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_마지막까지 불태워
어느 밤.
“릴리야.”
나는 전에 잠깐 이유찬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온 뒤로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
[ 왜? ]
나는 방이 아니라 FWX 이스포츠 팀 사옥 구석에 있는 그네에 기대있다.
농구장 옆에 있는 아주 작은 놀이터.
빛이 약한 가로등이 놀이터를 비춘다.
이런 시설이 왜 여기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는 은근히 몰래 연애하는 선수들이 즐겨 찾는 장소다.
나도 최근에 알았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다들 그러더라고.
하지만 지금은 내 차지죠.
“요즘은 좀 어때?”
릴리는 그네에 앉았다.
어른도 탈 수 있게 넉넉한 크기로 만들어진 그네다.
아직 작아 보이는 소녀의 발은 허공으로 동동 떴다.
[ 좋아. ]
악마는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였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신경질도 적어졌다.
사춘기가 끝났나?
[ 근데 좀 섭섭해. ]
“왜?”
[ 모르겠어. ]
“그래서 요즘 잘 안 나타났어?”
[ 그것도 모르겠어. ]
릴리는 시무룩해 보였다.
“나는 알 것 같은데.”
[ 왜? ]
“그런 거 아니겠어? 곧 헤어져야 할 필멸자와 정이 들었는데 어떡하죠? 내공 100점 드릴 테니 제발 답변 부탁드립니다.”
[ ··· ]
릴리의 표정이 깜짝 놀란 채로 굳어진다.
[ 어, 어, 어, 어.. ]
“농담인데.”
나는 그냥 웃었다.
[ 그게.. ]
“나도 생각은 해봤는데 내가 우승을 한다고 해도 네가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니잖아. 오히려 좋지.”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다.
이전까지는 그냥 매달리거나 혐오했던 내 삶이 꽤 풍요로워졌다는 증거니까.
[ 우승.. ]
릴리는 발을 꼼지락거렸다.
[ 할 것 같아? ]
“어.”
지체 없이 대답한다.
[ 그렇구나. ]
여름이지만 밤이 되니 기온이 내려간다.
나는 얇은 겉옷을 벗어 건넸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 나는 못 입어. ]
“그래.”
옆으로 메고 있는 작은 가방을 통해서만 간섭할 수 있다는 설정은 여전한 모양이다.
[ ··· ]
나는 잠시 말을 고른다.
여동생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나보다 실제로 나이가 많겠지만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은 외모라.
아마 이럴 때는 재촉하지 않는 게 맞을 것 같다.
“게임은. 재밌게 하고 있어?”
다른 주제를 던져본다.
[ 응. 재밌어. 인간 혐오 생기고 좋아. ]
좋다는 말 맞아?
그래도 이제 게임을 해봤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어떻게 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조심하세요.
당신은 진짜 악마와 게임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악귀들이 더 무섭겠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 근데 반대로 또 좋기도 해. 게임이 그런 건가 봐. 한 판 안에 희로애락이 있고. ]
릴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 계급처럼 나뉘어 놓은 티어 안에 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고. ]
생각해보면 꽤 잔인한 시스템이다.
“그렇긴 하지.”
[ 그리고 리그 안에는 또 수많은 사람이 있지. 정말로 여기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
틀린 말은 아니다.
“뭐.. 그것도 맞아.”
[ 응. ]
릴리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나는 잠시 산책로를 주시했다.
멀리서 다가오던 한 쌍의 그림자가 화들짝 놀라며 멀어진다.
혹시 커플?
우리 애들은 아니겠지?
[ 눈을 왜 그렇게 떠? 너 지금 완전 우리 아빠 같았어. ]
“...”
일단 인간형이긴 하시겠지?
예전에 볼베 닮았다고 말한 걸 들은 것 같은데.
내 이상한 표정에 릴리가 전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웃은 악마는 드디어 다시 입을 열었다.
[ 예전에 궁금하다고 했었지? ]
“뭐?”
[ 너희 팀원이 나 봤던 거. 그거 물어보려고 이러는 거잖아. ]
들킴.
[ 맨입에? ]
“뭘 드릴까요.”
[ 글쎄.. 생각 좀 해볼까~ ]
릴리는 평소처럼 샐쭉 웃었다.
“그러지 말고.”
[ 응, 뭐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봐.. ]
작은 손이 허공을 스치자 반짝거리는 점 세 개가 나타난다.
[ 나는 투자자야. 자원은 한정되어있어서 분산 투자는 할 수 없어. ]
그중 가장 큰 점이 반짝인다.
