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_자알 놀다 갑니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장면은 상대 본진에 텔을 타는 이유찬의 랭가였다.
냅다 센터에 꽂아서 스톰을 앞뒤로 포위하는 그 꼴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너무 과감해서.
“와.. 요놈들 요거. 숨은 쉬나?”
정말 오랜만에 직관하러 온 문봉구는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해설로 참여한 적은 있지만 그건 인천 결승 무대.
LOS 파크에 온 건 오랜만의 일이다.
“너어무 맛있게 게임하네..”
하지만 이 현장감, 저 플레이.
적진 한 가운데에서 실컷 휘젓는 싸움?
내 모습에 벌벌 떨면서 도망가는 다른 라이너?
이건 탑 생각이 없던 사람도 탑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이었다.
“아.. 게임 하고 싶다.. 존나게 재밌겠구먼.”
손바닥이 간질거린다.
마무리를 당했던 스톰은 얌전하게 잘 컸던 미드와 바텀의 힘으로 요령 있게 게임을 끌어나갔다.
20분 초반, 이른 바론 싸움.
이번에는 양측 모두 힘겨루기를 했기에 스틸은 아니었지만 무사히 권건이 바론을 챙겼고.
픽만 봤을 때는 망설여졌던 사이드 주도권은 완벽하게 FWX에게 넘어갔다.
아니, 사실 이제 사이드는 중요한 경기도 아니었다.
이미 밀린지 오래라 스톰이 집 안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고 있을 뿐.
그래서 지금은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
“무대..”
문봉구는 양손을 비볐다.
그와 이유찬의 탑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180도 뒤집힌 타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로..”
하지만 이유찬은 점차 문봉구를 흉내 냈다.
그게 나머지 선수들에게 익숙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팀은 그런 관성에 따라 돌아가게 되어있다.
“많이 달라졌네잉.”
잠깐 부러워질 뻔했지만 문봉구도 기억한다.
제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했던 이렐을.
그건 틀림없이 팀원들의 배려였다.
손이 따라가지는 않아도 분석력 하나는 뛰어난 문봉구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더 좋은 건 이유찬이 한계까지 가기 전에 FWX에서 연락이 왔다는 거다.
스트리머 계약을 하긴 했지만 사유 없이 사옥에 출입하는 건 금지되어있다.
그게 규칙이니까.
그래도 이 선수들은 자기를 잊지 않고 다시 불러줬다.
짜증 내고 투덜거리는 선수들은 있었지만 탑에게 뭔가 해주고 싶다고 했다.
“멀리서 보니 알긋네. 쟈도 저렇게 자존심이 없는 아가 아닌데.”
웨이브 곁에서 꾸준히 점심시간만 알리는 김예성의 피쯔.
오늘 FWX는 누가 봐도 ‘먼저 때리면서’ 탑에 투자를 퍼부었고.
“저 형들도.”
적들에게 거리 유지와 포킹만 담당해주고 있는 바텀 듀오.
그들도 ‘탑이 망하면 모두 망한다’는 마인드로 경기를 뛰어주고 있다.
“그리고.. 건이도.”
무엇보다도 권건이 그렇다.
오늘 FWX 정글러가 해주는 역할은 잔반 처리.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암살자 포지션에 해당하는 탑과 미드를 정상적으로 굴리기 위해 단단한 템트리를 선택했다.
그는 챔프의 특성으로 계속해서 먹잇감을 찾아 패스를 찔러넣어 주는 역할을 했고, 와드를 채우는 것 외에는 아예 귀환하지 않고 ‘계속 싸운다’.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까지.
FWX가 목표로 잡은 테마는 틀림없이 문봉구에게 전해졌다.
무대는 전보다 뜨거웠고.
“미드 비었습니다! 이거, 이대로 가면 밀립니다!”
쉴 틈 없는 게임이었다.
“와아아아아ㅡ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관객석을 압도하는 저놈의 고함소리.
헤드폰을 끼고 있으면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 줄 모르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여기서 크게 들리면 아마 같은 팀 선수들은 더 찢어지게 들릴 테니까.
“하이고.. 지랄이야.. 피방 왔냐?”
그는 이마를 짚었다.
근데, 직접 보니까 알겠다.
