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14화 (314/326)

314_그곳으로

몇 주 뒤.

“드디어!”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적당한 습도 덕에 숨쉬기가 편안하다.

“우리가!”

무더위와 우기가 한발 물러나고 맑은 날이 더 많아지는 시점, 10월.

이 장소의 가장 완벽한 계절.

“여기에!”

선수들은 도착했다.

“다들 여기로! 바로 숙소 이동 먼저 시작하자!”

“경호팀, 경호팀!”

장소는 바뀌었지만.

“이 두발 고라니 같은 놈들아! 제발! 유찬! 화장실은 숙소에 있다! 최은호! 인증샷 그만 찍고 이리 와! 지운아! 제발! 지금은 사인해드릴 때가 아니야!”

달라진 건 없다.

“한빛 형님.. 이래도.. 프로게이머 대부분이 I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나도 그걸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짐을 들고 있는 코치들이 사담을 나누고, 박 감독이 간신히 말썽꾸러기들을 제압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그제야 제대로 된 일정이 시작된다.

“오..”

“나 중국 처음 와봐.”

“나도.”

“대만이랑 좀 비슷하지 않아?”

“아직 도로밖에 못 봐서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운데?”

“그럴 때는 그냥 그렇다고 해주는 거야, 공능제 원딜 초극혐.”

“너 F니?”

“F가 뭐 어때서?!”

“은호쿤.. 그냥 물어본 건데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너넨 F, T 문제가 아니라 그냥 싸우는 걸 좋아하는 거야..”

이번 월챔 개최지는 중국의 광저우.

한국보다 한 시간 느린 정도로, 시차 적응이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중국 남부에 위치한 광저우는 거대한 무역 도시이자 아시안 시리즈를 유치한 경험이 있는 도시다.

첨단 IT 산업체를 많이 유치하고 있고.

중국 남부 지방에서 가장 큰 경제 도시라고 부족함이 없으며, 무엇보다 중국 내에서도 베이징과 상하이를 뒤를 잇는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월드 챔피언십을 개최하기 충분한 장소.

하지만 음모론자들은 이 장소에 대해 불신을 표했다.

우선 베이징이나 상하이, 톈진, 충칭처럼 직할시가 아니고.

광저우의 위치가 중국이 불참한 msl의 개최지, 대만의 근처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대만과 함께 TW 서버에 속하는 홍콩의 코 앞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한 경기장으로 일종의 과시를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

물론 이런 의견은 단숨에 묵살됐다.

개최국 선정에 일개 국가가 어떻게 간섭할 수 있냐는 말과 함께였다.

그리고 큰 투자로 큰 축제를 여는 게 뭐가 어떠냐는 말도.

딱히 부정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기에 이런 불만은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근데.”

누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왜 여기서 인기 많아?”

“모르겠는데..”

호텔 로비로 들어서기까지.

꽤 많은 인파가 몰려다니며 우리에게 열광했다.

정확한 일정을 고지하는 건 아니니 아마 종일 기다렸거나 특정 태그를 따라다닌 사람들일 거다.

- 우리는 한국의 FWX를 좋아합니다

- K-드라마 진행을 좋아하는 내가 널 응원

- #SHUTOUT #CQG #FWXWIN

- ‘무패’의 전통! 지키는 것이 옳다

- 최고의 무장, FWX 여포 차니

- 미남 그리고 미남 그것은 최고인 #FWXWIN

서툰 한국어로 적혀있는 응원 피켓.

이 사람들이 여기에 서 있는 이유는 많다.

그냥 단순히 국내 팀보다 해외팀을 좋아하는 사람도.

제 팀을 떨어뜨린 라이벌 팀이 국제전에서 망신당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우리를 응원할 수도.

아니면 기록이 마음에 들어서, 특정 선수가 마음에 들어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이미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렴 어때.

그래, 팬은 공평하다.

우리도 사람이라 특정 국적의 팬이나 자주 보이는 팬에게 마음이 쏠리는 건 맞다.

하지만 일말의 연도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한 조각이라도 마음을 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아무리 중국이 국제 리그에서 악역을 맡았다고 한들, 이건 어디까지나 과잉 대표성의 함정.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일원이 똑같다고 치부하는 건 곧 선입견이 되고 차별이 된다.

- 우리는 권건이 대-항저우즈에 임대를 온다는 약속을 기억한다

- 자신의 가문 이름으로 선수명을 정한 것은 천하의 부름을 따르겠다는 의지 표명이오

뭐.. 음, 어디에나 선동과 날조가 있긴 하지만 말이야.

전보다 수가 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어쩌면 여기서도 잘 먹히는 걸지도?”

“최은호 쌉소리 지리구연.”

그래도 절대 착각해선 안 된다.

이들에게 이 숫자는 정말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까.

어쨌든.

“FWX! FWX! FWX!”

FWX에게는 감동이 있다.

“권건 워더! 권건 워더! 워더! 워더!”

그런 걸로 하자.

#

그렇게 첫날.

“어, 챔피언!”

우리는 저녁 식사 뒤에 미라쥬 선수들과 마주쳤다.

