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_자리 좀 주세요^^
절기상 한국의 입추는 8월 초다.
기상학에서의 가을은 9일간의 일평균기온을 측정해 이동 평균이 20도 미만일 때를 가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보통 이런 기준보다는 극성을 부리던 더위가 잠잠해질 때나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 때를 가을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이제 가을이라는 게 정말 실존하는 계절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가을은 짧아졌다.
지금은 여전히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중순이면서도.
이상 기후가 놀랄 만큼 찬바람을 만들어내는 시기.
경기장에 사람이 넘치는 날이 더 늘어나고 선수 일정은 더 바빠지며.
여태까지 비축해왔던 체력으로 버텨야 하는 1년의 마무리, 서머 시즌의 말미가 왔다.
“괜찮아. 일정 생각하지 말고 푹 쉬고 돌아가자.”
그리고 FWX에도 결국 역병이 돌고야 말았다.
감독님은 마스크를 쓴 채 움직이고 있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감기나 몸살은 살면서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고, 디스크 같은 일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선수들도 꽤 많다.
바이러스가 뭐 우리 일정까지 봐가면서 찾아오지는 않으니까.
다만 그게 바로바로 밖에 알려지는 경우는 잘 없다.
투병 호소인 같고 좀 그렇잖아?
“진짜.. 괜찮.. 아요?”
커튼 속에 들어있는 김예성이 쉰 목소리로 말한다.
“응. 내일 오후 스크림은 취소했고, 대신 분석 공유 시간으로 스케줄 변동 있다. 단톡에 보내놓을 테니 참고해.”
박 감독님은 우리 미드에게 담요를 하나 더 덮어주면서 웃어 보였다.
“너희도 조심해라.”
“네.”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온다.
나도 칸막이가 있는 병상에서 가만히 수액을 맞고 있다.
아프냐고?
아니, 난 안 아프지.
좀 피곤하긴 해도 아프진 않아.
이번엔 다르다.
전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이 신경 썼으니까.
물론 이맘때 컨디션 난조가 올 확률이 높긴 하다.
월챔을 앞둔 지금의 LKL은 수능 직전,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기말고사랑 비슷한 시기거든.
아무리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을 해도 바이러스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수액을 맞는 건 일종의 행사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이들 그렇다.
물론 이전부터 건강 검진을 받았던 전담 병원에서 최근 식사 패턴이나 영양제를 파악한 뒤 영양 수액을 맞는 거다.
당연히 약물 검사를 받아야 하는 ‘주사’는 아니다.
연달아 야근했던 회사원이 맞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컨디션 유지용 비타민.
“그래도 다행이다.”
감독님은 내 옆의 빈 침대에 걸터앉았다.
“뭐가요?”
“경기 날까지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될 것 같아서.”
우리의 플옵 경기는 모레.
변수는 있겠지만, 과감한 결정으로 대처가 빨랐기 때문에 나쁜 상황은 아니다.
건강은 아무리 챙겨도 부족하다.
과거에는 심각한 중이염으로 고통 속에 경기를 해야 했던 선수도 있었고.
디스크가 터져 책상 앞에 앉기조차 힘들어하던 선수들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거에 비하면 나쁘지 않다는 거다.
“물론 너희가 가장 중요하지만, 그러니까 지금은 중요한 시기니까..”
박 감독님이 곤란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다.
“잘 알죠. 오히려 좋아요.”
“왜?”
나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러면 다들 핑계 못 댈 거 아니에요?”
“하하.. 은호 저격이야?”
“눈치가 빠르시네요.”
감독님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확실히 웃고 있었다.
“건이 너도 농담이 늘었네.”
농담 아닌데.
“최 코치님이랑 김 코치님은요?”
“아까 먼저 와서 진단받았고 지금은 임시 숙소.”
“다들 컨디션 빨리 올라오면 좋겠네요.”
“그래. 너도.. 음, 그래. 방역 수칙 잘 지키고.”
“네.”
박 감독님은 자리를 떴다.
톡, 톡.
수액 방울이 떨어진다.
이런 수액은 당장 뭐가 달라지게 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아픈 사람에게는 좀 더 힘을, 아프지 않은 사람은 며칠간 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뿐.
게다가 계속 맞는다고 계속 좋은 것도 아니라서 딱 필요할 때만 맞는 게 가장 좋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합숙 생활을 하다 보면 감염이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이다 보니 미리 조심하자는 뜻이다.
과잉 대응이 늘 나쁜 건 아니다.
플옵을 벼락치기 할 것도 아니고 이미 준비는 끝났으니까.
결국 우리 팀에서 역병에 걸린 사람은 셋이다.
김미드, 최 코치님, 김 코치님.
