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302화 (303/326)

302_FWX 미드

“블릿츠!”

함성이 터진다.

“이야, 이거 오늘 헥사 선수가 블릿츠를 꺼내서 보여줍니다!”

“준비를 좀 했나 본데요?”

기대를 모았던 플옵 경기다운 기세.

“그렇죠, 상당히 반가운 얼굴!”

“클래스 선수가 레나타 글로스크 가져가자마자, 그냥 바로!”

“블릿츠를 고른다는 건 사실 꽤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게 망하면 진짜 바로 깡통 되는 그런 챔피언인 거 모두 아시잖아요. FWX를 포함해서 몇 팀이 보여준 적이 있지만, 그리고 인기가 없는 픽은 아니지만! 최소한 LKL에서는 손이 잘 가지 않는.. 꽈리고추 반찬 같은 그런 느낌이 있어요!”

“근데 또 꽈리고추에 맛 들이면 이거 없으면 밥 못 먹죠?”

“맞습니다! 도둑이야! 도둑! 픽도둑! 밥도둑이야!”

“그러니까 이거. 지금 두 분은 이 상황을 밥과 반찬으로..”

“아뇨? 미라쥬가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거죠, 꽈리고추의 시대가 왔다! 한번 붙어보자!”

미라쥬는 시즌 내내 FWX를 상대했던 경험으로 카드를 가다듬었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5판 3선승제의 첫 번째 세트.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도전 정신이 깃든 카드를 꺼내서 기세를 꺾기 좋은 타이밍이다.

“그래서! 지금 블루 진영의 미라쥬가 탑에서는 그라, 정글은 비예고, 미드에서 리산과 바텀 아펠 블릿츠 조합!”

“쉬워요. 어떤 컨셉인지 보이죠. 버티면서 한타 보겠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블릿츠가 어떤 플레이를 하냐에 따라 바뀔 수도 있겠지만, 저는 헥사 선수가 그랩을 아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대가 받아치기의 전문가 클래스 선수거든요!”

비틀기.

“레드 진영의 FWX는 크샨테, 요공, 아라, 그리고 졔리와 레나타입니다!”

“이쪽도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미라쥬에 비해 비교적 이니시에 좀 더 신경을 쓴 모습이죠?”

그리고 정석의 싸움.

“이런 그랩 대 그랩 구도를 보는 건 꽤 재밌는 일이거든요..”

- 바텀 고정 좀

- ㄹㅇ 그랩에 모든 게 달렸다ㅋㅋㅋ

- 보여줘 헥사 보여줘 왕지우!

그래서 옵저버의 중계는 자연스럽게 바텀 중심으로 이어졌고.

“아, 이거 미라쥬가 먼저 밀어 넣습니다!”

“헥사가 당기나요, 당기나요? 이번에는 진짜 당기나요?”

시선은 왕지우의 그랩에 모인다.

“아끼라고, 아끼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블릿츠가 정말 위협만 하면서 무한히 시간을 끌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언제쯤 쇼가 시작될 것인가?

“지금..!”

“땡..!”

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그때.

“기여어어어어어!”

첫번째 블릿츠 그랩이 터지고.

“레나타!”

최은호의 챔피언이 적진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순간.

“아펠, 아펠! 아펠 방향, 레나타가!”

침착한 FWX 바텀 듀오가 상대의 움직임을 역이용해서.

“악수!”

바로 상대 원딜의 스펠을 뺀다.

“오히려, 오히려, 오히려!”

“서로 점멸이..!”

“빠집니다!”

“이러면 FWX에서 이득입니까?”

하지만 허공에 물총을 쏴대며 상대를 쫓던 곽지운은 갑자기 몸을 돌린다.

“어, 아니, 이거 끝까지 쫓아가서 다 퍼부으면 잡을 수도 있었을 것 같긴 한..데?”

밀리던 라인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홀드한다.

다음 턴의 유리함을 잡기 위한 선택이다.

“세자 선수가 그냥 스펠 아끼는 쪽을 선택한 것 같죠?”

해설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늘 천천히 가기로 마음먹었나요?”

킬이 마구 터지는 경기를 기대하던 관객들은 실망했다.

- 않이 형 오늘따라 왜 자린고비야

- 최전방 탱커 우리 원딜 ㅇㄷ

- 안 보고 있었던 거 아니냐?

- ㄴㄴ플옵이라ㅋㅋㅋ 섬세하게 하는 거다 이 말이야~

하지만.

FWX의 인게임 보이스는 전혀 다르다.

꽤 많은 팬들이 기대한 것과 달리 오늘의 주인공은 오히려 다른 곳이다.

“굿. 교전 없음! 바텀 싸움 종료!”

“오케이.”