바텀 듀오, 고수호와 왕지우다.

“언제 왔어?”

이미 예선을 진행 중인 미라쥬는 그야말로 파괴 전차였다.

일본이나 베트남, 태평양 연합 등은 LKL에서 하드 트레이닝을 마친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실상 거의 갖고 놀다시피 하는 경기력.

지난번에는 녹턴 서폿을 보여줬다고 했나?

그리고 에블린 정글?

한국에선 못 쓸 무기다.

LKL에서 최약체였던 내가 이세계에서는 최강, 뭐 이런 플롯을 찍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정 자체가 강행군인 건 어쩔 수 없다.

“너.. 왜 연락 안했어?”

핼쑥한 표정의 왕지우가 내게 묻는다.

꼴이 말이 아니다.

이래서 3 시드를 놓고 싸우는 싸움도 치열했던 거다.

예선은 주변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거든.

경기도 힘든데 티저 촬영에, 숙소 이동에.

게다가 가장 힘든 건 익숙지 않은 식생활을 1, 2, 3시드 팀보다 오래 해야 한다는 것.

호텔식은 세계화가 잘 되어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옥에서 이모님이 해주시는 따뜻한 밥이 낫지.

우리도 해봐서 알아.

“연락요?”

“내가 번호 줬잖아.. 왜.. 연락을 안..”

아차.

상대는 왕지우다.

“왜! 연락을! 안 하냐고오오오오오오오오! 우리가 먼저 와서 길 닦아놓고 있는데에에에에엑!”

“아이고..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권건 선수, 어, 또, 사이다 선수.. 미안합니다..”

으레 그렇듯 털보가 달려와서 왕지우를 낚아챈다.

“우리 애가 아직 철이 안 들어서..”

도대체 그건 언제쯤 드는 걸까?

“너. 저. 서폿이랑. 게임. 함?”

내 옆에 있던 유상준이 물었다.

“어.. 어..”

트릭스터에서 미라쥬로 이적한 원딜, 고수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 나. 버리고. 혼자. 트릭스터. 가더니, 그러셨구나.”

유상준은 더러운 안경을 벗어 소매로 닦는다.

그리고 내 옆으로 한걸음 붙으며 씩 웃었다.

“저런. 안됐.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고수호는 분한 표정을 지었다.

흘긋흘긋 나를 훑는 시선이 느껴진다.

“사이 좋네.”

“우리가?”

“우.리가?”

털보가 왕지우를 말리는 사이, 나는 유상준을 챙겨서 발걸음을 돌렸다.

“나중에 상준이랑 게임하러 놀러 와.”

“내가요? 진짜 가도 돼요?”

고수호는 벙 찐 표정으로 우리를 졸졸 따라온다.

“어.”

그 모습이 좀 웃기다.

유상준과 고수호는 연습생 시절 듀오로 말을 놓은 사이지만, 따지고 보면 고수호가 나보다 한살 많다.

근데 좀 만만한 타입이긴 해.

“나는! 나는! 나느으으으으으은!”

“나중에.. 뵙겠습니다.. 가자 지우야.. 피존투 사줄게, 제발..”

나는 손을 흔들어주고 유상준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유상준은 미묘하게 한쪽 눈썹을 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기분이.. 좋은 거겠지?

“잘하고 있나 보네.”

“그런.듯. 뭐, 못하는. 애들은. 아니니까.”

아마 좋은 것 같다.

월챔에서 같은 국적의 선수들은 일단 적이 아니다.

같은 리그의 팀끼리는 같은 조에 배정되지 않는다.

최소한 본선까지는.

8강에 해당하는 녹아웃 스테이지에서는 다를 수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렇다.

우리 숙소는 주최 측에서 제공한 숙소.

한 개의 층을 한 리그의 선수들이 사용하지만 규모가 작지 않은 편이다.

확실히 유럽 쪽 결승보다 시설이 좋고 편하다.

중국이 이런 데서 돈을 아끼지는 않거든.

선수들에게는 1인 1실, 감코진에게는 2인 1실과 더불어 모두 모일 수 있는 메인 룸, 스태프 숙소 등이 제공된다.

기본 제공되는 숙소는 넉넉했지만 FWX에서 붙인 스탭의 수가 워낙 많았기에 경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외부 숙소를 잡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미 여기에 몇번이나 와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만큼 좋은 층에 배정받아본 적은 없다.

이유는, 글쎄.

“어서 와.”

메인 룸에 도착하자마자 김예성이 유상준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었어?”

“어. 미라쥬. 서폿. 헥사가..”

나는 사실 감시당하고 있는 건가.

“놀러 온다고?”

사정을 전해 들은 김예성이 도끼눈을 뜨고 날 쫓아온다.

“이러다 채지한인가 뭔가 하는 그 안경잽이 미드도 놀러오면 진짜..”

아, 결국 이 이야기였구나?

트릭스터한테 도움도 받았으면서.

여기 오기 직전까지 트릭스터가 휴가를 반납하고 달려준 스크림은 꽤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경험자 채지한이 툭툭 던져준 중국의 특성이나 오더 방향, 생생한 현지 상황 등도 마찬가지.

