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_완벽의 무게
“탑 조심.”
짧고 간단한 콜.
“오케이.”
“바텀?”
“바보 연기 중.”
이유찬과 최은호가 연달아 대답한다.
종종 그들은 권건이나 김예성을 두고 라인전 오토라느니 놀려댔지만, 어떤 순간이 다가올 때는 모두 마찬가지다.
“할 수 있지?”
회의가 시작됐고.
“할 수 있지.”
회의가 끝났다.
“어어어어어어어! 이거 일러요? 타이밍 상당히 일러요?!”
의견 통합 완료.
“찌릅니다!”
“바텀 찌릅니다! 권건!”
달린다.
미드 라이너들의 경험치가 6레벨까지 아홉 시 반을 가리킬 무렵.
“과감하게 모습 드러냅니다!”
한 캠프를 포기하고 찌르는 타이밍.
“뒤, 뒤, 뒤, 뒤! 스톰!”
“졔리, 뒤!”
일순간 상황이 불붙으면서 빨라지고.
“권건, 애시 노립니다!”
“점멸! 좋은 판단!”
잠깐 느려진다.
“플랜, 애시의 대응 빨랐어요! 대응 자체는 진짜 백점, 하지만 FWX가 점멸을 뺍니다!”
“타워 권역! 호오오옥시 들어갑니까 권건?!”
- 다이브! 두 다이브!
- 뒤져 권건!
- 저 새기가 본체다!
“빠집니다!”
안도의 한숨이 터진다.
주변이 뜨거워진 사이 스톰의 바텀이 말한다.
“살았다.”
“와, 이걸 너 안 노리고 날 노리네.. 나 노플.”
진주호가 스펠 체크를 하며 중얼거렸다.
“지나갑니다, 권건, 지나갑니다!”
- 아;; 저걸 안 들어오네ㅋㅋㅋ 진짜 죽여놓으려고 했는데
- (가슴을 쓸어내리며)ㅋㅋㅋㅋ
“네, 너희 너무 서로 싸우고 그러지 마라. 응? 바텀 적당히들 해라! 이렇게 경고 딱..”
원딜 강수달은 자기네 타워를 등지고 걸어 나온 권건을 보며 식은땀을 흘린다.
아찔했다.
“주호야, 쟤 어떤 루트로 왔지?”
살짝 꼬았지만 그렇게 대단한 타이밍은 아니다.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충분히 올 만하지.
“이따 다시 확인할게.”
근데 상대 머리 위에 달린 이름이 불편할 뿐이다.
닉네임 노출 기능 빼고 올걸.
“일단 이거 밀리면 안 되니까 내가..”
“근데 와드 있었었는..?”
강수달은 위치를 뒤로 살짝 당겼다.
그리고 밀어 넣기에 당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가는 서포터의 모습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오래 감는 게 아니라 평범한 눈 깜빡임이다.
그리고 다시 뜬 순간.
“야, 조,”
뱌이의 빛나는 주먹을 봤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심,”
들어올 거 아니지?
거리 안 나오잖아?
반대로 가는 거지?
스노우볼은 우리가 더 먼저 굴려야 하잖아?
진짜 결승에서 게임 개노잼으로 만들려는 거 아니지?
“하..”
애석하지만.
강수달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각들에 비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느렸다.
“딩거, 클래스의 딩거, 딩거, 점..!”
“멸!”
바톤을 받은 FWX 서포터가 들어온다.
“호안에 수류타아아아아아아안!”
아, 이거.
권건은 그냥 시선 뺏으러 들어왔던 거구나.
- 아차차 치매 영감 하딩 폿..
- 저 새낀 덩치 좀 키워라 보이질 않냐 왜..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맞았어요오옥!”
없지?
“궈어어어어어어언건! 금고 부수기!”
“들어어어어어어어어어갑니다아아아아아악!”
얼음 궁수가 왼쪽 뺨을 얻어맞아 뜨는 순간.
“안 갔어요!”
“이번에는 도망 못..!”
“맨몸으로 맞기에는 너어어어무 아파요!”
“케틀, 케틀, 세자, 케틀이!”
오른쪽 뺨도 마저 맞은 애시가.
“헤에에에드샷!”
바닥에 엎어진다.
“퍼브으으으으으으으을!”
“FㅡWㅡX!”
앞일을 아는 관중의 환호가 어깨 너머에서 쏟아진다.
#
게임 무조건 이기는 꿀팁 푼다.
나 계정 두 개 있는데 대회용 계정으로는 LKL 우승했고 본섭 계정으로는 솔랭 1위 찍었다.
너네 다 킬만 따면 이기는 줄 아는데 그거 맞다.
그러니까 무조건 퍼블 따고 시작해라.
못 따면 그 판 진 거고, 따면 그 판 그냥 이김.
니가 퍼블이나 어시 먹었는데 못 이겼다?
그럼 무조건 팀원이 잘못한 거.
사실 어그로였음.
근데 틀린 말은 아니긴 해.
인정?
아.
사실 여전히 화가 잘 가라앉지 않는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좋은 성격은 아니다.
