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21화 (321/326)

321_걸어왔던 길의 결과

플레이-인 스테이지부터 쭉 분전했던 광주 미라쥬는 끝내 결승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다른 팀에 비해 일찍 출발하고 오래 뛴 팀으로 고평가받기는 했지만 결승에 선 FWX에게는 애석한 일이었다.

중국은 중요한 경기에서 한번, 결승에서 한 번 더 강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권건은 이 점을 잘 안다.

이게 무슨 무슨 정신이나 어쩌고 규칙에 따른 건지는 모른다.

어쩌면 덜 주목받는 자리에서는 ‘대충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강팀인 BJE가 느닷없이 그룹 스테이지에서 탈락한 것처럼.

물론 그런 특성을 빼고 보더라도 SHG는 강한 팀이다.

SHG 뿐만 아니라 그 어느 팀이건 ‘세계’라는 좁은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온 팀이 약팀일 리가 없다.

한국의 나머지 팀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SHG야?”

단지 지난 월챔에서 힘이 빠져있었던 FWX를 때렸던 게 SHG였고.

권건 역시 SHG가 바로 지난 삶에서 만났던 악몽이라는 게 조금, 거슬릴 뿐이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FWX는 아주, 아주 오랜 시간 이 경기를 준비해왔다.

어쩌면 권건이라는 선수를 만난 그 순간부터.

절대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던 트릭스터를 안간힘을 쓰며 이긴 날부터.

김예성이 자신의 과거를 찢어버렸을 때부터.

혹은 문봉구가 마지막 춤과 함께 자리를 양보하고 새로운 탑이 데뷔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후일지도 모른다.

곽지운이 제 최종 목표를 인지하고 달빛을 쏘아 내린 그때부터.

평범한 최은호가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몸부림칠 때부터.

그것도 아니면 한때 같은 팀이었던 윤도형이 어떻게든 서폿 포지션을 소화해냈을 때부터, 이유찬이 제 약점을 없앴을 때부터, 바닥 팀 FWX가 처음으로 월챔을 밟아봤을 때부터, 탑 전담 문백산 코치가 들어왔을 때부터, LKL 팀 간의 소통이 원활해지기 시작한 때부터, 이유찬이 하고 싶었던 걸 해봤을 때부터, 리그에서 무패 우승을 거뒀을 때부터.

그 어느 때부터였을 수도 있다.

그것이 FWX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지겹다, 지겨워.”

그 외에는.

평판을 노린 트릭스터가 FWX에게 넘겨준 ‘SHG 공개 스크림’의 일괄 분석 자료가 첫째요.

“야. 저기 봐. 저거 장치 뭐야? 불꽃 쏘는 거냐? 나중에?”

“그럴 것 같은데?”

스톰이 그룹 스테이지에서 SHG를 2위로 눌러 일찌감치 위기감을 느끼게 만든 것이 둘째.

“여기가 파티장?”

미라쥬가 4강에서 풀 세트 접전을 펼치며 SHG의 이번 시즌 무기를 노출시킨 것이 셋째.

“무슨 파티?”

“우리 우승 파티?”

“자신감 좋았다.”

“크게 동의. 지면 여권 태워.”

“수영해서 집 가.”

“얘들아.”

네 번째로, 이제 FWX 선수들이 큰 무대에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 지났다는 것과.

“잘하자.”

“우리 정글 말하는 것 좀 보소?”

“뭐.”

“말 잘한다고.”

마지막으로 권건이.

감정의 끝이자 시작을 드디어 찾았다는 데에 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경기 시작을 앞두고 있다.

“자, 파이어웍스 여러분. 이런 말이 어렵지만.”

FWX의 박진현 감독은 처음으로 말했다.

“실수하면 안 된다.”

정말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애석하지만 이건 으레 사람들이 말버릇처럼 하는 그런 말이 아니다.

SHG는 실수를 잡아먹고 크는 팀이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뜻인지는 먼저 맞아본 한국 팀들이 잘 안다.

큰 실수 없이 게임을 유지하면서 상대의 약점을 발견하는 순간 파고들어 살점을 물어뜯어 놓는 참혹한 경기력.

그게 전 챔피언의 장기다.

“네.”

“물론이죠.”

선수들이 별 뜻 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

“정말로, 실수하면 안 된다.”

박 감독이 다시 말했다.

그 말에 진심을 느낀 선수들이 묘한 분위기를 느낀다.

권건은 조용히 좌우를 살폈다.

탑이.

그리고 미드와 원딜, 서폿이 있다.

“유찬, 예성, 지운이형, 은호형.”

FWX의 권건은 처음으로 말했다.

“나, 꼭 이기고 싶다.”

이것 역시 정말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당연하지만 이건 으레 사람들이 말버릇처럼 하는 그런 말이 아니다.

“...”

두 사람의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

그걸 깬 사람은 이유찬이었다.

“완전 쉽네?”

“뭐가?”

누군가 물었고.

“원 플러스 원 아니야? 집중하면 이길 텐데.”

이유찬이 대답했다.

“아니지..”

김예성이 끼어든다.

