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_이게 맞아
쉴 새 없는 압박에 숨이 막혔던 스톰은 이 유혹을 놓칠 수 없었다.
함정일까?
모르겠다.
알아도 어쩔 수 없다.
한타를 하고 싶으니까.
미드로 몰려간다.
“이거 이렇게 되면!”
“미드, 미드에서 싸움 벌어지는데, 잠깐만, 이러면!”
“차니는 어디로? 차니 빠져요? 차니 멀어요!”
FWX를 상대로 선 미드 타워 득점 기회.
드문 일이다.
“중단, 중단, 중단!”
“엇허~ 들어가요~! 스톰! 센터, 치고 들어옵니다!”
“이렇게 공간을 내주면 바로 미드 골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죠?”
“이번 웨이브에서 위기!”
4 대 5의 대치 상황.
FWX에 한명이 없다.
“아니야!”
한명은.
“으ㅡ으으아아아아아아아!”
다시 한번 스프린트를 뽑아낸다.
격렬하게 달린다.
오늘의 FWX의 탑은 느린 수비수가 아니라 스트라이커.
“잠깐만요, 잠깐만요, 이러면, 이러면!”
“차니가, 차니가 혼자서 바텀 2차 밀고 있습니다! 탑, 혼자서!”
“오늘 경기의 핵심 선수인데요, 차니!”
“빠릅니다, 이거, 스톰은 미드에서 견제당하느라고! 바텀 밀리는 게 빨라요!”
“미드에서 FWX 넷이 돌아요, 어느 쪽이 먼저 부서집니까? 어느 쪽이?”
- 채굴기 돌아갑니다 이이잉
- 형님 여기서 돈이 출토되는데요?
- 일단 챙기어~
“이렇게 사이드 뚫리는 거 스톰 입장에서 굉장히 곤란해요! 스노우볼 굴려야 하는데 사이드 뚫리고 하면 이거, 라인 정리 승부로 가게 되면 불리해질 수 있거든요?”
보이지 않는 공은 움직인다.
스노우‘볼’ 이 구른다.
최전선, 탑에게 공이 넘어간다.
“지금 이거, 길게 찔러준 킬 패스!”
“이런 황금 같은 타이밍에!”
“이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스톰? 이거 제 생각에는 차라리! 차라리 그냥 눈 딱 감고 바로 미드 부숴버리는 게 나아요!”
빠르다.
인원이 많다고 무조건 득점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협곡에는 웨이브가 있다.
그 흐름에 많은 인원이 투자되면 성공할 확률도 높지만.
“둔합니다!”
그만큼 느려진다.
“바텀 포탑을 차니 선수가 혼자..!”
마음이 급해진다.
“어어, 이거, 이거, 어어어어?”
“FWX의 포백 진영, 포백 진영!”
“앞장섰던 권건 체력 떨어집니다! 워웍! 워웍!”
“이거, 열받은 탑 글로리! 찔러보려다가!”
“스칼 빠졌어요!”
“안 죽었죠, 권건! 늑대 안 죽었어요!”
“늑대가 잘 안 죽어요!”
“체력이 낮을수록 안 죽어요! 글로리, 아직 포기.. 하지 않아하아아아악!”
“묶입니다! 묶입니다, 클래스, 순간적으로 치고 들어가면서 발 묶어서, 저러면 타워, 타워, 타워 점사아아아아악! 해줘, 해줘, 해애애애애애 줘어어억! 권건 좀 죽여줘어어어어억!”
“우우우우우주 탱킹!”
결국.
“안 죽고 탈출에 성공!”
“FWX 미드, 미드! 타워라도!”
“글로리, 글로리, 글로리!”
“타워에 너무 많이 맞.. 아아아!”
“FWX의 미드 타워가 무너지면서 동시에! 글로리가! 쓰러집니다!”
또 한 번 사고가 터져 나온다.
“바텀에서 차니가 타워로 득점!”
“이러면, 이러면 계산서 두드려보는 게 민망해지는데요, 스톰!”
“이게 전체적으로 스톰이 굉장히 딸려 들어가는 플레이를 하고 있거든요? 사실 조금 전에도 글로리 선수가 스칼이 빠졌는데도 앞으로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마음이 급하다는 뜻이에요!”
“워웍은 진짜 물면 안 됩니다, 진짜 한 대 맞으면 죽을 것 같아도 이게 절대 안 죽거든요!”
“그리고 하이브리드로 피흡하는 챔피언입니다!”
- 저 새기 저거 워웍이 뭔지 몰라?
- 그걸 누가 알아요;; 그런 똥챔을;;
- LOS에서 절대 따라가지 말아야 할 챔피언은 역병 군주 싱지드가 있고
- 피 냄새를 맡은 워웍이.. 있다..
“선수들이 그걸 모르는 게 아닙니다. 절대 모르는 게 아닌데, 상황이 그렇게 만들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전체적으로 미드 압박이 제대로 들어가질 못했어요!”