선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경기가 쉽냐고?

쉬워졌다.

권건의 오더에 익숙해지고, 호흡이 맞기 시작하고 나니 분명히 전보다 쉬워졌다.

하지만 시즌을 거치면서 난이도는 다시 올랐다.

아무리 웃고 떠들고 친한 사이라도 노릴 수 있는 건 노리고.

뺏을 수 있는 건 단호하게 뺏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은 불안 요소가 있는 날이다.

“미드 조심.”

칭, 경고음이 들려온다.

이건 바텀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보통’이라면 바텀 쪽으로 시야를 살짝 돌릴만한.

아주 찰나의 시간을 버릴, 예리한 타이밍이었다.

김예성은 귀를 기울인다.

아직 목이 아프다.

열이 남아있다.

마스크 때문에 호흡이 불편했고 헤드폰에 눌린 끈이 예민하게 느껴진다.

집중을 위해 어제 약은 절반, 오늘 약은 아예 건너뛰었지만 사고가 느리다.

사실은 팀원들에게 말한 것보다는 조금 더 아프다.

물속에 있는 느낌.

누구나 그렇다.

전문적인 관리를 받는 프로들도 컨디션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건 결과에 대한 핑계가 되지 않는다.

“...”

김예성은 대답 대신 몸을 기울인다.

“ㅡ드, 미드, 미드, 미드으으으으!”

눈이 보이는 것보다 소리의 진동이 더 빨리 전해지는 것 같다.

“벨의 리이이이이이사아아아안!”

그 말은.

피하기는 늦었다는 뜻이다.

“묶습..!”

하지만 기회는 한 번 더 있다.

상대가 점멸과 함께 발을 얼리는 그 순간.

“비예고, 비예고 옵니다! 테러의 비예고!”

다시 한번, 칭.

김예성은 경고 핑이 떴던 방향에서 살짝 틀어 매혹을 날린다.

사고를 거치지 않고 눈과 손이 한 일이다.

“으으으으읏차아아아!”

맞췄나?

“라아아아아아아오오오오오오온! 아라!”

대검을 들고 도약을 시도하던 상대 정글러가.

승모근을 잠재우고 느릿하게 걸어온다.

“테러의 비예고를 상대로! 매혹 적중시키면서!”

불여우는 스펠로 몸을 돌리며 2 대 1 상황에서 벗어난다.

“점멸로오오오! 대탈출에 성공합니다!”

“흐으으으으으으! 이거 진짜 너무 아슬아슬했어요! 진짜 테러가 기민하게, 호랑이처럼 노렸거든요? 욕심날 만한 웨이브에 바텀 싸움까지!”

“바로 퍼블 갈 뻔했죠?”

“하지만 이렇게! 흘려냅니다! 미드 서로 점멸 교환!”

미라쥬 쪽에서는 아쉬움의 탄식이, FWX 쪽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터진다.

김예성은 먼저 사고하고 그 뒤 움직이는 타입이다.

그래서 빠른 챔피언은 못 하냐고?

아니.

빠른 챔피언일수록 더 빨리 사고하면 된다.

단지 오늘은 그게 좀 어려운 날이다.

김예성은 귀환하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아라 하지 말 걸 그랬나?

아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게 조합에 맞을 것 같아서 골랐다.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아플 때 게임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손도 까딱하지 못하게 아픈 게 아닌 이상 게임은 할 수 있다.

이상하지만 왠지 그렇다.

대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

음주 LOS만큼의 감각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연산 처리가 느려진다.

귀환을 마친 김예성이 혼잣말했다.

“봉풀주 정화 쓸 걸 그랬나?”

분명히 평소보다 느리다.

“아니?”

하지만 대신 뭔가를 얻기도 한다.

“개 명장면이었는데?”

이유찬의 칭찬이다.

“니가 그걸 봤어?”

“탑은 지금 론나 만만해서.”

“...”

이해하기 어렵다.

더 가성비 좋은 교환이 있는데 왜?

“예성, 방금 그거 느낌 좋더라.”

권건도 한마디 거든다.

컨디션이 안 좋다고 억지로 칭찬해주는 건가?

“감각적인 플레이였어.”

그게 뭐지?

“야, 예성아.”

라인 복귀 전 시야를 위해 잠깐 김예성의 옆에서 달리던 최은호가 말한다.

“너 저거 못 알아듣겠냐?”

“...”

“못 알아듣겠지?”

“어.”

“너 맨날 상대가 들어올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지? 정보 분석하면서 정글이 들어올지, 말지, 누가 먼저 들어올지, 아예 흘리는 게 나을지, 아님 스펠을 빼는 게 나을지. 그리고 나는 주문서 스펠 쓰는데 적은 자기 스펠 쓰게 할 수 있을지. 그럴 시간에..”