[ 이게 너였어. 가장 가능성이 높은 별. ]
“무슨 의미로?”
[ 열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을 사람. ]
그럼 내가 프로를 그만두고 싶었다는 감정을 못 느꼈어야 하지 않나?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 결국 포기 안 했잖아. ]
릴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 그리고 지금은 리그 전체가 활활 불타고 있게 만들었잖아? ]
“어. 그건..”
나 혼자 했다기보다는 이 팀에 들어와서 생긴 일인데.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 아닌가?
[ 그리고 다른 한명이 너희 팀원. 재밌게 게임할 때 가장 열정적인 사람. ]
두 번째로 큰 점이 빛난다.
이유찬 이야기겠지.
[ 그리고 또 다른 한명도 비슷해. 이게 이렇게 되네? ]
가장 작은 점은 희미하게 반짝인다.
“마지막 한 명은..”
[ 그건 지금 와서 큰 의미가 있는 얘기는 아니고. ]
더 대답해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근데, 투자라고?
“릴리야. 너 힘 없잖아.”
탈모빔 밖에 못 쏘는 게 까불어.
[ 원래 이 정도는 아니거든? ]
릴리가 손을 모아쥔다.
앗, 아아.
말조심.
[ 너한테 다 쏟아부어서 그런 거지. 남는 게 없어. 적자예요, 적자. 사장님이 미쳤어요! ]
“탈모빔이 회귀랑 동급이라고?”
[ 당연히 아니지. 이번이 마지막 영끌 담보 대출. ]
릴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 요즘은 배당금만 빨면서 살아. 빨리 떡상해라. 제발! 가즈아아아아앗! ]
“?”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훈훈했던 우리 사이가 사실은 개미와 주식의 관계였다 이 말입니까?
“담보..는 뭔데?”
시시각각 변하는 내 표정을 보며 악마는 키득키득 웃었다.
[ 너야. ]
“...”
[ 인간의 영혼은 아주 특별한 가치를 지니죠.. ]
야.
이게 무슨 소리냐.
이거 이번 삶에서 얘가 안 나타나고 나 포기했으면 그냥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거?
아니면 지금 실패하면 죽는다는 뜻도 되는 거 아니야?
그게 시한부잖아, 이 악마야.
“릴리야, 이거 너 진짜 이거 그러니까 프로게이머가 목숨 걸고 게임한다는 뜻이 비유가 아니라 진짜..”
[ 응~ 사실 구라임. 악마가 인간 영혼 엿 바꿔 먹는 거 갑돌이 갑순이 시절 얘기임~ ]
“미쳤어?”
[ 아하하핫! 하하핫! 표정 진짜 너무 웃겨, 푸후이! ]
한참 웃은 릴리가 다시 방긋 웃었다.
[ 괜찮아, 안 죽어. ]
“이제 그 대사 좀 그만 써먹어라.”
[ 싫지롱, 계속 쓸 거지롱. 죽지는 않아, 죽지는. 어떻게 그래? 벌어다 준 게 있는데. ]
“사장님. 얼마 줄 거야. 한국에서 일하는 거. 힘들어. 안 돼.”
[ 군말 없이 일해라 한국인 노동자! 끝까지 죽어라 달려! ]
“사실 외국인은 너 아니냐고.”
[ 내가 바로 마계 버핏이다. ]
“얼씨구.”
우리는 잠깐 같이 웃었다.
[ 너도 질문해. ]
“뭘?”
[ 이제 곧 헤어져야 할 불멸자와 정이 들어버렸는데 어떻게 하죠? 내공 100점 드립니다. ]
“자문자답.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우승은 양보 못 합니다. 꼭 할 테니까 두고 보세요.”
[ 환자의 상태가 초기에 비해 아주 많이 나아졌군요. 이제 퇴원하셔도 되겠습니다. ]
“압도적 감사.”
내 인사를 받은 릴리가 바람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수수께끼가 다 풀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겠더라. ]
아직 웃음소리가 바람에 남아있다.
아마 나밖에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겠지만 무척 기분 좋은 소리다.
[ 세상에 정말 스포츠가 많아. 위대한 것들도 아주 많지. ]
“하지만..”
[ 응. LOS를 대신할 수 있는 건 LOS밖에 없어. 끝까지 최선을 다해. ]
맞는 말이다.
#
이번 시즌.
권건은 개막전부터 펜타킬을 달성했지만 모든 선수가 그런 건 아니었다.
메타 해석이 많이 갈리는 서머 시즌의 특성상 더 그랬다.
