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하후란과의 만남
“유성탄이 돌아왔습니다.”
“벌써요? 산적들은 어쩌구요?”
“지들 말로는 작살을 냈다고 떠들고 다니는데 아직 확실하게 들어온 정보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거짓말 같습니다. 오고 가는데 칠팔 일은 걸릴 거고 산적을 없애는데 적어도 열흘은 걸린다고 봤을 때 너무 빨리 돌아왔습니다.”
“그건 그러네요. 떠난 것이 열흘 전인데 한 문파가 갔다 해도 왕태산의 산적이라면 이틀 만에 제거는 어려운데 그들만으로 벌써 해치우고 왔다는 것은 불가능할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뭐가 말입니까?”
“나는 자꾸 유성탄이 진짜 이틀 만에 왕태산의 산적을 없애고 온 것 같으니 말이에요. 호호호! 기다려보면 알겠지요.”
* * *
“어떡할까요?”
철검보 총관 배장손이 물었다.
“어떡하기 뭘 어떡하나! 그놈들 거짓말 치는 게 분명하네. 왕태산의 산적은 우리가 갔어도 이렇게 쉽게 제거하지도 못하지만 한 명도 죽지 않고 왔다는 게 말이 되나?”
철검보 내당 당주 노룡한이 말도 안 된다며 흥분했다.
“그거야 지금 애들을 보냈으니 곧 판명이 날 거고 우선은 마음 상하지 않게 구슬려놓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외당 당주 정두호는 신중하게 말했다. 실질적으로 가장 다혈질인 정두호의 반응은 모두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도대체 정 당주는 그놈이 뭐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요?”
노룡한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묻자 보주인 상관청이 나섰다.
“그만하게. 정 당주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우선은 두고 보자.”
“그게… 지금 당장 금자 백오십 냥을 내놓으라고 난리가 아닙니다.”
배장손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당장 무사들을 시켜서 반쯤 죽여 쫓아 보내자니까요?”
노룡한이 다시 주장하자 정두호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노 당주! 그렇게 자신 있으면 직접 가서 한번 상대해 보시오. 그놈이 얼마나 괴물 같은 놈인지……!”
정두호의 말에 노룡한도 뭔가 꺼림칙한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우선 돈이 준비되는 대로 줄 테니 며칠만 기다리라고 해라. 그리고 왕태산에 보낸 무사가 돌아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겠습니다.”
배장손은 유성탄을 만나는 것이 무척 곤혹스러운지 안 좋은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배 총관은 왜 저러는 거야? 자기도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놈이 뭐가 무섭다고…….”
노룡한이 밍그적 나가는 배장손을 쳐다보며 한마디 더 한다.
“낭인대장 화정은 낭인으로 보기 힘든 일류고숩니다. 그 화정이 유성탄에게 엄청 깨졌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게 진짜라면 배 총관은 유성탄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서 있던 정두호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 * *
“그러니까… 도박장이라는 곳이 있다 이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거기에 가면 눈먼 돈이 철철 넘칩니다.”
“돈이 어떻게 눈이 머냐?”
마동파의 얘기는 유성탄의 흥미를 아주 돋우고 있었다.
“진짜 돈이 눈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돈이 많다는 얘깁니다.”
“주인 없는 돈? 그럼 포대기 하나 가져가서 그냥 쓸어 담아오면 내 돈이 되는 거냐?”
유성탄이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이거… 내가 괜한 얘기 한 거 아냐? 대형 눈이 반짝이니까 왠지 가슴이 철렁하네.’
마동파는 도박장 얘기를 해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유성탄의 성격상 도박장에 가서 물러달라고 할 공산이 많았고, 그것은 엄청난 시비로 번질 확률이 다분했다.
“그게… 그냥 쓸어 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참 설명하기가 힘든데…….”
신나게 얘기하던 마동파가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도박장에 대한 얘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 하나에 제법 큰 고을이 백여 개 된다. 그 중에서 상권이 발달한 곳은 약 십여 곳, 그리고 그곳에는 반드시 도박장과 큰 주루가 있기 마련이었다.
주루는 그래도 허가받은 장사에 속하지만 도박장은 아예 허가 자체가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은 버젓이 선전까지 하면서 도박장을 운영한다.
도박장은 그 고을의 흑도중 가장 세력이 큰 조직이 맡기 마련인데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 뒤가 문제가 된다.
