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_인생 이야기
강준윤이 잠깐 들렀다.
“너는 정말 나쁜 아이야.”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그리고 너네 미드 진짜 아기 강아지 아잉. 어머. 친구 멋쟁이 사랑해.”
말이 너무 심해서 필터링으로 대체한다.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공기 부족하니까 이제 좀 가래.”
설마 김예성이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너 진짜 모르냐? 너 진짜 모르냐고! 그런 오늘도 화이팅 예쁜 *** ***들만 너랑 친추할 수 있냐? 어?”
필터링할 말이 다 떨어졌다.
“아, 그거 아니라니까.”
우리는 황당한 대화를 좀 더 나눴다.
“난.. 이걸 진짜..”
한참 퍼붓던 강준윤이 씩씩대다가 천천히 침착해진다.
“다 믿을 수가 없어. 이게 다 뭐야.”
나는 테라스에 앉아 바람을 느낀다.
우기가 지나가 버린 이곳의 바람이 익숙하지만 낯설다.
왔던 적도, 못 왔던 적도.
포기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는 내게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월 29일, 윤년의 생일 같은 곳이다.
“야, 권건.”
저 멀리 결승이 치러질 경기장이 보인다.
닿을 듯 닿지 못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건 내 오랜 파트너였던 스톰의 강준윤이 옆에 서 있기 때문일까.
“..너는 그런 연락 안 왔냐? 가짜인 척하면서 스폰 제안 들어오는 거.”
“그건 항상 오잖아.”
“광고인 척 승부 조작 제안 들어오는 것도?”
“오지.”
“임대를 빙자한 밑장 빼기도? 단장과 대화를 나눴다는 멘탈 공격도?”
“익숙하니까.”
원치 않았던 컨택은 흔하다.
가짜 정보와 진짜 정보를 섞어서 선수를 때리는 이 공격은 때론 나에게 심적인 부담을 줬지만.
글쎄, 나는 올해 가발에 숨긴 송신 장치 이슈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이건 정말 대응하기 어려웠거든.
선수들의 머리카락이 진짠지 가짠지 보고 있어야 하니까.
그것만 빼면 우리 팀 경기에 집중하는 것도 바쁘다.
“그게 왜 익숙해?”
“오랫동안 하면 그렇게 돼.”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그런가..? 내가 아직 부족한가..?”
강준윤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마치고 팔을 늘어뜨렸다.
“야. 너.”
“왜.”
“반말은..”
강준윤이 눈을 흘긴다.
무시한다.
“내가 그냥 봐준다. 솔직히 넌 반말이 어울려.”
들어본 적 있는 말이다.
“근데 너 니가 진짜 내 라이벌인 건 알고 게임하냐?”
이것도 들어본 적 있는 말이다.
“알지.”
“미드빵 떠서 내가 이기면 우리 팀이 결승 가는 걸로 해주냐?”
“해.”
나는 웃었다.
“내가 또 100킬 0뎃 하겠지.”
이것도 진짜다.
옛날에는.. 맨날 했었거든.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예성이 먼저 이기고 와, 허접 미드.”
“진짜 개 같은 놈.”
강준윤은 턱을 잡고 웃었다.
저 선수의 오래된 버릇이다.
“니가 우리 팀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오. 표정 변화 지린다. 섭섭해? 섭섭해? 섭섭함?”
“왜?”
간신히 늦게 물었다.
“우리 팀, 많이 변했다.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이제 수달이 형한테 오더 전권 주겠다고.”
“그 형이.. 괜찮지.”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보면 알지.”
“그런가? 오더 쌉고수들한테는 보이는 게 있나?”
“형 성격 받아주는 거 보면 알지.”
“이 시건방진 애송이가..”
강준윤은 볼을 긁었다.
“..수달이 형이 원딜인 건 알지?”
“어.”
“그래도 괜찮은 거냐?”
“형 팀 오더인데 내가 무슨 상관이야.”
