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15화 (315/326)

315_왕과, 왕과, 왕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월드 챔피언십이 개최 중이었지만 예선까지 모두 챙겨보는 한국 팬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간간이 미라쥬의 경기가 있을 때나 볼 뿐.

그것마저도 초반에는 단판 경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LKL을 보던 습관이 든 사람들은 이 시간마저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선수들에게는 지극히 빨랐다.

MSL보다 훨씬 긴장감 넘치는 시간이 이어졌고, 한국팀끼리도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행사, 현지 적응, 개인 연습, 단판제 스크림, 기기 점검, 티저 촬영, 사진 촬영.

LKL에서 1, 2, 3 시드를 받아 온 세 팀은 물론 4 시드의 팀도 정신없이 바쁜 날이 지나간다.

그리고.

선수들이 바쁜 사이에도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 WELCOME, 광저우! LOS 월드 챔피언십 그룹 스테이지 초읽기 ]

[ 로드 투 월드 챔피언십 페스티벌에서 로스터 대공개! ‘미리 보기’로 뜨거운 발길 이어져.. ]

이제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 ‘진짜’ 월챔.

[ 중국 BJE, 로스터 공개.. 그런데 정글이 없다? ]

ㄴ 탑 미드 원딜 서폿 서폿? 로스터 저게 맞아?

ㄴㄴ 뭐임? 정글 왜 없음?

ㄴㄴ 서브폿이 정글로 감???

ㄴㄴ 뭐 잘못된 거 아님? 이번엔 비자 문제도 없지 않음?

[ BJE 감독 제우 레이, “다 발표하지 않았을 뿐, 로스터는 변동 없다” ]

ㄴ ???????

ㄴㄴ 이개 도데채 무슨 말인지 설명헤 줄 사람

[ BJE 제우 레이, “(페스티벌일 뿐인데) 꼭 다 발표하라는 법은 없지 않나?” ]

ㄴ 그러니까 다른 팀들은 다 발표하는데 왜???

ㄴㄴ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했지ㅋㅋㅋ

ㄴㄴ 이게 뭐 막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긴 한데..

ㄴㄴ 그럼 나머지 팀은 ㅄ이라서 발표함?

ㄴ 이거 저격 아니냐?

ㄴㄴ 뭔 저격

ㄴㄴ 서폿 둘? 이거 지금 월챔에서 진짜 서폿 둘 쓰는 팀 FWX밖에 없는 거 아님?

ㄴㄴ 킹리적 갓심;

ㄴㄴ 지들이 뭔데 FWX를 저격함?

ㄴㄴ 니 유니버스 팬 아니냐?

ㄴㄴ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님 일단 우린 한편임

본선에 앞서서 진행된 여러 가지 이벤트에서도 아주 소소한 이슈가 있었고.

[ ‘콩가루 리그’.. CQG 밍쯔(MingZ), “HZ는 적폐 팀..” 게시글에 좋아요.. “발칵” ]

ㄴ ;;; CQG가 4 시드고 HZ가 2 시드임;

ㄴㄴ 적아를 가리지 않는;;

ㄴㄴ 이건 우리 트릭스터가 낫겠다ㅋㅋㅋ

ㄴㄴ 우리 트즈 스크림 지원 뒤졌자너..

ㄴㄴ 트릭스터 월챔 0참여 1승

그냥 가십거리도.

[ ‘GGSlayer’ 아이디 달고 중국 서버 1위 찍은 ‘가오 팅’, 권건(GwonGun)에게 1위 뻇겨.. ]

ㄴ 아; 이거지

ㄴㄴ 편ㅡ안

ㄴㄴ 이러면 한국 브론즈가 중국 브론즈보다 낫다는 뜻이지?

ㄴㄴ ㅇㅇ

ㄴ 근데 한국 서버에 있는 ‘귄귄’은 누구냐?

ㄴㄴ 미친 이건 뭐야ㅋㅋㅋㅋㅋ

ㄴㄴ 미드인거 보니까 이거 아무래도..

ㄴㄴ 월챔 못 따라간 트릭스터의.. 읍읍

자연스러운 일도.

[ 욕설 및 차별 발언으로 선수, 코치 등 13명 벌점 및 벌금 징계 ]

그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도 일어났다.

그렇게 슬슬 예선에 해당하는 플레이-인 스테이지가 마무리되면서.

[ 유쾌한 유럽 G3 SNS,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꿀잼” ]

손가락 참여 팀도.

[ 미드 라이너 로로플라워, ‘긴급한 가족 문제로 귀국’? 우리는 왜 항상.. 북미팀의 눈물 ]

불행의 아이콘도.

