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유성탄의 신위 (7/79)

제7장 유성탄의 신위

‘히히히! 내가 꼭 뭐라도 된 기분이군. 흠! 그렇다면 뭔가를 보여줘야겠지.’

뒤를 한번 보고는 기분이 좋아진 유성탄은 앞장서서 달려 나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씨… 저 무서운 늙은이가 왜 저기에 있는 거야?’

눈이 엄청 좋은 유성탄의 눈에 대월인이 싸우는 모습이 들어왔다. 유성탄은 대월인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방향을 튼 유성탄의 눈에 위가 열린 가마 같은 곳에 뒷짐을 지고 서서 사방을 보고 있는 조그만 노인이 하나 눈에 띄었다.

‘뭐야! 저 늙은이는…….’

아직 싸움에 끼지 않고 혼자 무게를 잡고 있는 노인이 보이자 유성탄은 그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선 나이가 많았고 몸이 작은 게 만만해 보였다. 거기다 싸움이 무서워 뒤로 물러나 있는 것같이 보였다. 한마디로 가장 만만한 상대를 골라 덤빈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성탄의 대실수였다.

“우악!”

달려들던 유성탄은 그 노인의 간단한 손짓에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아이구, 아파라! 이거 잘못 건드렸구나. 저번 노인보다 더 아프다. 이걸 어쩐다?’

평원의 바닥에 털버덕 떨어진 것으로도 모자라 무려 십여 바퀴를 돌고서야 멈춘 유성탄은 고민에 빠졌다. 충동의 벌레들과 싸우면서 익힌 감각이며 자신의 장점인 빠르기도 전혀 상대가 안 되었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냥 죽은 척해? 에이 씨! 괜히 대형은 해가지고… 이대로 죽은 척하다가 깨면 엄청 쪽인데…….’

“아이고, 대형! 우리 대형이 죽었나 보다!”

마동파의 고함이 유성탄의 귀에 들렸다. 유성탄은 그 소리에 일어나기로 했다. 그리고 유성탄은 일어나서 옷을 툭툭 털며 소리쳤다.

“마동파! 너 나 유성탄 대형을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넌 두고 보기나 해라.”

유성탄을 날려보냈던 노인의 얼굴에 이채가 나타났다.

“이상한 놈이로구나. 노부의 장을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나다니……!”

노인은 한마디 중얼거리더니 쏜살같이 날아오더니 다시 유성탄의 턱을 그대로 발로 가격해 버렸다. 제법 거리가 있어 안심하고 속으로 작전(?)을 구상하던 유성탄은 갑자기 날아드는 노인의 발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이구! 나 죽네……!”

턱을 그대로 차이며 그 자세 그대로 삼 장 가까이 날아간 유성탄이 온갖 엄살을 부리며 다시 일어서자 전체 싸움까지 멈춰버렸다.

그 노인은 비월문의 첫째가는 고수인 안남지존 척지경이었다. 비월문 자체가 정치적인 집단인 덕에 문주는 그다지 고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비월문은 총당주를 맡고 있는 척지경을 정점으로 사대장로가 모든 일을 처리할 정도로 척지경의 권위는 비월문에서 대단했다.

특히 척지경은 안남에 한 명밖에 없는 무림 백대 고수에 이름을 올린 자였다. 당연히 남무림에서 가장 꺼리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래서 그가 나타났지만 아무도 그에게는 시비를 걸지 못하고 우선 경계만 하고 있었는데, 유성탄이 완전 실수로 그를 건드린 것이다. 그런데 척지경이 마음먹고 죽이려고 했는데도 죽지 않고 일어나자 모두 놀라 싸움을 멈춘 것이었다.

‘이거 분위기가 왜 이래? 이렇게 되면 은근슬쩍 죽은 척하기도 힘들고 도망가기는 더욱 힘들게 됐는데…….’

수백에 달하는 무사들이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 유성탄과 척지경을 쳐다보자 유성탄은 뭔가 생각과는 다르게 흐르는 분위기에 완전 죽상으로 변해버렸다.

“싸움은 왜 멈추느냐! 다 죽여라!”