좋다는 건 다 챙겨 먹은 우리 팀 사람들이 왜 골골거리는지에 대해서는 글쎄?
많은 사람과 접촉했던 경기 후 팬 미팅 때문일 수도 있고, 코치님들이 마주친 사람들이 문제였을 수도, 누군가 깜빡하고 열고 잔 창문이 문제였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과거 팬데믹 사태 후.
각 리그의 제도는 물론 각 팀에서도 대응 프로세스를 구축해둔 상태다.
이쪽은 온라인에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재택근무나 격리에 적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 다른 팀들도 시즌 중 이런 사태를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을 예정일지 모른다.
물론.
“이거 짜도 되나? 내 거 아예 안 나오는 것 같은데.”
“유찬. 진짜 안 나오고 있으면 손대지 말고 너스콜 해.”
“사실.. 나옴. 밀린 예능이라도 보고 싶다. 여기 와이파이 외않되?”
선수 대부분은 이 시간을 꽤 지루해했다.
약 한 시간 동안 가만히 누워있으라는 건 생각보다 지겨운 일이다.
“나도..”
“나 오기 직전에 어제 거 다운받아놨는데.”
“은호야. 잠깐 폰 좀 줘봐라. 여기로 던져볼래?”
“형님. 내가 발가락 잘 뻗으면 닿을지도..”
“...”
그래, 뭐 한창때인 애들인데.
무조건 눈 감고 쉬라면 좀 힘들 수도 있긴 하지.
“너네들.. 콜록, 콜록.”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김예성이 말문을 열었다.
“야. 너 말하지 마.”
“걱정.. 콜록.. 고마운데..”
“아니, 우리한테 옮을까 봐 그러는 거임.”
이유찬 저거 진짜.
둘이 제일 잘 놀면서 왜 사람이 아픈데 저래.
김첨지야?
“그런 소리.. 하다가.. 콜록.. 건블레스유 맞는 수가 있어..”
“어.”
“전투.. 콜록, 취침!”
“전투 취침!”
“전투 취침!”
대체 왜요?
제가 잠까지 관리하는 사람처럼 보이나요?
“아저씨들, 일단 주무세요.”
맞습니다.
아파서 졌다, 뭐 이런 말은 이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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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KL) 플레이오프 1R 4, 5위전 광주 미라쥬 vs 인천 트릭스터 ]
FWX가 불가피하게 ‘반차’를 낸 날.
[ 광주 미라쥬, 트릭스터 상대로 1세트 선점! ]
플레이오프 1라운드가 한창이었다.
“오늘 경기의 승부 예측은 대부분 미라쥬 쪽으로 쏠렸죠?”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트릭스터가 정규 시즌 2라운드부터 상당히 난항을 겪으면서 최종 순위 5위에 안착한 이유가 드러나는..”
“확실히 트릭스터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였을 것 같아요.”
5판 3선승제 중 1세트.
인천 트릭스터는 컨디션이 안 좋았던 탑, 이상하를 출전시켰다.
다전제에는 시즌 중간에 콜업한 선수보다 경력 있는 선수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 ㅈㅓ 새1기 아직도 여기 있었냐?
- 차라리 없는 척하라고;;
- 아픈 거 존나 티 내는 거 꼴 보기 싫다
- 손 떠는 척 패고 싶고 ^오^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었고.
특히 혼자 게임을 다 말아먹은 이상하에 대한 평가는 냉소적이었다.
꽤 오랜 시간 리그를 제집처럼 여기며 결승에서 일부러 함성을 유도하던 탑의 모습은 없었다.
트릭스터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리더십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특징으로 꼽혔던 안티 캐리 성향은 전혀 돋보이지 않았고.
강박 역시 여전했다.
반대로 미라쥬는.
이제 슬슬 팀에 적응한 피닉스 출신의 탑, 텐.
도장훈의 힘을 선보였다.
- 우리 탑 10위인 줄 알았더니 사실 꿀매였네ㅋㅋㅋ
- 미라쥬 미라클런 가보자고ㅋㅋㅋㅋ
- 여과에 환수 필수라니까ㅋㅋㅋ 존나 고인물 트릭스터;
- 팩트) 트릭스터가 감독 포함 가장 많이 팀원이 변경됐다
- 그럼 더 ㅄ이네ㅋㅋ
안타깝지만 그의 강박이 해결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단순했다.
악플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안티는 막을 수 없으니까.
이 판에 악질 안티는 흔하다.
안티 없는 선수는 없다.
모든 걸 증명한 과거 레전드들도, 지금 시장에서 가장 고평가받는 권건도, 그리 유명하지 않은 선수도 수만 차이 날 뿐 똑같다.
이건 팀의 이름이나 성적과도 전혀 상관이 없는, 개인에게 따라붙는 안티.
