며 엄청 부르려다가 만만치 않은 백리빙의 반격에 살살 내리던 유성탄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이십 냥을 불렀다.

“열두 냥!”

“열여덟 냥!”

“열셋!”

“열일곱!”

“열넷!”

“열여섯!”

“열다섯!”

“열다섯……?”

‘씨! 또 당한 것 같네.’

‘하여간에 엄청 치사한 작자네.’

그런 몰골로 다니다가는 모든 사람이 다 쳐다본다는 백리빙의 말에 낭인칠웅은 우선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정자운이 대기로 했다.

유성탄이 안 주면 그냥 거지꼴로 다니겠다고 우겼기 때문이었고 꼬드기고 싶은 백리빙에게 미운 털이 하나 더 박히고 만다.

정자운은 마차를 하나 구입했다. 마차에는 정자운과 백리빙 그리고 유성탄이 탔고 마부석에는 강태웅이 앉았다.

마부석에는 다른 아우를 앉히고 강태웅은 안에 타라고 했지만 강태웅은 대형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은 불경이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말을 타고는 마차의 주위를 보호하며 사천 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런 마차에 아우들 모두에게 그 비싼 말까지 사주고… 분명 엄청 부자가 분명한데…….’

유성탄은 정자운과 백리빙의 눈치를 살살 보며 어떻게 야바위로 벗겨먹을 방법은 없을까 열심히 궁리하고 있었다.

“유 대형께서는 어느 분께 사사를 받으셨나요?”

“사사요? 두 번씩 죽었냐구요?”

“정말 무식하네. 죽을 사 자 두 개가 아니고요 누구한테 무공을 배웠냐구요?”

백리빙이 답답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알긴 뭘 알아요? 몰라서 두 번 죽느냐고 물어놓고서!”

“나는 두 번 죽었냐고 물었다.”

“죽느냐나 죽었냐나!”

백리빙이 약 오른 듯이 소리치자 정자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빙아!”

또다시 말이 다른 데로 샐 것 같자 정자운이 더 이상 말싸움을 못 하도록 백리빙의 입을 막은 것이다.

“무공을 익히다 보면 학문에 소홀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약간 문자 같은 것을 못 익힐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그런 것을 가지고 유 대형을 곤란하게 만드느냐! 그만두거라.”

정자운의 말에 백리빙이 혀를 쏙 내밀더니 입을 닫았다.

“그래 어느 분께 무공을 배우셨나요?”

“하하하! 내가 유성탄이오. 천하에 누가 있어 내게 무공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이오? 나는 오로지 독학으로 지금까지 나를 키워왔소. 정말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나의 굳은 신념 하나로 버텨왔었소. 아마도 나 같은 기재는 지금까지 없었고 아마 이후에도 태어나기는 힘들 것이오.”

유성탄은 말하다가 스스로 자아도취에 빠졌는지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아가씨,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니까요. 세상에 자기를 스스로 저렇게 올리고 싶을까. 어떻게 된 사람이 겸손이 하나도 없어!”

“이따금은 나도 무지 겸손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데요?”

“누가 돈 줄 때는 무척 겸손해집니다.”

유성탄의 말을 들으며 백리빙은 빈 말이 아니라 눈이 아닌 혀를 뽑아버리고 싶은 욕망에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호호호! 유성탄 대형께서는 정말 유쾌하신 분 같아요.”

정자운의 입에서 교소가 터져 나왔고 그런 그녀를 백리빙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천상 여자였고 그 고아한 품위를 언제나 잃지 않던 정자운이 그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백리빙도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점 보이지? 내가 왔다 갔다 하다가 딱 손을 멈추면 그쪽에서 점이 있는 패를 찾으면 되는 거야.”

유성탄은 긴 여행에 지루하다는 핑계로 드디어 야바위 패를 꺼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백리빙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쉽네요. 그럼 이걸로 내기를 하자는 거예요?”

“이런 거는 내기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고! 봐, 내기 없이 점만 맞추면 무슨 낙이 있겠어.”

