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_에필로그
청담의 한 호텔 예식장.
“은호야. 축하한다.”
잘 차려입은 곽지운이 하얀 장갑을 낀 채 최은호에게 악수를 건넨다.
“결국 형.. 사고 칠 줄 알았어.”
머리를 모두 뒤로 넘긴 김예성도 어깨를 으쓱하며 최은호의 어깨를 두드린다.
“이제. 어른. 맞네.”
이제는 살이 제법 올랐지만 여전히 허수아비 같은 유상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최은호를 외면한다.
“야, 고맙다.. 얘들아.”
멋지게 차려입은 최은호가 뒷머리를 긁으며 환하게 웃는다.
“근데..”
“이거 맛있다. 먹을 사람?”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이유찬이 접시를 내민다.
애피타이저로 제공되는 핑거 푸드다.
“너 이거 먹으면 이따가 밥 못 먹는다.”
“엥? 밥이 또 나옴?”
“예식 중에 코스 서빙되는 거잖아.”
“김미드 천재다.”
“뭐..”
탑과 미드가 티격태격하며 멀어진다.
최은호는 휴대폰을 꼭 쥐고 메시지를 보냈다.
- 으노 : 이제 결혼식 시작할 것 같아!!!
물론 이 결혼식은 최은호의 결혼식이 아니다.
- 찹쌀떡♡ : 응응! 잘 다녀 와♡
- 으노 : 우리도 여기서 결혼할까?
아나 암브로지우 킴이 기혼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좌절했던 최은호는 몇 달 전에 ‘진짜’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
횡단보도에서, 첫눈에.
그 전과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떨림.
최은호는 그 순간을 평생 기억할 게 틀림없다.
그를 그저 평범한 대학생으로 생각했던 동갑의 상대는.
최은호가 삼성역 3번 출구 지하철 광고판으로 공개 고백을 했을 때 그가 월챔 우승 경력을 가진 프로게이머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이 일이 일어난 직후 사촌의 팔촌까지 연락해 와서 이 남자의 무모하고 섣부른 선택을 지탄했지만.
- 찹쌀떡♡ : ㅎㅎㅎ그런 걸 두고 ♡깝친다고 해^^
- 으노 : ㅇㅋ 확인♥
상대는 최은호의 주접과 찐따스러움을 사랑스럽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고.
- 찹쌀떡♡ : 괜히 ♡허세 부리지 말고 겸손하게^^
그의 진상짓 뒤에 숨은 허영을 눌러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 으노 : 근데ㅜ 하트가 하트 맞지? 욕 아니지?
- 찹쌀떡♡ : ♡♡
무엇보다도.
메신저 고백도 아닌 지하철 광고판 공개 고백을 받아주는 대인배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SNS를 해놓고도 후폭풍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줬을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상대는 최은호와 정반대의 타입.
SNS도 없는 데다 개인에게 집중하는 타입이었던 그녀는 그 어떤 다른 것보다도 그저 ‘최은호’라는 사람을 들여다봤다.
권건과 부딪히면서 솔직하게 드러내기 시작한 그의 순수한 일면을.
- 으노 : 나도 사랑해♥
그가 가지기 위해 노력했던 스펙은 최소한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 ‘고백할 용기’를 주는 역할 정도가 되어줬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최은호는 행복했다.
자기만.
“으.. 씨.. 극혐.”
몰래 메시지를 엿본 곽지운은 토하는 표정을 지었다.
“쟤. 아직도. 저럼?”
“이제 슬슬 그만하겠지. 곧 찹쌀떡님 과외 알바 시간이라.”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알고 싶지 않았어..”
유상준과 대화하던 곽지운이 비뚤어진 나비넥타이를 바로 멨다.
“얘들아! 여기야!”
그리고 힘차게 손을 흔든다.
“형!”
“지호야, 여기서 그렇게 크게 말하지 마.”
“정일도 니 이제 내 원딜도 아니잖아. 꺼져.”
“너의 원딜. 만발 특등 사수의 포상 휴가로 대체되었다.”
“미친 굳건이..”
우르르 몰려든 것은 퓨처스 리그의 선수들.