도박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견되는 사업이었고 당연히 연관되는 세력이 한둘이 아니었다.
흑도는 장사가 끝나면 주위 큰 세력에게 돈을 상납한다. 가장 큰 세력은 당연히 관부였고, 그 다음은 무관을 포함한 무림 제 세력이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정파도 속해 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무림고수라 해도 도박장에 가서 함부로 행패를 부리는 것은 삼가는 편이었다. 잘못하면 그 싸움이 어디까지 번질지 예상이 안 가기 때문이었다.
낭인 정도는 그들에게 한주먹 거리도 안 된다. 같은 흑도라 해도 산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 자식은 잘 말하다가 갑자기 왜 떠듬대는 거야? 약 먹었어!”
마동파가 갑자기 설명을 미진하게 하자 유성탄이 소리쳤다.
“대형, 마 동생 말에 신경 쓰지 마시고 이제 어떡하실 건지 향후 계획이나 세워보시지요.”
강태웅이 마동파가 그러는 이유를 즉시 눈치 채고는 끼어들었다.
“향후 계획! 흠… 지금 내 계획은 부자 하나 꼬드겨서 패나 돌릴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대형, 그게 무슨 계획입니까? 대형 같은 분은 그래도 꿈을 크게 가지셔야지요.”
“내 꿈? 난 천하제일부자가 되고 싶은데! 이번에 거지 만나서 사기당하는 바람에 돈을 엄청 날렸잖냐! 그러니 이제부터 다시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야 할 거 아니냐. 안 그래?”
“거지한테 준 거야 동냥 아닙니까? 그런 거는 사기라고 하면 안 됩니다.”
마동파가 끼어들었다.
“나도 알아 인마! 그런데 나는 자꾸 사기를 당한 것 같단 말이야.”
“대형, 우선 우리도 세력을 만듭시다. 세력을 크게 만들면 뽀다구도 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세력? 난 그런 거 싫다.”
“예?”
“솔직히 난 싸우는 거 싫어. 어렸을 때부터 피 보는 거 싫어해서 싸우다 코피라도 터트리면 도망치고 했는데… 난 사람 죽이는 거 싫다.”
유성탄의 말은 아우들에게는 정말 뜻밖이었다.
“대형, 하지만…….”
강태웅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데 밖에서 표도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형,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이상하게 아는 사람도 없는데 뭔 손님이 자꾸 찾아오는 거야! 누구냐?”
“귀면호리 마효춘 영감인데요?”
마효춘이라는 말에 강태웅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강태웅이 낭인촌에 처음 들어와 낭인막에 이름을 쓰면서 낭인막의 정체가 무척 궁금했었다.
거친 낭인들을 무공도 아닌 머리만으로 조종하며 각 문파에 보내는 용병들을 마음대로 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보이는 마효춘조차도 그 무공이 자신보다 높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는 함부로 파헤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마효춘이 먼저 찾아온 것이다.
“마효춘? 마효춘이 누구냐?”
“낭인촌 낭인막에서 일하는 여우같이 생긴 영감이 마효춘 아닙니까!”
마동파가 부언하자 유성탄이 마동파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 같은 마씨구나.”
“마씨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사무불통녀인지 년인지가 나를 만나고 싶다?”
“년이 아니고 녀일세.”
“그 말이 그 말이지.”
“그 말은 완전히 뜻이 다르네.”
‘이 영감이 전에도 은근히 비위를 상하게 하더니 끝까지 개기네.’
‘이 자식! 하여간에 무식한 놈이 짜증나게 하는 데는 아주 일가견이 있어요.’
“뜻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 좀 해보시오.”
“대형! 우선 온 이유부터 들어보지요.”
자꾸 얘기가 다른 데로 흐르자 강태웅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러자 마효춘도 잘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는 유성탄 자네를 높이 평가하고 계시네. 그래서 한번 만나서 향후 계획을 들어보고 서로 도울 것이 있으면 도왔으면 한다고 하셨네.”
‘향후 계획? 도대체 왜 내 향후 계획에 관심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찝찝하게.’
“그럼 거기서 나를 찾아와야지 어찌 여자가 감히 남자에게 오라 가라 하는 거요?”
‘이 자식이 꼴에 남자라고… 아이고, 드러워. 코 후비는 것 좀 봐라.’
