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19화 (319/326)

319_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김예성은 권건의 머리 가운데가 하얗게 센 걸 봤다.

“거니 유니콘이야?”

눈치 없는 탑이 종알댔지만 권건은 이미 깊이 집중하고 있는지 귀를 닫았다.

“조용히 좀 해.”

저 상태를 김예성은 잘 안다.

바로 얼마 전에 아팠을 때 자기가 겪었던 일이다.

내면의 세계니 뭐니 어려운 말을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비슷한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쉬운 말로는 심연 잠수?

“나도 저렇게 해볼까? 차니거니 세트로.”

하지만 이유찬은 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염색한 게 아니잖아.”

“그럼 사람 머리가 어떻게 저렇게 됨?”

“집중하면 흰 머리 나는 거 몰라?”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임?”

의외로 정상적인 이유찬의 역질문에 김예성은 대답을 망설였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들은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저렇게까지 갑자기 확 변하는 걸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몰라.”

“간지네. 너도 끼워드림? 거기 무슨 좋은 미용실 가서.”

김예성은 잠깐 이유찬을 봤다.

김예성이 이유찬을 처음 만났을 때.

목이 긴 양말에 샌들을 신고 돌아다니던 이 더벅머리 선수는 무척 비호감이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는 문봉구가 그리워질 정도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머리가 길어지면 잘라야지, 머리띠를 공구하는 사람이 어딨어.

프로게이머잖아.

방구석 폐인이 우연히 출세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건 팬분들께 실례다.

그게 김예성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유찬은 매달 김예성이 가는 미용실에 따라온다.

문봉구가 후배들을 데리고 가는 곳과 같은 곳이다.

이제 양말도 그럴듯한 것을 신는다.

김예성이 발바닥이 닳고 새까매진 축구 양말을 볼 때마다 버린 뒤 몰래 새 양말을 사다 넣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유찬이 아무렇지도 않게 발목 양말을 신고 다니는 걸 보고 알았다.

우리 탑이 양말에게 평등한 사람이라는 것을.

“맘대로.. 해.”

황당하지만 싫지는 않다.

복잡한 것보다 나으니까.

“우승하면, 다 네 맘대로 해.”

“님도 하쉴? FWX 상체 삼총사.”

그리고 뭐.

우리 탑이니까.

“상관없으니까 지금은 조용히 해.”

“오키용.”

“...”

김예성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확실한 건 우리 정글이 지금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거다.

권건은 말이 없다.

그리고 김예성은 권건을 말릴 생각이 없다.

“ㅡㅡㅡ가, 지금부터! ㅡㅡㅡ!”

일부 선수들은 걱정하기도 했지만 김예성은 오히려 저런 상태를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권건이 하면 뭐든지 옳다.

그게 이 선수가 믿고 가는 길이니까.

다만 저럴 때 필요한 게 있다면.

“그저 내가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것.”

그래서.

똑같이 숨을 줄인다.

빙글빙글 돌며 천천히 위도를 맞춘다.

“ㅡㅡ부터! 시작합니다!”

밴픽이 시작된다.

“SㅡTㅡM!”

선턴을 잡은 스톰에서 카드를 내밀고, FWX에서 받아친다.

“아라?”

“주죠.”

“사일?”

“역시 이번 버전에서는 안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박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고, 몇 가지 기억들이 스친다.

지난 시간이다.

밴픽이 끝났다.

침묵의 보이콧은 여전했다.

경기장의 크기에 비해 한없이 미미한 수준의 함성이 들려온다.

한국 대 한국의 경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객석에 빈자리가 듬성듬성 보인다.

눈치 빠른 김예성은 이게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았다.

표를 예매하고 경기장에 오지 않은 거다.

예의 없네?

김예성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짜증이 나면서 멘탈이 흔들릴 것 같았지만 가만히 권건을 떠올린다.

팬분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

김예성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권건에 의해 확신이 선다.

고개를 젓는다.

신경 쓸 거 없어.

온라인에서는 뜨거운 응원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좋은 모습으로 돌아온다.

경기 바깥에서야 더러운 양말을 버리고 머리를 자르고 욕설을 삼가는 모습이겠지만.

경기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것이 ‘좋은 모습’이다.

“본 경기, FWX 대 STM, STM 대 FWX..”

경기가 시작된다.

이제 대화는 필요 없다.

머리를 물속에 박는다.

이곳을 떠난다.

‘온라인’의 바다로.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김예성은 권건과 비슷한 깊이로 잠수한다.

“라온, 라온, 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오오오오오온!”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에에에에에에!”

뻐끔, 입을 열어 말을 해보지만.

아마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설마 에니를 상대로, 에니를 상대로!”