“싸가지..”
우리는 짧게 웃었다.
이게 강준윤과 대화하는 방식이다.
압도적 긍정.
강수달은 원딜이지만 오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서포터와 정글러에게 오더를 맡기고 라인전에나 집중하라는 김지훈 감독님의 말에, 스톰은 항상 2인 오더 체계를 유지했다.
“잘 될 거야.”
그리고 김 감독님은.
절대 원탑 오더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지.
그 생각을 바꾸는 건 항상 오래 걸렸다.
붐보이를 뚫고, 김 감독님까지 거치고 나서 이 자리에 오기에 부족할 만큼.
“응. 그래서 다행이라는 거다.”
강준윤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네가 우리 팀에 있었으면 이 규칙은 영원히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바뀌더라도 너한테 갔겠지. 늙은 형은 손목 힘이 빠지면서 점점 게임 할 의미를 잃었을 테고.”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제 가야겠다.”
“어. 가.”
강준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원숙한 미드는 잠시 멀리 보이는 결승 경기장을 눈에 담았다가.
“너도 가.”
고개를 돌렸다.
“어.”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가라.”
“어.”
“너는.. 반드시.. 끝까지.. 가라.”
이 말은 약간 울음이 섞인 목소리 같아서.
끝내 가지 못한 길에 남긴 사무친 한이 들어있는 목소리라서.
“그래.”
나는 강준윤의 눈을 피했다.
“너, 지고 오면..”
말이 더듬더듬 나온다.
“죽여.. 버린다.”
나는 과거에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의 호소를 받아낼 자신이 없어 외면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지고 오면.
지면.
“어차피.. 죽어.”
“지랄 마라. 죽을 거면 남 손에 죽지 말고 내 손에 죽어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D-5.
[ 너희는 무엇이 두려운가? 우리는 SHG. ]
D-4.
[ 차분하게 쌓아온 것을 드러낼 뿐. FWX. ]
D-3.
[ 패배자의 말로를 기억하는가? SHG. ]
D-2.
[ 과거가 있기에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FWX. ]
D-1.
[ 결코 벗어던질 수 없는 굴레, 그것이 패배자와 패자의 리그. ]
[ 인간은 항상 불가능에 도전하는 존재 ]
D-Day.
LOS 월드 챔피언십의 결승.
중국 광저우, 젠궈 중앙 스타디움.
고요의 장막이 드리운 이곳에 인공적인 빛이라고는 유도등뿐이었지만.
그것 말고도 빛이 있었다.
까마득한 인파.
이 수많은 이들의 두배만큼.
검은자에서 흰자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날카롭게, 또 잔인하게 선수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속에서 딱.
따악.
두 번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주변을 흐르던 엠비언트 뮤직이 끊긴다.
정적.
크고 장대한 정적.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차가운 정적이 흐른다.
“리그 오브 서머너즈, 월드 챔피언십.”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선 한 남자가 입을 연다.
그가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주최국의 언어가 함께 울려 퍼진다.
“이것은.”
남자는 캐스터다.
“인생 이야기입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캐스터이자, LOS의 근원인 북미 사람이며.
가장 오랫동안 이 무대를 장식해온 캐스터가 진지한 목소리로 군중을 끌어당긴다.
“생과 사, 그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말을 멈췄다.
다시 찾아온 정적이 1초.
2초.
그리고 3초.
“너무 지나친 표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캐스터는 여유롭게 무대를 떠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죠.”
차가웠던 시선이 캐스터에게 가서 멈춘다.
한결 누그러진 기색이다.
“티벳 밀교의 승려들은 갖가지 색의 모래로, 모래의 만다라를 그립니다. 수련이죠.”
캐스터는 왼손을 내민다.
“그들이 그리는 건 우주이자 인생, 그리고 깨달음.”
오른손도 내민다.
“원과.”
그리고 손뼉.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주변에 거대한 빛의 원이 새겨진다.
