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_뭐였더라?
“오늘은 돌아가서 잔여 일정이 있는데..”
박 감독님은 늘 하는 것처럼 일정 공지를 읊었다.
하지만 선수들의 집중력은 붕 뜬 상태였다.
“나는 가끔 이유찬 뇌 주름에 끼어 죽고 싶어.”
“불가능. 노 주름.”
“동의한다..”
바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려서?”
이유찬은 또유찬했고.
“그런 말 아니야.”
김예성은 얼굴을 가렸다.
“너는 그냥 인터뷰 반려하면 안 되냐?”
“니가 나보다 잘하면 POM 인터뷰 나감.”
“와.. 진짜 말을 해도 저렇게 사람을 빡치게.. 오늘 내가 너 밀어준 거..”
탑은 싱글벙글.
“오늘은 승리 라이브 패스하기로 했다. 내일 일정도 있으니까..”
감독님은 볼을 긁었다.
“아니, 그래도 1라 전승인데 오늘 같은 날 방송을 안 하면!”
“라운드 끝났다고 이번 주 경기가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돌아가는 차 안.
콘텐츠 팀 팀장님과 감독님의 토론이 한창이다.
이미 각종 채널은 이유찬이 던진 소재로 불타올랐다.
정말로 내가 관심법을 사용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금방 가라앉을 소재긴 하지만 오늘 방송이라도 켰다간 채팅이 그 이야기로 도배될 걸 생각하면 좀 끔찍하다.
“근데 뭐. 좀 궁금하긴 해.”
“동의.”
“나도 방에서 혼잣말하는 거 들은 적 있어.”
“건이가 가끔 딴 데 보고 멍하니 있고 그러잖아. 혹시 너 내 비밀 일기장..”
릴리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본 사람이 있나 보다.
내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김예성이 끼어들었다.
“형들, 그런 비과학적인 얘기를 믿어?”
대리인을 자처한 미드가 재빨리 말을 잇는다.
“쟤 정도 되면 당연히 혼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겠지.”
그럴듯한데?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상상 전투를 하는거야. 이번 메타에서는 이게 어떤지, 저게 어떤지. 그게 아니면 우리 데이터가 그렇게 상세할 수가 있겠어?”
“오..”
“그렇구나.”
어쨌든 나는 나대로 충격이 크다.
정말 이유찬은 이유찬이었던 것인가.
그냥 그 사람 그 자체가 저랬던 건가.
“근데, 이유찬.”
판도라는 왜 상자를 열었을까.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동물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였어?”
“동물이 동물이지.”
대답은 1초 컷이었다.
내 상자 안에 남아있었던 희망이 날아갔다.
“근데 대신에 우리가 다 같이 같은 컨셉으로 게임하니까 재밌었어.”
이유찬은 신나서 말했다.
“탑 중심 게임도 완전 재밌었고!”
“너 우울하다며.”
나는 간신히 말을 붙였다.
“엥? 내가? 언제?”
“맞아. 막 우울해서 바지 벗겠다고 그랬잖아.”
“그랬어.”
“나도. 들음.”
여기저기서 증언이 빗발친다.
“바지 벗는다고?”
이유찬은 멀뚱멀뚱 생각에 잠겼다.
“아~”
왜지?
나 정말 독심술이 생겼나?
갑자기 이유찬의 입에서 나올 말이..
“그건 내 가장 큰 무기가 거기에 있.”
나는 그냥 이유찬의 입을 막았다.
“?”
“얘가 지금 뭐라고..”
“오늘 방송 안 켜서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세상에, 아무 신이나 썸띵갓 정말 감사합니다..”
“박 감독님 당신은 정말 염소 당신은 우리 콘텐츠 팀의 구세주 리얼 정말 레게노..!”
황망함이 밀려온다.
무기?
나 왠지 이 이야기 아는 것 같아.
“혹시 이유찬 쟤가 말하는 게.”
“아니, 상대는 그유찬이다. 나한테 일일 생산품 보여주려고 변기 물 안 내리는 놈이라고.”
“오케이. 이곳이 전장이 아님을 확인.”
“허허, 얘들아 지금 무슨..”
“다들 침착해. 카메라 켜진 거 없지? 그러니까 다른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자맨이 우울하다는 착각을 했다는 그런 말인 거지? 매니저님, 저 여기서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내려주시겠어요? 아니면 저속으로 줄여주시면 제가 뛰어내릴게요.”
