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_먼저 가서 기다릴게
이상할 정도로 논란이 많은 월챔이었다.
[ (믿거나 겜로그) 노골적인 ‘모 국가 중심’ 경기 배치 논란, 올해의 일만은 아니다? ]
[ WCS의 공정성 도마 위에.. , 공정해야 할 국제 경기의 심판의 “국적”이 왜? ]
[ 월챔 기간 중 ‘템퍼링’ 논란.. 접촉은 어디까지 있었나? ]
[ (단독) “불법 도박”에 연루된 선수가 있다? 관계자 조사 중 ]
[ 중국 팬덤, “데미지 버그가 있는 것 같으니 확인하라”.. FWX를 향해 포격, 이상 없음으로 종결 ]
일부는 내가 충분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일부는 새로운 것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몰랐다.
[ SHG, 성남 스톰에게 밀려 조 2위 기록.. “불명예” ]
SHG가 몸을 웅크리고.
[ 지옥문 뚫고 올라온 HZ.. “무엇이 두려울까? 우승은 우리 것” ]
HZ, 월드 시리즈에서 약한 항저우즈가 기세를 올리며.
[ 재경기 끝에 충격의 탈락, BJE ]
[ BJE 정글러 티엔 즈한 “유럽이 발목을 잡아서” ]
ㄴ 왜 한국팀이라고 말을 못해?
ㄴㄴ 쉿! ^^ 중국이 자고 있어요
BJE가 떨어져 나가고.
[ (윤’s 겜터뷰) 그룹 스테이지 탈락 CQG 감독 칭, “올해의 결과? 중요치 않다.. 앞으로 모두가 우리 팀에 오고 싶어할 것” ]
CQG가 쓰러질 줄은.
나는 SHG에게 진 적도, HZ에게 진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탈락하고 없는 CQG와 BJE에게도 진 적이 있다.
아마 그때의 CQG에는 채지한이 있었을 테지만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때는 결승전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결승에서 만난 적이 있는 BJE는 비밀 무기를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유니버스가 만만했던 건지 어쨌던 건지 끝까지 드러내지 않다가 마지막에 P5G에게 지는 이변이 일어나면서 탈락.
그 무기는 꺼내 보지도 못했다.
결국 8강에 진출한 것은 한국의 4개 팀.
FWX, 스톰, 유니버스, 미라쥬.
그리고 중국의 2개 팀 SHG와 HZ, 유럽의 G3, 마지막으로 홍콩 팀인 P5G.
G3에는 이제 주전 정글러가 된 윤도형이 버티고 서있다.
솔직히 놀랐다.
이렇게 중국의 전력을 깎아낼 수 있다고?
과거에도 한국이 8강에 네 팀을 올린 적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 무대는 과거가 아니다.
반복되는 작년과 올해일 뿐.
불과 작년 월챔에서도 우리는 혼자 힘으로 본선을 기어 올라가야만 했다.
올해는.. 다르다.
불과 몇 주 전까지 우리의 적이었던 이들이 같은 편에 서 있는 건 꽤 놀라운 경험이다.
다른 팀들 덕에 라이벌은 좁혀진다.
이제는 한국 팀도 라이벌인 셈이지만 솔직히 결승에서 한국 팀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조금 더 감을 잡아야 하거든.
괜히 LKL이 암흑기였던 게 아니니까.
그리고.
설렁설렁하다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는 게 중국 팀의 무서운 특징이다.
“얘들아, 얘들아. 항저우즈는 AP 쪽으로 무게를 싣는 걸 좋아한다. 파일럿이 누구건 AP 키우는 데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고..”
“네, 그럼..”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의 상대는 HZ.
LPL 정규 리그에서 2위를 차지했던 팀.
1경기는 우리와 HZ, 스톰과 P5G의 경기.
그리고 2경기는 미라쥬와 G3, 유니버스와 SHG 경기.
“김 코치님! 민옌 선수가 미드 카시를 솔랭에서 연습한 흔적을 새로 발견했는데..”
“문 코치. 우리도 알아, 그거.”
“떼잉?”
“됐다, 됐어. 막내니까 봐준다.”
그 첫 번째 경기가, 바로 오늘이다.
“여기도 꽤 크네?”
“다시 보니까 좀 그래 보이네. 뭐 정리했나?”
멀리.
입구의 빛이 보인다.
“들어오는 길에 있었던 탈락팀 휘장 없어지고, 앞에 펜스 추가됐네.”
“예성아..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아?”
“형, 그건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알 수 있어.”
“와.. 그걸 그때그때 다 치우는구나. 되게 잔인하네.”
“우리가 가는 길이 그런 거니까.”
“김미드 너 뭐 말하는 학원 다니냐? 깐지 왤캐왤캐임? 나중에 자서전 써라.”
“...”
점자 길이 좁아지고 있다.
“8강에 오신 ㅡㅡ을 환영합ㅡ다!”
열기가 뜨겁다.
“오늘의 경기는 LKL의 FWXㅡㅡㅡㅡㅡㅡㅡㅡ!”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고, 팀이 보기에도 우리가 상대하기 더 어려운 건 HZ보다 SHG다.