탑이 들여다본 탑의 생각을.
“옳지, 요거. 요거..”
구겨진 현수막을 들여다본다.
탑은 탑만 안다.
“피방 온 기분 맞지.”
문봉구는 씩 웃었다.
#
나는 확신한다.
이유찬의 일일 대장 놀이였던 오늘은 어떤 선수의 깊은 생각과 놀라운 점을 볼 수 있었던 하루라고.
틀림없다.
“또 뵙겠습니다, 권건 선수. 이번 시즌에는 POM 점수 분산이 많네요.”
익숙한 아나운서의 얼굴.
“반가운 일입니다.”
“오.. 항상 대답을 예쁘게 해주시는 것 같아요.”
생긋 웃은 박현아 아나운서가 잇달아 질문한다.
“오랜만에 나온 워웍이라는 챔피언의 마나 관리나..”
인터뷰의 시작.
“그건 지난 패치 후..”
내 옆에는 아까 함성 지르던 사람 대신 얌전한 한 사람이 서 있다.
머리에는 팀에서 씌운 사자 머리띠가 올라가 있다.
아마 이유찬은 자기 머리 위에 그런 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
아직도 동공이 잔뜩 확장되어있으니까.
“워웍 꿀팁은요?”
“워웍은 생각보다 히트 박스가 작은 편이거든요. 그런 부분을 잘..”
기본적인 질문이 오간다.
오늘 나왔던 특이했던 픽이나 기본적인 전략 같은 것들.
“그래서 오늘 조합, 사실 거의 동물에 가까웠잖아요.”
“그랬죠.”
“이게 일부러 동물을 선택하신 건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전부 동물 챔피언들이 나온 경기가 됐거든요. 고양잇과, 갯과, 양서류, 조류. 동물 대장들이라고.”
그리고 눈치 못 챌 줄 알았던 동물 컨셉에 대한 질문도 들어온다.
“동물 농장 맞.”
옆에 있던 탑이 불쑥 끼어들었지만 나는 팔꿈치로 이유찬을 찔렀다.
“팀에서 정한 컨셉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사실 같은 말이긴 한데.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어쨌든 말은 두루뭉술하게 하는 쪽이 옳다.
오해할 수도 있잖아.
“그렇군요! 그럼 이런 챔피언의 특성이 뭐라고 생각하셔서 이렇게 정하신 건가요?”
발언권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뭐..”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일단 내가 생각한 이유찬이 바라는 바는 끊임없는 교전에 적합하고 기동성과 합류에서 이점을 보이는 챔피언들이다.
기본적으로 동물의 형태가 그렇다.
대부분 대시기를 지녔거나 빠르다.
조금씩 기울어진 부분은 있지만 대부분 활발한 동선 창출 타입.
지형지물에서 강점을 가지고, 영역을 넓게 점유했을 때 유리하며 기본적으로 모델이 된 동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을 제외하면 동물은 충분히 그 안에서 초식, 육식으로 나뉘니까 밸런스도 좋다.
그러니까 이유찬은 틀림없이 이런 걸 계산하고 ‘동물’을 제시한 걸 거다.
말로 설명은 못 해도 본능적으로는 안다는 거지.
아닌 것 같아도 꽤 똑똑한 친구라니까?
근데 이걸 솔직하게 다 말하는 건 좀 그렇고.
“일찍 활동하고 늦게 잠들어라?”
“네?”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네요.”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전략 전술은 비밀이다, 뭐 이런 말씀이시죠?”
“경기로 보여드릴게요.”
아직 자리에 남아있던 FWX 팬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환호가 터지며 이번 질문은 여기서 끝.
“좋습니다..”
샐쭉 웃은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돌린다.
“그럼 차니 선수.”
“네, 네네, 네?”
“오늘 굉장히 탑 중심의 경기로 돌아갔는데요, 이번 시즌 들어서 탑 중심 게임이 들어간 게 처음이죠?”
“네.”
“탑은 참 중요한 포지션이죠. 그런데 이번 시즌 들어서는 고립되는 일이 잦았어요.”
아나운서는 사자 귀 머리띠를 보고 잠깐 웃음을 참는다.