“침착한 척 하지 마, 예성아!”
이 사건의 범인을 알았다.
최정인, 최정인, 최정인.
최고의 무기 운운하는 게 틀림없이 최정인 유니버스다.
눈썹 미는 게 최고의 무기인 그놈의 짓이 틀림없다.
“우린 다 속았어! 우리가 바보한테 속은 거야!”
“꺄아아악! 끔찍해!”
“종.말.”
“잠깐, 잠깐, 잠깐!”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잠까안!”
크게 외쳤다.
“헉.”
“어.”
“음.”
와, 오늘따라 여러 대 맞은 느낌이다.
경기보다 현실이 더 맵네.
“다들 침착해. 우리가 고작 그것 때문에 그렇게 한 게 아니잖아.”
“마, 맞아.”
“감독님께서..”
분명히 이유찬의 심리 검사 결과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얘들아. 오늘 일은 잘 한 거야.”
“그렇죠? 맞죠?”
그리고 모였던 우리는 모두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게 오늘 이유찬 대장 작전까지 온 거고.
“뭐?”
“그때 검사했잖아. 상담사님이랑.”
“뭐 말하는 거야? 왜들 그리 다운돼있어?”
탑이 코를 후빈다.
나는 휴지를 건넸다.
“스트레스 지수. 한 달 쯤 전에 우리가 단체로 했던 거, 기억 안 나?”
“선생님 한 분 오셨었잖아.”
“면담도 했었는데.”
“나도. 나. 결과. 이상.”
“너는 그게 맞아, 무조건 맞아.”
우리의 대화를 주목한 나머지 선수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아! 아아아아! 그거! 그거! 알아! 알아! 쌤이 초콜렛 주셨던 거!”
나는 왠지 뒷골이 아릿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독심술이 생긴 게 맞는 것 같다.
“그거!”
제발 말하지 마라.
“1번으로 찍었는데?”
“...”
“드리프트 얼얼하네..”
“뭐가 문제야 세이 썸띵?”
너 영원히 탑 갱 압수.
#
FWX의 막내 코치, 문백산은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산책을 다녀왔으니까 아침 식사를 할 시간입니다.”
정확히는 권건을 쳐다보고 있었다.
새벽 4시가 넘어 잠든 그에겐 좀 이른 시간이다.
정오까지 한참 남은 시각.
잠이 좀 덜 깬 문 코치는 눈을 비비며 더벅머리를 긁었다.
“아침 식사는 보통 간단하게 합니다. 12시부터 일정이 있기 때문에 과하게 먹으면..”
권건이 작은 캠을 들고 화면에 말하고 있었다.
아, 속옷 꼈다.
문 코치는 궁둥이를 들썩거렸다.
“됐다.”
간신히 돌아간 옷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순간.
“어.”
카메라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안녕하세요?”
문백산이 어설프게 손을 내리며 인사를 건넸지만 권건은 셀프 카메라를 천천히 내렸다.
와, 저게 뭔데 무섭냐?
그는 어깨가 약간 움츠러들었다.
“미안. 미안. 촬영 방해해서 미안. 내가 팬..”
더 말하면 좀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니에요. 식사 같이하실래요?”
“어..”
권건 옆에서 보조 촬영을 하고 있던 스탭이 손짓으로 문 코치의 머리를 가리켰다.
정리 좀 하라는 뜻이다.
“응, 그래.”
사실 문백산은 권건이 좀 어색하다.
포지션 코치인 그는 이유찬과 따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편이었고, 아직 다른 코치들만큼 경력이 길지 않아서 선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도 컸다.
말실수라도 하면 박 감독과 진실의 방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박 감독은 선수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였지만 코치들에게는 무서운 면이 있다.
FM 그 자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우유 어딨지?”
“여기요.”
오늘은 FWX 최고 인기 선수의 브이로그 촬영 날.
처음 들었을 때는 뭐 그런 걸 하나 싶었는데 막상 나와보니 이해가 된다.
조각 미남이 산책하러 갔다 밥 먹고 게임하고 운동하는 건 그냥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매일 보는 일상이라 몰랐지만 시청자의 시각으로 보니 필견 영상이다.
“건.. 아. 이따가 스크림 있고.. 냉동실에는 아이?스크림이 있고..”
막내 코치는 권건 주변을 빙빙 돌았다.
“감사합니다.”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자리를 이동한다.