야바위에서 낙을 찾는 유성탄을 쳐다보는 백리빙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 찼다.

겨우 세 개의 패 그중에서 하나 찾는 놀이라면 눈이 좋은 무림인들에게는 너무도 쉬운 것이었다.

‘이상해… 무슨 속셈이지? 우리가 무림인이라는 것을 눈치를 못 챘나 본데… 그럼 혼 좀 내줄까?’

백리빙은 그렇지 않아도 얄미운 유성탄을 공식적으로 혼낼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하지만 우리는 돈 내기 같은 것은 못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다른 걸로 내기해요.”

“돈 내기를 못 하다니… 그런 아쉬운 소리를… 아! 정말 아쉽네.”

돈 내기를 못 한다는 말에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던 유성탄이 좋은 생각이 났는지 끈쩍한 눈으로 백리빙을 보며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 만약에 내가 지면 내가 한 번 주고, 니가 지면 니가 한 번 주는 거야, 어때? 아주 공평한 내기인 것 같은데?”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뜬금없이 서로 주자고만 하면 너무 막연하잖아요. 정확히 뭘 달라 하고 말하는 게 낫지요.”

“그럴까……?”

유성탄의 목소리가 늪에 빠진 사람처럼 축축해졌다.

“그럼… 아! 말하기가 좀 쑥스럽구먼.”

백리빙은 유성탄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에 살기를 띠며 말했다.

“만약 쓸데없는 소리로 능글맞게 굴면 당장에 눈을 뽑아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요!”

‘아이 씨! 빨리 말해 버릴 걸… 괜히 뜸들이다가 망했네.’

“야! 돈도 안 되고 그것도 안 되면 무슨 재미로 노냐! 난 그만둘란다.”

다 틀렸다고 생각한 유성탄이 야바위 패를 품에 다시 집어넣더니 눈을 감고 잠든 체한다.

‘이상한 사람이다. 하는 행동이나 말투는 완전 망나닌데 느껴지는 기운은 한없이 맑고 깨끗하다. 전혀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치 어린애 같은 동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거기다 몸에서 나는 이 달콤한 냄새는 무슨 향수나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몸에서 풍기는 냄새야.’

면사로 가린 정자운의 얼굴은 유성탄에 대한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정자운은 유성탄과 마룡방의 청룡대가 싸울 때도 유성탄이 한 명도 죽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약한 사람에게는 약하게 주먹질을 한 것이다.

그런 싸움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정자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성탄은 그렇게 한 것이다.

물론 사천에도 그녀가 가야 할 일이 있기는 했지만 유성탄이 그저 강하기만 했다면 정자운은 굳이 일부로 동행까지 되는 계획을 짜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 * *

“청룡대까지 전멸이라는 말이냐?”

마룡방의 외당 당주 조운리는 급보로 안휘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전멸은 아닙니다. 하지만 창 대주께서 아주 정신을 놓으셨고 청룡대원들도 십여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도 모두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답니다.”

마룡방 정보담당 소양도도 역시 의외의 결과에 자신도 놀랍다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겨우 흑도의 도박장 하나 부서진 사건이 마룡방의 정예 이 개 대가 풍비박산 나는 결과로 나타나다니… 도대체 그놈들이 누구란 말이냐?”

조운리의 음성은 극도의 분노로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안휘의 가능에 있는 영천무관이라는 곳에서 청룡대와 싸운 자들을 본 모양입니다. 하지만 자세한 상황을 말해 주기를 꺼려 하고 있습니다.”

“일개 무관 따위가 감히 본 방의 행사에 협조를 거부한단 말이냐?”

“일개 무관이 아닙니다. 남궁세가와 관계가 깊은 곳이라 합니다. 아마 우선 남궁세가에 보고를 한 연후에야 우리에게도 정보가 들어올 것으로 보여집니다.”

“후우! 방주님께 보고할 일이 까마득하구나. 마룡방이 생기고 이런 치욕은 처음일 것이다.”

“어찌할까요? 더 시간을 끌다가는 놓칠지도 모릅니다. 대충 그들의 행로를 짚어보니 계속 서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서진(西進)?”