잠시 멈췄던 싸움은 척지경의 외침이 터지자 다시 어지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척지경은 자신의 외침으로 다시 싸움이 시작되자 유성탄을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유성탄이 갑자기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내가 말이오. 노인장에게 덤비려고 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덤비려고 한 것이 잘못된 겁니다. 그러니 화가 나셨다면 이만 푸시고 우리 싸움은 여기서 끝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척지경이 잠시 손을 멈췄다. 유성탄의 어이없는 말을 듣던 척지경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고 느끼고는 다시 신형을 날렸다. 유성탄은 몇 번 맞은 척지경의 손속에 이미 질려 있었다. 대월인과 싸울 때도 엄청 엄살을 피웠지만 이번에는 정말 그때의 몇 배는 아팠던 것이다.

‘저 노인의 손에 그대로 계속 맞다가는 아무래도 오래 못살지도 모른다.’

유성탄은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심각하게 싸움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척지경의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물론 잘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맞아가며 무림인이 가장 펼치기 싫어한다는 뇌려타곤에 손까지 발로 사용하는 네 발 달리기, 거기에 더해 왔다갔다 뛰어다니기 등 온갖 화려하고 치사한 수법을 다 동원해서 도망 다니는 것이었다. 그 덕에 정통으로 맞는 것은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얼마 안 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이 뻔히 보였다.

“이놈이! 용병 따위가 내 손을 피해!”

척지경이 약이 올랐는지 갑자기 진력을 십 성으로 올리더니 자신의 진신절학을 펼쳤다. 갑자기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척지경의 몸이 사라지는 듯싶더니 어느새 유성탄의 뒤에 나타나 그대로 유성탄의 뒤통수를 갈겨버렸다. 이곳에 모인 모든 무사 중 최고의 고수다운 수법이었다.

간신히 피해나가던 유성탄은 척지경이 갑자기 사라지자 순간 어리둥절하다가는 척지경의 장이 뒤통수 뇌호열에 작렬하자 완전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더니 그대로 뻗어버렸다.

‘놀라운 놈이구나. 분명 내공도 없고 호신강기도 없는 놈이 나의 철사장에 그렇게 맞고도 피 한 방울 안 나다니.’

척지경은 은근히 질려 있었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계속 소리를 질러내던 유성탄이 괴물같이 보였다. 하지만 뇌호혈은 백회혈과 마찬가지로 사혈 중의 사혈이었다. 만약 살더라도 거의 바보를 만들어버리는 곳이 그 혈도였다.

그곳을 철사장으로 거의 십 성에 가깝게 쳤으니 속으로는 뇌가 다 망가져 버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전혀 피를 흘리지 않은 유성탄의 신체가 무척 신기했다.

“아니 이놈이!”

유성탄의 몸을 아예 박살을 내 버릴 심산으로 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던 척지경은 순간 놀라 소리쳤다. 죽은 줄 알았던 유성탄이 갑자기 달려들더니 척지경의 몸을 잡고 늘어진 것이었다. 마치 벌레가 죽은 척하다가 갑자기 도망치듯 순식간에 달라붙는 유성탄을 척지경도 순간적으로 피하지 못한 것이다.

펑!

척지경의 십이 성 공력이 깃든 장이 다시 유성탄의 몸에 작렬했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척지경의 몸을 잡고 늘어지던 유성탄은 다리를 입으로 물면서 손으로는 척지경의 남자를 손으로 꼭 잡았다.

“이놈이 치사하게!”

척지경은 무인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하지 않을 유성탄의 치사한 행동에 아연실색했으나 이미 잡힌 아래에서는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척지경은 손에 최대한 살기를 머금고 무차별하게 유성탄을 때렸다. 하지만 온갖 사혈을 다 맞아도 유성탄의 입은 척지경의 몸을 죽어라 물고 있었고 손은 터져라 하고 물건을 꽉 잡고 있었다.

순간 척지경의 싸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비월문의 고수들이 급히 달려왔다. 뭔가 상황이 이상해진 것을 느끼고는 척지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 수 늦고 만다.

남무림에서 먼저 튀어나온 태을문의 상명도장의 검이 먼저 척지경의 가슴을 뚫어버린 것이었다. 척지경이 유성탄에 잡혀 몸의 움직임이 느려지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유성탄의 손이 척지경의 남자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던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개같은……! 이런 버러지 같은 놈 때문에 나 척지경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심장을 뚫리고는 살 수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즉사할 상황에서도 몇 마디 지껄인 척지경은 어이 없이 죽어버렸다.

