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25화 (325/326)

325_권건

불이 꺼진 무대를 혼자 걸은 적이 있다.

웅장한 음악도.

찬란한 빛을 뿜어내던 PC도.

정신없이 움직이던 감독, 코치, 선수, 심판, 스탭, 팬.

모두가 사라진 무채색의 무대.

그 위에는 까만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

월드 챔피언십, 3세트.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고에 의해서 선수들이 차례차례 끊겼다.

꽝 한타 대패가 아닌 잇단 사고였다.

하지만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사고다.

양쪽 모두 싸움이 이렇게 커질 줄 몰라서, 거리가 멀어서, 누군가가 해결할 줄 알고 등의 이유로 서로의 합류가 늦춰져 길게 늘어진 싸움은 처음에는 서로 손해 보지 않을 교환 구도였다.

결과적으로 지금 이 순간 FWX에 남아 있는 것이 권건일뿐.

다만 애석하게도.

이런 사고를 우리는 ‘실수’라고 부르며.

SHG는 그걸 아주 잘 잡아먹는 팀이라는 것.

그리고 이 순간이 FWX에게 가장 큰 위기가 된다는 것을 권건은 몸서리치게 잘 알고 있었다.

선택권은 SHG에게 있다.

“바론 갑니까, SHG?”

“아니면 권건을 잡으러 가나요?”

휴전 여부의 선택권은 항상 승자에게 있었고.

“쫓습니다!”

SHG는 전투를 선택했다.

“현 시점 생존, 제이슨, 르블란. 그리고 바류스와 브리움!”

“그렇죠, 권건의 리싱이 있는데 바론.. 이건 상당히 불편합니다..”

“이번 세트에서는 아직 권건 선수가 스틸을 보여준 적이 없지만, 바로 직전 경기에서도 뒤통수 맞은 기억이 생생하거든요?”

“근데 이러면 이거 권건 선수가..”

“아..”

“..부담이..”

권건은 잠겨있었다.

아주 깊이 잠겨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권건! 제발!”

지금은 몇 시지.

시간 개념이 사라진다.

“여기서 죽으면 진짜,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절대 죽으면 안 돼요!”

그저 피부로 느낀다.

위기의 협곡은 아직 어두컴컴하고 음습하다.

[ ··· ]

눈이 보이지 않는 수도승에게.

가장 빨리 다가온 마법사의 환영 사슬이 꽂힌다.

“왕슈잉의 르블란ㅡ!”

정글러는 우측으로 한 칸, 전진하면서 거짓을 부순다.

[ 이길 거야? ]

누군가가 묻는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귀도 들리지 않았다.

“제발, 제발! 죽으면, 죽으면 안 돼요!”

“류, 류 가까워요, 류! 류의 바류스!”

이번에는 고대의 존재가 번쩍, 하고 굽이치는가 싶더니.

부패한 사슬을 쏘아낸다.

“피했..”

역한 냄새를 뿜어내는 역경을 흘려보낸다.

[ 이길 거구나. ]

지각이 솟구친다.

그가 가는 경로로 막아낼 수 없는 자연재해가 밀려온다.

“메이메이의 빙하 균열!”

이제 다만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으로, 촉각으로 돌아서는 순간.

솟아오른 벽이 코끝을 스치고.

“흡!”

“어.”

그 끝에서 격렬한 전격 폭발이 일어난다.

“이것도.. 피했..어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히려 바론 방향, 강가 내려갑니다!”

“동선, 동선 괜찮아요? 지금 너무 잘 보이는 쪽으로..”

SHG가 고른 조합은 강하다.

한국의 스톰에게 뽑아 온 이 조합의 정수는 아주 고상한 것이었다.

적을 반드시 묶어놓는 게 아니라 거리를 두고 유유자적할 수 있는 조합.

“이 조합이 분명 포킹이 굉장히 강력한데, 그러면 이게 CC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지금..”

그건 달리 말해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포기하지 않고 눈을 제대로 하고 마주했을 때, 그제야 비로소 피할 수 있는 인생의 역경처럼.

“지금, 그래서, 지금, 권건이..”

또다시 몸을 튼다.

“미쳤어요..”

“몇 개를 피해낸 거죠, 지금?”

“이 선수 지금 집중력이.. 아직 안 죽었어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버전.

LOS의 신이 선언한 이 메타는.

팽팽한 상황에서 정글러가 4대1로 싸우고 킬까지 따는 메타가 아니다.

하지만.

“쫓습니다, 쫓습니다! 재생된 팅, 팅의 세주가 강가로 올라오는 중! 이거 도망갈 수 있나요, 끝까지 도망갈 수 있나요 권건!”

“여전히, 여전히 죽으면.. 여전히!”

“제발, 권건, 제발요!”

시간을 끌고.