남들과 똑같이 고집스러운 부분도 있고, 재수 없는 부분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내 마음대로 잘 안되는 날.
다, 이겼어야 했다.
완벽하게 이겼어야 했다.
“퍼블 먹었으니까 이제 나..”
“유찬아~ 눈치 챙겨~”
“거니 눈빛.. 확인..”
리그 부흥의 대의?
남한테 해달라고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이기고, 내가 우승하고, 내가 바로 세울 거니까.
이건 내가 해야할 일이다.
“오늘 좀..”
“그냥 두자.”
그래서 진짜 이기는 비결은, 그래.
상대 멘탈 터뜨리면 이긴다.
근데 킬을 따는 게 가장 멘탈을 터뜨리기 쉬운 방법일 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는 자신이 죽는 과정에서 멘탈이 터진다.
그럼 무조건 킬을 따야 하나?
그건 아니다.
상대가 트페를 들고 있는데 억지로 킬을 따려고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교환이나 하겠지.
그러니까 이럴 때는 더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 있다.
심리전.
이 게임은 결국 심리전이다.
중요한 경기일수록 그렇게 된다.
선수들은 막다른 길에서 자신의 진짜 챔프를 꺼낸다.
‘막다른 길’은 중요도가 아주 높은 경기가 될 것이고.
‘진짜 챔프’는, 음.
쉽게 말하면 자신 있는 챔피언 정도가 되겠지?
하지만 이 리그를 오랫동안 본 사람이라면 아마 꽤 많이 봤을 거다.
최후의 순간에 정말 생뚱맞은 챔피언을 고르거나 요상한 조합을 하는 경우를.
암살자 메타에서 미드 밸코즈라던가, 탑 캐리 메타에서 백도어 요뤽 같은 거.
최소한 감독이 시켰을 것 같지는 않은 픽.
그 선수들은 왜 그런 챔피언을 골랐을까?
그냥 그게 좋아서?
경기를 포기해서?
글쎄, 그것까진 내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어때?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게 그거인 거지.
지구 종말의 날에 뭘 할 거냐고 물으면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어쨌든 나는 그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LKL 서머 결승, 마지막 세트가 될 수도 있는 이 경기!”
표현이 좀 과한가?
근데 프로들이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지금 트페 6레벨 찍었어요, 근데 이거 상당히 곤란합니다..”
“트페가 일단 갈 데가 없어 보이거든요!”
잠깐 해야 할 일을 마치자.
바텀에 퍼블을 먹이고 미드 방향으로 동선을 탄다.
미드에는 강준윤의 트페가 있다.
이제 막 6레벨을 달성했다는 걸 김예성이 널리 알린다.
“빨리 굴리고 싶은데요, 스톰! 그리고 빨리 굴려야 하기도 하고요!”
와드 시야 끝에서 올라가는 척 무빙을 마치고.
귀환한다.
적도 예상할 거다.
하지만 껄끄럽다.
“아, 이거 상당히.. 이거 상당히 불편한데요?”
“탑, 탑 쪽 미스터 선수가 찔러보지만 무난하게 넘깁니다!”
“트페가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타이밍이 남질 않았어요!”
게임의 흐름을 잡는다.
“나 집.”
김예성의 목소리가 가물가물하게 들린다.
“보여주면서 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생각에 집중한다.
점점 세밀해진다.
시야는 바둑판처럼 넓어진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상대보다 앞서서 상대의 생각을 읽는다.
그래.
챔피언 선택의 이유.
스톰의 막다른 길에 서 있다.
이건 어쩌면 해설진이 해석한 구성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 나오는 선수들의 솔직한 성향.
스톰의 탑은 잭쓰, 힘.
정글은 요공, 안정감.
미드는 트페, 영향력.
원딜은 졔리, 캐리력.
서포터는 애시, 견제.
“탑 간다.”
“어.”
“앞으로 간 B-2 포지션. 뭐 하려고 하지 마.”
“하지 마?”
“...”
상대 미드는 시간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
상황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심리적으로 ‘급하다’.
“예성, 천천히.”
“오케이. 미드 미아.”
머릿속의 우주를 정리하며 탑으로 향한다.
한 수.
좀 더 넓혀보자.
상대 탑은 힘을 발휘하고 싶고, 정글은 경기에 안정감을 주고 싶어 하며, 미드는 영향력을 보이고 싶다.
“어어어어어어어!”
“탑, 탑, 탑!”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천천히 짚어보면.
수십 가지의 경우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한 가지를 가리킨다.
“글로리의 잭쓰, 선진입!”
반드시.
“요공이 아직도 집에 안 갔어요! 이거 진짜 완전 노골적으로..”
‘한 번 더’를 한다는 것.
“드디어 트페가! 궁극기를..”
머리 위로 사우론의 눈이 떠오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권거어어어어어언!”
나는 내 ‘친구 리스트’ 소속 강준윤을 향해 따봉을 날려준다.
“탑 근처까지 왔어요! 왔어요! 봤습니다, 스톰도 봤어요!”