“김미드 니가 생각이 너무 많다는 뜻임.”

“이유찬 말뽄새? 난 예성이가 완벽주의자라는 뜻이었는데?”

“은호 형이랑 서로 나눔하면 좋을 것 같음.”

“오랜만에 유찬이가 옳은 말 하네?”

“역시 주장.”

“니네 둘 다 뒤진다.”

세 명이 피드백을 빙자한 비난을 나누는 사이.

복귀한 김예성은 라인전을 한다.

권건이 묵묵히 뒤를 봐주고 있다.

잠시 평화의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최은호가 종알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미니언 막타를 친다.

“예성아, 뭐가 최선인지만 생각하면 과부하 걸려, 안 걸려?”

“야, 서폿. 너 예성이보다 점수 높아? 할 일 없어? 패드 빚 안 갚아? 계속 입 털거야?”

곽지운의 목소리가 들린다.

또 막타를 친다.

“시급 얼마?”

“내 킬 하나당 10만원 까줌.”

“호잇! 충성 고객 우대! 실드 들어갑니다! 오늘은 꼭 펜타 드세요!”

“그런 말 하면 오히려 안 나오는 거 알지? 머가리 물총으로 쏴버린다.”

“야메떼!”

“예성아. 쟤 말 무시해도 돼. 너 힘내라는 뜻일 거야. 아마?도.”

다들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상대의 견제를 피한다.

또 CS를 먹는다.

“이제 예성이 쟤도 라인전 오토 돌리고 생각한다.”

“건아.. 이제 나한테도 배포할 때 되지 않았냐?”

“넌 손으로 주워 드세요.”

“이 새끼 자긴 서폿이라고 못 하는 말이 없네.”

갱을 흘린다.

웨이브를 삼킨다.

“억울하면 나도 막타 같이 쳐줘?”

“꺼져.”

이따금 잡담이 들린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

산처럼 밀려오던 웨이브가 어느새 끝났다.

김예성은 다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이’ 플레이가 괜찮았다는 거야?”

순수한 의도로 묻는다.

“어.. 아직도 그 얘기야? 유찬이가 그렇게 게임하잖아. 감각으로.”

탑이?

여전히 사고가 한 박자 늦게 쫓아온다.

“둘이 닮아가나?”

며칠 전이었으면 바로 무슨 말이냐고 대꾸했을 것 같은 소리가 왠지 기분 나쁘지 않다.

“어어어, 다시 한번 국지전 발생!”

“ㅡ가! 위기!”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미드와 전혀 상관없는 영역에서의 싸움이다.

“무사히 탈출합니다!”

“하지만 FWX, 또 한 번 용 주도권 가집니다!”

또다시 상황이 끝났다.

라인전에 집중한 채, 자신과 관련 없는 정보를 싹 흘린 미드 라이너는 기묘한 감각을 느낀다.

권건이 또다시 뒤에서 봐주고 있다가 그가 귀환할 때쯤 멀리 사라진다.

“오..”

상점에 들렀더니 잔돈이 남는 기분이다.

“야, 예성이 지금 CS 혹시..”

“아직도?”

“너네 다 닥쳐. 말하면 깨지니까 조용히 해.”

“...”

어느새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고요하다.

김예성은 이제 느린 사고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무슨 뜻인지 물었다.

“잘하고 있어.”

권건이 대답했다.

“뭘?”

김예성이 다시 물었지만 권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가끔은 비워도 돼.”

FWX의 미드 라이너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서울 빅스 소속일 때부터 섬세한 플레이를 지향했으며, FWX에 와서는 늘 든든한 미드였다.

그리고 감각파 탑 이유찬과 정반대의 플레이어다.

“네가 쌓아온 감각이 도망가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결국 단점을 덜어내고, 장점을 더하다 보면.

둘은 어떤 점에서 만나게 되어있다.

“아하.”

파사삭, 뭔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쓸데없이 자원을 소모하던 휘발성 메모리를 모두 날리고.

깔려있던 비휘발성 메모리만 남긴다.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깨달음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알겠다.”

화면을 꼼꼼하게 확인한 김예성이 말을 뱉었다.

“그래?”

정글러가 대답한다.

“어.”

완벽만 추구하던 김예성은 지금의 감각과 원래의 자신을 천천히 조율한다.

“마음대로 해봐.”

권건은 왼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이 말은 이유찬에게는 자주 한 말이지만.

김예성은 처음 듣는 말이다.

두 사람이 워낙 달랐으니까.

“무리하지 마.”

“무리?”

이제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다.

“지금은 지는 게 더 무리야.”

천재 미드가 고요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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