[ 따봉 일본! 아슬아슬하게 그룹 스테이지 진출.. 목표는 “8강”, 과연? ]

이웃 나라도.

[ 바이바이, 베트남 & 브라질 ]

그리고 참여에 의의를 둔 팀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정리해가면서.

그렇게 그룹 스테이지가 밝아온다.

[ 광주 미라쥬, 플레이-인 통과. 출격 준비 완료. ]

#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나는 늘 그렇듯 어깨를 쭉 펴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근육을 푼다.

그리고 하나 더.

양쪽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스마일.

“왜 그렇게 웃냐? 재수 없게.”

터벅터벅 걸어온 스톰 미드 강준윤이 내 테이블에 앉았다.

“재수 없다니?”

“그렇게 웃는 사람이 어딨어. 진짜 재수 없네.”

“형은 크게 웃으면 턱 빠져서 안 웃는 거잖아.”

“왜! 또! 반말..이.. 아니고..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발끈하는 모습이 웃기다.

“뭔데 너네만 깔깔거려? 나도 끼워줘.”

이번에는 유니버스 탑 최정인이다.

“이게 웃는 걸로 보여? 써머 형은 꺼져.”

강준윤이 쏘아붙이는 거로 봐선 최정인에 대한 취급은 어딜 가나 똑같은 모양이다.

“얘 말하는 버르장머리 봐라? 야. 동생, 이 형이 말하는데 이런 애들이랑 놀면..”

“혹시.. 여기가 친목질하는 곳인가요?”

최정인의 말을 끊고 들어온 건 미라쥬 서폿 왕지우.

“나도 좀 끼워줘. 제발.”

나는 잠자코 자리를 내줬다.

폭탄 옆에 폭탄, 그리고 또 폭탄 옆에 폭탄.

여기 완전 폭탄 처리.. 아니, 그럼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이게 이렇게 된 이유는 오늘이 자국 음식 케이터링 서비스 날이기 때문이다.

원래 제공되는 건 아니고.

FWX에서 해줬다.

재료 공수부터 일정 확인, 홀 대여, 전문 조리장과 원래 사옥의 이모님의 비행편까지 전부 지원.

이게 또 우리만 이렇게 돈 자랑하면서 먹으면 될 일이 아니라서, 말이 나오지 않게 다른 리그 쪽과도 이야기를 꽤 나눈 모양이었다.

어쨌든 여기는 한국인의 밤.

“A조 누구?”

“우리 팀. 유니버스.”

강준윤이 묻고, 최정인이 손을 들었다.

“형, 거기 누구 있지?”

“우리한텐 다 밥인데?”

최정인이 흰 쌀밥에 삼겹살 묵은지 찜을 가득 담아 먹으며 말했다.

“누구 있냐고 물었다.”

“조빱 1, X밥 2, 좃X 3. 그리고 대-유니버스.”

“하.. 써머 개 노답..”

“저 새낀 입만 열면 구라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건 왕지우.

최정인과 왕지우, 둘은 동갑이다.

오래전에 미라쥬에서 같이 있었던 적도 있고.

“혓바닥으로 챌 찍었냐? 너희 조에 베이징 팀 있잖아.”

아무래도 서포터는 포지션의 특수성 때문에 나이에 좀 너그러운 면이 있고, 그러다 보니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일단 미라쥬가 이 선수를 정신적 지주로 기용한 건 아니다.

“베이징? 어차피 우리가 싸 먹어. 베이징덕 라이브러리 만들어버려~”

“그러던가.”

그룹 스테이지는 A, B, C, D 네 팀으로 구성된 4개의 조가 있고 단판제 더블 풀리그 방식이다.

쉽게 말해 조 1, 2위가 8강으로 올라간다.

A조는 한국 3 시드인 유니버스, 그리고 중국 3 시드 BJE가 유력 진출 후보.

나머지 두 팀은 홍콩 팀과 유럽 2 시드인데.

유럽 2시드 팀이 변수가 될 수는 있지만 지금의 최정인이라면.

“왜. 형 옆자리에 앉고 싶냐?”

“아뇨. 전혀.”

“솔직하지 못한 새끼.. 그저 샤이건..”

문제는 없을 거다.

아마도.

“너는 B조?”

“어.”

왕지우는 신경질적으로 당근을 골라냈다.

주의, 털보가 여기를 주목합니다.

“B조 진짜 개썩다리.. 왜 걸려도 여기 걸려?”

“미라쥬 자신 없쥬? 항저우즈 무섭즈?”

B조에는 한국 4 시드 광주 미라쥬, 중국 2 시드 HZ.