“와이구야, 오랜만이네잉.”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는 문봉구다.
“행님덜 잘 지냈소잉?”
“어.. 응.. 근데.. 넌.. 왜..”
“수염 멋지죠잉.”
“아니..”
문봉구는 스트리머로, 때론 퓨처스 리그의 구루로 활동하고 있다.
적성을 찾은 그는 더 행복해보였다.
“화면발도 안 받으니까 제발 좀 깎으라고 해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작은 캠을 들고 따라다니던 편집자 지세현이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이 평범한 대학생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 여러분. 여기 계셨네요.”
“헉.”
“헥.”
“반갑습니다. 이 테이블, 비었나요?”
“비.. 비비비비비비비비었어요. 앉으세요. 앉으세요.”
2군 서포터 이지호는 벌벌 떨며 캐스터 안은우에게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민초 이지호 선수.”
“제.. 제제제제제 이름은 어떻게..”
“당연히 알죠. 퓨처스 리그는 미래의 리그 아닙니까?”
안은우 캐스터는 여러 해설자를 홀렸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어린 선수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비밀인데. 저도 민초단이거든요.”
“헤으응.. 캐스터님..”
이지호가 몸을 배배 꼴 때.
“이쪽은 정글 단디, 미드 산입니다. 또 이 친구는..”
2군의 주장이었던 정일도가 나서서 다른 선수들을 소개했다.
계약을 그만두고 입대를 선택한 정일도는 이제 이 세계로 돌아오지 않겠지만, 현역 2군 선수들에게는 얼굴도장 하나하나가 소중한 기회다.
“장한울, 김산 선수시죠?
“어어어어어어떻게..”
“아, 반응이 다 똑같네. 귀엽게.”
어린 선수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 캐스터는 정일도를 향해 악수를 청한다.
“제가 다른 분 만나면 좋은 말 많이 할게요. 앞으로 좋은 일만 있으실 거예요. 전 선수, 정일도님.”
군인 신분의 정일도도 웃으며 마주 악수했다.
“감사합니다. 캐스터님, 응원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곽지운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말은 여러 가지인 법이다.
“형. 건이는?”
자리를 떴던 이유찬과 김예성이 두리번거리며 돌아왔다.
“얘들아, 건이 봤어?”
“건이 형은 저기 앞에..”
“그 뭐지.. 수금하고 있어.”
“수금이 뭐냐. 축의금 받는 곳이겠지.”
김예성은 발을 바삐 움직였다.
권건이 보인다.
“..주.. 멋진데요.”
“힘 좀 썼죠.”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 끝내주게 차려입은 권건은 반쯤 캐주얼한 복장이었다.
너까지 힘을 주면 안 된다는 박 감독의 부탁을 받아들인 셈이다.
“이런 지원은 별것도 아니에요. 선수님들이 해주신 거에 비하면, 뭐..”
김수연 단장은 여전히 건강하게 빛나는 구릿빛 피부로 활짝 웃음 지었다.
FWX에게 공을 들인 만큼 입지가 잡힌 그녀는 항상 이 팀에게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를 고민했다.
“단장님, 감사합니다.”
옆을 지나가는 FWX 소속 타 게임 팀 감독이 권건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활동 축소 위기를 벗어난 팀이다.
권건은 김예성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수신호를 알아들은 김예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내로 돌아갔다.
오늘은 박진현 감독의 결혼식.
그와 결혼 상대의 가족들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온 이 자리는 전체 대관으로 진행됐다.
권건은 통 큰 축의금을 건넨 스톰의 감독과 미드 강준윤도 만났고.
자기 누나가 결혼하는 것처럼 울고 있는 유니버스 탑 최정인과 원딜 강은찬도 만났으며.
미라쥬에서 온 털보 한상열과 말썽꾸러기 왕지우, 유상준의 옛 원딜 고수호도.
선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 트릭스터의 새로운 감독과 미드 채지한도.
곽지운의 친구이자 은퇴 선언을 마친 호넷 스트리머 안우진도.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F.L.E 감독 오지현과 이수민, 그리고 이름을 찾은 원딜러 이신도.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한 해머스의 한동규 감독과 언론계에서 종사하는 그의 아버지도.