“이러면, 이러면! 가지 않는 게..!”
잠시 시간이 얼어붙었다가.
“가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면 손해 많이 봤어요, 미스터 선수의 요공, 시간 대단히 크게 낭비합니다!”
“이거 권건이! 용 쪽 갔을 거라고 기대하고 시도 한번 해본 것 같은데! 이러면 기분 나빠요, 기분 나빠집니다!”
“지금 라온 텔도 안 쓰고 라인 복귀했거든요, 이런 것까지..”
지금이 적기인 상대의 턴을 뺀다.
“나이스.”
적에게 유리한 타이밍을 우리에게 유리한 타이밍으로 바꾼다.
손익 계산이라는 게 그렇다.
쓰지 못한 기회는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다.
단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제 용 쪽 타면서 내려갈테니까 바텀 준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들이 스스로 선택한 역할.
힘, 안정감, 영향력, 캐리력, 견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대는 멘탈이 깨져나가기 시작한다.
“건아, 나 지금..”
김예성이 말하고 있는 건가?
“미드는 오지 말고 잘 커서 캐리해.”
좀 더, 조금만 더 부수면 된다.
“캐리?”
그게 게임을 이기는 방법이다.
여긴 아직 한국.
고작 이런 데에서 버벅거릴 시간은 없다.
급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다.
#
스톰의 이상태 코치는 코칭 박스 안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공기가 무겁다.
감독 김지훈은 원래도 엄격한 타입이었지만, 중요한 경기가 될수록 더했다.
솔직히.
솔직히 FWX가 우승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변수로 계산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으.”
오늘의 FWX는 뜨겁다.
마치 불꽃처럼 뜨겁다.
하지만 차갑다.
얼어붙을 듯이 차가워서 손을 가져다 대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다.
“숨 쉬어.”
김 감독이 말했다.
“이거..”
“알고 있었잖아.”
속수무책.
FWX는 욕심쟁이다.
뭔가를 연구해오면 바로 그걸 흡수한다.
세 번째 세트야말로 스톰의 정수였다.
아예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것.
하지만 네 번째 세트인 지금은 어떻지?
그냥 운영적으로 모든 스톰의 움직임을 틀어막고 있다.
화려하고 재밌는 경기가 아니다.
그냥 심리전, 심리전, 그리고 또 심리전.
꼭 필요한 움직임만 딱딱 노려서 틈 없이 교묘하게 경기하고 있다.
“흥분하지 마, 이 코치. 그게 상대가 노리는 거니까. 아, 이젠 의미 없나.”
감독의 시니컬한 말투.
지난 FWX가 동물 픽을 했을 때, 상대는 스톰이었다.
그리고 스톰은 FWX의 이런 피지컬 원툴 플레이 역시 전략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뭔가 바닥났을 수도 있지.
그래서 준비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또 달랐다.
마치 다 보인다는 것처럼 촘촘한 플레이.
이건 싸움보다 더한 고통이고, 멘탈을 부숴놓는 압박 면접이다.
이건 ‘잘한다’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전략이고.
대부분의 라인이 우위에 있어야만 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
“이제 이런 식으로 안 할 줄..”
이 코치는 숨을 몰아쉬었다.
경기장 안에 들어가 있을 선수들이 느낄 압박감을 생각하면 심장이 멈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게 어딨어.”
김 감독은 여전히 냉정하게 대답한다.
이 코치는 섭섭하다.
그래도,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딱 그때처럼만 했으면 지금 강준윤의 트페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는 아니었을 텐데.
왜 또 스타일을 뒤집는 거야.
이 코치가 주먹을 꽉 말아쥔다.
FWX가 첫 번째 전령에 이어 두 번째 전령을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문득.
“FWX 말이지.”
김 감독이 말을 뱉었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적고 있지 않다.
아까 적기 시작한 피드백이 노트를 꽉 채워버려서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아마 패배를 직감한 순간부터.
이 경기가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며 다음 세트가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
“얼마나 지루했을까?”
김 감독의 말에 이상태 코치가 울컥했다.
“감독님..?”
스톰의 감독은 고집이 세고 엄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 말을 뱉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설마 우리가 시시한 상대라고..”
하지만 김 감독은 고개를 기울이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경기를 봐.”
차가운 얼굴의 김 감독이 화면을 툭툭 두들겼다.
“쟤네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권건이 움직이고 있다.
스톰이 굴리려고 했던 스노우볼은 구르지도 않았다.
“...”
김 감독은 며칠 전 권건의 눈에서 본 광기를 떠올렸다.
그 선수는 알고 있을까?
자기가 그런 눈빛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도 혹시. 혹시라도.”
김지훈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일어난 적 없는 과거지만 어디선가 겪어봤던 것 같은 기분이다.
“길이 있을지도 몰라.”
뜨겁고 차가운 FWX의 불꽃.
이 두 가지의 온도 차이가 얼마나 위험한지.
“네?”
“그런 광기는 욕망이 되고, 욕망이 때론..”
“네?”
“사람을 잡아먹으니까.”
화면 너머의 경기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