명실상부한 1위 자리에 올라앉은 FWX 입장에서 아쉬운 게 있다면 기록이다.
주로 원딜이 먹는다는 그 펜타, 원딜의 자존심이라는 그 펜타를.
올해의 곽지운은 먹지 못했다는 것.
곽지운은 활동 경력에 비해 비교적 늦게 얻은 1,500킬을 달성하기도 했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1,500어시스트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건 짧게 지나가는 기록일 뿐이다.
이 시장에서 많은 사람에게 가장 큰 의미를 남길 수 있는 게 펜타다.
물론 몇 골, 몇 홈런처럼 큰 의미가 없는 기록일 수도 있다.
결국 리그는 우승하는 팀이 최고니까.
하지만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냉정하게 말해 곽지운은 평균 선수 수명의 끝자락, 원딜 수명의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곽지운의 올타임 펜타 이력은 한 번.
작년 서머 1주차 유니버스전.
그러니까 벌써 14개월쯤 전의 일이다.
그리고 FWX는 최근 떨친 명성에 비해 펜타가 박한 팀이다.
체급 대신 뇌지컬을 약간 포기한 탑 라인을 제외하면 여전히 극한의 이득과 운영 쪽에 힘을 더 주는 팀이었으니까.
“아, 최은호 진짜 저리 안 꺼져? 너네 자꾸 이러면 우리 강아지 실명 공개한다.”
“강아지 이름 뽀삐 아니냐?”
“사생활 침해로 고소합니다.”
“지랄 노.”
권건은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형.”
“어?”
“나?”
“지운이 형.”
“왜?”
이 팀은 다양한 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이 너무 많고 수동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감독.
지나치게 본능적이고 다루기 어려운 탑이나 예민한 미드, 오지랖 넓은 원딜, 땅굴 파는 1번 서포터와 사이코패스 2번 서포터.
그리고 요양차 왔다가 진심이 된 정글러까지.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팀이 아니다.
어쩌면 마이너스만 모인 팀이다.
그런데도 엉뚱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돌아간다.
탑 라이너에게 한번 당했지만 정말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다.
이건 이유찬의 표현대로, ‘그냥 그런 느낌’이다.
서로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렇게 펜타가 먹고 싶어요?”
권건은 아주 희미한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개막전의 펜타는 원딜에게 줄 수 있었던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다.
“먹으면 좋지?”
곽지운은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그건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어. 그래서 가끔 별똥별 좀 떨어지라고 소원 빌잖아.”
“야,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 비는 거 아니냐?”
최은호가 끼어들었다.
“일단 별이 떨어지라는 소원을 이루면 펜타가 뭐 별거겠냐?”
“그..러네.”
이 팀에서 가장 오랫동안 고통받은 사람이 누구일까.
‘팀에서의 시간’으로 따진다면 비교적 신속하게 콜업된 탑이나 상위권 타 팀에 있었던 미드, 팀을 순회했던 서폿과는 비할 바 없는 사람이 이 팀의 주장이다.
권건은 박 감독의 방에서 본 쪽지를 떠올렸다.
펜타가 먹고 싶어요.
“다 같이 노력 한번 해볼까요?”
“뭘?”
물론 펜타는 그냥 잘한다고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밥 먹듯이 펜타를 먹는다면 그 리그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하늘이 점지해주는 게 펜타다.
“은퇴하기 전에 펜타 5번은 먹고 가셔야지.”
권건이 뻔뻔하게 말을 놓자 잠시 곽지운이 눈을 끔뻑거렸다.
“나 멀었는데? 스물 일곱살에 은퇴할 건데?”
“그럼 1년에 한 번씩만 먹어도 되겠네.”
하지만 펜타 확률을 높일 확률은 분명히 있다.
“그럼 내가 더 잘해야겠네? 그래야 펜타도 나오지.”
“별이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잘해야죠. 선행 과제니까.”
“그럼 동의.”
더 빡빡하게 경기하고 더 촘촘하게 경기하는 것.
“유찬아, 들었냐?”
“들음. 일동! 모ㅡ여어어어어어라아아아악!”
이건 여러 가지가 확정되면서 살짝 풀어질 뻔했던 FWX에게 주어진 작은 미션이다.
“건스터코오오오오올! 납신다아아아아아악!”
“뭔데 뭔데?”
“내일부터 경기 뒤지게 빡세게 하라고오오오오오오옥!”
어딘가 느슨해졌던 긴장감 속.
달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서브 미션을 받고 시즌 후반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