마효춘은 코를 후비고 있는 유성탄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가씨께서는 함부로 움직이지를 못하시네. 그러니 어쩌겠나!”
“만사무불통녀가 다리병신인지는 몰랐소.”
마효춘은 귀한 분이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순식간에 다리병신을 만드는 유성탄의 말에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절대로 손해가 나는 일은 없을 것이네.”
“난 어차피 손해 날 것도 없는 사람이오.”
마효춘은 유성탄의 말에 손이 저절로 올라가려는 것을 다시 겨우 참았다.
‘참 독특한 분이야 대형은. 싸우는 게 싫다는 사람이 저런 식으로 말하면서 어떻게 안 싸우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아우들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모두 킥킥거리며 생각했다.
* * *
“그러니까 나보고 당신이 몸담고 있는 문파에 들어라! 그 말 아니오?”
“호호호! 정말 시원시원하시군요. 소문보다 더 남자다우시네요.”
하후란이 여러 미사여구를 써가며 유성탄을 설득했지만 유성탄의 대답은 간단했다.
‘조게! 예쁜 얼굴을 왜 가리고 있을까?’
유성탄은 하후란을 만나면서 관심사는 그녀의 말이 아니었다.
하후란은 두꺼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관한 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성탄이었다. 당연히 하후란의 얼굴이 다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이 유성탄의 취향에 맞은 것이다.
하지만 초앵에게 한번 데인 경험이 있는 유성탄은 하후란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에게 사기를 치고는 도망을 칠 생각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좋소! 그럼 나도 조건이 있소!”
“호호호! 정말 유 대형과는 대화가 잘 되네요. 말씀해 보세요. 되도록이면 들어주도록 할게요.”
“한 번 주시오.”
유성탄의 말에 만사무불통녀인 하후란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뭘 한 번만 달라시는 건가요?”
“남자가 여자한테 한번 달라고 하면 뭐겠소? 모르는 게 없다고 하더니 그 말도 다 헛소리였구먼.”
‘남자가… 여자에게 한번 달라고 하면… 그게 뭐겠냐고?’
하지만 하후란도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그런 쌍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죄송하군요. 만사무불통녀라는 말은 사람들이 그냥 붙여준 과분한 이름에 불과합니다. 솔직히 아직 뭘 달라고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 * *
“대형!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하후란을 낭인막에서 만나고 나오는 유성탄을 보며 강태웅이 궁금한 듯 다가와 물었다.
“얘기 나눈 것도 없다. 여자가 좀 또라인 거 같더라. 뭘 설명 좀 해달래서 설명해 줬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며 나가라고 하더라!”
유성탄은 알지 못할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빙빙 돌렸다. 누군가가 미쳤다는 말인 것 같은데 아우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예! 대형, 그런 소리를 여자에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유성탄이 한번 달라는 의미를 하후란에게 설명하자 나온 반응은 유성탄에게는 뜻밖이었다. 실실 쪼개며 부드럽게 나오던 하후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고, 나온 말은 당장 나가라는 축객령이었다.
그리고 유성탄의 설명을 들은 강태웅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왜에? 동파는 청루에서 여자들에게 한번 달라고 막 그러던데?”
유성탄이 또 잘못 배웠다는 것을 안 강태웅이 마동파를 노려보며 설명했다.
“그거야 기생들 아닙니까! 그냥 처자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아주 못된 놈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무림여자라 해도 마찬가집니다.”
“맞습니다. 대형, 여자가 화나면 정말 무섭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한번 달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욕이고요.”
장우왕까지 옆에서 거들자 유성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에이! 뭐가 그렇게 복잡해? 어떤 여자는 되고 어떤 여자는 안 되고, 골치 아프다. 철검보에나 갔다 올란다.”
“대형! 그럼 혈문에 대해서도 못 물어보셨겠군요?”
일어나는 유성탄을 보며 강태웅이 다시 물었다. 유성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야! 다짜고짜 화를 내는데 그거 물어볼 새가 어딨어! 에이, 모르겠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뭐!”
손사래를 치며 소리친 유성탄이 밖으로 나가자 강태웅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무엇인가 비밀이 있는 만사무불통녀를 만나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만남이 끝났다는 것이 내심 무척 아쉬웠던 것이다.