“어차피 집중할 건데, 영 플러스 투지.”

“오.”

분위기가 확 밝아진다.

“영 플러스 투지!”

최은호가 외치고.

“투지!”

곽지운이 기합을 넣는다.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이 걸어왔던 길의 결과가, 시간이, 그리고 노력이.

고작해야 상대의 무슨 무슨 정신이나 어쩌고 규칙 따위에 꺾일 리 없다는 것을.

“갚아 줘야지.”

권건은 희미하게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밴픽에서 기 싸움이 있었다.

SHG의 마지막 밴은 쟈이라였다.

“?”

리메이크됐지만 현 메타에서는 리그뿐만 아니라 솔랭에서조차 쓸 이유가 없는 픽.

지금은 가치가 0에 수렴하는 챔프.

“저걸 왜 밴?”

“손 미끄러졌나? 자이야 밴 하려다가..”

“중국 버전도 순서 같아?”

“모르겠는데? 아무렴 상관없지. 이득~”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저건 SHG의 서포터 메이메이가 쟈이라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승 스킨 만들고 싶어 할까 봐.

그러니까.

SHG는 이미 우승을 전제에 두고 자기네 팀원이 못하게 하려고 밴한 거다.

픽의 폭이 넓은 우리를 상대로 굳이 저런 밴.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가 안중에도 없다는 그런 기 싸움.

아니.

이걸 기 싸움이라고 해도 될까.

센 척이나 허세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 아닐까?

여기까지 와서도 우리의 진지한 태도를 꼽주겠다는 심보.

혹은 너넨 안간힘 다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이건 한 판의 게임일 뿐이라는 가벼운 태도.

광오(狂傲).

우리가 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당연히 여기에 대한 질문이 나올 테고.

SHG는 ‘우리는 밴을 양보했는데..’라고 인터뷰할 게 뻔하잖아.

가갈갱 밴의 변주나 다를 바 없다.

물론 자이야를 ‘픽’으로 준비해서 들고나왔다면 완전히 달랐을 거다.

그건 지더라도 패배에 대해 뒷감당까지 하겠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이미 우리도, 우리가 아닌 수많은 팀도 자신들의 뉴메타 픽에 대한 책임을 져왔다.

증명의 승리 혹은 부끄러운 패배로.

그게 픽과 밴의 차이다.

근데, 쟈이라 준비 안 해온 거 안다.

혹시 모르지.

우리가 더 약해 보였으면 진짜 쟈이라를 했을지도.

알면 알수록 놀랍다.

어떻게 이렇게 상대를 엿먹일 방법을 잘 생각해내는 걸까?

“얘들아, 잘 부탁한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SHG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해 온 우리 감독님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박 감독님은 끝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웃으며 퇴장했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아닌 것 같은데? 우리를 상대로?”

“예성.”

그러니까.

나도 이걸 굳이 팀원들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신경 쓰지 마.”

그래, 우리가 이렇게 병신같은 놈들한테 졌다.

내가 이렇게 병신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당해도 한마디 하지 못했던 게 LKL이었고, FWX였다.

“그래.”

하지만 결국 누가 병신이 될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다.

SHG는.

최소한 ‘이번 회차’의 SHG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쳤고 또 그들이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빚을 갚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도 그걸 이번 월챔에 와서야 깨달았으니까.

경쟁밖에 없는 이 세계도 조력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야.

“가자.”

첫 번째 세트의 내 픽은 세주.

정글 챔피언을 상대도 납득할만한 평범한 픽.

“최대한 빠른 풀캠.”

“오케이.”

그래, 픽.

밴 말고 픽.

‘할 수 있는 픽’과 ‘할 수 없는 픽’.

SHG는 고의로 밴 카드를 한 장 버렸다.

열받는 건 열받는 거고, 확실한 건 우리가 무슨 챔피언을 할지 짐작은 하고 왔다는 얘기.

그래, 맞아.

솔직히 인정해.

우리는 여기서 아주 특별한 픽을 할 생각은 없다.

단 한 줌의 가능성이라도 올리기 위해 전력을 다할 테니까.

메타에 정답은 있다.

특히 중요한 경기라면 더 그렇다.

이건 절대 평가가 아니라 상대 평가니까.

그리고 프로의 챔피언 풀에도 한계가 있다.

SHG가 저따위로 행동한 희박한 근거가 이거다.

우리가 멋대로 할 수 없을 거라는 거.

우리도 못 하는 게 있다.

프로면 무조건 다 잘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노력이나 재능 이야기를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나머지 절반은 성향과 환경.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성향’은 특정 챔피언의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주력 챔피언에게 맞는 성향, 과감함이나 안정감 같은 부분을 포기해야 할 때.

야쓰오 장인이 미드 세라핌을 플레이하는 것 따위가 그렇다.

패턴 관성.

하지만 반대로 성향만 맞는다면 낯선 픽이라도 상대적 장벽이 낮다.

이유찬의 랭가, 김예성의 피쯔, 곽지운의 카시나 최은호의 애시 같은 거.

‘환경’은 메타와 팀원.