“평.. 타! 따라갑니다, 따라갑니다, 따라갑니.. 막..타아아아아아!”

여전히 상관없다.

“미드에서 솔ㅡ로ㅡ키이이이이이이이일! 퍼블!”

전달하는 방법은 많으니까.

“나이스.”

“나이스.”

“나이스.”

짧고 고른 칭찬이 전해지고 스펠 체크하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함성은 없다.

객석과 경기장의 거리가 먼 이곳에.

선수들은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다.

“FWX! 화이팅!”

누군가 외쳐보지만 닿지 않는다.

모든 선수가 깊이 잠수하고 난 수면이 고요하게 느껴진다.

김예성은 오른손을 당겨 쥔다.

마우스를 바싹 잡는다.

목을 기울인다.

화면에 다가간다.

허리를 살짝 앞으로 숙인다.

점점 더 다가간다.

이 자세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금이다.

“리산, 리산, 라온의 리산!”

암흑 시야를 노려 얼음 갈퀴길을 만든다.

세련된 기습에 적이 일순간 흩어지고.

“스톰의 요른, 바로 불어요!”

들어가지 않는다.

“어어어어어어어어! 대신 측면, 측면, 측면!”

순식간에 적들의 시선을 흩뜨린 김예성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벽에 몸을 기댄다.

진동이 느껴진다.

“권건의 요공, 바로 들어가면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권건이 시야를 확보하는 순간.

“차아아아아니의 술통 폭발!”

뻥, 큰 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경기장에 협곡의 소리만이 울린다.

“루루!”

“플랜, 플랜의 루루가! 벽 너머로..”

걸려든 상대를 순식간에 묶는다.

“글로리의 요른, 산양 못! 쳤! 어! 요!”

나머지는.

“세에에에에에에에자아아아아아아악!”

원딜에게 맡긴다.

“신ㅡ난ㅡ다!”

숨을 돌릴 틈은 없다, 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이미 김예성은 점멸로 벽을 넘어.

“이이이이이이이거어어어어어어어!”

적의 원딜을 얼음 무덤 속에 가둔다.

아름다운 삼각형이다.

강가에는 정글과 탑이, 정글 안에는 원딜이, 벽 너머에는 미드가.

이건 정말, 아름다운 삼각형이다.

“...”

예쁘다.

한번 예뻐지기 시작한 경기는 어렵지 않다.

“이렇게 1세트가!”

경기가 끝난다.

“이렇게 되면..”

“스톰을 상대로, FWX가 승리를..”

꾹 참았던 숨을 터뜨린다.

수면으로 올라온다.

밖을 살펴본다.

“생각보다 한국 팀도 제법..”

“그래봤자 고려인..”

“FWX! 힘내라!”

아까보다 좀 더 술렁임이 느껴진다.

하지만 여전히, 수면이 잠잠하게 느껴진다.

“다시 밴픽 시작..”

다시 잠수를 시작한다.

“지금부터 월드 챔피언십 4강, 그 두 번째 세트를 시작..”

이번에는 예상과 달라졌다.

강준윤이 야쓰오를 골랐다.

이전 세트의 픽을 대거 금지하고 빼앗아 가면서였다.

김예성은 얇게 웃었다.

뺏어?

그럼 나도 뺏어야지.

“사일! 이번 메타에서, 사일, 사일, 사일! 오랜만에 사일!”

물속을 헤치고 나아간다.

“라온, 라온, 라온, 라온, 이거, 라온, 라온, 라아아아아아아온!”

사슬을 길게 뻗는다.

쭈욱 빨려 들어간다.

그대로 낚아채서, 위로 올린 다음.

빼앗은 궁극기로 상대를 내려찍는다.

쩌엉.

숨이 부족한 상대가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순간을 낚아채서.

“쇼류우우우겐ㅡ이ㅡ 도오오오오오우!”

찍어누르며 억압한다.

“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오오오오오오온! 또! 한번! 솔로! 킬!”

그렇게, 적의 숨통을 끊어 놓으면서 권건을 두드린다.

아직 대답하지 않는다.

끝나지 않았다.

이 패턴을 알고 있다.

김예성은 숨을 토해내며 몸을 돌린다.

수중의 옅은 감각 속에 훌쩍, 점멸을 터뜨리는 순간.

점멸로 접근해온 마오차이가 쭉 딸려 들어온다.

대어다.

김예성은 침착하게 상대 정글을 인수해서 권건의 비예고에게 넘긴다.

“하나 더어어어어억!”

김예성은 기억한다.

이 선수가 빅스 선수들의 껌 종이를 한장 한장 모아 찢어버렸던 모습을.

“추격, 추격, 추격, 이거 빨려 들어온 마오 놓치지 않습니다, 권건, 권건!”