* * *
“아가씨, 그놈을 왜 그냥 보내셨습니까? 감히 아가씨께 그런 무례를 저지른 놈을 그냥 잡아서 치도곤을 해도 시원치 않은 놈인데요.”
마효춘이 씩씩대는 하후란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마효춘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성격상 감히 자신을 능멸하는 자를 그냥 놔둔 적은 없었다.
‘정말 우리에게 너무 필요한 자라서 참은 걸까?’
하후란은 처음 유성탄이 낭인막에 들어오던 때가 생각났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 산도적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그 속에 숨어 있는 모습이 무척 수려하다는 것을 느꼈다. 거기다 숨어 있는 그녀의 코에까지 풍기던 이상한 달콤한 냄새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이상하게 생긴 것하고는 다르게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단 말이야?’
오늘도 그 달콤한 냄새는 여전히 유성탄의 몸에서 풍겼다. 그녀는 이상하게 유성탄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 * *
“또 와서 큰소리치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유성탄이 철검보에 나타나자 무사 하나가 배장손을 찾아와 보고를 했다.
“아직 왕태산에 간 놈 연락 없지?”
“아직 없습니다.”
“분명 어제 삼 일만 기다리라고 했더니 알겠다고 간 놈이 왜! 하루 만에 와서 또 신경을 거슬리는 거야!”
배장손이 짜증난 목소리로 외치자 무사가 물었다.
“우리가 모른 척하고 혼 좀 내서 보낼까요?”
배장손은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외당 당주인 정두호의 말에 유성탄을 너무 과대평가한 건지도 몰랐다. 슬쩍 모른 척하고 시험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시비를 걸되 만약 시끄러워지면 너희들 선에서 시비가 난 걸로 해라. 만약 별 볼일 없다 싶으면 목을 따버려도 된다.”
결국 배장손이 유혹을 못 이기고 명을 내렸다.
“야! 유성탄,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쪽 가서 얘기 좀 하자.”
배장손에게 허락을 받은 무사는 십여 명의 동료에게 뒷마당에 기다리라고 하고는 유성탄을 불렀다. 그동안 같이 다니던 아우들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이 눈에 거슬리던 유성탄을 해치워버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왜? 저쪽 가면 돈 줄 거유?”
“돈은 모르겠는데 다른 건 줄 게 있네.”
‘이 자식들 봐라!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뽑겠다 이건데… 어디 보자.’
따라가는 유성탄은 이제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의 감각은 거의 초인적이었다. 상대가 속으로 욕하는 작은 감정변화까지도 느끼는 그가 따라오라는 무사 놈의 마음속에서 이는 살기를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전에는 기분이 안 좋아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지만 이제 살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철검보에서는 제자가 들어오면 상당히 힘든 수련을 통해 기본기부터 탄탄하게 연마시켰다. 당연히 철검보의 무사들의 실력은 낭인들이나 왕태산의 시시한 산적들과는 쾌를 달리했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유성탄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철검보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자들이었다.
“내가 유성탄 대형이거든!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하고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말이야. 새끼들이 조용히 돈만 주면 갈려고 했는데 왜 사나이 가슴에 불을 붙이는 거야 앙!”
십여 명의 철검보 무사들은 모두가 코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실력이 실력이다 보니 유성탄도 여러 검 맞았다.
하지만 갈수록 그의 몸은 무기에 신기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유성탄의 몸에 검을 맞춘 무사들은 자신들의 검을 놓칠 만큼 엄청난 반동에 깜짝 놀라곤 한 것이다. 아예 몸이 찰고무같이 맞는 순간 튕겨내 버리는 유성탄의 몸이었다.
결국 모두는 유성탄에게 작살나게 맞고는 살려달라고 애원하고서야 매타작이 끝났다.
“이씨! 아예 오늘 철검보를 작살내 버려!”
은근히 화가 나는 유성탄은 철검보의 연무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철검보를 이번 기회에 모조리 때려잡을 생각이었다.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연무장에서는 마침 철검보의 무사들이 수련 중이었는데 웃통을 벗어 들고 검을 휘두르는 백여 명의 무사들이 갑자기 뛰어드는 유성탄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두의 눈이 자신에게 향하자 유성탄은 쫄고 만다.
‘에이! 오늘 한 번만 봐주자.’
뛰어든 기세와는 달리 꼬리 감춘 강아지처럼 후다닥 들어온 문으로 뛰어나가는 유성탄이었다.