“그리고ㅡㅡㅡㅡ LPL의 HㅡㅡㅡZ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환호가 온몸을 흔든다.
“야..”
“이거..”
주변에서 속삭임이 아련하게 멀어진다.
“우리한테는 환호 안 하고.. HZ에만 환호하는 거 맞아?”
“그런 것 같은데..”
“우리도 중국 팬 많은 거 아니었어?”
“인구가 많잖아..”
나는 말없이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내쉰다.
“얘들아, 괜찮아.”
주장이 말한다.
“우리가 이기고 나면.”
나를 닮은 말이 귀에 꽂힌다.
“어차피 우리 영역이 될 테니까.”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룹 스테이지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마음이 다시 술렁인다.
적에 대한 두려움도, 팀에 대한 불신도 아닌 이 긴장감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 다시 입을 다문다.
#
곽지운이 보기에 권건은 매우 엄숙해 보였다.
유상준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협업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전처럼 혼자 짊어지려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팀플레이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으며.
말투는 편해졌고 태도는 온화하다.
경기력은 완벽에 완벽을 더해 흠잡을 구석이 없다.
다만 권건은 그런 경기력을 위해 완벽하게 몰입하고 있었고.
아주 아주 조금, 티끌만큼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구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머지 선수들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챌 만큼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을 뿐이다.
울음을 참고 있는 사람 같은 느낌?
근데 권건이, 천하의 권건이?
차라리 겨울잠을 깨려는 곰이 더 어울리겠다.
곽지운이 유상준에게 눈짓했다.
뭐 있지?
ㅇㅇ.
무슨 고민 있나?
ㅇㅇ?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주장은 유상준과의 눈빛 대화를 포기했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여기.”
곽지운은 더 생각하는 대신 갑니다, 핑을 찍었다.
띵ㅡ 띵, 귀를 찌르는 소리가 들린다.
장내는 조용했다.
실제로 뭔가 들린다는 뜻이 아니다.
고요의 감각.
이 무대는 한국 결승 무대였던 대전 시티즌스 파크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시티즌스 파크 역시 결승이 예정되어있는 젠궈 중앙 스타디움만큼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인일 거라는 거.
결승이라면 몰라도, 아니 결승이라도 현지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이곳은 명백한 타지.
“ㅡㅡㅡ세자! 세자의 ㅡㅡ!”
곽지운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맘때 오소소 일어서야 할 솜털이 솟지 않는다.
그건 아마 술렁임이 없기 때문일 거다.
하나하나 귀에 꽂히지 않아도, 몸에 닿는 공기의 진동이 감각을 깨워주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그게 없다.
“상준아.”
무대 체질인 FWX의 주장은 그 느낌을 좋아한다.
아주 예전부터 선호했던 공기의 무게.
하지만 오늘은 그게 없다.
“어.”
옆을 돌아본다.
최은호 대신 다른 파트너가 자리하고 있다.
반대 방향을 본다.
상체 팀원들이 앉아있다.
곽지운은 짤막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생각한다.
뭐, 이거면 됐지.
“가자.”
월챔은 여태까지 쌓아왔던 것을 보여주는 자리.
새로운 깨달음을 얻거나 성장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장소다.
그러니까 그저 쏟아낼 뿐이다.
“어.”
무뚝뚝하고 괴팍하지만 게임에 제대로 미친 서포터가 응답하고.
“이거, 이거, 이거, 숨어서..!”
둘의 호흡을 합친 다음, 숨을 죽인다.
적을 직시한다.
틀림없이 만나본 적 있는 상대다.
이긴 적도 있고, 진 적도 있다.
월즈 기록과 스크림 다 통틀어서 그렇다.
하지만 몸이 안다.
이긴 적이 더 많은 상대라는 걸.
근육을 당겨 올린다.
하나, 둘.
카운트 다운.
그리고.
“석화의 응시이이이이이이이이이!”
셋.
고요한 경기장을 대신해서, 곽지운이 찢어질 것처럼 큰 비명을 터뜨린다.
뱀의 비명이 적막을 깬다.
“완벽하게 들어갑니다!”
멀리서 포격하는 탑의 공격이 비처럼 쏟아지고.
바닥에서 또 한 번 독기가 피어오른다.
곽지운이 미끄러지듯이, 아니.
정말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엉금엉금 기어, 적을 잡아먹을 쌍독니를 빛내는 그 순간.
“민옌, 민-옌, 합류!”
둘러싸인다.
FWX 원딜에겐 익숙한 일이지.
저도 모르게 코를 찡긋거린 곽지운이 딜을 중지하고 그 자리에 금빛으로 얼어붙는다.
두어개의 스킬을 흘려보냈을까?
먼저 노렸음에도 발 빠르게 합류한 적이 붙는 그 순간.
“라아아아아아아아온!”
서폿 챔을 잡은 미드 라이너가 곽지운에게 실드를 덮어 데미지를 흡수한다.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적을 잡아먹는다.
적의 발목을 잡고 독사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를 꽂는다.
그리고 적을 쫓아 기고, 기고, 또 기어서..
끝내, 전장의 한복판으로.
“세자의 카시가아아아아아아악!”