“예, 제 생각으로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쫓을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냐?”

“호북의 중간을 지나면 무당의 세력권입니다. 더 가서 사천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손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봐도 됩니다.”

“방주님의 재가가 필요하다. 이미 마룡방이 자랑하는 두 개의 무력집단이 무너졌다. 더 이상 피해가 생긴다면 당장 우리를 노리는 구룡회나 상관세가와의 싸움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건드리지 않는다면 당장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놈들이라면 우선은 놔둬라.”

“하지만 곧 청룡대까지 당했다는 소문이 퍼질 텐데 아무런 조치도 않는다면 우리 방의 위상이 많이 깎일 수 있습니다.”

“안다. 하지만 그놈들이 너무 멀리 도망가서 그런 걸로 역소문을 퍼트리면 우선은 어느 정도 체면 유지는 할 수 있다. 이번 사건으로 미루어 보아 그놈들을 제거하려면 대규모의 무력이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이동은 다른 문파에 우리가 그들을 치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하지만 방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 역시 무리해서라도 그놈들을 제거하고 싶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정보요원들로 하여금 그놈들의 행적이나 놓치지 않도록 주시하라고 명하겠습니다.”

별거 아닌 도박장의 난동이라는 미풍이 절강성의 무림세력의 판도까지 바꿔버릴 정도의 태풍으로 변하고 있었다.

* * *

“감히 마룡방의 사파 놈들이 안휘까지 들어와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냥 좌시를 한다면 남궁세가를 우습게 볼지도 모릅니다.”

남궁세가에서는 영천무관의 보고를 받고는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마룡방이 안휘로 들어온 데 대하여 사과하는 서찰을 보내주기로 했다 하니까 기다려보지요. 솔직히 마룡방이 작은 문파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남궁가의 가주인 남궁후덕에게는 세 명의 동생과 다섯 명의 사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현 남궁세가의 실질적인 지도부이기도 했다.

먼저 말한 사람은 사촌 중의 한 명인 남궁후생이었고 뒤에 말한 사람은 친동생인 남궁후학이었다.

“자네는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우리 남궁세가는 최고의 전성기일세. 마룡방 정도를 우리가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니 그런 발상이 어디서 나오는 건가?”

남궁후생이 남궁후학의 말에 심하게 질타를 했다.

“형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무사를 움직인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아마 십 리도 못 가서 관에서 군이 출동할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문파가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괜히 우리가 먼저 나서서 본보기로 당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후학의 말이 맞는 것 같네. 지금 관에서는 전조(前祖)와는 달리 무림을 강압적으로 누르고 있네. 우리라고 특별대우를 해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걸세.”

가주의 둘째 동생인 남궁후룡의 말에 남궁후생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룡방에서 사과 서찰이 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영천무관의 양규 대협의 말에 따르면 청룡대의 창평추가 돌아가는 대로 방주에게 보고를 해서 사과 서찰을 보내겠다고 했다는데, 이번에 낭인칠웅이라는 자들에게 완전 박살이 났다 하니 보고나 제대로 했겠습니까? 그리고 마룡방도 지금 엄청 독이 올라 있을 테니 우선은 잠시 관망을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남궁세가의 정보를 맡고 있는 사촌인 남궁후기의 말에 모두 생각에 잠겼다.

무림의 정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한다면 누구나 명예라고 한다.

하지만 좋게 말해서 명예지 사실은 체면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마룡방의 안휘성의 침범은 분명 남궁세가의 체면을 도외시한 중대 도발 행위였지만 들어와서 오히려 전멸을 당했으니 강호 도의상 너무 몰아가는 것도 남들이 보기에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남궁무가 우연히 낭인칠웅이라는 자들과 친분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러니 남궁무에게 이번 일을 맡겨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만…….”

남궁후기의 말에 가주인 남궁후덕이 입을 열었다.

“무아는 아직 어리다. 거기다 마룡방은 무림의 오대사파 중 하나인 거대문파이다. 무아에게 맡기기에는 사안이 너무 큰 듯하니 후풍이가 무아와 동행을 하여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오면 그때 마룡방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겠다.”