유성탄은 어려서부터 겁이 많았다. 큰아이들과도 종종 싸우는 것을 봐서는 깡도 있어 보였는데 밤에는 무서워서 혼자 변소에도 가지 못했었다. 타고나기를 마음이 여리게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잘난 체 좋아하는 심성도 같이 타고났으니 강태웅의 말대로 누가 옆에서 칭찬을 해주면 쪽팔리는 것이 싫어서도 죽기 살기로 싸우지만 보는 사람이 없으면 언제나 내뺄 준비부터 하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에이!”
유성탄은 혼자 쪽팔려서 구시렁거리며 철검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사들이 떡이 된 것을 본 배장손은 곧장 보주를 만나러 달려갔다.
“대형, 혼자 어디 가셨다가 오신 겁니까?”
유성탄이 터덜거리며 청루에 도착하자 표도행이 뛰어나오며 물었다.
“철검보에 갔다가 몇 놈이 까불어서 손 좀 봐주고 왔다.”
“몇 놈이나요?”
“한 오십 명은 되는 놈들이 덤비기에 아주 작살을 내주고 왔다.”
‘한 열 명 덤빈 모양이구나. 그러나 저러나 철검보에서 가만있을지 모르겠구나.’
이제 유성탄에 대해 어느 정도 꿰찬 표도행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유성탄이 요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대형이 하는 말을 안 믿고 그러면 죽는다.”
‘이크! 눈치는…….’
“하하하! 대형도 참! 제가 어찌 감히 대형 말을 안 믿겠습니까? 믿습니다.”
말하는 표도행을 흘긴 눈으로 쳐다보며 유성탄이 안으로 들어갔다.
“너희들 뭐 하냐?”
방안으로 들어서자 전부가 모여서 뭔가를 연구하고 있었다.
“대형, 이리 와 보십시오. 강태웅 형님이 예전에 기연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노인이 준 물건이랍니다. 그런데 지도예요.”
철패가 반갑게 말했다. 그러나 유성탄은 시큰둥한 얼굴로 아랫목으로 가더니 벌렁 누우며 말했다.
“기연이랬다가 노인이랬다가 지도랬다가… 말도 엄청 못 해요. 너랑 대화를 나누면 뭔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나는 잠이나 잘란다.”
자기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유성탄이었다.
“대형도 참!”
철패가 뒤통수를 긁으며 다시 지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태웅 형님의 사부 되시는 분이 죽어가면서 이것을 남겨주셨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은 대단한 고수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격체전력으로 내게 자신의 내공을 넘겨주거나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왜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고 죽어가고 있었을까요?”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지도를 찾아가면 천고의 기연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지도를 사부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알고는 습격을 한 모양이다.”
“그런 나쁜 놈들이 있나!”
황대산이 강태웅의 말에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럼 그 지도가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는 아십니까?”
마동파가 지도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
“나도 모른다. 내가 이 지도를 받은 후 한 번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목숨을 맡길 형제를 찾는데 거의 오 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 우리 일곱이면 어떤 위험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여기를 가면 천고의 기연을 가질 수 있을까요?”
“나는 비록 정식 구배를 드리지는 못했지만 사부님을 믿는다.”
모두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낭인들에게 가장 큰 꿈이 바로 기연이었다.
“천하제일의 무공비급이라도 있었으면…….”
“아니야. 나는 내공을 일 갑자를 올려준다는 만년삼왕 한 뿌리면 족하다.”
모두 감격에 젖어 한마디씩 희망사항을 얘기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전부 나가! 잠도 못 자게 방해하고 있어.”
단잠에 빠져 있던 유성탄이 몸을 뒤척이더니 소리쳤다.
“태웅 형님, 그런데 지도가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유성탄에게 쫓겨난 그들은 모두 마당에 모여 조그맣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니겠는가.
“낭인을 하면서 천하 곳곳을 다 돌아다녔다. 하지만 지도가 가리키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 그림의 떡 아닙니까? 아무리 천금이 있어봐야 뭐 합니까?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사람을 알아놨다.”
“누굽니까?”
“만사무불통녀다. 모르는 것이 없다고 소문이 난 여자니 한번 만나볼 생각이다.”
“그럼 아까 대형이 만날 때 얘기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솔직히 갑작스럽게 만나자고 하는 바람에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함부로 보였다가 알아채기라도 하면 우리의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표 동생은 어디 간 겁니까?”