“아무래도 탑은 탑끼리 싸워라, 이런 구도였죠.”
“네.”
이유찬은 고개를 주억거린다.
뭘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역대급 잔인한 경기력’, 뭐 이런 얘기가 나왔어요. 그럼 이 부분에 대해..”
“아! 진짜 재밌었어요. 랭가는 스킨을 안 써도 멋있는 챔프기도 하고.”
“네?”
“그냥 메타대로 가는 건 재미가 없잖아요.”
“그렇긴, 하죠?”
생뚱맞은 대답에 잠깐 침묵.
“근데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아나운서가 불안한 눈빛으로 이유찬을 바라본다.
몇번이나 망한 인터뷰의 전례가 있다.
“제가 이 팀으로 건이를 데려왔잖아요.”
갑자기?
“네? 네! 아, 네, 그랬죠!”
“제가 왜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건 또 무슨 소리?
느닷없는 소재에 관심이 쏠린다.
“아니, 그.”
왜긴 왜야.
문상 때문이잖아.
하지만 발언권이 돌아올 각이 안 보인다.
“왜요? 왜 그러셨는데요?”
단숨에 눈빛이 변한 아나운서는 나를 제지하고 이유찬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낸다.
아니, 누나.
우리 깐부 아니었어?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인터뷰는 어떻게 된 거야?
“사실은..”
이유찬은 시선을 즐기며 입을 열었다.
“얘가 사람 마음을 읽어요.”
“네?”
“?”
“마음 들여다보는 거 뭐더라?”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독심술?”
하지만 이유찬 통역사로 살아온 내 입은 멋대로 대답을 뱉어낸다.
“맞음. 그걸 씁니다. 그걸 제가 알아보고..”
“...”
나는 드디어 깐부 누나와 눈을 마주쳤다.
미안해요.
“그러.. 그렇. 그러시구나.”
“진짠데.”
이유찬은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 하루 진짜 재밌게 놀아보고 싶다, 다 같이 동물 파티하면 너무 재밌겠다 생각했거든요.”
아니잖아.
너 그렇게 단순한 애 아니잖아.
단순해 보여도 사실은 다 생각이 있었던 거잖아.
동물은 ‘동’선 창출이 뛰어난 ‘물’리 공격 챔피언 같은 뜻 아니었냐고.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게임 한 판 해보고 싶은 날이 있는데, 그걸 알아주는 놈은 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
“봉구 형님! 맞지!”
객석에 앉아있던 문봉구는 열렬한 따봉을 보냈다.
“탑 마음 알아주는 정글 짜세!”
“아..”
이상한 멘트에 이상할 정도로 큰 함성이 터진다.
“그렇구나..”
이 환호 속에서 어색한 사람은 아나운서와 나 뿐이다.
“독심술요.”
“아닙니다.”
“그렇죠..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긴 하겠네요.”
“가져본 적 없는 능력입니다.”
딱 잘라 발언한다.
아무도 믿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괜히 구설에 오르는 건 사절이다.
“근데 너 가끔 뭐 보고 그러잖아.”
릴리 얘기 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얘.
전에 무대에서 사람 봤다고 뭐 어쩌고 그랬었지.
나는 조금 섬뜩해져서 손사래를 쳤다.
“내가 언제.”
교묘하게 카메라를 피해 작게 입 모양으로 말한다.
이제 닥쳐.
“...”
드디어 통제 불능 탑의 발언이 멈춘다.
“그..”
“네.”
나는 대외용 미소로 돌아왔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해요.. 권건 선수, 혹시 지금 제 마음이 어떤지 읽으실 수 있으세요?”
슬픈 눈.
“음..”
이건 독심술이 아니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뷰 망했다고요?”
“어떻게 알았지. 진짜 하네, 독심술.”
“맞죠? 쟤 진짜 독심술 하죠?”
“그런 뜻 아니야..”
나만 우리 애가 천재라고 생각했던 거냐?
동물에 대단한 뜻이 있고, 막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있고.
그런 생각했던 게 나뿐이었냐고.
“여러분, 오늘도 만수무강한 하루 되세요.”
얘를 어쩌면 좋니.
자괴감 들고 괴로워.
“자아아아알 놀다 갑니다!”
환호가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