캐스터는 그 길을 따라 동그랗게 돈다.
“다각형.”
때론 급격하게 꺾는다.
“점과 선!”
이제, 소리 높여 외치며 발을 구른다.
“그리고.. 패턴!”
한국 무대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젠궈 중앙 스타디움의 바닥에.
어느새 한 가닥씩 빛의 도형이 그려져 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형태였다.
하지만 수레바퀴처럼 천천히 돌아가며 균형을 이룬다.
그 안에서.
캐스터는 잠시 고개를 숙인다.
“입으로 한 땀 한 땀 불어서 만드는 이 ‘모래의 만다라’는.”
그리고 입으로 후후, 짧게 부는 시늉을 한다.
무언가 날아간다.
작은 빛의 알갱이들이 3차원의 허공과 바닥을 수놓는다.
선과 선 사이.
마치 모래가 쌓이는 것처럼 갖은 색의 불빛이 생겨나려다가.
“에취!”
연극적인 기침에 의해 한순간에 꺼져버린다.
“오, 블레스 유.. 이런 작은 기침 한 번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고.”
남자가 웃다가 침묵하자 다시 빛이 모여들고.
“어, 어어어어? 어이쿠!”
과하게 비틀거리는 몸짓에 다시 한번.
작은 빛들은 반딧불이처럼 포르르 날아가 버린다.
“..한순간의 비틀거림에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수도 있죠.”
모래라도 묻은 것처럼 옷깃을 탁탁 털어낸 캐스터가 똑바로 섰다.
“어떻습니까?”
그는 양손을 바깥으로 털었다.
그건 꽤 고상하고 멋진 몸짓이었지만.
남아있던 원과 사각형, 점과 선마저 손바람에 순식간에 사라진다.
“모든 노력이 찰나에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모래로 만들어진 그림이니까요.”
그의 시선은 관객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 땅만의 관객이 아니라, 세계의 모두가 공평하게 볼 수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려운 길입니다. 마치 이곳처럼.”
천천히 고개를 내린다.
그의 시야에 객석의 빛들이 들어온다.
술렁임.
차가운 눈빛.
누가 봐도 한쪽으로 쏠려있는 색깔.
그사이 간신히 빛나고 있는 FWX의 응원 색.
이상하리만치 드문드문, 희미한 빛.
작은 별들.
리그의 태동기를 두 눈으로 봐온 나이 든 캐스터의 눈에 회한이 스친다.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그게 ‘어느 쪽’을 향한 마음인지는 그도 알 수 없다.
그의 홈인 북미는 근본이라는 이름 아래 자만하다 무너졌으니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대신 숨을 크게 들이쉰다.
“1년은 31,536,000초, 2년은 63,072,000초, 3년은 94,608,000초. 선수들이 그 이상의 빛나는 모든 젊음을 긁어모아! 짧으면 15분, 길면 1시간에 불과한 이 경기에!”
이 마음을 대신해서 말을 토해낸다.
“한 숨, 모자람 없이!”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한 숨, 온 마음을 다 쏟아 부어!”
이제 무대가 밝아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한 숨에, 끝내 마무리를 짓고 나면!”
흐트러졌던 선이 제자리를 찾고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바닥이 환하게 빛나면서 동시에 조명이 들어온다.
“이곳에!”
무대 바닥에, 벽에, 그리고 센터 스크린에 거대하게 뜬 것은.
“중국의 SHG와 한국의 FWX, LKL의 FWX와 LPL의 SHG!”
기하학적인 패턴 속에 엉켜있는 두 팀의 엠블럼.
빛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이 시각적인 압박이 청각적인 압박으로, 청각적인 압박이 심장에 와서 닿는 그 순간.
터진다.
탄력 있게 터져나간 빛들이 산란하며 시야를 가린다.
더는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밝아진 조명에 관객들이 눈을 감았다가.
“!”
실눈을 뜨는 순간.