“생각난 김에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 낭인막에 보냈다.”
“만사무불통녀를 아예 오늘 만나시려고요?”
“그렇다. 대형이 저지른 실수도 사과하고 겸사겸사 만나고 싶다고 전갈을 넣으라고 했다.”
“만약 지도를 보고 뭔가 낌새를 눈치 채면 어쩌시려고요?”
“마 동생 말대로 지도가 가리키는 곳을 모르면 아무리 귀중한 지도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모험을 해볼 생각이다.”
강태웅이 지도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는 모른 척하고 지도가 가리키는 장소에 도착한 후 얘기할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모두를 끌고 다닌다는 것은 어렵다고 느낀 것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혼자서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태웅은 자신의 그릇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혼자서 지도가 가리키는 장소에 도착한다 해도 지킬 자신이 없었다. 거기다 낭인 주제에 지도를 함부로 돌릴 수는 더욱 없었다.
결국 품안에 간직한 채 오 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번 찾아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형제들이 기연에 눈이 멀어 배신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성탄과 마동파를 빼고는 이미 목숨까지 맡길 정도로 믿는 사이들이었다. 그리고 마동파도 같이 지내면서 사나이다움에 절대 배신을 할 친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문제는 유성탄이었는데, 정말 믿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거지들과의 일은 강태웅이 유성탄을 완전하게 믿는 계기가 되었다.
유성탄은 고집도 세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는 했지만 타고난 성품은 믿을 만했다. 거기다 너무 세상물정을 모르는 점도 안심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어쩌면 어떤 유혹에도 안 넘어갈 사람이 유성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태웅이 얘가 나를 아주 정확히 보더라고… 세상에 나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 한번 말하면 절대로 말 바꾸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찌질하게 말하는 성격도 아니고 하여간에 모두들 장부일언 중천금이라는 말이 나 때문에 생긴 말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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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호! 강태웅 대형께서 저를 보자고 하실 줄은 몰랐네요.”
“이제는 대형이라고 부르시면 안 됩니다. 제가 새로 대형으로 모시는 분이 생겼으니까요.”
“알고 있어요. 유성탄 대형이지요. 그런데 솔직히 강태웅 대형께서 유성탄을 대형으로 모셨다는 말을 듣고 상당히 의외였답니다.”
“대형의 이름을 제 앞에서 막 부르면 저도 어쩔 수 없이 소저께 결례를 저지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호호호! 죄송해요. 제 짐작이 틀린 것 같군요. 솔직히 처음에는 유성탄 대형을 이용하기 위해 대형으로 모시는 척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충성을 보이는 것을 보니 강태웅 대형께서도 유성탄 대형을 크게 될 사람으로 본 모양이군요.”
“대형께서 아까 결례를 저지르신 것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그 문제가 본론은 아닌 듯싶군요.”
별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태웅이 온 것이 유성탄의 사과 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당장에 알아채는 하후란의 말에 강태웅의 눈이 약간 커졌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강태웅 대형이 얼마나 대범하신 분인지는 저도 많이 들어 안답니다. 그런 분이 그 정도 말실수를 사과하기 위해 저를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니까요.”
하후란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린 강태웅이 종이 하나를 꺼냈다. 이곳 낭인촌에 오기 전에 길거리 화공에게 동전 두 문을 주고 복사한 지도의 그림이었다. 진본을 보지 않고는 그 그림은 그저 경치를 그린 풍경화로 보일 뿐이었다.
“여기에 그려진 곳이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후란은 자신이 생각한 강태웅이 찾아온 이유에 대한 예상이 틀렸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림을 받았다. 그리고 그림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이 그림만 보고 어디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네요. 이곳이 어딘지 알려고 하시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어릴 적 살던 곳을 생각나는 대로 그려본 것입니다. 만약 어딘지 알면 고향에 한번 가보려고요.”
“호호호! 설명치고는 무척 빈약하지만 믿을게요. 제 생각으로는 이런 모양의 산은 천하에 세 곳이 있어요. 물론 그 세 곳이 다 아닐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그 세 곳이라도 가르쳐주십시오.”
