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_끝을 향해
김예성은 가끔 아주 일찍 잔다.
정확히는 아주 아주 늦게 잔다.
개인 연습 시간은 새벽 4시까지니까.
어느 정도 조율은 가능하지만 결국 이런 패턴에 몸이 무너지는 선수들도 많다.
이건 프로 생활 중 의외의 복병이다.
그래도 김예성은 큰 탈 없이 잘 적응한 편이었다.
심지어 꽤 좋아하는 편이기까지 했다.
예민한 그에게 소음이 없고 모두가 잠든 시간은 평화롭다.
더 기억해야 할 것도 없고 더 받아들여야 할 정보도 없으니까.
해는 간신히 떴지만 공기 중의 이슬은 걷히지 않은 아주 이른 아침.
사람을 마주치기 힘든 시간.
종종 그는 산책하러 나간다.
새벽 산책은 위험하다.
특히 안개가 낀 날은 더 그렇다.
추워서?
위험한 사람이 돌아다녀서?
아니, 산책로에 작은 달팽이들이 기어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달팽이는 길 가운데에 멈춰서 쉬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달팽이는 먼저 이 길을 지나간 사람들에게 밟혀 죽어있기도 하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해서 내디뎌야 한다.
그가 대단한 동물 애호가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생각 없이 걷다가 달팽이들을 밟아 죽이는 건 피하고 싶었다.
달팽이의 패각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그 아래에 물컹한 감각은 유쾌한 게 아니니까.
“아.”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점액질의 흔적이 남는다.
대부분의 달팽이는 안간힘을 쓰며 자신의 길을 그려 걸어 나간다.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많이도 헤맸네.”
김예성은 그런 달팽이를 만나면 손으로 집어 수풀로 옮겼다.
징그러운 건 딱 질색이지만 껍데기는 좀 괜찮다.
나선형의 패각을 바라보고 있으면 왜 아빠가 사진에 미쳤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제법 큰 놈인데도 꾸불꾸불, 제자리만 돌면서 해가 중천일 때까지 수풀에 닿지 못할 게 뻔해 보이는 달팽이도 있다.
“넌 방향 감각이 없어?”
어디로 가고 싶은 건지 한 자리에서만 맴도는 바보 같은 놈들.
달팽이는 제 껍질이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겠지만 인간의 발아래 껍데기는 한없이 부드럽고 연약하다.
“불쌍한 놈.”
김예성은 달팽이를 주워다 수풀 속에 넣었다.
그는 가끔 자기가 달팽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언제 누구에게 밟혀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 기는 느림보.
여기가 어디로 가는 길인지, 축축하고 부드러운 땅과 풀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냥 기어가는 달팽이.
“잘 살고. 너도 은혜는 꼭 갚아라.”
그런데 어느 날.
팀원들이 그를 들어 올려 수풀 속으로 넣어 줬다.
#
플레이오프 인터뷰 자리에는 모든 선수가 나와서 서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명백했다.
“먼저 라온 선수, 오늘 하루의 경기에서만 총 37킬을 먹는 대단한 기록을 세우셨는데요! 어시도 아니고 킬으로만! 이건 정말..”
미드, 김예성이다.
“암살 미드 라온이라는 평가가..”
오늘 경기 결과를 대충 예측은 했지만 실제로 보고 나서 더욱 좌절한 미라쥬 팬들은 대부분 자리를 떴다.
심지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일부 극성팬들은 FWX를 방해하기 위해 알루미늄 포일을 씌운 모자를 쓰고 왔는데.
그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면서 반사된 빛이 FWX의 무대를 더욱 빛냈다.
- 알루미늄.. 전자파 차단.. 실패냐?
- 거를 타선 없는 유사 과학ㅋㅋㅋㅋ
- 되겠냐ㅋㅋㅋㅋㅋ 얼탱ㅋㅋㅋㅋ 어디 도청 장치라도 있어?ㅋㅋㅋㅋㅋ
- 나 유치원 때 저런 거 쓰고 찍은 사진 있다ㅋㅋㅋ 털 난 철사에 구슬 달고ㅋㅋㅋ
- 미라쥬치원 손나 윾쾌ㅋㅋㅋㅋ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의 열정은 그 빈자리를 메울 만큼 대단했다.
“예성아! 형이랑 결혼하자!”
“엔들리스 FWX 레전드 라아아아아오오오온!”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제 더 이상 빅스 유니폼을 입고 와서 김예성을 응원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씩 웃으며 대열을 흩트렸다.
김예성이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네?”
하지만 질문을 받은 김예성은 인이어를 툭툭 두드렸다.
“오늘의 놀라운 경기력에 대한 감상에 대해서 여쭤보고 있었어요.”
