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18화 (318/326)

318_이 하루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HZ를, 이겼다.

어떻게 이겼는지 모르겠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고.

손이 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오랜 시간의 길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허우적거린다.

뒤통수 어딘가에서 나를 괴롭히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왜?

드디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건.”

희미하게 기억이 돌아온다.

그래, 이겼지.

화가 나서 씩씩대며 ‘아임 차이니즈!’라고 외치는 HZ 선수를 보면서, 시원하게 썸 다운을 내려그으며 귀가할 때 교통 체증 조심하라고 말해준 기억이 난다.

과연 그 선수가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진 내 알 바 아니지.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이기고 나니 기분이 좋았고, 입꼬리는 분명히 올라가 있다.

내 주변에 있는 선수들을 보고 있다.

그런데도 자꾸만 불쑥불쑥 올라오는 울컥하는 기분은 대체 뭘까.

“..아, ..야!”

어지럽다.

“야! 애송이!”

그때 귓가에 소리가 꽂힌다.

“권건!”

평소와는 다른, 천둥 같은 성량이다.

“야~ 건아~ 대답 좀 해줘라~”

“저 형 곧 울 것 같음..”

“인프피의 마음속에는 8살 소녀가 산다고요~”

“미친놈들아, 다 닥쳐!”

윤도형.

G3의 윤도형이다.

“어머머? 신고합니다.”

“국제전 비매너? 도형아.. 너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너무 실망하겠다.”

“그걸 내가 왜 신경 쓰냐고!”

왜 여기에 와있나 한참 생각했다.

경기가 끝났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벌써, 우리가 8강전을 이긴 지 하루가 지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도형아.. 우리가 너 띄워준다고 했잖아. 진짜 떴잖아.”

“그리고 중국도 일찍 뜨게 해준다는 말이었냐, 이 개간나들아?”

“말넘심..”

그리고 다음 경기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형, 그래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웃었다.

이 감정은 순수한 반가움이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더니. 제법이네.”

그래서 굳이 내 말을 포장하지는 않았다.

“..?”

내 말을 들은 윤도형은 멍청한 표정으로 인중을 긁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게 덩치가 더 커진 것 같아.

성장긴가.

“얘 저 말 이해 못했다.”

“매우.. 매우 그래 보인다.”

“욕 한 거냐?”

“놀린 거지.”

“아.. 그렇구나..니? 어째서 나한테 반말을? 어이어이! 라라퐁! 귀엽던 내 후배가 왜 저렇게 되어버린거냐구!”

은근히 자주 만나는 것 같아서 웃기다.

내가 전 정글러와 이렇게 웃으면서 보게 될 줄은.

“형. 먼저 가게?”

마음에 솜털이 들어간 양 간지럽다.

“다음엔 순위 감량 좀 더 하고 와.”

나는 윤도형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

고릴라의 얼굴은 더욱 못생겨졌다.

나머지 팀원들이 시원하게 웃어젖히자 인제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건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고! 이 씨이이이이벌..롬들아!”

발을 구르며 화를 낸다.

“나, 사나이 윤도형! 나를 향한 모욕은..”

분명히 이건 험상궂은 ‘전 정글러’의 모습일 텐데도 밉지 않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하나씩 잊힌다.

“모욕이라니? 세계 최고의 정글러가 직접 해주는 응원입니다만?”

그래서 나는 씩 웃었다.

“사실 난.. 윤도형이 아니라 폴리라고 해. 윤도형은 욕해도 됨.”

“미친놈.”

“또라이.”

“구정글.”

“전 여자 친구 같은 호칭 붙이지 마라. 기분이 상하이니까.”

윤도형은 한숨을 푹푹 쉬며 못다 한 인사를 나눈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얘 왜 여기 왔지?

“형. 8강 탈락했어?”

“몰랐냐? 미라쥬한테 졌어.”

“아.”

윤도형은 이제 내가 반말을 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외국에 오래 있어서 그런 건지 이런 걸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원래부터 유교 사상이 제대로 박힌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왠지 그럴 것 같았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뒤지고 싶냐 진짜? 얘 왜 이래?”

“자연스럽고 좋은데 왜. 건이 슈퍼스타잖아. 민생?에 관심 없을 수도 있지.”

“억울하면 형도 해. 탑티어 슈퍼스타 정글.”

“존나 대꾸할 말이 없네.. 나도 이제 어디가서 안 꿀리는데..”

시무룩해진 윤도형이 중얼거렸다.

“닌 아직 서브 정글이잖아.”

“죄은호 니도 서브잖아.”

“오. 형님.”

“미친 유상준.. 오 형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윤도형은 마치 오랫동안 한 팀이었던 것처럼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바나나를 쓱쓱 까먹는다.