남궁후덕에게는 아들이 둘 그리고 딸이 하나 있었다. 큰아들 남궁문과 둘째인 남궁무는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공이 높고 협의가 높아 벌써부터 사방에 칭송이 자자했고 딸인 남궁혜미는 무림사미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무아가 낭인칠웅이라는 자들과 친분을 가졌다면 그들의 면모는 알아두었나?”

가주의 셋째 동생인 남궁후호가 남궁후기에게 물었다.

“그게… 알아보기는 했지만 알지 못한 것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전혀 이름이 나지 않은 자들입니다. 알아낸 것도 이름 정도인데 분명한 것은 그들 중 첫째인 유성탄이라는 자가 아주 특이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이한 무공……?”

“예, 무아가 십 성의 공력으로 내지른 선풍 십이식에 요혈을 맞아도 끄떡없고 심지어는 검에 분명 베였는데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대단한 무공이라고……. 보아하니 철포삼이나 금종조 같은 몸을 단단하게 하는 외공을 익힌 모양인데 조문만 알아내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나!”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무아 말로는 분명 그런 외공과는 괘를 달리한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무아가 내공이 좀 딸려서 그렇지 무공에 대한 지식은 우리보다 더 낫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합니다. 나는 무아의 말에 무게를 좀더 두려고 합니다.”

“알겠네. 그래봐야 떠돌이 무사들이니 우리에게 큰 위협은 안 될 것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무아에게 이용할 가치가 있는 자들인지 아닌지 잘 알아보고 친분을 유지할지 아니면 그냥 내칠지를 결정하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 * *

“그러니까 전부 나만 보면 달달달 떠는 거야! 심지어는 벌레들까지 나에게 꼼짝을 못했다니까!”

안휘의 접경을 넘기까지 무려 일주일이나 마차로 여행을 했지만 유성탄의 뻥은 쉴 새가 없었다. 그런데 정자운이나 백리빙은 전혀 지루해 하지 않고 유성탄의 말을 열심히 들어 주고 있었다.

그녀들이 몸담고 있는 문파는 경건하기가 거의 불문이나 도문에 견줄 정도였고 무림 문파이면서 공부도 엄청 많이 시키는 곳이었다.

당연히 백리빙 정도만 되어도 그곳에서는 별종 취급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녀들이 무림에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온 것이 이제 겨우 한 달째였지만 정자운의 몸에서 풍기는 자태가 너무 고상하다 보니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한마디로 너무 심심하게 여행을 하고 있던 그녀들에게 유성탄의 입심은 정말 그녀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 그들과 다른 사람이기에 더 흥미진진한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용병을 하는데 처음 철검보라는 데를 갔거든. 보통은 낭인이 용병을 가면 엄청 무시를 하는 게 그 바닥인데… 나 봐봐! 니들 보기에도 내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거야. 그들도 나를 보더니 황송해 하면서 직접 내 이름하고 인적사항까지 직접 적어주면서 내 비위를 맞추는 거야. 그래서 내가 느꼈지. 사람이 너무 뛰어나도 불편하구나.”

‘도대체 저 작자는 저러고 싶을까 몰라? 어떻게 입만 열면 뻥에다가 순 자화자찬이니. 거기다 저게 은근히 아가씨한테까지 말이 짧아졌단 말이야. 성질 같아서는 그냥 눈을 뽑아버리면 딱 직성이 풀리겠는데 아가씨께서 가만히 계시니 함부로 할 수도 없고… 후유! 주먹이 운다, 울어.’

말은 재미있게 듣지만 은근슬쩍 둘을 도매금으로 반말에 이따금 니들이라고까지 하는 유성탄을 보면서 면상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욕망을 억지로 참고 있는 백리빙이었다.

“태웅아! 이렇게 대로로 계속 가도 괜찮을까?”