‘대부분’의 좌석을 차지한 어떤 관객들은 속았음을 깨달았다.
강하게 쏟아진 빛 사이.
원과 선이 만나는 모서리마다.
두 팀의 선수들이 서 있었다.
동시 입장.
“...”
FWX 선수들은 그곳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서 있다.
건너편에서는 누군가는 불만스럽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캐스터는 주먹을 꽉 쥐며 시선을 끌었다.
선수 입장, 일방적인 함성이 터져야 할 타이밍 같았지만.
아무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자아!”
이건 함성의 순간을 캐스터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신비로운 일이죠?”
보이콧을 준비하던 관객들을 향해 그가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기 때문이며.
“이 위대한 선수들이 그린 그림.”
무엇보다도.
캐스터의 이야기로 여기까지 따라온 관객들은,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이 큰 소리를 내면 사라질 모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이번에는 캐스터가 아니라 관객들이 만들어낸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건 압도적으로 무거웠으며, 일순간이나마 나머지 외국 국적의 팀들이 느꼈던 압박감에 가까웠다.
“결국.”
오롯이 선 캐스터는 그 감각을 비껴내며 다시 입을 연다.
“결국, 오늘로. 이 위대한 그림이 완성됩니다.”
모래로 그린 만다라라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곧. 사라질 겁니다.”
완성되는 순간까지가 수행이며, 완성품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한순간에 해체되어 버릴 만다라.
“완전히ㅡ 사라질 겁니다!”
이 리그에서의 만다라란.
언제든지 불면, 휘청이면, 무너지면 모든 것이 사라질 중압감 속에서 끝까지 한순간의 영광을 위해 버텨내는 것.
일렁인다.
무대 장치에 의해 그림이 일렁거리는 것뿐이었지만.
관객들은 그 순간만큼은 선수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아쉬우시죠?”
캐스터는 속삭였다.
“오랫동안 공을 들여 그린 그림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게 아쉬우시죠.”
몇몇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에서 객석을 보는 캐스터는 좌중의 흔들림을 느낀다.
그래, 상대가 없는 리그는 있을 수 없다.
결국 이 경기는.
누가 더 강한 나라고, 누구의 도시가 더 위대하고, 누구의 팬들이 더 영향력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바로 오늘 경기의 생과 사.”
그저.
쌓아 올린 것들의 순수한 격돌이어야 한다.
“결국 사라지고 말겠지만, 만들어가는 과정에 의미가 담긴!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이 경기이며!”
캐스터는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들이 오늘 보시게 될, 지난 1년간의 모든 LOS 리그의 끝이고 소멸!”
그리고 그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커진다.
“다시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올해의 마지막 경기!”
결국 발을 구르자.
모든 그림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
“...”
빛의 모래가 흩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다.
사라졌다.
“하지만 결국, 결국에는 다시 돌아올 리그!”
무대에는 단색의 환한 빛만 남았다.
“올해의ㅡ 마지막ㅡㅡㅡ 찬란함ㅡ!”
이제 청중은 느낀다.
오늘의 무대가, 마지막 결승이 다른 무대보다 더 의미가 깊다는 것은 단순히 결승이라서가 아니다.
이 젊은이들이 쏟아부었던 수천, 수만 시간의 삶이.
오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종결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이 바람을!”
SHG 쪽에서 푸른 빛이 피어오른다.
“이 불꽃을!”
FWX 쪽에서 붉은빛이 솟아오른다.
“여러분이ㅡ 두 눈으로ㅡ 똑똑히ㅡ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ㅡㅡㅡ!”
다시 존재하지 않을 찰나의 황홀.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경기장에서 하늘은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FWX 선수들에게 전해지는 응원은 일부였지만.
“SHG! SHG! SHG!”
“FWX! FWX! FWX! FWX!”
희미한 불씨는 여전히 번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경기를, 시이이이이이자아아아아아악! 하겠습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지막 축제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