“아니.. 근데 미라쥿같은 새끼들 뭘 먹고 게임을 저렇게 잘하게 됐냐? 예전에는 찐따 아니었냐?”

“응~ 너 정글러일때는 한 번도 그랬던 적 없어~”

“쟤 퍼즈 걸었던 거 미라쥬 아니었냐?”

“그런 듯?”

“아니야, 스톰이었.. 닥쳐, 이 쫌쫌따리들아!”

순식간에 바나나 하나를 다 먹어 치운 다음.

“아씨, 이제 가야겠다.”

월챔 일정이 끝나 바쁜 일도 없을 사람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게 저 못난 남자의 서투른 배려라는 걸 이제는 안다.

우리는 일정이 남았으니까.

“가게?”

“어.”

나머지 선수들이라고 아쉽지 않을까.

아마 윤도형과 긴 시간을 보냈던 곽지운이나 최은호, 김예성은 좀 더 아쉬울 거다.

“이제 관광버스 타러 가라.”

“빨리 가. 너 때문에 산소 부족했어.”

“나 사람 알러지 있으니까 얼른 나가줘.”

“그 설정.. 계속 유지할 거니 예성아?”

물론 뭐가 더 중요한지까지 잊어버릴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래. 사옥으로 중국 특산물 보낼게, 십새들아.”

“형님! 난 팬더로 부탁함!”

“닥쳐, 탑.”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진다.

나도 웃었다.

평범한 하루가 또, 지나간다.

“어쨌든 또 보자.”

“응, 잘 꺼져.”

“너네도 우승으로 꺼져. 힘내..보던가.”

윤도형은 중지를 날리며 사라졌다.

“감사.”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나는 이 하루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

이번 월챔을 지켜보는 한국의 팬들은 오묘한 마음이었다.

- (STM) 근데 이번에 월챔 왠지 쉽지 않?

중국은 벌써 플인, 그룹에서 벌써 가지치기 끝나고

유럽은 모 이번에도 SNS만 올리다가 가고

북미는.. .. ···. LOS 망했냐?

어쨌든 한국이 경기 다 호로록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마음 편했던 월챔이 있었나?

반박 시 중국이 우승

ㄴ 한국에서 FWX한테 너무 개같이 져서 우리가 ㅄ인 줄 알았는데 존나 그런 것도 아님

ㄴㄴ 우리도ㅋㅋㅋ

ㄴㄴ 우리도ㅋㅋㅋ

ㄴㄴ 우리도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ㄴ 이게 FWX 백신인가 뭔가냐?

그건 어떤 팀의 팬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팀이 이렇게 잘했나?

역시 게임 세계 원탑은 한국이 맏따..

ㄴ 솔직히 F.L.E도 나갔으면 그룹은 그냥 뚫었겠는데?

ㄴㄴ 솔직히 호넷도 나갔으면..

ㄴㄴ 솔직히 피닉스도..

ㄴㄴ 피닉스? 그런 팀이 있었나요?

ㄴㄴ ㅠㅠ

격세지감.

자국 리그는 어렵고 세계는 쉽다.

이게 얼마나 국뽕을 차오르게 하는 말인지, LKL을 응원하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ㄴ 근데 중요한 거 하나..

ㄴㄴ 스톰 다음 상대 ㄴㄱ? F..

ㄴㄴ 아.. 시1바.. FXX..

ㄴㄴ 좀! 오지! 마! 참모총장 같은 새기들아! 악! 우리도 월챔 훈련 좀 하자!

ㄴㄴ 아찔하게 PTSD 온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일어날 일이었고.

승부의 세계에서 끝까지 모두 다 함께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팬들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중국에 있는 선수들이 중간중간 영상과 짧은 방송으로 안부를 전할 때 무수한 응원이 쏟아졌지만, 이건 한계가 있다.

경기장의 광경.

LOS 파크에서, 영화관에서, 집에서 방송을 보는 팬들의 눈에도 현지 상황이 불쾌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 (WCS) 중국 응원 보이콧 실화?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어디서 정신 교육받고 오냐?

ㄴ (광저우 현지) 여기 FWX 팬 좀 되는 것 같음 인기 좋다 의외로 나머지 팀도 반응 좋음! 특히 북미 쪽 팬들은 거의 다 한국 팀 응원함!

ㄴㄴ 북미는.. 벌써 다 떨어졌으니까 써드 파티가 필요할 수 밖에ㅋㅋㅎㅎ;

ㄴㄴ 부럽다 형.. 뭐 하는데 월챔을 보러 가?

ㄴㄴ (현지) 나? 회사 안 다녀!

ㄴㄴ 현지야.. 그게 진짜 부럽다..

ㄴ 아니 위에 애들은 팬 많다는데 왜 화면에는 아예 안 잡힘?