종종 마주치는 다른 팀 선수들이 반갑게 인사하거나 비켜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선수들 사이의 스타.
“형! 오랜만이야! 요즘 잘 보고 있어!”
“오랜만이에요, 권건 선수.”
“건강 잘 챙기세요. 이거 시골에 계신 저희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건데..”
권건의 생활은 워낙 규칙적이었기 때문에 FWX 사옥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선수를 마주칠 수 있다.
“감사합니다.”
그건 꽤 큰 복지였다.
“이제 스크림 시간입니다.”
솔직히 권건의 말주변이 대단히 좋으냐, 그럼 그건 절대 아니었다.
이 선수는 무슨 콘텐츠를 하건 억양이나 말투가 비슷했다.
하지만 뭐 그런 건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약 세 시간 정도 오후 스크림이 있습니다. 늘어질 때도 있고 조금 일찍 끝날 때도 있죠.”
오늘 문백산은 권건의 백업을 맡았다.
어차피 사옥 내의 일상 촬영.
특별히 할 일은 없지만 감초 역할이다.
“문 코치. 잘하고 있어? 촬영 별일 없지?”
“네. 회심의 드립도 한번 쳤고..”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그냥 보고만 있어도 돼.. 제발.”
“네네넵.”
“오후 스크림은 스킵하고, 이따 저녁 스크림 때 다시 합류해줘. 문 코치도 좀 쉬어야지.”
“감사함다.”
오후 스크림이 끝나고 나서는 세 시간 정도 자유 시간.
벌써 네시.
이때 선수들은 식사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곱 시부터 다시 저녁 스크림이 진행된다.
권건은 꾸준히 이 시간대에 근력 운동을 하러 사옥 내 피트니스 룸으로 향한다.
“운동 다녀오겠습니다.”
권건의 옆에는 몇몇 선수들과 특히 울상인 최은호가 서 있었다.
“야.. 오늘은 촬영한다면서.. 왜 오늘도 운동을.. 진짜 매일 가는 거냐고..”
“브이로그라서요.”
“그럼 예쁜 카페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오늘은 특별히.”
“오.”
“보충제 먹을까요?”
“...”
“레어한 보라색 통으로.”
“싫어. 그거 나방이랑 콩가루 섞은 맛 나..”
최은호는 웩, 하는 표정으로 운동화를 챙겼다.
문 코치는 자기도 같이 가자고 할까 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잘 갔다 와. 카메라는 안 들고 가?”
“셀프 캠까지 들고 가는 건 좀 불편해서.”
확실히.
운동 시간은 권건에게 꽤 중요한 멘탈 관리 시간인 모양이었다.
요즘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가곤 하지만 예전에도 혼자서도 꾸준히 갔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권건의 몸은 딱 보기 좋은 날렵한 근육질이다.
“응, 그렇겠다.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문 코치는 촬영팀에 꾸벅 인사를 건네고 권건이 앉아있던 자리의 화면을 봤다.
“건아, 너 메시지 오는데.”
“누군데요?”
“킹. 스톰 미드.”
“지금 더 중요한 일 해야 하니까 대신 대답만 부탁드립니다. 고생 많았다고.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채워질 테니 안심해도 된다고.”
병역 비리의 붐보이가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됐고, 첫 피해자였던 스톰은 이제 큰 짐을 벗어 던진 참.
하지만 때마침 메시지를 보낸 건 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 있는데? 여름남자. 이건 팀명이 안 붙어있네. 일반인 친구?”
“여름남자? 아..”
이름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권건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하. 걔는 친삭 좀 해주세요.”
“말없이 그냥?”
“가장 큰 무기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거예요.”
“그래, 알았어.”
다들 우르르 빠져나간다.
늦은 식사를 가는 선배 코치들과 쉬러 가는 선수들을 배웅하고 커피를 한잔 가져왔다.
그리고 권건 자리에 앉은 막내 코치는 키보드를 잡았다.
게임 계정으로 날아온 메시지들이 반짝거린다.
- 에스티엠 킹 : 야; ㅋ 관심법 리얼ㅋㅋ이냐?;; ^^;;; 나ㅋ 읽;혔냐고ㅋㅋ아ㅋ
- 여름남자 : 헤이 브로! >< 너 왜 톡 읽씹해???
근데.
뭐였더라?
누구한테 대답하고 누굴 친삭하라고 했지?
문백산은 머리를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