“안남지존 척지경이 죽었다!”

“태을문의 상명도장이 척지경을 죽였다!”

순식간에 척지경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전장을 덮었고 싸움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대형,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척지경이 죽은 후 싸움은 쉽게 결말이 나 버렸다. 원래부터 싸움 자체가 척지경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시작되었고 또한 비월문 최고의 고수인 척지경이 죽은 이상 남무림과의 싸움을 계속한다 해도 비월문으로서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싸움의 와중이라 거의 모든 사람이 척지경이 죽는 상황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여섯 명의 아우들은 잠시도 유성탄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척지경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 유성탄의 덕임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그놈은 얼마짜리였냐?”

“오십 냥 이상짜리였습니다.”

“그래?”

유성탄의 입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돈이면 배곯지 않고 엄마와 아버지를 찾아 천하를 다 뒤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자들이 그 돈을 다 대형께 줄까요? 사실 대형이 죽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황대산이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무림인들이 얼마나 약은데요. 분명 그것을 핑계로 돈을 안 줄 확률이 있습니다.”

“만약 금자 오십 냥 다 안 준다면 내가 다 때려 부술 거다. 나 유성탄의 돈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 푼도 떼어먹지 못한다.”

강경하게 말하는 유성탄의 말을 들으며 강태웅이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형, 대형의 마음은 알지만 만약 저들이 주지 않는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 내가 아니었다면 척지경인지 뭔지 하는 늙은이는 못 죽였을 것이다. 얼마나 셌는데…….”

“만약 철검보에서 난장을 치면 수천 명을 상대로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는 척지경만큼 강한 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는 안 주더라도 반은 주지 않을까?”

* * *

“왜 부르신 겁니까?”

갑작스런 철검보 총관 배장손의 부름을 받은 유성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방금 남무림 대표들끼리 의논을 했네. 그리고 자네에게 금자 열 냥을 지급해 주기로 결정했다네.”

“금자 열 냥이라고요? 아니 이기기만 해도 금자 두 냥이고, 은자 열 냥짜리도 셋이나 내가 죽였고, 거기다 금자 오십 냥짜리도 내 덕에 죽였는데 어째서 금자 열 냥이라는 말입니까?”

돈에 관해서는 상당히 똑똑한 유성탄이 따지듯이 말하자 배장손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다른 용병들은 금자 두 냥으로 끝이다. 솔직히 네가 척지경과 싸우고서도 죽지 않은 것이 장해서 더 생각해 주는 것이다. 자꾸 척지경을 죽인 공이 네 거라고 우기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주는 거나 받아 가라.”

배장손의 말을 듣던 유성탄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밸이 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니 아들이냐? 왜 말끝마다 반말이야! 썅… 금자 오십 냥도 안 줄 거면서 왜 반말이냐구! 더러워서 돈 안 받는다. 하지만 나 인간 유성탄 손해보고는 못 산다는 것만 알아둬라. 니들 남무림 나한테 찍혔어!”

유성탄은 말을 끝내자마자 방문을 그대로 발로 차며 밖으로 나갔다. 유성탄의 발에 차인 방문은 박살이 나며 떨어져 나갔다.

“아니 이놈이……!”

배장손이 소리를 치며 일어서다가는 유성탄이 째려보는 눈에 움찔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 분명 말하지만 너희 남무림 놈들 나한테 찍혔어. 두고 봐라!”

유성탄이 처음으로 돈보다 자존심을 택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 * *

“대형, 왜 그러시오?”

마동파가 유성탄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자 말을 붙인다.

“금자 열 냥이라도 그냥 받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달도 밝고… 그냥 울적하다.”

“아닙니다. 잘하신 겁니다. 대형 같은 분이 그까짓 금자 열 냥에 연연하시면 안 됩니다.”

‘이 자식이… 누구 약올리나? 연연이 되는 걸 어쩌라는 거야!’