“팅즈의 아펠을 잡습니다!”
죽이고.
“거의 동시에 HZ 민옌이 세자의 카시를 끊..!”
죽는다.
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진다.
HZ와의 경기에서 곽지운이 잡은 건 비원딜 카시.
결정적인 ‘한 세트’를 위해 준비한 무기다.
다리 대신 뱀의 하체를 달고 있는 이 챔피언은 본래 탑이나 미드에서 사용되는 챔피언이지만 묘하게 원딜과 닮은 구석이 있다.
뚜벅이라는 점, 지속 데미지를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래서 살려두면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역겹고 지독하다는 점까지.
다만 신발조차 사지 못하는 노상 뚜벅이라는 것, AP라는 것, 초반 라인전이 힘들 수밖에 없다는 점, 팔이 짧다는 점까지 더 큰 단점들이 무수히 있다.
인기 있는 픽은 확실히 아니다.
어쩌면 옛날의 FWX처럼.
하지만 이제 다를 것이다.
물론.
상대가 무섭지도 않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강한 상대는 두렵다.
곽지운은 여전히 모든 경기가 두렵다.
이겨내고 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챔피언을 가져온 이유는 결승이 끝난 그 시점부터 오로지 월챔 상위권 팀을 대상으로 맞춤형 무기들을 쭉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게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이니까.
“..렇게 되면 HZ가 바론 방향으로..”
그렇게.
밴픽으로 상대가 짜온 틀을 완벽하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라온이 발목 계속 잡는데요, 이거, 지금 무제한으로 돌아가요, 칼마, 칼마, 싸엘라싸티리비!”
“빨라요!”
서포터인 척 속였던 픽으로 미드 싸움을 유도했던 적의 의도를 흘려내고.
“ㅡ를 발견하지 못하고! 사이다, 사이다, 사이이이이이이다아아아아아아아!”
그 힘을 바텀에서 온전히 드러내 찌르는 것.
“은신했던 사이다의ㅡㅡㅡ 인과응보오오오오오오오오!”
그게 FWX가 HZ를 상대하기 위해 내린 조심스러운 결론이었고.
“아크산의 악당ㅡ 처단! 땅땅땅따당땅따아앙!”
지금의 FWX는 마지막 준비물까지 챙긴 참이다.
“카시가아아아아아아악! 부활합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길 각오.
“2대 1 교환하면서 즉시 부활!”
“미친 거 아니에요, 진짜?!”
그들이 이 월챔을 준비한 기간은 넉넉잡아 한 달.
그사이에 실현한 각오.
‘적당히’ 특이 픽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서포터에게 작정하고 AD 탑 챔피언을 쥐여주고.
‘당연히’ 아펠을 가져갈 거라고 생각했던 원딜은 AP를 가져가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던’ 미드는 서폿 챔피언을 하고도 완벽하게 수행해 이길, 그런 각오.
“제정신입니까, FWX? 진짜 어떻게 된 팀이에요, 이게? 도대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에에에에! 하체에서 시간 끄는 사이..!”
“몰래 바론 성공하면서, 전 라인 바론 버프!”
“FWX가! 이렇게에에에에에에! 경기르으으으으을! 굳ㅡ힙ㅡ니ㅡ다!”
“FㅡWㅡX!”
곽지운은 생각했다.
“바텀 나이스!”
당신의 팀이 FWX가 아니라면 따라 하지 마세요.
“오케에에에에에에에이!”
사실 광오하게 들리는 이 말은.
최고가 되고 나서도 새로운 무기를 찾아 끊임없이 노력을 해왔다는 이야기다.
상대가 따라잡을 수 없도록.
기본기뿐만 아니라 그 어떤 무기라도 언제 어디서든 꺼낼 수 있도록.
“잘했어.”
곽지운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건이도 수고!”
여전히 대답 없는 정글을 향해 씩 웃었다.
“야, 상준아.”
“어.”
“우리 이거 우승하면..”
곽지운은 눈으로 말을 걸었다.
우승하면, 우리가 뛰는 리그가 더 가치있어질까?
최소한. 한국에서. 이. 게임이. 망하.지는. 않겠지.
더 많은 후배들이 꿈을 키우고 도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까?
나. 육십.까지. 이. 겜. 할 거다.
역시 말이 안 통하는 것 같다.
그래도 또렷해지는 건 하나 있다.
바텀은 듀오.
목적은 달라도,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같다는 것.
그치?
멀리서 보고 있는 늙은 내 서포터야.
너도 그렇지?
곽지운은 자라고 있는 유상준을 보며 웃었다.
언젠가 자신이 이 어린 서포터보다 먼저 은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FWX 바텀의 정신을 이어받을 사람은 이 선수가 되겠지.
“상준아, 가자.”
그때까지 멈출 생각은 없다.
“어.”
결정적인 장면이 터졌음에도 침묵으로 가득한 경기장에서.
가장 오래된 원딜과 가장 어린 서포터는 가장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오래되고 늙어도 끊임없이 새롭게 발전하겠다는 것처럼.
그렇게 바텀 듀오가 가장 먼저 손을 잡고 걸어 나간다.
그들은 권건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