그들이 상대를 미워하는 이유는 들어볼 필요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씨발, 씨발, 씨발..”
잘 몰라도 미워하고, 알고 나면 더 미워하고.
유틸 챔피언을 고르면 쉬운 것만 한다, 공격적인 챔피언을 고르면 캐리충이다, 방어적인 챔피언을 고르면 버스 탄다.
그러다 게임에서 실수라도 하면 이때다 싶어 더 미워한다.
- 저 새기 지금 박스 안에서 입 모양 X발 아니냐?ㅋㅋㅋㅋㅋㅋ
- 걍 퇴물 노잣돈도 주지 말고 내보내라 좀;;
- 결승에서 함성 ㅈㄹ할 때부터 이럴 줄ㅋ (링크)
- 얘 과거 안 봄? 그전에도 은근 비매너 많이 함ㅋㅋ 이건 습관임
- 게임 끝나고 나서 피닉스 애들한테 뭐라고 말함 사진 증거 있음ㅋ
- 다음 세트 또 나오면 0/18/0 예상한다
이들과 아예 마주치지 않는 건 온라인 환경상 불가능한 일이다.
법적 대응을 하더라도 제재가 들어가기 전까지 당사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오직 상대가 ‘크게’ 긁을 구석을 주지 않는 것뿐.
그래야 자연 회복이 가능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씨바..”
하지만 여기저기 여지를 줬던 이상하는 면역이 낮은 상태다.
팀 순위가 떨어진 지금, 그 행동은 안티들의 잘못된 정당성이자 욕할 이유가 된다.
물론 이건 어느 팀의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흔한 일이다.
패착은 오만.
그가 던진 돌은 너무 크게 돌아오고 말았다.
“형..”
안타깝지만 주변의 도움도 어려웠다.
“저 너무 궁금해요.. 혹시 형은 지금 자기가 게임 안보다 밖에서 더 민폐 끼치고 있는 걸 진짜 모르나? 당장 다음 판 준비해야 하는데 왜 혼자 씨를 처뿌리고 있는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네요..”
상황이 워낙 급하니까.
그리고 최근 경기에서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민찬아.”
“아.. 감독님.. 제가 궁금증을 못 참는 성격이라서.. 이런 서포터라서 정말 너무너무 죄송해요..”
이런 말까지 받아줄 정도로 너그러운 선수들은 이미 지난 스토브 리그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하아..”
전감독이 경질된 후, 아직 제대로 된 후임자를 찾지 못한 채 엉성하게 굳어진 임시 감독 김정욱 역시 중심을 잡아주지 못했다.
결국 트릭스터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뜻은 아니야, 민찬아.”
하지만 리그는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감독님?”
옆에서 안경을 닦던 미드 라이너가 끼어들었다.
“빨리 엔트리 선언하시죠?”
귀환한 미드 채지한이다.
“상하야. 수고했다. 도진아, 준비해.”
“넵. 알겠습니다.”
콜업된 탑이 눈치를 보며 장비를 스탭에게 건넨다.
일부 팬들은 탑의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걸 안타까워했다.
한때 꽤 이름을 날렸던 탑의 초라한 말년 모습.
박수받으며 떠났던 FWX나 미라쥬의 이전 탑과는 정반대다.
“이게 무슨 꼴.”
채지한만 탄식을 터뜨렸다.
아무리 미드가 멱살 캐리 역할이라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여전히 밖에서는 분석 데스크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오늘! 트릭스터의 승리에 거신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최근에 리뉴 선수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좋아요.”
“네, 그렇습니다. 캐리력 면에서는 오히려 리그 최상위권이라고 꼽히는 공격적인 미드 라이너거든요?”
“이 자원을 어떻게 쓰느냐가 그래도 오늘 트릭스터가 뭘 보여줄 수 있냐에 직결..”
최근 플레이 스타일에서 김예성과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불리는 선수.
“이거..”
채지한은 두꺼운 유리를 너머를 곁눈질로 봤다.
환호, 함성, 기대.
그건 모두 내가 받아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팀이 별로라고 끝까지 좌절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정신적인 문제로 완전히 붕괴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아 눈을 돌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았다.
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
아직 시간은 남아있고 방법은 많다.
밀어내기, 당겨오기, 계약 옵션 달기, 트레이드, 시장 파괴, 선수 가치 언플.
이런 부분에 밝은 편인 채지한은 다시 안경을 올린다.
“시즌 빠르네?”
트릭스터의 미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핑계는 없다. 라.온.”
다만 그가 관심 있는 자리의 주인공은.
내일 경기를 뛸 것이다.
팀을 빼면 자기보다 나은 게 없는 그 선수.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 주지..”
아무튼.. 그럴 생각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