말이 중요한 게 아니다.

행동이 중요하다.

여태까지 권건이 보여준 모든 것들이 김예성에게 대답이었다.

“궈어어어어어어어어언거어어어어어어언!”

드디어 물살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나이스.”

“나이스.”

“나이스!”

짧고 고른 칭찬이 전해지고 스펠 체크하는 소리가 기운차게 울려 퍼진다.

“와아이아아!”

“음..”

“젤나가 맙소사. 의외로 볼만한 게임을..”

조금씩 함성이 커진다.

“FㅡWㅡX! FㅡWㅡX!”

팬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도 흥분의 감정이 점점 퍼져나간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시 수면으로 솟아오른다.

김예성의 귀에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경기는 끝났고.

“이렇게 되면 지금, 스톰이 상당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세트가 오게 됐는데..”

“여기서 포기할 스톰이..”

다시 시작됐다.

김예성은 또 한 번 숨을 죽인다.

“어어어, 어어어어어!”

“6분대! 이른 타이밍 로밍!”

“어어어어어? 이러면, 이러면? 바텀에서 힘차게 압박하던 루냐미가!”

“라온, 라온, 갈레오, 갈레오의 기습 로밍! 이게 원조 비밀 카드의 힘?!”

“도오오오오오..!”

“발!”

터뜨린다.

“야, 이 챔피언을! 이 챔피언을! 이런 타이밍에 꺼내 들다니, 라온 너어는 진짜..!”

“끊ㅡ깁니다! 끊ㅡ겼어요! 또 한 번! 앞서! 나갑니다, FWX!”

아까보다 더 커진 함성이 수면을 울린다.

이제 그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여서, 김예성은 잠시 객석을 눈짓했다.

비워진 객석보다 채워진 객석에 집중한다.

그 사람들은, 우리 경기를 보러 와준 사람들이다.

팬이건 아니건 관계없다.

“FWX, FWX, FWX!”

“이거 이렇게 장로 싸움 가게 되면 스톰도 절대..!”

“양보할 수..”

이제 점점 더 수면이 떨려온다.

열광에는 편견도, 차별도, 국가도 없다.

탑이 그랬던 것처럼.

“이거, 이거, 이거, 마지막 싸움..!”

“이거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김예성은 떨림을 뒤로하고 다시 물속을 헤집는다.

잉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잉어라는 물고기는 어항에서 키우면 8센티까지 크고, 강에서 키우면 120센티까지 큰다는 이야기.

물고기도 사람도 넓은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걸 다른 시각으로 보면.

좁은 어항 속에 갇힌 잉어는 평생 8센티로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기만 하다가 죽어버린다는 뜻이다.

사람이라고 다를까?

김예성은 계속 헤엄친다.

다행히 이곳은 너무 넓고 또 넓어서 끊임없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

감사.

팬에 대한 감사.

팀에 대한 감사.

‘그’에 대한 감사.

“어어어어어어어..!”

김예성은 깊이, 가장 깊이 들어간다.

“세자, 세자, 세자, 또 안으로 깊숙..”

물을 차내고.

“차니가 밀어내면서..”

발을 움직이면서.

“클래스가 원딜 삼켜주고!”

가장 깊은 곳으로 몸을 넘긴 다음.

“이거.. 이러.. 면..!”

깊이 숨을 들이쉰다.

“라온, 라온, 라온, 갈레오, 갈레오, 갈레오, 갈레오!”

큰.

호흡.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요! 와요! 와요! 와요!”

고마워.

내가 클 수 있게 바다가 되어준 너에게 감사해.

“영웅..!”

그래서.

“추우우우우우우우우울!”

가장 높은 하늘까지 날아올랐다가.

“혀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힘차게 수면을 두드린다.

거센 파장이 가장 깊은 곳까지 전해진다.

“FㅡWㅡX!”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FWX! FWX! FWX! Daejeon! Daejeon!”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쿵쿵거리는 소리가 살갗을 때린다.

환호가 피부를 찌르고 전해진다.

“잘했어! 완전 잘했어! 완벽해! 퍼펙트!”

“예성이 나이이이쓰!”

“나이서어어어어어어어어!”

길고 제각각인 칭찬이 전해지고 스펠 체크하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가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물살이 거세진다.

모두가 달려간다.

그리고 아주 나직하게.

“나이스.”

권건이 대답했다.

“FㅡWㅡX! FㅡWㅡX! FㅡWㅡX!”

“미친.. 미친.. 저.. 저..”

“저 팀은 완전히 미쳤어!”

미드는 걸어 나간다.

권건을 기다린다.

이 미드는.

이제 그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

지금은 오직, 그걸 위해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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