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92화 (293/326)

292_서브 미션

나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던 걸까.

어떻게 이렇게 하이엔드급 사고뭉치 탑만 모여있을까.

마가 꼈나?

모든 문제의 근원이 탑은 아니지만 탑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유찬과 최정인에 이어서 바로 문 코치님까지.

이게 탑 게이트의 실존성을 증명하는 꼴인가?

이러면 리그에 비정상적인 탑밖에 없냐는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정말 정상적인 사람들이 많다.

내가 느꼈을 때 가장 멋진 사람은.. 전 탑 문봉구였으니까.

다만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이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근데 왜 하필 내 주변에 이렇게.. 엉뚱한..

“건아. 너한테 이런 사소한 일로 잔소리하는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죄송합니다.”

“이런 사례가 있어. 계정 주인이 맞으면서도 장난으로 ‘사실 이거 친구 계정, 나 원래 플레임’.”

“대리가 아니라도 걸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괜찮아.”

나는 오랜만에 혼났다.

전에 곽지운의 사촌 동생과 게임을 했던 것과 비슷한 사유다.

내 계정을 내가 잡고 있지 않은 것.

“이게 진짜 꼼꼼하게 따져보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일이긴 한데.. 친구끼리 장난치다가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거든. 근데, 그게. 음.. 우리는. 알잖아?”

“아닙니다, 더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문 코치님이 내 자리에 앉았던 건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전해달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나를 사칭하지도 않았다.

근데 그게 대상이 잘못됐고.. 말이 잘못됐고.. 그냥 총체적으로 다 잘못됐을 뿐이지.

“다행히 문 코치가 정말 신고를 넣지는 않았더라.”

박 감독님은 어깨를 으쓱했다.

“덧붙이자면 장난 신고도 가능하면 하지 말고. 물론 너라면 안 그럴 거 알고 있다.”

“예.”

주변인이 어쨌든 확실히 내 실수다.

“두 사람이랑 연락은 됐니?”

“네. 잘 설명했고 사과했습니다.”

여름 남자 최정인을 친삭하는 것도 실패했고 말이야.

이번에는 정말 친삭하려고 했는데.

이 사건은 오해라고 했더니 크게 아쉬워했다.

그리고 스톰의 강준윤은.. 단단히 삐졌다.

“하핫. 살다 보니 네가 실수를 다 하네. 좀 사람 같다?”

감독님은 긁어온 스크립트를 읽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문 코치 얘도 진짜 뚱딴지 돼지감자야. 전적 사이트에 검색만 해보면 누군지 알 수 있는걸. 어떻게 이렇게 은밀하게 암살을 시도할 수가 있지?”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더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아냐, 아냐. 그 친구가 나한테 달려오자마자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나요?”

“심각한 이슈가 있다고, 누가 우리 선수 괴롭히려고 한다고.”

“아.”

나와 문 코치님은 과거 접점이 컸던 사이는 아니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게임은 전문가지만 일상 기억력이 나쁘고.. 단순할 뿐이지.

그래서 이유찬 전담.

둘 다 좋은 사람들이다.

“얘도 그냥 FWX인거지, 뭐.”

박 감독님은 머리를 긁었다.

예전과 달리 FWX라는 단어의 느낌이 꽤 단단하게 느껴진다.

“근데 왜 하필 문 코치한테 부탁했어? 차라리 김 코치를 찾지.”

“빨리 운동가고 싶어서..”

좀 어린애 같은 말이었을까?

“운동이 그렇게 좋아?”

역시나 감독님은 푸근하게 웃었다.

나는 잠시 말을 망설인다.

“좋죠.”

원래부터 좋아하긴 했지만 예전보다 조금 더 좋아지긴 했다.

같이 운동할 사람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그래. 항상 고맙다.”

감독님이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친구가 많이 늘었네.”

“봉 들어줄 사람이요?”

“응? 아니.. 그게 아니라.”

“네?”

“얘네랑 다 친구 아니야?”

“네?”

“강준윤 선수랑 최정인 선수.”

“네?”

“미안하다.”

“네.”

잠시 뻘쭘한 시간이 흐른다.

“그.. 뭐야, 음.”

“이제 나가볼까요?”

“그럴까. 나도 이제 나가야 해서.”

나와 감독님은 어색하게 몸을 일으킨다.

“근데 이제 와서 다시 묻기는 좀 미안하지만, 너 정말.. 스톰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없어요.”

“혹시라도 전에 그 개.. 아니, 아무튼 무슨 일이건 꼭 말해줘.”

“네.”

정말 다들 주책바가지라니까.

“어이쿠.”