류수정 아나운서는 싫은 기색 없이 다시 물었다.
“네?”
마스크를 쓴 김예성이 다시 한번 되물었다.
“앗, 문제가 있나..”
아나운서가 황급하게 사운드 체크를 요청한 사이 옆에 서 있던 권건이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 경기.”
“아.”
화들짝 놀란 김예성이 자세를 바로잡고 대답한다.
“좋았습니다.”
눈만 뜨고 있지 제정신이 아닌 기색이었다.
“네에.. 그렇군요.”
아나운서는 인터뷰를 잘하는 편이었던 김예성의 단답에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침착하게 엔지니어들과 사인을 주고받았다.
확인 결과 장비 문제없음.
“저, 잠시.”
주장이 손을 들어 마이크를 받았다.
“예성이가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았거든요, 최근에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그래서 지금 대답을 잘 못 하는 거니까 이해 부탁드립니다.”
깔끔하게 정리한 곽지운이 다시 뒤로 물러난다.
응원해주는 팬들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면서였다.
“아, 감사합니다.”
아나운서는 몇 세트를 지나면서 충분히 전해 들었던 내용이긴 하지만 다시 물었다.
시청자들은 모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퇴장 인사도 비접촉 주먹 인사로?”
그리고 감이 좋은 아나운서는 이쪽이 더 훌륭한 주제라는 사실을 알았다.
“네. 이제 회복기라 전염성은 낮다고 들었지만 조심해야 하니까요.”
이번에는 권건이 대답했다.
- 매너 씨;
- 미라쥬 애들 혹시 옮을까 봐?;;
- 알루미늄 캡을 감싸주는 포용력;; 가슴이;; 웅장해진다;; 말이;; 되냐;;
- 니네 아까 주먹 인사 건방지다고 그랬잖아ㅋㅋㅋㅋ
- 벨이 하도 서러워하길래 주먹 감자인 줄 아랏지ㅋㅋ
- 걔는 오늘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울어도 된다ㅋㅋㅋㅋㅋ 존나 미드 차이ㅋㅋㅋㅋ
- (예) 예 제가 (성) 성공한 사람입니다
“어머.”
어차피 승부 예측은 FWX로 통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스토리가 붙으면 다르다.
“그렇군요.”
직업 정신이 투철한 류수정은 권건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렇게 스토리 라인을 짜주는 권건도 그렇지만.
최근의 김예성도 게임 아나운서의 직업 만족도를 높여주는 세터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비밀리에 이 팀을 응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남동현의 영업도 한몫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멋진 모습을..”
이어 나갈 내용을 생각하던 류수정은 말을 늘렸다.
전문적인 계산 하에 이루어진 행동이다.
말을 고르고 표정을 가다듬는다.
“그럼 일단 다른 선수분들 먼저 인터뷰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스틸컷을 의식한 류수정은 턱을 당기며 안쓰럽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팬심은 팬심이고.
여기가 직장인 이상 그녀도 방송인이다.
물론 프로의 표정과 사심은 조금 다르다.
우리 예성이 안색도 창백한데 이걸 또 이겨?
어린 오빠들 빨리 나으세요 제발.
이뻐 뒤져.
그리고 고운 한마디를 덧붙인다.
“라온 선수의 투혼과 배려심에,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마음을 담아 감사드려요.”
이렇게 말하면 뭐가 달라지냐고?
곽지운, 권건에 이어서 기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거다.
아마 [최악의 컨디션으로 최상의 경기력, FWX의 미드 라이너의 부상 투혼]이나 [‘국민 여동생’과 ‘국민 미드’, 실력뿐만 아니라 매너도 장착?] 정도가 타이틀이겠지.
이건 어쩌면 주류 포털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에 올라갈 정도일지도 모른다.
20대 남성이라면 눌러보지 않을 소재로만 이뤄져 있으니까.
“주목도가 높았던 건 라온 선수지만 다른 분들도 빼놓을 수는 없죠! 오늘 탑과의 호흡도 굉장히 좋았던.. 차니 선수?”
전문 인터뷰어는 부드럽게 대상을 옮겼다.
“오늘 좀 치더라고요. 제 반 정도 하는 것 같던데..”
마침 인터뷰 사고뭉치도 ‘비교적’ 정상적인 인터뷰로 응대했다.
“하하, 사이다 선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솔직히. 제가. CS. 먹으면. 저도.”
이제 FWX와의 인터뷰는 익숙하다.
난도가 낮은 편은 아니지만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가장 자주 만난 팀이 이 팀이니까.
“네, 역시 우애가 돈독한 모습입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류수정은 생긋 웃었다.