그리고 북미 1 시드와 유럽 3 시드가 있다.

서로에게 최악의 조라고 불린다.

사실 시드 넘버로만 보자면 미라쥬가 밀리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는데.

“최정인 깝치지 마. 항저우즈 존나 하나도 안 무서워서 잘 때 혼자 자기 쌉가능.”

덮어놓고 팰 만만한 팀이 없다는 게 문제일 뿐, 미라쥬는 약한 팀이 아니다.

올해의 지옥 같은 LKL을 겪은 미라쥬는 그렇다.

“근데요.”

미라쥬와 사이가 안 좋은 스톰의 강준윤이 눈썹을 씰룩거린다.

“이제 가실 때 되지 않았나요? 예~선부터 올라오느라 준비할 시간도 없으셨을 텐데.”

그리고 배려를 빙자한 축객령을 내렸다.

“하.. 참나.”

이 말을 들은 왕지우는 숨길 마음도 없는지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냈다.

실은 저게 저 떼쟁이의 본성이다.

거칠고, 적 많고, 말실수 많이 하고.

“다음에는 너네가 4위 하게 만들어줄게.”

“4위씩이나요? 감사합니다. 그럼 5위 하시겠네.”

“스톰 애들은 다 저렇게 한마디를 안 져.”

그래도 분위기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두 팀은 미운 정이 든 사이라서.

“간다.”

K-전통 방식으로 호일 포장된 김밥을 챙긴 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왕지지 들어가고~”

왕지우는 최정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먼저 꺼질게, 할 일 없는 잼민이들아~”

그리고 재빨리 나에게 다가와서 속삭인다.

“혹시 너한테 위협하는 새끼 있으면 말해. 내가 대신 찔려서라도 막아줄게.”

“또라이.”

최정인의 잡음이 끼어들었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쥬 화이팅.”

“그래! 과식하지 말고! 한국 가서 연락하자!”

왕지우가 내게 밝게 웃으며 멀어진다.

“온도 차 무엇? 권건 너 존나 리자뭉임?”

옛 은혜를 갚으려는 건 좋은 자세다.

딱히 이런 걸 바라고 구해준 건 아니었지만.

“야. 권건.”

내가 훈련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본 강준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뭐 할 말 없냐?”

스톰은 D조다.

한국 2시드 성남 스톰의 조에는 북미 3 시드와 일본팀이 있다.

이건 그렇게 크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니다.

하지만 나머지 한 팀이.

“형은 알아서 잘할 거잖아.”

중국 1시드, 월챔 우승 배당 1위, 디펜딩 챔피언.

그 외에도 무수한 호칭을 지닌 팀이자 우리가 지난 월챔 때 상대했던.

“...”

상하이 게이밍, SHG다.

“뭐..”

한참 갈치구이를 깨작거리던 강준윤이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나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형은 좋은 미드야. 잘 부탁해.”

스톰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그룹 스테이지에서 강팀을 떨어뜨리거나 할 수는 없지만 순위를 바꿔놓을 수는 있다.

그렇게 되면 대진이 달라지고.

다른 결과가 기다릴 수도 있겠지.

“뭐어..”

강준윤은 약간 당황하는가 싶더니 연신 맨밥만 퍼먹기 시작했다.

“쟤 뭐 내외하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최정인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은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스톰에 있었을 때의 나는 거칠었거든.

항상 내 맘대로 되지 않았으니까.

사실 이런 자리 자체가 처음이다.

라이벌이었던 네 팀의 선수가 해외에 나와서 옹기종기 욕 섞인 대화까지 하면서 편하게 지내는 것.

팀 간의 관계를 한명의 선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아마 이건 FWX가 쌓아 올린 탑일 것이다.

거기에 나도 숟가락을 올렸을 뿐.

예전에 월챔에 올 때는 항상 서로 등을 돌리고 있기에 바빴지.

팀 사정도 팀 사정이었겠지만 나도 당장 인생이 리셋을 향해 달려가는데 어떻게 여유가 생겼겠어.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형도.”

나는 최정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

“형도 힘내세요.”

여기까지 오는 데에 LKL 선수들을 꺾어야 했지만, 또 각 팀은 결국 다 한국이라는 이름 아래에 뭉쳐있다.

그냥, 그걸 이제야 느낀다.

“어어..”

“이번에는 진짜 결승에서 만나요.”

그리고 나는 왼쪽 입꼬리를 올려서 웃었다.

“어버버.. 뭐.. 갖고 싶은 거 있냐?”

오면 좋지.

바보들.

“먼저 갑니다.”

그룹 스테이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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