“절강성에 가면 항산이라고 있습니다. 그 항산의 일곱 번째 봉우리가 이 그림의 산과 비슷해 보이네요. 또 하나는 사천에 아미파가 있는 아미산에도 이것과 비슷한 봉우리가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숙성에 가면 천산의 끝자락인 북천산을 만납니다. 그곳에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곳을 지나면 바로 십만대산이 나오지요. 강태웅 대형께서도 아시겠지만 십만대산은 마도의 성지예요. 잘못하면 목이 몇 개라도 살아남기 힘든 곳이랍니다.”
강태웅은 하후란의 말을 들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나이나 용모는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로 짐작컨대 별로 많은 나이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단지 그림 한 조각으로 천하를 다 아는 듯이 말하는 그녀. 그녀의 진정한 정체가 궁금해졌다.
“유성탄 대형을 제가 포섭을 좀 하려고 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저의 뒤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이 큰 문파가 있다는 말이지요. 본문에는 천하의 모든 지형을 모두 그려서 특징을 써 놓은 글이 있답니다. 저는 단지 기억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구요.”
강태웅이 너무 놀라 하는 듯하자 하후란은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아직 유성탄을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맞는다 해도 놀라운 것만은 사실이었다.
“한 가지만 더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강태웅은 지도에 대해 다 듣자 혈문에 대한 것까지 알아 가기로 했다.
“말해 보세요.”
“혹시 혈문이라는 단체에 대해서 아시는지요?”
“혈문이요? 혈문은 왜……?”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요. 무림에서는 삼대 살수 집단에 드는 곳이에요. 한 십팔 년 전인가 청부를 잘못 받아서 멸문의 위기까지 갔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럼 지금은 없어졌습니까?”
“호호호! 제가 분명히 위기까지 갔다고 그랬는데요. 지금은 혈점사(血點死)라는 특출난 살수를 배출해서 다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 들었어요.”
하후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강태웅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혈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후란은 강태웅의 말에 정색을 하면 말했다.
“혈문은 여간한 방파들도 피하는 무림 최고의 살수 집단 중 하나예요. 그들과 원한을 맺으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까지 도는 곳이지요. 그런 곳을 왜 알고 싶어하는지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제가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의 허락 없이 이유를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후란은 강태웅의 말에서 당장 유성탄이 알고자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좋아요. 그렇다면 물어보시고 허락을 얻은 후에 다시 말해요. 솔직히 혈문의 위치는 무림에서는 대단히 비싼 정보랍니다. 그런 정보를 원하신다면 저에게도 뭔가를 지불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강태웅은 하후란의 말에 다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소저의 말씀이 맞습니다. 뭔가를 원하면 그에 합당한 뭔가를 주어야겠지요. 우선 제가 허락을 받은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 영주님!”
강태웅이 나가자 하후란은 급히 마효춘을 불렀다. 그리고 마효춘이 급히 들어왔다.
그런데 그 신법의 빠르기가 엄청났다. 마효춘은 강태웅이 생각한 듯이 일류가 아니고 초일류의 고수였던 것이다.
“낭인막을 철수하세요. 그리고 본문에 연락해서 제가 얼마간 문에 못 돌아간다고 전해주세요.”
“아가씨! 뭐 하시려구요? 그렇지 않아도 문주님께서 걱정이 여간이 아니십니다.”
“아버님께는 제가 정말 중요한 일 때문에 못 돌아간다고 해주세요.”
“저 혼자는 못 갑니다. 같이 못 돌아가시면 최소한 제가 보호는 해야 합니다.”
“마 영주님은 저를 이기실 수 있어요?”
“무공이야 아가씨께서 저보다 강하시지만 강호의 경험은 제가 훨씬 많습니다. 무림은 실력이 삼이면 경험이 칠인 곳입니다. 저를 우습게보시면 안 됩니다.”
하후란은 마효춘의 말이 이해가 되는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요. 대신 저랑 다니면서 일어나는 일에 방해를 하면 안 돼요. 그리고 문주님께도 제 허락 없이 보고는 안 돼요. 지킬 수 있겠어요?”
“당연합니다.”
* * *
“대형,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기연이 좋은 거라며?”
“그럼요. 엄청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 좋은 기연 너희들이나 가지라고. 나는 그냥 세상을 떠돌며 부모님이나 찾겠다 이 말이다.”
강태웅의 지도에 대한 얘기를 들은 유성탄은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무림인이 될 생각이 없는데 기연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유성탄은 야바위나 하면서 부모를 찾아다닐 생각이었다.