승리한 건 FWX였지만 류수정도 신나고 들뜬다.
LKL의 화제성이 높아질수록 이 자리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진다.
그 말은 그녀가 있는 이 자리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이번 하반기에만 해도 대기 지원자가 부쩍 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실 인터뷰어를 겸하는 게임 아나운서는 근로 조건이 압도적으로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리그와 명운을 같이 해야 한다는 리스크는 있지만.
화면 고정 노출을 통해 팬덤을 형성하고 다른 활동까지 할 디딤돌이 되는 거거든.
그래서 냄새를 맡고 몰려들 라이벌은 어디에나 있다.
지금 와서 들어오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럼 마지막으로 다음 경기에 대한 각오 한 마디씩 부탁드립니다.”
퓨처스 리그서부터 화면 아나운서를 맡아 오랫동안 LOS를 공부하며 올라온 류수정은 제 자리에 자부심이 있다.
사실 최근에 가장 기분 좋은 건 지원자 풀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게임 아나운서 자리를 땄다고 했을 때 게임은 폭력이라느니, 게임 방송이면 아나운서도 아니지 않냐느니 고나리질하던 얄미운 기집애.
귀족 스포츠 테니스가 최고라더니 제풀에 망하고 구천을 떠돌다가 요즘 이 시장이 뜬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지원서를 넣어본 모양인데.
당연히~ 레퍼 체크 해줬다.
‘게임은 폭력이라고 말하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아이구, 진짜 복덩어리들.
“완전 쌤통.”
“네?”
- ?
- 모라고 하신?
- 클래스랑 겹침
- hoxy 욕이라도 ㅋㅋㄹㅃㅃ
- 누나 집중 안 해? ㅡㅡ
“앗, 생각이랑 말이 반대로..”
미쳤다.
완전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마지막 질문의 마지막 차례로 마이크를 잡고 있던 최은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다시 돌아보니 생각 역시 꺼내기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
“그?”
와, 나 진짜 최악이네.
갑자기 웬 잡생각을 이렇게 했지?
조금 전까지 나쁜 생각 해서 벌 받았나 봐.
이거 잘못하면 여태까지 노력해 온 게 전부 물거품이 될 것 같다.
진짜 딱 한 번인데.
“갑자기 혀에 쥐가 나서.. 쓰.. 땜통..? 댐동.. 딩동.. 딩동..”
얼굴이 빨개지도록 당황한 류수정이 아무 말이나 뱉은 순간.
“요즘 감기가 독하더라고요.”
권건이 자연스럽게 나섰다.
“예성이처럼 컨디션 안 좋은 걸 수 있으니까 병원 미리 가보세요.”
류수정은 정신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셨죠? 딩동 누나.”
마지막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 다를 바 없는 왼쪽 입꼬리 미소와 함께였다.
- 딩동? FWX 딩동!
- 딩동 누나! 딩동 누나! 딩동 누나! 아프지 마!
- 진짜 뭐라고 한 거임?
- 몰?루 걍 혼자 뭐 중얼거렸나 보네
- 눈나 4차원 손나 커엽ㅋㅋㅋ 귀까지 빨개짐ㅋㅋㅋ
- 권건의 첫 공식 ‘누나’ 떴냐?..
왠지 권건이 아주 작게 한쪽 눈을 깜빡여준 것도 같다.
“딩동 누나 힘내요!”
“딩동 누나 화이팅!”
“건아아아악! 나도 누나라고 불러줘!”
객석에서 응원의 소리가 들려온다.
“고.. 고.. 고맛습니다. 제송합니다..”
뜻밖의 응원과 애칭을 얻은 류수정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게 이렇게 되네.
오늘따라 권건이 더 잘생겼다.
유니폼을 입은 게 아니라 유니폼이 권건을 입었네.
미쳤다.
달다.
“그, 그럼..”
다행히 이번에는 생각이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항상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슬쩍 아나운서의 눈치를 본 권건이 자연스럽게 마무리 멘트를 친다.
“어휴.. 죄 많은 놈..”
최은호가 뭐라고 웅얼거리긴 했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다음 경기도 꼭 이기겠습니다.”
다행히 마지막 질문 후 마무리되는 분위기.
류수정의 건너편에서도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있다.
딩동 누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여기 직장.
나는 프로, 필요한 건 집중.
“인터뷰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경기에서도..”
그래도.
마지막 한 마디에는 좀 더 진심을 담아도 괜찮을 거다.
너희 은퇴할 때까지 나도 은퇴 안 할게요.
“좋은 모습 부탁드릴게요. FWX, 화이팅!”
이 뒤로는 정말 중요한 경기만 남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