마치를 모는 강태웅의 곁으로 다가온 장우왕이 짐짓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며칠째 아무런 동향도 보이지 않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마룡방으로서도 생각지 못한 청룡대의 괴멸로 대책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 한 삼 일만 가면 무당의 세력권이니 거기까지만 들어가면 더 이상의 추적은 없을 거다.”

“그렇긴 해도 전력을 다해 달려가도 아쉬울 판에 이렇게 유람하듯 가니 걱정이 된다.”

“저번 청룡대와의 싸움에서 느낀 거 없었냐?”

“뭘?”

“전 같았으면 우리가 마룡방의 정예라는 청룡대와 싸워서 얼마나 버텼을 것 같으냐?”

“글쎄… 생각은 안 해봤는데… 솔직히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목을 내밀고 있었지 않겠나 싶다.”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지.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죽어라 싸운다면 한 삼십 초는 버텼을 것이다. 그것도 우리와 같은 숫자로 싸울 때를 상정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둘씩이나 상대를 하면서 그들을 이겼다. 저번 항산에서 황룡대와 싸울 때와 또 달라졌다는 말이다.”

“하긴 나도 놀랐었다. 우리가 그렇게 강해졌을지는 생각도 못 했었다.”

“대형과의 비무가 우리를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류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수련을 해 나가다 보면 우리도 일류고수라는 말을 들을 정도까지는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제는 적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본다. 아니 이제는 우리가 적을 찾아가는 상황까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강태웅의 말에 장우왕이 어깨를 우쭐하더니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우리가 이제 낭인이 아니라 무림인이라고 떠벌려도 되겠구나!”

“우리는 이미 무림인이다. 마룡방과 맞장을 뜨고 있는 우리가 무림인이 아니라면 누가 무림인이 되겠냐? 하하하!”

강태웅의 상쾌한 웃음소리에 장우왕도 미소를 지었다.

낭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림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같은 용병을 해도 낭인과 무림인은 그 대우 자체가 달랐다.

받는 목숨 값도 값이지만 먹는 것부터 잠자는 것까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낭인 용병은 한 달에 겨우 이틀만 외출 외박을 할 수 있었지만 무림인이 되면 용병을 하면서도 외출 외박이 자유였다.

사람은 누구나 대접이 같으면 불만이 없지만 차별을 받게 되면 화가 나는 법이다. 당연히 낭인들로서는 무림인이 가장 부러운 족속들이었다.

하지만 무림인으로 행세를 하려면 번듯한 사문이 있거나 이름이 있는 사부를 두어야 했다.

어디를 가든지 사문을 묻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고 그 절차를 무시하려면 스스로 강한 무공을 익혀 누군가 무림인에게 도전을 해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하지만 무림인에게 도전을 한다는 자체가 낭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탄탄하게 기본기를 다진 사문이 있는 무인들을 독학으로 막 싸우면서 무공을 익힌 낭인이 이긴다는 것은 정말 어쩌다 생기는 기재가 아니라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정말 힘겹게 이겼다 해도 그 다음은 이긴 자의 사문 무사들을 피해 다녀야 하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 뻔했다.

결국 죽을 게 뻔한 싸움을 하기에는 아무리 죽음을 먹고 산다는 낭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유 대형께서는 지금 부모님을 찾으셔야겠군요?”

“그렇다니까. 내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실지로도 엄청 효자거든. 지금 내 마음속에는 오로지 빨리 부모님을 찾아서 효도를 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데…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상한 동생들과 의형제를 맺는 바람에 여기까지 온 거지. 난 정말 싸우는 거 무지 싫어! 솔직히 나같이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아마 누구도 나오지 못할 거야.”

“호호호!”

“왜 웃어?”

말끝마다 자기 칭찬을 하는 유성탄의 화술에 정자운이 다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자 유성탄이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묻는다.

“죄송해요. 너무 대단한 효자를 만났더니 감격을 한 것 같아요.”

정자운의 말에 정작 놀란 것은 백리빙이었다. 십오 년을 같이 지내왔지만 정자운이 이렇게 즐겁게 웃는 것도, 방금 같은 농담을 하는 것도 처음 보는 그녀였다.