그리고 새롭게 하위권 SS 듀오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빅스와 피닉스에서 보낸 사람들도 만났다.
그저 한 자리에 서서, 몇 달만큼 더 나이를 먹은 사람들을 지켜보며 웃었다.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는 이제 권건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팀으로 올 수도 있고, 전직을 할 수도 있으며, 레전드로서 맞붙을 수도 있다.
긴장되면서도 행복한 일이다.
해외에서 온 선물이나 윤도형이 보내온 롤링 페이퍼도 있었다.
이 롤링 페이퍼는 얼마 전 협약을 맺은 G3에서 보내온 놀림 페이퍼에 가까워서, 팀에서는 이 팔만대장경을 박 감독의 업무 복귀 후에 제공하기로 했다.
다만 유로로 동봉된 축의금은 박 감독의 신혼여행 때 요긴하게 쓰일 예정이다.
그리고.
[ 우승 스킨은 뭐로 했어? ]
슬슬 모두 예식을 보기 위해 장내로 입장한 시각.
“글쎄.”
권건은 여전히 로비에 서 있었다.
종종 멀리서 시선이 꽂히지만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가드들이 시선을 던지자 이내 흩어진다.
[ 내가 못 알아낼 줄 알고? ]
“벌써 지나간 날인데 그게 궁금해해서 뭐 해.”
[ 그래도. 혹시 나랑 영원히 못 만날 줄 알고 릴리야를.. ]
“넌 바쁜 일도 없어? 새 친구를 찾아본다며?”
그가 고개를 돌린다.
이제 제법 늘씬하게 자란 소녀가 팔짱을 끼고 왼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다.
[ 왜, 누구 올 사람 있어? 넌 왜 안 들어가? 내가 맞춰볼까? ]
서로 기가 막히게 동문서답이 이어졌지만.
[ 너를 신처럼 떠받드는 여자는 벌써 저 안에 있고.. ]
권건은 익숙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상준이네 누나? 코스어 휘감는 죽음의 광휘 유다희님? 그분 정말..”
[ 정말 뭐? ]
키는 컸지만 여전히 가늘게 찢어지는 눈매에는 어린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흠, 흠.”
권건은 눈꼬리를 접으며 헛기침했다.
“넌.. 가끔 신인지 악마인지, 아니면 그냥 미취학 아동인지 모르겠다.”
[ 뭐.. ]
지독하게 길었던 시간은 모두 지나간 일이다.
그 모든 게 지나간 일이다.
권건은 그냥 웃었다.
그때,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난다.
“건아. 후, 후욱.”
깔끔한 턱시도를 입은 박진현 감독이다.
그는 어쩌면 결승 무대에 선 것 같은 선수들의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있다.
손은 이미 땀으로 축축해서, 그를 따라온 도우미들이 부드러운 손길로 박 감독의 옷매무새를 다시 만져줬다.
이것도 역시 어떤 프로게이머의 또 하나의 미래일 것이다.
“자꾸, 자꾸 땀이 나고 떨리네..”
하지만 그도 웃고 있었다.
가슴 떨리는 시작의 순간.
이제야, 또 다른 인생의 시작.
“축하드립니다.”
“너도 축하한다.”
권건은 공감하며 악수를 건넸다.
‘릴리야.’
그리고 작게 눈썹을 움직이며 입을 달싹거린다.
‘우리 감독님한테 빔이나 쏴줘.’
[ 무슨 빔? ]
‘자라나라 머리머리. 기억나지? 우리 감독님, 고생 많이 하셔서 말이 아니다.’
[ 너는 내가 무슨 릴리에몽.. ]
‘오늘 좋은 날이잖아. 새로운 하루.’
[ ··· ]
한결 훤칠해진 박 감독이 밝은 문 너머로 사라지고.
이어서 식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신부 대기실에서 낯선 얼굴이 나온다.
“고마워요.”
그의 신부는 권건 옆을 지나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승 못했으면 결혼 못 할 뻔했지 뭐예요.”