유성탄은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었다. 우선 받고 성질을 내고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안 받고 성질을 낸 것이다. 강태웅의 말이 아니었다면 사단이 나도 이미 났겠지만 유성탄은 무식한 거였지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대형, 이제 용병생활도 오늘이면 끝입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강태웅의 말에 유성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런 것도 생각해야 되는 거냐?”

유성탄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질렸다는 표정이 그려졌다.

“대형! 아무리 그래도 내일을 한 번쯤은 생각하는 것이 인간 아니겠습니까? 나 같은 막장 인생도 이따금 내일 내가 뭐를 해야 하나 하고 미래를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장우왕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직 형제의 의를 결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된 거 오늘 달도 밝은데 월하결의(月下決意)를 맺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막내인 표도행이 말했다.

“맞소! 그러고 보니 우리도 대형과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한 것 같소. 아예 오늘 우리 목숨을 대형께 맡기는 결의를 합니다.”

황대산도 나서며 말했다. 이미 전투에서 유성탄의 위력을 본 그들인지라 유성탄을 대형으로 모시는데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낭인들 사이에서 유성탄은 완전히 대형으로 인식이 되었다. 삼류의 무공에 그렇게 맞고도 이빨과 손으로 안남 최고의 고수를 잡는데 공헌을 한 유성탄의 모습은 낭인들에게는 너무 멋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는 짓이 너무 치사해서 무림인들에게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인물로 각인되었다.

“우리 일곱은 태어난 날과 태어난 곳은 모두 다르지만 죽음은 한날한시 같은 곳에서 죽기를 결의합니다. 또한 대형의 명은 곧 하늘의 명이니 대형의 뜻이라면 죽음을 불사할 것이며, 대형은 아우들을 사랑하고 보호한다. 이제 우리는 천지신명께 우리의 결의를 천명하니 만약 이 약속을 어기는 자가 나올 시에는 벼락을 맞아 죽어도 싸다.”

뭔가 있는 듯이 나가던 결의문은 끝으로 가더니 낭인답게 끝났다.

“캬아! 대형을 위하여!”

모두는 큰 사발에 술을 가득 담아 꿀꺽꿀꺽 단숨에 마시고는 유성탄에게 큰절을 했다.

‘내 형제란 말이지! 흐흐흐…….’

처음에는 뭘 그런 걸 하나 하던 유성탄은 여섯 명의 아우가 절을 하자 이상하게 가슴이 복받쳐 옴을 느꼈다.

충동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외롭게 지냈는지 모른다. 그냥 그렇게 벌레나 잡아먹다 죽는 줄 알았었다. 충동을 나와서는 돈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돈을 모으는데 집착했다.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한 유성탄으로서는 배고픈 것이 제일 싫었다. 사람으로서의 생각보다는 본능을 따라 행동을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아우들이 생긴 것이다.

“하하하! 나 유성탄에게 아우들이 생겼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않을쏜가. 하하하!”

유성탄의 입에서 기쁨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아침이 되자 용병들은 모두 금자 두 냥씩을 받고는 뿔뿔이 흩어져갔다. 남무림에서는 용병들에게 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전쟁에서 이겼으니 나가는 돈은 모두 비월문에 청구할 것이었고 그동안 손해본 것까지 챙길 것이었다.

“대형 낭인촌으로 가시겠습니까?”

“거기 가서 뭐 하게?”

“이제 우리가 낭인칠웅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났으니 낭인세계에서는 우리를 얕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세력을 좀 만드는 거지요.”

“맞습니다. 우리 정도면 큰 문파가 없는 지역에 방파 하나 만들어 큰소리 칠 만합니다.”

“난 싫다. 그런 거보다는 우선 엄마 아버지와 혈문을 먼저 찾아야겠다.”

유성탄은 부모를 찾기 위한 계획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지만 혈문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 어떻게 혈문을 잊고 지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다. 그렇게 복수를 한다고 이를 악물었는데… 세상에 나오자 너무 좋은 나머지 깜빡 잊은 것이다.

“부모님은 이름도 모른다면서요?”

“내가 언제나 엄마 아버지라고만 불러서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아버지 성이 유씨인 것은 분명하다.”

유성탄이 성을 기억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자 모두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유성탄의 아버지의 성이 유씨인 것을 아는 것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뭔가 조금이라도 단서는 있어야 찾을 수가 있을 텐데요.”