그때 일어나던 감독님의 옷자락에 걸려 하얀 종잇조각들이 쏟아진다.

“그건 뭐죠?”

“어? 이거 소원 수리함.. 아니, 뭐냐.. 그. 선수들의 요청 사항 같은 걸 모아둔 건데.”

“우리 팀 건데 그렇게 많아요?”

“아, 진짜 문제는 아니야. 거의 식단 이야기. 좋아하는 반찬 투표용지 같은 거지.”

나도 떨어진 종이를 두어개 주워 책상 위로 올린다.

“이거.”

“어?”

그때 우연히 펼쳐진 한 장의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

압도적이었다.

“호넷, 호넷, 호넷, 호네에에에에엣!”

“인생 땡겨서 흑염룡이랑 악수 한번 하고 싶었나요?!”

“이거, 이거, 감히 노렸습니다! 감히! 뒷텔 작전을 수행했어요!”

“하지만 어림없습니다! 알고 있었죠!”

오랜만에 닐랴를 들고나왔던 부산 호넷.

이들은 초반 바텀을 장악하며 혹시 FWX를 상대로 좋은 기록을 남길 수 있나 싶었지만.

“자르반 들어갑니다, 권건, 권건!”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않았다.

“띄우고, 뒤로! 뒤로! 뒤로 돌아들어가서어어어어억!”

“호조의 폼, 권건!”

“몇! 번을! 띄우는! 건가요! 몇! 번을!”

“몇 번을! 몇! 번을!”

- 닐랴는 왜 저렇게 자꾸 붙어 서 있는 거야

- “팔이 짧으니까”

- 그럼 닐랴를 왜 했어 메타도 아닌데

- “새로운 픽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팀은 호넷뿐이기 때문”

- 뉴메타? FWX가 근본 아님?

- “아아ㅡ 거기는 [인간계]가 아니다..”

- 10ㅋㅋㅋ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을 더 꿈꿔보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더는 원딜이 역할을 해주기가 어려워요, 호넷!”

“다운! 다운! 호넷, 따아아아아아아아아운!”

- “이리될 줄 알고 있었소”

- “자꾸 질 거면 해머스처럼 머리라도 밀고 져라”

- 호넷 팬들 컨셉 지리네ㅋㅋㅋㅋ

빠르고 신속한 퇴장, 1위의 1위에 대한 증명.

“LKL 서머 리그 쉰여덟번째 경기 지금부터..”

“오늘 경기, 인천 트릭스터가 준비해 온 것이 많을 것 같은데요.”

“다만 시즌 초부터 불안했던 탑의 안정성이 굉장히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최근 경기부터 2군에서 콜업된 솔로잉 선수가 출전하고 있죠.”

“오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번 시즌 트릭스터, 고생이 많습니다. 코치진도 급히 바뀌었을 뿐 아니라 선수들까지..”

- 오늘도ㅜㅜㅠ 도비가 대신 나왔니?

- ㅈ됐다 갸아악

- 오랜만에 봤는데 우리 상하 형 어디 갔어요? 감독님은요?

- 걔 강박증 심각해져서 쉰다고 공식 인터뷰 나왔잖아 감독은 짤렸고

- 그럼 이거 복권이 아니라.. 두꺼비였어..? 콩쥐야 우리 망했어..

- 1번부터 6번까지 거를 타선 없는 왕방망이 팀 FWX

그리고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트릭스터.

“미드에서 리뉴 선수가 끝까지 애써보지만!”

“라온 선수가 제대로 틀어막았습니다! 야, 니가 요즘 트릭스터의 주 무기야? 나는! 원래부터! 이 팀의 대포였어!”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고 했다.

그래서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던 이 팀은 각 팀이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약점이 드러났다.

시즌 시작부터 예견되어있었던 문제들이 곪아 터져나가기 시작한 것.

“아아아아, 이거 많이 싸늘해요, 리뉴 선수의 장점인 로밍 틀어막히면서 완전히 벽 느껴집니다!”

“아니, 아니, 탑에서는 차니가 그냥! 술통을 그냥!”

“어후! 어후! 어우우우우우우우우! 이 선수, 요즘 들어 공격적인 픽 자주 보여줘요?!”

“트릭스터의 솔로잉 선수가 아직 현장 실습이 좀, 시간이 좀 더 필요한데!”

“차니 선수는 그런 걸 봐주는 선수가 아니에요!”

“한타 페이즈 들어가면서, 마지막 싸움, 싸움, 싸움! 혹시? 혹시? 이거 끝까지 싸우면 혹시?”

“이거 혹..”

“혹시는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 광역 CC 쭉 들어가면서!”