이런 경험은 나에게도 귀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물론 그쪽도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정확히는 시즌 말미에 간신히 들어온 감독의 자리 잡기 행사 같은 거지.

‘명문 팀’이 월챔 진출도 못 했는데 바로 휴가를 떠난다는 말보다는 이쪽이 더 나아 보이기도 하고.

“진짜다. 나 사람 알러지 있어서 절대 안 돼.”

“어.”

“와.. 김미드.. 추하다..”

“뭐?”

“아무 말도 안 했음..”

나는 그냥 시선을 돌렸다.

“이건 뭐야?”

다행히 거실에서는 언패킹이 한창이다.

“선물 들어온 거.”

“볼래?”

“팬아트 수준 진짜.. 미쳤다.”

“나는 자수 티셔츠 받았음. 이거 보임? 화염 드래곤.”

“지린다.”

그건 중국 팬들이 보내준 선물.

먼저 도착한 스탭들이 검수를 마쳤음에도 양이 상당했다.

“건이 선물 뭐야?”

“왜 양 차이가 이렇게..”

“은호야, 진짜 그 이유를 알려줄까?”

“아니. 제발 말하지 마.”

어쨌든.

숙소의 층도 그렇긴 한데, 이것도 좀 이례적이다.

내가 다른 LKL 강팀 소속으로 여기에 왔을 때는 이렇지는 않았거든.

달라진 게 뭘까.

“예성아, 너 선물 이거 풀어봐. 박스 묵직하다.”

“뭐야? 뭐야?”

김예성의 표정이 풀어진다.

“오.. 이북리더.”

“올~ 예성이가 갖고 싶어 하던 거 아니야? 잘됐네~”

“진짜 돈 주고 사기는 좀 애매한 건데 어떻게 알고 저런걸..”

그때.

이유찬이 툭 던진다.

“이북리더? 김정X?”

“?”

오.

이건 좀 참신한데.

“뭔 미친 개소리야? 전자책 보는 기계라고!”

김예성 화났다.

“이유찬 쟨 진짜..”

“크크큭.. 크.. 크큽.. 큭.큭..”

“유상준 왜 저렇게 웃음?”

하지만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큭큭.. 선물로.. 이북.. 리더.. 크큭..”

“아.. 씨.. 얘가 웃으니까 나도 웃기네.”

여기에도, 저기에도.

“어휴.. 빙신들.. 저게 웃겨? 웃겨? 크킁!”

“풉.”

“푸히히.”

그리고 끝내 김예성까지 웃었다.

“아하하하하하학!”

“하하하하! 켁, 하하하!”

웃으면 지는 것 같은데 나도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담겨있는 중의적인 뜻은 없는가, 정치적이지는 않은가, 윤리에 어긋나지는 않은가, 차별적이지 않은가 따위를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웃는 게 아니라.

순간적인 재치에 대한 감탄이나 옆 사람이 웃으니까 따라 웃는, 그런 단순한 웃음.

별거 아닌 거로 다 같이 깔깔거리고 모습.

어이가 없네.

얘들은 긴장이 없나?

“...”

얼마 전에 있었던 결승을 떠올린다.

그래, 그런 거겠지.

원래 이런 사람들이다.

나는 종일 숨겼던 온갖 생각들과 걱정, 불안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올 듯 말듯 했던 미소는 다시 사라지고 없다.

내 움직임에 따라 나오려고 했던 선수들에게 고개를 젓는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와서 발코니에 몸을 기댔다.

주 산업 단지와의 거리가 한국보다 멀어서일까, 아니면 환경 정책의 효과를 본 걸까.

고향과 다를 것 없이 보이는 하늘이지만 별이 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한참을 별을 센다.

내가 온종일 무거웠다는 사실을 잘 안다.

모두가 그걸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지금은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확신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이전보다 훨씬 더 엄숙한 긴장감이 든다.

분명히 더 나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데이터와는 별개의 마음이다.

이 감정은 대체 어디서..

“야.”

이유찬이다.

“뭐하냐?”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이유찬은 내 바디랭귀지에 관심도 없는 것처럼 나와 나란히 섰다.

손에는 그 대단한 이북 리더기를 들고 있다.

“그건 왜 들고나왔어.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우리 발아래에는 까마득한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하늘의 별처럼.

“님 그거 암?”

하지만 역시 이유찬은 내 말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미소 지으면서 코로 숨 안 쉬어짐.”

“?”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숨을 쉰다.

“구라띠.”

“...”

“이렇게라도 웃으라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음.”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생각해냈을 때.

“가자, 친구.”

역시 내 말을 신경도 안 쓰는 이유찬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유리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선물을 뜯어보고 있는 선수들을 본다.

그건 큰 경기를 앞둔 사람들이 아니라, 꼭 먼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단란한 가족처럼 보였다.

끝내 몇몇이 내게 재촉하는 손짓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그래.”

잠시 생각은 접어둔 채, 희미하게 웃으면서 그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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