강태웅이 굵직하게 말하자 유성탄이 걱정 말라는 투로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돈을 좀더 벌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다 뒤져볼 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찾겠지.”

“대형! 도대체 천하가 얼마나 넓은데 집집마다 찾아다닌다는 겁니까? 그렇게는 절대 못 찾습니다.”

마동파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혈문과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가장 머리가 좋은 표도행이 뭔가 생각을 하더니 물었다.

“그놈들이 나를 납치해서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었다. 나를 건드렸으니 그 죄는 물어야 하지 않겠냐?”

“혈문이라면… 그게 살수문 아닙니까?”

표도행이 모두에게 묻듯이 말했다.

“그래! 나도 들어본 것 같다. 대형, 살수문 맞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상당히 유명한 살수 집단이라고 들었는데요.”

마동파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단서는 나왔네요. 혈문을 찾으려 하면 대형을 어디서 납치해 왔는지 아는 놈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표도행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혈문에 대해 들어봤다고? 그럼 그놈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아냐?”

“그거야 모르지요. 살수문에서 제일 극비로 치는 것이 자신들의 본거지의 위치입니다. 본거지가 알려지면 사방에서 복수를 한다고 달려들 텐데 알려지게 할 리가 없지요.”

유성탄이 급히 묻자 마동파가 어깨를 움찔하며 말을 이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살수문이라는 특성상 의뢰는 받아야 합니다. 찾으면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유성탄이 실망하는 듯하자 강태웅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개방은 모르는 게 없다고 하던데.”

마동파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하자 강태웅이 대답했다.

“개방은 구파일방 중 하나다. 우리 같은 낭인이 가서 말한다고 가르쳐줄 리 없다.”

“맞습니다. 괜히 갔다가 머리에 혹만 붙이고 올 수도 있습니다.”

표도행도 강태웅의 말이 맞다는 듯이 말했다.

“낭인촌의 만사무불통녀가 모르는 게 없다고 소문났던데요.”

마동파가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는 듯이 말하자 철패도 맞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저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사무불통녀란 말은 들었지만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잖습니까?”

표도행이 말을 하다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외쳤다.

“맞습니다. 귀면호리 그 여우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낭인막의 실제 주인이 만사무불통녀라는 소문이 있었으니 그 말이 맞다면 분명 귀면호리가 알 것입니다.”

“대형, 우선 낭인촌에 가서 귀면호리를 잡아 물어보면 알지도 모릅니다. 그쪽으로 가보지요.”

장우왕이 결정 났다는 말하자 모두 몸을 일으킨다.

“그런데 오늘은 청루에서 하루 놀고 가는 것이 어떨까?”

유성탄이 청루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말했다.

청루에 도착한 유성탄은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초앵부터 불렀다.

“헤헤, 지금 초앵이는 손님과 같이 있습니다. 제가 더 예쁜 기생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싫다. 난 초앵이가 좋다.”

유성탄이 고집을 피우자 철패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대형이 말하면 들어라. 우리 비위 거슬리면 어찌되는지 알지?”

그냥 조용히 하는 말이었지만 철패의 덩치에 위압감을 느끼고 있는 점소이에게는 마치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죽인다는 말로 들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초앵이 받고 있는 손님들이 철검보의 무사들인 자라…….”

“뭐? 철검보!”

유성탄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철검보에 감정이 있던 그로서는 초앵까지 꿰차고 있다는 말에 흥분한 것이다.

“어디야? 내가 오늘 사생결단을 한다.”

“대형, 무슨 청루 기생 따위 때문에 사생결단까지 나오십니까? 제가 더 예쁜 아이를 골라올 테니 참으십시오.”

마동파가 놀라 급히 말린다.

“아니야, 이 자식들 철검보에 있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거기다 돈도 다 못 받았고. 난 한번 찍으면 죽을 때까지 괴롭힐 거야.”

유성탄이 일어서며 말하자 마동파도 일어서려고 했다.

“마 동생, 대형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동생으로서 대형이 하는 일을 돕기만 하면 된다.”

강태웅이 마동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잘못하면 시작도 하기 전에 우리가 떼죽음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형으로 모셨으면 그냥 믿자.”