“계속 쫓습니다, SHG!”

진영을 바꾸며.

“이거 이제 남은 게 점멸 하나 밖에..”

“FWX, 제발..”

“팅, 정글러 팅 왔어요! 팅까지..!”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맞아야 할 건 맞을 수는 있는 메타다.

“이러면 계속 연계할 수 있는..”

언제나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

“팅, 팅의 세주, 팅의 세주! 빙하 감옥을..!”

“이번엔 진짜 맞..?”

그리고 어느 약속의 순간.

“날아..”

손에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권건의 음파가 공명한다.

“날아아아아아아아아아갑니다아아아아아아악!”

적 서포터를 향해서였다.

“점..!”

정중앙으로 들어간 정글러가 아껴뒀던 점멸을 사용하는 순간.

“찼ㅡ어요ㅡ!”

번쩍이는 빛 뒤로 희미한 형상이 아른거리고.

“아.”

“왔어요..”

끝내 상대 시야의 어두운 안개 속에서, 드디어 아군이 모습을 드러낸다.

죽어도 살아나고, 또 살아난다.

그렇게 게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는 게 LOS.

그리고 권건.

“드디어ㅡ 왔ㅡ어요!”

“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오오오오오온!”

어두웠던 협곡에 해가 고개를 내밀고.

“라온이 합류합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춘다.

“잠깐만, 라온이 살아났다는 건..”

점차 어둠이 흩어진다.

미라쥬의 신기루처럼.

“그렇다는 건..”

모두가 외치기를 그만뒀을 때.

한 마디의 해설 없이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세클 듀오도.. 옵니다.”

성난 돌풍이 들이닥치고 있다.

스톰의 폭풍을 담은 그들이 온다.

“왔어요!”

실핏줄이 터진 충혈된 권건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인다.

“SHG.. 이러면..!”

너무 깊다는 것을 알아차린 SHG가 돌아선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여우의 손에 쓰러진다.

아군, 아군의 지원은.

아군의 지원은 더 존재하지 않는다.

FWX는 한 사람에서 두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네 사람이 됐지만.

SHG는 네 사람이 세 사람이 됐다.

무언가에 눈이 멀어 순식간에 뒤집힌 인원수에 당황한다.

장난꾸러기 요정, 트릭스터에게 속은 것처럼.

“씨바.”

한국어를 닮은 욕설이 터진다.

협곡 시계를 확인한다.

길다.

기다려야 할 시간이 너무 길다.

동등한 유니버스에서 보냈던 공유 시간이 불균형하게 느껴질 정도로.

권건이 맨손으로 제 팀을 기다렸던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길다.

“이러면..”

하지만 그 꼴이 우습다는 듯이, 화려한 빛기둥이 자기 진영 안쪽 깊숙한 곳에 꽂히고.

“차니의..”

마지막으로 살아난 FWX의 탑이 번개처럼 땅에 내린다.

“사이언..”

그들의 퇴로를 가로막으며.

“달.. 립니다..”

파도처럼 밀려온다.

“달립니다!”

“달ㅡ립니다! 달ㅡ립니다, FWX!”

점점 속도가 붙는다.

“달립니다, 달려오고 있습니다, 전부ㅡ 다, 전부 다ㅡ 왔어요, 전부 다!”

“그리고 거의 다 왔습니다, 거의 다ㅡ 왔어요, FWX!”

“차니, 차니, 차니, 차아아아아아아아아아!”

FWX와 SHG와 FWX.

SHG를 가운데 둔 FWX가, 서로 만나는 순간.

“뻐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끝내.

거대한 천둥소리가 들린다.

“게임이.. 게임이..”

“신이시여.”

강렬한 예감이 모두를 흔든다.

“싸웁니다..”

이 순간에도 객석은 계속 비워져 나간다.

“싸웁니다, 싸웁니다, FWX! 두 팀, 싸우면서..!”

진영이 역으로 밀려 나간다.

“아아아ㅡ 아아아, 아아아아ㅡ!”

그들이 한걸음, 뒷걸음질 칠 때마다 확신이 더해진다.

“안쪽으로, 점점 더 안쪽으로, SHG가, 안쪽으로!”

이 경기가 끝난 뒤.

권건은, 최은호가 사주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

“물러납니다, 물러..”

한달 뒤에 있을 생일날 파티를 하고 싶다.

“라온이.. 탑으로 텔!”

“꽂ㅡ힙니다!”

친구들을 초대해서 어린아이처럼 생일 파티를 하고.

“탑 웨이브ㅡ 뚫고 들어갑니다!”

고작 한 달만큼 나이 더 먹은 부모님을 보고, 웃고,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세자가! 세자가! 신ㅡ난ㅡ다!”

“신ㅡ난ㅡ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듬해 하얗게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밖에서 라면을 먹어보고 싶고.