“대형! 기연에는 엄청난 보물도 있는 겁니다. 이런 거 들어보셨어요? 눈알만 한 구슬인데요. 무려 가격이 금자 만 냥! 그런 게 발에 차인답니다.”
“금…자 만~냥!”
유성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천 냥도 엄청 많다고 느낀 그에게 만 냥은 정말 얼마를 말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 액수였다.
마동파가 드디어 유성탄의 흥미를 끄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런 구슬이… 발에 차여?”
말을 하던 유성탄의 손이 그대로 마동파의 뒤통수를 갈겼다.
“내가 놀랄 줄 알았지! 짜식이! 가만히 두고 보려니까 대형을 아주 바보 취급을 해요. 야 그런 곳이 어떻게 우리한테까지 차례가 오냐? 솔직히 너희들 몰골을 좀 봐라. 재수가 있게 생겼나? 짜식들이 바랄 걸 바래야지.”
말을 마친 유성탄은 몸을 돌려 앉더니 야바위 패를 꺼내서 연습을 시작했다. 그는 천하제일의 야바위꾼이 될 생각이었다. 황금 만 냥이 발에 차이는 기연 따위가 자기에게 차례가 올 거라는 생각은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
“철검보에서 금자 백오십 냥을 보내왔습니다.”
장우왕과 마동파를 상대로 야바위 패를 돌리던 유성탄은 표도행의 말에 벌떡 일어섰다.
전에도 철검보의 무사를 때리는 바람에 자신이 받을 돈과 까이면서 돈을 못 받은 경험이 있는 유성탄은 이번에도 돈을 받기는 글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검보에서 순순히 돈을 보내온 것이다.
유성탄에게 맞은 철검보의 십여 무사는 보 내에서 최고의 고수급에 드는 무사들이었다.
당연히 금자 백오십 냥으로 유성탄과 싸우는 것은 손해라는 결론을 내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장손에게 보고를 받자 노룡호조차도 더 이상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잘됐구나. 그럼 이곳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이제 만사무불통녀가 말한 산들을 다 돌아보는 거다.’
하후란을 만나고 돌아온 강태웅은 철검보에서 돈을 보내왔다는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철검보에서 유성탄을 실질적인 고수로 인정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남무림에서 가장 패도적이라는 철검보가 이렇게까지 참는다는 것은 유성탄을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돌아볼 곳은 세 곳이다. 우선은 대형께는 대형의 가족을 찾아다니는 걸로 한다. 기연은 기연이고, 우선 낭인세계부터 통일한다.”
강태웅은 지도에 대한 기연을 믿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거기에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아우들에게 이런 것이 있다는 희망을 준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다고 보았다. 어차피 기연이란 하늘이 내린 사람에게나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강태웅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사무불통녀인지 년인지가 혈문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는 대신에 돈을 지불해라 그랬단 말이지?”
“돈을 원하는 건지 다른 것을 원하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원한다는 거 아니냐?”
“그렇지요.”
강태웅은 우선 떠나기 전 혈문에 대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유를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하후란의 말을 유성탄에게 전했다. 물론 거기에 대응하는 뭔가를 줘야 할 거라는 말도 같이 말했다.
그러자 유성탄은 이유는 말도 하지 않고 지불에 대해서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두 눈 뜨고 내 돈 못 내놓는다.”
“꼭 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두 눈 뜨고 내 거는 아무것도 못 내놓는다.”
강태웅의 부언에 말을 바꾸는 유성탄의 얼굴에는 불굴의 의지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 떠나면 만사무불통녀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좀 들더라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직접 알아볼 거다.”
강태웅이 다시 한 번 설득했다. 그러나 의지의 유성탄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여간에 자기 거는 엄청 챙기는 우리의 유성탄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를 떠나자 이거 아니냐?”
“맞습니다. 대형, 남자란 모름지기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입니다. 이제 우리도 큰 곳으로 나가야지요.”
유성탄의 눈이 반짝였다. 큰물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강태웅은 우선 혈문 건은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고 우선 중원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맞았어! 야바위를 해도 크게 놀아야 한다고 했다. 좋아, 나 유성탄이 크게 한 건 하리라!’
유성탄이 청운의 꿈을 꾸고 있을 때 강태웅과 아우들 역시 다른 의미의 청운의 꿈을 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