강태웅의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유성탄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 내가 바로 사나이 유성탄이다. 믿어라.”

상대가 조금만 세도 도망갈 생각부터 하면서도 언제나 큰소리는 천하제일고수인 유성탄이었다.

“야! 초앵이 너 내가 오라는 소리 못 들었어! 앙!”

철검보의 무사들이 놀고 있는 방문을 다짜고짜 열고 들어선 유성탄은 우선 소리부터 질렀다. 상대의 기세를 죽이려면 목소리가 커야 한다. 양아치들의 첫 번째 법칙이었다.

소리를 지른 유성탄이 몸을 건들거리기 시작했다. 양아치들의 두 번째 법칙이었다. 불량하게 보여야 상대가 겁을 먹게 되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양아치 근성은 타고났나 보다.

“대형, 몸은 흔들지 마십시오. 품위가 떨어집니다.”

뒤에 서 있던 강태웅이 조그맣게 말하자 건들거리던 유성탄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품위가 떨어진다지 않는가. 유성탄은 품위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급 양아치였다.

“초앵이 이리 나와!”

유성탄이 다시 소리쳤다.

“이게 누구야? 태웅이 아닌가?”

앉아 있던 철검보의 무사 중 하나가 강태웅을 알아보고는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유성탄이 대단한(?)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유성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안남제일고수를 죽인 것은 공식적으로 태을문의 상명도장으로 되어 있었고, 척지경에게 맞으며 뒹굴다 온몸에 흙을 뒤집어썼던 유성탄을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철검보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용병 사이에서는 이미 유성탄이 대장이 되어 있었지만 철검보의 무사 정도 되는 그들이 용병들을 유심히 볼 리 없었다. 강태웅만은 그래도 오래 같이 생활했기에 기억하는 것이었다.

“야 이 자식아! 내가 말하는데 왜 태웅이는 찾아! 이거 웃기는 놈이네.”

유성탄의 말을 들은 철검보의 무사들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자식? 놈?”

잠시 유성탄의 말을 뇌까린 철검보의 무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치사한 유성탄이 그들이 몸을 다 일으킬 때까지 기다려줄 리 없었다. 양아치의 마지막 법칙, 상대가 준비하기 전에 먼저 먹여라! 선방이었다.

순식간이었다. 아무리 기습이라고는 하나 정식 무공을 배운 철검보의 무사들이 손도 못 써보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버렸다.

“대형! 죽인 것은 아니겠죠?”

표도행이 놀라 물었다. 약간의 시비는 몰라도 만약 죽였다면 문제가 커진다. 철검보는 남무림에서도 가장 호전적이고 거친 문파였다.

“안 죽었어, 인마! 나는 딱 칠 때 어느 정도면 안 죽는다를 딱 알아. 그리고 아버지께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고 하셨다.”

말을 마친 유성탄은 얼굴에 웃음을 함빡 지으며 겁에 질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초앵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리 오라는 말이었다.

“하하하! 내가 그 늙은이를 작살내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유성탄의 전투에서의 무용담을 듣는 아우들의 얼굴이 편치 않았다.

‘대형도 참… 직접 본 사람들이 이렇게 있는데… 뻥을 쳐도 어찌 저렇게 칠 수 있을까?’

그 싸움의 현장에 모두 있었다. 그러나 유성탄의 무용담 중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유성탄이 거기에 있었다는 말 이외에는 전부 다 뻥이었다.

“아니 이게 전부 돈이에요?”

“그렇다니까, 내가 엄마 아버지를 찾으려고 모은 돈이야. 이제 제법 모였으니 내일부터 돈 버는 것은 그만두고 엄마 찾으러 갈 거야.”

얼큰하게 취한 모두가 여자 하나씩을 옆에 끼고 사라지자 드디어 초앵과 단 둘이 남은 유성탄은 초앵을 안았다. 그런데 안으니 허리에 고이 모셔둔 돈 전낭이 거치적거렸다. 철검보를 나오면서 그동안 피땀 흘려 번 돈을 모두 갖고 나온 유성탄이었다.