“FWX에서.. 더블, 트리프으으으으으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마무리이이!”

“세자 선수의 화력이 충분해서 펜타를 가져갈 뻔했는데 갱플 궁에 뺏겼죠?”

“아쉽네요, 세자!”

약점이 드러난 트릭스터는 더 이상 예전 같은 압도적인 위상을 지닌 팀이 아니었다.

- (FWX) ??? : 야, “라이벌”

트릭스터 : 네?

ㄴ ??? : “니가 왜 대답을 해? 난 유니버스 부른 건데”

ㄴ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ㄴ 언젠가 이런 날 올 줄 알았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ㄴ ㄹㅇㅋㅋㅋㅋㅋㅋ 1위라고 깝칠때부터ㅋㅋㅋ 알아봤다ㅋㅋㅋ

ㄴㄴ 인천 결승? 이제 [대전 한밭]의 시대입니다 ^^7

ㄴㄴ 한밭! 한밭!

ㄴㄴ 한밭 FWX! 절대 한밭! 결코 한밭!

ㄴ (fact) 유니버스도 FWX의 라이벌은 아니다ㅋㅋㅋㅋ

ㄴㄴ 맞말추ㅋㅋㅋㅋㅋ

ㄴㄴ 2위잖아 좀 껴줘라ㅋㅋㅋ

ㄴㄴ 나 불렀어? ><

ㄴㄴ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니버스 옥희왔자너ㅋㅋㅋㅋ

ㄴㄴ 우리가 왜 라이벌이야ㅋ 우린 친구야^^

ㄴㄴ 써머형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제발 형네 게시판으로 돌아가ㅋㅋㅋ

ㄴㄴ 난 진심 FWX랑 유니버스 경기 빨리 보고 싶어ㅋㅋㅋㅋ

ㄴㄴ 이 형 또 우는 거 아니야? “아직 저는 어리다구욧”ㅋㅋㅋ

그 직후 만난, 상승세를 올리고 있는 제주 F.L.E도 같은 성을 가진 FWX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뒤로 돕니다, 이거 승부수..!”

“던지지.. 못하고! 여기서! GG!”

다시 만난 해머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스틸? 똑같은 상황! 하지만 세자가.. 먹습니다!”

“아, 방금 뭐라고 했어요? 권건 선수가 칭찬했나요?”

“세자 선수 입을 틀어막고 있어요!”

쭉쭉 이어 나가는 FWX.

2라운드의 극초반은 비 플레이오프권의 팀들이 포진한 대진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 (LKL) FWX, 플레이오프 진출 확정 ]

FWX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일찌감치 확정됐다.

중위권 팀이 따라올 수 없는 승수를 거뒀기 때문이다.

[ 모 선수 개인 방송 발언, “(FWX가) 우승까지 해주면 감사할 것” 발언.. 무슨 뜻? ]

ㄴ “해줘”

ㄴㄴ 포인트로 자리 뺏지 말고 그냥 빨리 “꺼져줘”

아직 조금 이르지만 서서히 월챔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시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중상위권의 팀들 입장에서 선발전 자리를 늘리는 길은 그들이 우승까지 차지하는 것이다.

우승으로 FWX가 월챔에 직행해준다면 아래에서 포인트 싸움을 하던 팀들의 숨통이 트인다.

물론 FWX는 이 기대를 저버릴 팀은 아니었다.

2라운드 하반기 대진 역시 FWX 입장에서는 그리 부담스러운 대진표는 아니다.

그냥 기존 상위권 팀들에게도 ‘헬대진’ 개념이 생겨났을 뿐.

해머스 다음으로 얻어맞은 건 미라쥬였다.

이 사건으로 미라쥬는 더욱 스톰에게 집착하게 되고, 트릭스터가 미끄러지기 시작하면서 두 팀은 정말 순위 경쟁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서머의 경기들이란 보통 스프링에서 쌓아 올린 결과대로 흘러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례적으로 작년부터 전 팀원을 그대로 유지한 FWX가 앞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급격한 성장의 성장통이 있었던 지지난 시즌과 스프링은 끝나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까.

이제 가야 할 길을 가면 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정규 시즌, 플레이오프, LKL 결승, 선발전.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있는 건 월챔이다.

세계 모든 LOS 팀의 마지막 목표인 월챔.

이제 서서히 정조준에 들어가고 집중력이 오르며, 경쟁의 장이 과열되는 시기.

FWX는 매일같이 새로운 기록을 세우면서 금자탑을 세우고 있었지만 달성하지 못한 목표가 있었다.

“형.”

“어?”

여유 있어 본 적 없는 정글러는 잠시 눈을 돌릴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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