“그대로! 억제기까지 뚫고 들어갑니다, FWX!”

정반대로 따뜻한 휴양지에도 가보고 싶다.

“밀고 들어갑니다, FWX, 밀고 들어갑니다..!”

“갑니다! 갑니다! 정상을 향해, 갑니다!”

해보지 못한 게 너무 많다.

앞을 바라보고 싶다.

같이, 여기서.

같이.

“SHG가 막을 궁극기를 전부 소진했거든요? 이거, 이러면 순식간에..”

“FWX가, FWX가!”

“ㅡㅡㅡ!”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자.

“...”

“...”

넥서스가 보인다.

“정말로..”

뭔지 모를 장애물들을 함께 치워내고.

“두드립니다.”

결국엔 모두 도달한다.

“한 숨, 모자람 없이!”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한 숨, 온 마음을 다 쏟아 부어!”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한 숨에, 끝내 마무리를 짓고 나면!”

권건이 스스로를 불태운 불꽃으로, 협곡은 대낮처럼 밝아졌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현장, 현장 소리! 현장 소리 들리십니까!”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들리십니까, 이 소리!”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밝아지고 밝아져서.

“FWX! FWX! FWX!”

밝아지고 또 밝아져서.

“FㅡWㅡX! FㅡWㅡX! FㅡWㅡX!”

“FWX가ㅡ 마지막ㅡ 넥서스를ㅡ ㅡㅡㅡㅡㅡㅡㅡㅡ!”

끝내 정적마저 완전히 걷어내고.

그림자로는 가릴 수 없는, 더 밝을 수 없는 빛으로 터진다.

FWX, 파이어웍스처럼.

#

어슴푸레한 빛이 쏟아져 내린다.

가물가물 희미해졌던 내 의식이 몸에 뿌리내린다.

여태 닳아 없어졌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느낌.

발끝부터 올라와 무릎, 허벅지, 허리, 배, 가슴, 그리고 어깨를 거쳐.

머리 끝을 때리는 환희가 먹먹하게 울렁인다.

단 하루를 얻어내기 위한 나의, 회귀자의 결승.

“ㅡㅡㅡ ㅡ 월드ㅡ 챔피언십ㅡㅡㅡ!”

뜨거워진다.

“우승은 ㅡㅡㅡ ㅡㅡ ㅡ FㅡWㅡX!”

점점 모든 감각이 돌아온다.

눈이, 귀가 모든 정보를 받아들인다.

“야!”

“야아아아아아악!”

“얘들아..!”

“빙신같이뒤지는못난형들..!”

“...”

“은퇴.. 안할래..”

“당연하지 개..새야.. 니가.. 은퇴하면.. 나는.. 누가.. 받아주냐.. 병신..”

모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울어.”

다만 이유찬만이.

“가족이잖아.”

나와 가장 닮은 이유찬만이 웃고 있었다.

“해냈어!”

“우리가 결국에, 끝내, 진짜 결국에..”

“했어..”

“FWX.. 흐..”

“터져라, 파이어웍ㅡ스.. 으.. 흐..”

살아있는 감각.

드디어 찢고 나온 질긴 피막.

그 안에 있다가 튀어나오는 것은 마치 양수 속에 갇혀있던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아서.

“으..”

나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으윽, 으.. 으으.. 윽..”

볼썽사납게.

“으윽..”

큰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가 이 세상에 왔노라고, 드디어 내가 왔다고, 내가 여기에 있다고.

우리의 내일을 얻었다고, 알린다.

“FㅡWㅡX!”

정적으로 뒤덮여있던 무대는 환희와 함성으로 가득했다.

객석은 빈자리가 눈에 보일 정도로 뚜렷했지만.

“FWX! FWX! FWX! FWX!”

절반, 혹은 그것보다 안되는 사람들의 환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해지는 뜨거움이.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바람이 하얗게 센 내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정신없이 손이 떨린다.

[ 고마워. ]

지금 떨고 있는 것은 프로게이머 권건이 아니다.

인간, 권건이다.

누군가 그 손을 잡는다.

“하나.”

또 다른 이의 손을 잡는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

화면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결국 모두가 서로 꽉 움켜쥐자, 그건 주먹이 됐다.

“둘.”

한 자리에 선 팀 FWX는 함께 맞잡은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셋!”

길고 길었던 모래 그림이 모두 사라진다.

간신히, 끝내, 기어코.

새로운 그림을 그릴 차례가 온다.

“파이어ㅡ”

듬성듬성 비어있는 객석에서 빛나는 응원봉들이.

거대한 불꽃처럼 어두운 장내를 밝혀낸다.

“ㅡㅡㅡㅡ웍스!”

미래를 되찾은 회귀자가 그토록 바랬던.

가을밤의 불꽃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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