“그런데 그 스톰 수비의 빈틈을 놓치지 않은 클래스 선수의 역습이 들어가면서! 스톰 입장에서는 미드는 가져왔지만 킬도 주고, 타워도 주고!”
“상황 점점 어려워집니다!”
이유찬은 웃고 있었다.
킬을 몰아 먹고 싶고 혼자 세지고 싶은 게 아니다.
게임을 이렇게 하고 싶은 거다.
누군가 ‘이렇게’가 뭐냐고 물어도 대답은 못 한다.
근데 그냥 이렇게 하고 싶다.
“틈만 나면 사이드 압박 들어갈 수 있는 환경, 갖춰집니다!”
“스톰은 여기서 이제 더 이상 각개 전투를 해주면 안 돼요, 한타 중심으로 몰고 가야 합니다!”
“절대 몸싸움 들어가 주면 안되는 거거든요? 그냥 멀리멀리 떨어뜨려 놓고, 한 점으로 돌파하는 게 지금 답입니다!”
상황은 점점 빠르게 돌아간다.
“전령, FWX가 바로 풀어서 미드 동률 만듭니다!”
“이러면 아까 희생을 감수하고 미드 타워를 가져간 스톰이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고 보기가 어려워져요!”
“일부러 끌어들인 걸까요?”
“아마 FWX 쪽에서 타이트한 오더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저는!”
“그 사이 용이..!”
땅이 흔들리며 지형이 바뀐다.
“이거, 이거, 잠깐만, 그럼, 이거!”
“바다 협곡이죠?”
“부시가! 늘어납니다!”
“그러니까, 이게, FWX가 처음부터 용을 먹으려고 했으면! 그래서 시간이 지연됐다면 이게 이렇게까지 빠른 지형 변화가 안됐을 텐데..”
“스톰이 바로바로 가져가면서 지금 지형이! 랭가에게 유리한 그런!”
“알고 그런 건가요!”
“아뇨, 이건 예측 못해요, 당연히 예측 못하는 게 맞아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FWX에게 유리해진 것도 맞아요!”
고성이 오간다.
“이제 탑 방향! 탑 방향 밀어요, 완전히 발 풀렸습니다, 차니!”
“스트라이커는 원탑이고 탑은 차니죠!”
“오늘 그 역할 톡톡히 해주면서 스플릿을 이어 나갑니다! 렝가가, 이거 타워 미는 데에 진짜 귀재거든요! 철거왕!”
“FWX가 선호하던 국지전이나 한타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게 아니라, 오늘은 이거 완전히!”
무대가 달아오른다.
“글로리의 클래드, 바로 달립니다! 차니, 너, 나와!”
“그래요, 벌써 5데스 째 기록한 이상! 이거 뭐라도! 해보는 게! 좋은 거거든요?”
벼랑 끝에 선 상대 탑이 싸움을 걸어온다.
동료들과 함께다.
“근데 이게, 랭가가! 아무리 태생이 암살자고 그래도, 이번 메타에 맞건 안 맞건! 이렇게까지 FWX가 밀어준 탑을..!”
“못 큰 랭가는 폐기물이지만 잘 큰 랭가는 정말, 정말, 정말 끔찍하고 성가십니다!”
“달려갑니다, 스톰, 스톰, 스토오오오옴! 이번에는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밀어붙여! 인원수로, 밀어붙여어억!”
포악한 탑은 숨을 죽인다.
챔피언이 중얼거린다.
약한 자를 먹이로 삼는 건 생존을 위한 일이지만.
강한 놈을 먹이로 삼을 땐 삶의 희열을 누릴 수 있다고.
그게 맞다.
전율, 그건 만만하고 약한 놈들을 상대할 때 나오는 게 아니다.
좀 더 강한 놈.
그리고 좀 더 위험한 플레이.
사냥에 나선다.
탑으로 와서 제 이빨을 갖다 바친 놈들에게 얻은 전리품이 목에 걸려있다.
하나, 둘, 셋.
아직 수집하지 못한 적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유찬.”
귀가 닫히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잘, 해.”
공백으로 가득 찬 오더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이러면 경기는 단순해진다.
복잡한 계산은 해주는 사람이 있다.
이유찬은 그걸 가장 잘 돌릴 수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예전에는 자기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정확히는 큰 무대에 서고 나서 좀 달라졌다.
어쨌든 이 탑이 좋아하는 건.
더 일찍 시작하고, 더 빨리 달리고, 더 싸우고, 더 물어뜯는 것.
이제 귀를 닫는다.
수풀에 몸을 감춘다.
팀이 유리하다는 건 전장 선택권을 가진다는 뜻이다.
뒤로 한 걸음.
짐승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유리한 위치를 찾아낸다.
뒤로 두 걸음.
상대 미드가 사건의 지평선을 깔며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좋은 먹잇감이 멀어진다.
뒤로 세 걸음.
반드시 끊겠다는 각오로 들어오는 적 탑과 정글의 궁극기 조합에 몸을 틀면서 도약.
위로 날아올라 상대 탑의 목부터 물어뜯는다.
멀리서 화살이 날아온다.