드디어 한 달이 넘게 고대하던 초앵과의 회포를 푼 유성탄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곯아떨어져 버렸다.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유성탄이었다. 정말 깊고 깊은 잠이었다.

“대형! 이만 일어나십시오. 벌써 점심입니다.”

강태웅이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깬 유성탄이 문을 열며 나왔다. 아직도 웃통도 입지 않았다.

“대형, 어제 정말 재미있으셨나 봅니다. 지금까지 주무시고 말입니다.”

황대산이 흉터가 가득한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헤! 내가 어제 죽여줬거든. 무려 백 번을 뛰었더니 좀 피곤하구나.”

유성탄의 말을 들은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백 번이라면… 대형의 성격상 열 배로 불렸다고 보면… 그래도 열 번인데, 한 번도 안 했다더니 한꺼번에 뽑아내는군.’

벌써 유성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채기 시작한 똑똑한 아우들이었다.

“어쨌든 빨리 가셔야 합니다. 철검보의 무사를 어제 건드렸으니 분명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으니 빨리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강태웅이 이제 떠나야 한다는 듯이 말하자 유성탄은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방안을 쳐다본다. 초앵을 보기 위해서였다.

“응! 얘가 어디 갔지?”

“초앵이요? 지금이 몇 신데요, 벌써 일어났겠지요.”

철패의 말에 유성탄은 그렇지! 하면서도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당장 초앵이 찾아와!”

유성탄이 부리나케 옷을 주워 입다가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유성탄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으아악! 초…앵…이… 그게……. 으아! 내 돈주머니를 들고 사라졌다!”

“대형! 그 계집이 아예 작정을 했나 봅니다. 기둥서방이 있었는데 같이 사라졌다는군요. 어젯밤 이후로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답니다.”

장우왕이 풀이 죽어 앉아 있는 유성탄을 보며 위로하듯이 말했다.

“하여간에 이런 데 있는 계집한테는 돈을 보여주면 안 됩니다. 믿을 계집이 아니라는 거지요.”

철패가 마치 자기도 경험이 있다는 듯이 말했다. 나름 유성탄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함부로 연장을 사용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마동파도 위로한답시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노려보는 유성탄의 눈길에 입을 다문다. 위로 같지 않은 위로는 약 올리는 것이 되는 법이다.

“지금 사방에 아이들을 풀어놓았습니다. 계집이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곧 잡힐 겁니다.”

표도행이 유성탄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을 꺼냈다.

“이곳을 벗어났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만…약 이미 벗어났다면…….”

“벗어났다면……?”

“못 잡는 거지요.”

“이게!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대형!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입니다. 사나이 대장부는 이런 정도에 풀이 죽으면 안 됩니다. 돈이란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법이니 다시 벌면 됩니다. 대형 같은 대인은 이런 정도는 까짓 거 불쌍한 계집에게 적선했다 생각하고 마음을 푸십시오.”

가만히 말을 듣던 강태웅이 유성탄에게 대인의 풍모에 대해 설명했다.

“야! 강태웅! 너도 니 돈 잃어버리면 그렇게 말 못 한다. 피땀 흘려 번 돈을 한 순간에 날리면 얼마나 허탈한지 아냐!”

유성탄이 강태웅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하자 마동파가 끼어든다.

“솔직히 대형이야 피땀 흘린 것도 없지 않습니까? 남들이 대형 주먹에 피땀을 흘렸지요.”

마동파의 말에 유성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마동파! 너 이제부터 하루에 장기 열 판씩 두어야 한다. 빨리 잃어버린 돈을 채우려면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열심히 일해야 할 것 같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우리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대형의 돈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대형 같은 분이 동생들이 돈을 준다고 받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냥 우리의 성의라 생각하십시오.”

처음에는 강태웅의 말에 귀가 번뜻했던 유성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저게 돈을 줄 테니 받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저놈은 만날 얘기를 요상하게 한단 말이야.’

강태웅은 이미 유성탄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 유성탄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인간관계를 조금씩 가르치고 있었다. 거기다 유성탄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었지만 초앵이 유성탄의 돈을 들고 튄 것을 오히려 반가워하고 있었다.

‘대형! 남자가 죽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여인을 믿는 것입니다. 이번 일은 대형께서 여인을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시게 된 수업료라고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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