박 감독에 비해 차분한 모습으로 농담을 던진 숙녀는 천천히 그의 앞을 지나 커다란 문으로 걸어간다.
“제가..”
깊이 고개를 숙였던 권건이 작게 말했다.
“큰일을 했네요.”
신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릴리야.’
[ 왜? ]
‘다음에는 세계 평화를 위해 회귀시키지 마라. 그냥 상태창 같은 거나 줘.’
[ 뭔태창? ]
‘여기 괜찮은 애들 많더라.’
[ 그러면 니가 질 텐데? ]
‘우리 팀을? 상태창 정도로? 한번 해보던가.’
[ 계약은 끝났는데 왜 자꾸 나한테 뭐 시키고 그래? ]
‘섭섭하게 왜 그래. 우리 사이에.’
[ 우리가 무슨.. ]
그리고 악마의 말은 또 끊긴다.
“아! 제가 너무 늦었나요?”
멀리서부터 황급하게 뛰어오는 건.
“죄송해요, 오늘 촬영이..”
김예성의 여동생, 김예린이다.
지난 LKL 결승뿐만 아니라 월챔 결승에도 자리했던 연기자.
그녀는 어떨 때는 경쾌한 리본 머리로, 또 어떨 때는 프리스타일 와이드 팬츠와 크롭탑으로 포인트를 주면서 최근에는 한 명품 브랜드의 얼굴이 됐지만.
오늘만큼은 하객으로서 깔끔한 오피스룩과 포인트 벨트를 선택한 모양이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손님까지 접객을 마친 권건이 웃었다.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환한 웃음에 김예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금세 반달로, 초승달로 함께 접었다.
“당연히 와야..”
그리고 매니저 언니가 말해줬던 것을 되새긴다.
첫째, 헷갈리지 말 것.
“기다렸어요.”
둘째, 헷갈리지 말 것.
“저를요?”
“네.”
셋째, 헷갈리지 말..!
모르겠다.
“그, 그리고. 저, 생일 축하해요. 오늘 축하할 일이 너무 많은 날이네요. 그쵸?”
김예린은 이제야 뭔가 시작될 것 같다는 설렘을 느낀다.
“아, 고맙습니다.”
그녀가 내민 쇼핑백을 받아든 권건이.
“이건 혹시..”
뭔가 말하려고 할 때.
“야. 거니!”
측면 문이 빼꼼 열리며 누군가 외친다.
“너 거기서 뭐함? 빨리 안 오면 니 밥 없음.”
이유찬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찾으러 온 사람.
그가 여기에 없었다면 마찬가지로 없었을지도 모를 사람.
시작, 위기, 그리고 미래까지 전부 함께 할 사람.
그는 언뜻 바보스럽고 부족해 보여도 결국 서로에게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이다.
마치 탑과 정글처럼.
“탑..!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목소리..!”
뒤에서 김예성이 충분히 큰 목소리로 핀잔을 주고 있는 게 들린다.
둘은 점점 똑같아져 가고 있다.
아마 이 정글러도 그럴 것이다.
“간다.”
권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예린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우측으로 들어가시면 가족석이 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 방금 하시려던 말씀..”
“팀원들과 함께 나눠 먹겠습니다.”
김예린은 시무룩해졌다.
착각하면 안 된댔지?
“케이크 아닌데..”
“서두르세요. 식이 벌써 시작됐거든요.”
“그으..”
초대장을 받은 모든 사람에 대한 접객을 마친 그가 김예린에게 가야 할 길을 다시 알린다.
아직 둘이 가야 할 길은 다르다.
“그럼 이만.”
좌측의 작은 문이 열리고.
“빨리 와!”
“간다고, 가.”
신랑과 신부를 위한 밝은 문이 아니라 평범한 문으로 권건이 환히 웃으며 사라진다.
[ 쟤는 어차피 ‘게임’ 밖에 모른다니까. ]
적막이 내려앉은 로비.
[ 이제.. ]
악마는 하얗고 긴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나선형으로 쭉 뻗은 긴 창문이 보인다.
[ 또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려보자고. ]
밖에는.
새로운 도화지를 만드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