방향을 기억한다.
턱 아래에서 아드득 깨지는 진동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상대의 판정이 멀어지는 틈을 노려 다시 몸을 감춘다.
짙어진 사냥감의 냄새를 맡으며 키보드를 누른다.
원딜을 지키고 선 적이 있다.
가는 길에 지나쳐야 할 상대도 있고, 숨어있을지 모르는 상대도 있다.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게 맞다.
나 대신 신경 써 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귀를 닫은 그에게 들리는 건, 여전히 없다.
이미 시작된 사냥의 전율에 게이머의 몸도 떨릴 뿐이다.
“ㅡ딜, ㅡㅡ펠!”
“먼저 ㅡ지 마!”
달려들어 간다.
노출된다.
상관없다.
“ㅡㅡ아!”
초장거리 스프린트?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
어 그래.
그냥 오늘은 존나게 달리기 좋은 날이다.
“ㅡㅡ 중!”
무슨 말인가가 아릿하게 들려온다.
다시 도약.
탑 입장에서 보면 한없이 약자인 원딜의 발에 올가미를 던지고.
오른쪽으로 휘듯이 돌아들어 가면서 점멸.
상대가 위축되는 게 모니터 너머까지 느껴진다.
벌벌 떨고 있는 공포를 도려내서 삼킨다.
포악함을 드러내고 최대 계수를 짜낸다.
잘 갈아온 이빨이 번뜩거리는 순간.
적의 지원군이 미처 돌아보기 전에.
목을 부러뜨린다.
“ㅡㅡㅡㅡㅡㅡ!”
“ㅡ니가 ㅡㅡㅡ 딜을!”
포악하게 적의 이를 부러뜨리고 뽑아내 목에 건다.
이건 전리품이다.
“사고가! ㅡㅡ요!”
옆에 뭐가 있었나?
몸을 옭아매는 닻이 느껴진다.
다음 순간, 전투의 포효를 폭발시킨다.
쇠사슬이 터져나가고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떨어졌던 체력이 차오른다.
눈이 마주친다.
시뻘겋게 보인다.
이것도 뜯어내고 죽여버린다.
또다시 도약.
붉은 기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무작정 뛴다.
“ㅡㅡ리플 키이이이이이이이일!”
잘, 큰, 탑은 그래도 된다.
이건 포식자의 게임이다.
“눈 뜨고, 아니, 안보였지만, 어쨌든 타워를 두고도! 스톰이, 그냥, 예, 아주, 악!”
- 형님! 형님! 저는 쇠도끼면 되는데! 딱 쇠도끼면 되는데!
- 거짓말을 했구나! 금도끼 은도끼 모두 압수하고 죽이겠다!
탑은 항상 내가 잘 크고 싶다.
이유는 필요 없다.
그게 탑이고 그게 게임이니까.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탑은 원래 자기만 아는 놈들이 모인 라인이니까.
이유찬은 탑이다.
피지컬 원툴 탑이다.
탑만 아는 탑이다.
“스톰, 따운, 따운, 따아아아아아아아아운!”
그래도.
그래도 말했었나?
이 게임이 재밌는 거.
FWX라는 팀이 재밌는 이유.
혼자 게임 하던 때와 달라진 건, 상대 탑만이 아니라 상대 전체를 빡치게 할 수 있는 것.
이게 얼마나 낭만적이고 신나는 일인지.
그래서 이유찬은 FWX 탑이다.
“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트리프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을!”
“쿼어어어어어어어드라아아아아아아아악!”
뻑뻑했던 청각이 돌아오기 시작하자마자 터뜨렸다.
“진짜 재ㅡ밌ㅡ다!”
이유찬은, 심장에서부터 우렁차고 거대한 고함을 끌어 올려 터뜨렸다.
“이게ㅡ LOSㅡ지이이이이이이!”
천둥같이 외쳤다.
이건 너무 큰 목소리라서.
“미친 새끼 아녀, 저거?”
객석 가장 앞에 앉아있던 문봉구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문봉구는 민망해서 ‘탑은 탑만 안다’ 현수막을 접었다.
“진짜 재ㅡ밌ㅡ다! 이거ㅡ야! 이거ㅡ 시워어언ㅡ하ㅡ다!”
그리고 그 포효 속에 몇 마디 말이 묻힌 건 당연하다.
“..! 찬!”
“..찬아아앗!”
“사람 말 좀..!”
터지듯이 몰려드는 말.
이제 막 전장에 도착한 팀원들이 달콤한 잔소리를 쏘아붙인다.
“너 그렇게 귀 닫고 입 닫고 게임하면 아무도 안 데려가요. 어?”
이유찬은 죽었다.
“라온의 상어와 피 냄새를 맡고 온 권건, 바텀까지이이이이이!”
“달려들어 마무리르으으으으으을!”
이상하지만 항상 탑은 죽는다.
하지만 제가 쓰러뜨려 겹겹이 포개진 적의 시체 위에서 죽을 뿐이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학! 나 갈 데 없어! 맞아!”
그래도 기분은 최고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