ㄴㄴ 호응 소리도 거의 안 들려서 해설진들이 좀 불편해하던데

ㄴㄴ 카메라에 치어풀도 거의 안 잡힘

ㄴㄴ 객석 카메라를 어느 나라 사람이 잡고 있겠냐?

ㄴㄴ 추하네..

그렇지만 팬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다국어 능력자들을 앞세워 항의 메일을 보내거나 사무국에 문의를 한 다음에는 그저 기도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혹은 누군가 때려 부숴주기를 바라거나.

ㄴ 어차피 중국 팀 하나밖에 안 남음ㅋㅋ SHG

ㄴㄴ 미라쥬가 밀어주겠지ㅋㅋㅋ

ㄴㄴ 한국vs한국 가보자고~ 될 것 같은데?

ㄴㄴ 어차피 FWX가 이길 거지만! ^^

ㄴㄴ 솔직히 FWX 타령 지겹긴 한데.. 이제 결승 내전만 성사돼도 더 바랄 게 없음

ㄴㄴ 와.. 이 얘기를 얼마 만에 하는 건지 기억이 안 남..

ㄴㄴ LKL 암흑기가 길긴 길었다.. 옛날엔 내전도 흔했는데..

ㄴㄴ 아재들.. 진짜 그런 때가 있었나요?

ㄴㄴ 아암..

ㄴㄴ 그런 면에서 이번 대진 너무 아쉽다..

ㄴㄴ ㄹㅇ

ㄴㄴ 당연히.. 한국이.. 우승이지..

‘당연히’라는 말을 앞세우면서도.

오랫동안 패배감에 젖어 불안한 팬들의 마음이다.

월챔에서 만큼은 모두가 LKL에서 8, 9, 8, 9를 기록하던 FWX 팬과 같은 마음.

점점 그 기도의 대상이 한곳으로 모인다.

#

8강 직후.

경기장에서는 총 네 팀의 휘장이 거둬졌다.

중국의 HZ, 홍콩의 P5G, 유럽의 G3 그리고 대구 유니버스.

애석하게도 유니버스는 또 한 번 미끄러졌다.

8강에서 상하이 게이밍, SHG를 만나 연달아 두 세트를 이기며 화력을 뿜는가 싶었지만.

3, 4번째 세트에서 휘청였고 심지어 마지막 세트에서는 SHG가 꺼내든 초반 올인 조합 앞에서 월챔 역사상 최단 경기 시간을 기록하며 맥없이 고꾸라진 것이다.

중국을 열광하게 만드는 대역전극.

SHG의 패패승승승, 유니버스의 승승패패패.

이 팀의 불행한 운명이 그랬다.

기세를 탈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엎어지는 것.

유니버스는 선수 하나하나를 놓고 봤을 때 부족한 팀이 아니다.

무력 좋은 탑, 습관 숨기기를 잘하는 정글, 다재다능한 미드필더형 미드, 온갖 비원딜이 가능한 유학파 원딜, 메타를 가리지 않는 서폿.

올해 초에 트릭스터 출신 미드를 데려오면서 단단해진 이 팀은 국내전보다 국외에서 강할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SHG를 단박에 두 세트나 몰아붙였으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유니버스가 3세트까지 가져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중국 현지 해설들조차도.

하지만 게임은 뒤집혔다.

SHG의 분석의 영향이다.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유니버스는 급해질수록 탑의 무력에 의존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팀이라는 것.

그건 맞아떨어졌다.

한국의 여론이 어떻건 SHG는 약한 팀이 아니다.

그들은 LPL 1위를 차지한 강팀이었고, 고대 중원 무림의 가르침에 따라 2할의 힘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역전은 드라마가 됐고, ‘좋은 것만 보는’ 중국의 기세는 더없이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진짜 이빨을 드러낸 SHG를 상대할 팀은 광주 미라쥬.

예선부터 바닥을 긁으며 올라온 미라쥬 역시 G3를 상대하면서 풀세트를 채운 터라 약점이 많이 드러나 있는 상태.

두 팀이 4강에서 만난다.

반면 FWX의 상대는 성남 스톰.

내전이다.

성남 스톰은 8강에서 A조 2위인 P5G와 붙었다.

올라 온 것을 ‘이변’으로 평가받았던 P5G는 의외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1세트를 가져갔지만 끝내 단단한 성남 스톰의 벽을 뚫지는 못했다.

FWX는 HZ에게 완승을 거뒀고, 그 과정에서 바텀의 힘이 제대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결국.

“왔냐?”

미드 강준윤이 손을 내밀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권건에게 향한 손을 김예성이 가로챈다.

“여긴 차가 유명하다던데. 쇼핑 준비는 다 하셨나요?”

“...”

김예성은 원래 이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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