메타 변화 때문에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팀원이 맞춰줄 수 있는 데에는 제약이 따른다.

투자 대비 효율 문제다.

대부분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성향을 택하자니 환경이 따라주지 않고, 환경을 택하자니 성향이 따라주지 않는 것.

우연히 타 팀으로 이적했을 때 선수의 역량이 크게 상승하거나 하락하는 경우가 이런 거다.

챔피언으로 보는 심리테스트가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이유도 이거고.

다른 길을 뚫어내려고 하면 노력도 노력이지만 여러 가지 조건이 걸린다는 얘기다.

“나 리콜.”

“오케이.”

그럼 나는 어떨까.

내게도 못하는 챔피언이 있을까?

아니.

미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없다.

“이제 긴장해. 요공 레드 시작.”

“오케이.”

나는 남들과 다르다.

다만 매번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메타, 팀원, 전략에 맞춰서 가야 하니까.

그건 아주 오랫동안 정글을 돌았던 내 습관이다.

그런데 이게.

이게, 참으로 못났던 FWX의 팀원들한테는 ‘환경’이 되어줬던 것 같다.

나를 빨리 받아들인 덕에.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용.”

얼마 전에 중국 팀을 상대로 바텀 듀오가 보여줬던 ‘들어가는’ 비원딜 카시 같은 픽이 그랬다.

곽지운은 팀의 요구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그 한 번의 확장을 위해 1년 가까이 꾸준히 노력해온 거다.

서포터들과 함께 한계 돌파를 위해서.

“바텀은 어떻게 할까?”

“나 시간 돼. 내가 백업할 테니까 바텀은 벽 쪽으로 붙어서 진행해줘.”

“예성이 땡큐.”

김예성도 그렇다.

이 선수는 처음부터 챔프 폭이 상당히 넓은 편이었지만 이제는 더 다양하다.

“제이슨, 라온의 제이슨! 초ㅡ장거리 견제에 성공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죠? 용, 우리 거야! 이러면 SHG도 들어오기 굉장히 껄끄럽거든요?”

“FWX가 스무스하게 첫 용.. 가져갈.. 것 같습니다!”

주로 탑과의 스왑.

서로 받아주는 게 일이다 보니 그렇게 됐다.

“탑에서는 차니의 케낸이 죽도록.. 죽도록..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때리고 있어요!”

“하지만 헤이랑의 그라, 회복하면서 밀리지 않습니다. 이 선수의 그라가즈 숙련도가 굉장하거든요.”

“팽팽합니다. 여전히 팽팽해요.”

탑도 마찬가지다.

“오늘 꼭.. FWX가..”

이건 스토브 리그를 한바탕 흘려보내고도 멤버가 변하지 않게 해준 FWX의 공도 크다.

“꼭, 반드시 첫 경기를 잡아내야 하거든요?”

“그렇습니다. 월드 챔피언십에서 첫 세트를 가져간 팀의 우승 확률은 79.3퍼센트, 8할에 육박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저희의 목소리가 FWX 선수들에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꼭.. 이 선수들이..”

그 어려운 걸 이 팀이 해냅니다.

그래서, 결국 챔피언 폭 늘려놨다는 소리나 실컷 해놓고.

끝까지 평범한 픽할 셈이냐고?

다시 말하지만 맞아.

근데 그걸 알아야 해.

결승까지 온 시점에서 우리의 픽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원들이 이런저런 뉴메타나 서브 픽을 쓰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

주력 픽을 마스터했다는 뜻이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허락할 리가 없잖아.

화를 가라앉히고 몸을 이완시킨다.

잠시 눈을 감고 내쉰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각한다.

우리는 ‘완성’됐고.

아직 ‘다 보여주지 않았을’ 뿐이며.

여전히 ‘얌전히’ 굴고 있다는 것을.

눈을 뜬다.

“전령 타이밍!”

여기는 FWX.

내가 있는 곳이자,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팀원들이 있는 곳.

챔피언 풀로, 실력으로, 혹은 극복으로.

그 모래로 조심스럽게 쌓아온 그림을 바치는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

“이거 SHG가 턴 내준 거거든요?”

결승.

내가 반드시 찢고 나가야 할 첫 번째 피막.

“이럴 때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요, SHG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머물 순 없죠? FWX가 어떤..”

그래서 세주.

이 팀을 단단하게 지킬 픽.

“안.. 안 가요?”

“어어, 안 가요?”

“자리 비우지 않습니다, FWX?”

“아니면 두 번째 용 노리나요?”

“그것도.. 아닌 것 같죠?”

“왜.. 왜?”

상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

천천히 적을 잊는다.

나만을 떠올린다.

소중한 것을, 나의 미래를, 그리고..

“이거..!”

바꿀 수 없는 기회.

나의 가장 큰 적은 상대가 아니라 나의 내면이다.

“제발요, FWX..”

그저 양손에 가득 쥔 철퇴를 휘두른다.

이 싸움을 내 마지막 싸움으로 만들기 위해.

팀원들과 함께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 나가기 위해 다른 것들을 지워나간다.

가라앉는다.

아주 깊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