‘감격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하여간에 여자한테 나는 인기가 너무 좋은 것 같아.’

유성탄은 속으로 자신에 취한 듯한 말을 중얼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의형제를 맺을 때 큰 실수를 했거든.”

“무슨 실수를 했는데요?”

“죽을 때 한날한시에 죽는다. 만약 의리를 저버리면 벼락을 맞아 죽는다 그랬단 말이지.”

“그거야 의형제를 맺을 때면 으레 하는 말 아닌가요?”

“문제는 한날한시에 죽는다는 맹센데… 저것들이 원체 허약해서 벌써 여러 번 죽을 뻔했다고.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죽어라 싸워야지 어떡해. 안 그래?”

“당신 바보예요?”

백리빙이 듣다가는 결국 못 참고 톡 쏜다.

“뭐! 이게… 내가 이래봬도 네 살 때 천자문을 다 뗀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그런 사람이 진짜 벼락을 맞아 죽을까봐 걱정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네 살 때 천자문을 떼었다니까… 그럼 한번 외워봐요!”

“나는 공부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지금은 공부를 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럼 언제 공부하는데요? 며칠 동안 봤지만 유 대형이 공부하는 장면은 한 번도 못 봤네요.”

“학식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공부하는 장면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런 것을 보이면 마치 잘난 체하는 것 같지 않냐? 나는 겸손한 사람이다.”

‘아휴! 정말 말이나 못 하면… 어떻게 저렇게 얄밉게 놀까?’

백리빙이 인상을 찡그리자 유성탄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엽다고 생각했다.

“빙아, 그만해라.”

다시 백리빙의 말을 막은 정자운이 물었다.

“그럼 정말로 지금까지 무공을 배워본 적이 없으시다는 말인가요?”

“나는 무공 같은 거 안 배워도 강하다. 특히 어두운 밤에 으슥한 방에서 무지 강하다.”

다시 나오는 유성탄의 유혹이었지만 문제는 그녀들이 유성탄이 말하는 뜻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전부터 느낀 건데 밤에 방에서 강한 것을 왜 자꾸 강조하는데요?”

백리빙이 또다시 참지 못하고 나서다가 정자운의 눈초리에 입을 닫는다.

“그럼 제가 한번 유 대형의 진맥을 해볼 수 있을까요?”

“진맥……?”

“예.”

“하시오.”

유성탄은 말까지 존대로 바꾸며 급히 손을 내밀었다.

‘슬슬 꼬드겨지는 것 같은데… 진맥을 핑계로 내 손을 만지고 싶다 이거 아니겠어?’

정자운의 손이 자신의 손목을 잡는 것을 느끼며 홀로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유성탄이었다.

‘이럴 수가……!’

유성탄의 진맥을 하던 정자운은 놀란 눈으로 유성탄을 쳐다보았다.

“하하하! 내가 좀 잘생기기는 했지요.”

하지만 정자운에게는 유성탄의 흰소리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에 단전이…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 완전히 뚫려 있다. 거기다 이 크기라니……!’

유성탄의 손목을 놓으며 정자운이 조용하게 말했다.

“유 대형께서는 무공을 배우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어요. 지금도 강하시지만 무공을 배웠다가는 잘못하면 몸에 이상이 생겨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자운은 유성탄의 진맥을 하고서는 자신의 놀람을 감추고 딴 말을 했다.

그녀가 알아낸 유성탄의 몸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웠다.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유성탄이 만약 무공을 배운다면 어쩌면 세상에 다시는 보기 힘든 초고수가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온한 세상이었다. 정치도 안정되고 국경도 평정되어 있었다.

무림이 약간 불안하기는 하지만 서로 세력이 비슷하니 오히려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초강자의 등장은 모든 평화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정자운은 유성탄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유성탄은 정자운의 무공을 배우면 죽는다는 말에 완전히 쫄고 만다.

‘어째 요즘 어깨가 뻐끈하더라니… 그게 무공을 배워서 그런 거구나…….’

누구나 몸에 안 좋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어깨가 뻐끈해 온다. 특이한 몸을 가진 유성탄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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