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_말로 설명은 못하겠지만
우리가 뒤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거다.
대기 시간 중의 보이스란 게 그렇다.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온다.
좀 음험한 팀이라면 밖으로 나가면 위험한 이야기, 예를 들어 상대 누구누구가 인성이 별로라거나 스크림 꼬라지 보니까 쟤는 이번 시즌에 은퇴할 것 같다는 말이 나올 때도 있고.
보통이라면 정말 일상적인 이야기, 오늘 퇴근하면 뭐 먹을 거냐는 말이나 아끼던 팬티가 없어졌다는 시답잖은 말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게 절대 가볍지는 않은 게.
상상할 수는 없지만 듣는 사람은 있으니까 그렇다.
심판과 옵저빙 그룹이 듣고 있으니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안심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이건 주최 측에서 팀의 색을 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다.
“동물인 건 좋아. 이해했어.”
그러니까.
“하지만 경기는..”
이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좀 꼰대 같아 보이지는 않을까?
“최선을 다해서!”
이유찬이 내 말을 가로챈다.
“맞아.”
“난 항상 최선을 다함. 재미없어도 최선을 다함. 왜냐하면..”
나도 가로챈다.
“지켜봐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까?”
“어.. 어.. 뭐.. 당연하지!”
뭔가 다른 대답을 하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다들 최선을 다한다! 알겠나?!”
“어어, 그래.”
나 참.
열심히 응원하고 있는 문봉구를 봐서 봐준다.
한동안 이 경기장에 학을 뗐다는 이유로 직관을 삼갔던 ‘봉구 형’이 드디어 온 날.
퇴사한 회사에 놀러 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기 마련이니까.
오늘 문봉구는 어느 정도 알고 왔다.
탑 중심의 게임이 되리라는 것도, 이유찬의 의견이 굉장히 지배적인 경기가 되리라는 것도.
어쩌면 날을 잘 잡았다.
이건 문봉구가 열심히 설파한 탑 이론의 증명이 되어 줄 거다.
물론 여기에 있는 건 상상치도 못한..
“?”
“?”
혼돈의 픽.
- ?
- ??
- ???
아무리 동물 챔피언으로 경기를 진행하기로 했다지만 이건 우리끼리의 약속.
질 목표로 게임을 하는 게 아닌 이상, 이길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구성하는 게 당연하다.
그게 우리의 ‘최선’이니까.
“그러니까.. 이거 피쯔?”
- 이번엔 진심이다!! 이번엔 지려고 한다 저거!!! 저것덜!!!
- 드디어 패널티 걸었냐?
- 그래 스톰도!!! 함 이겨보자!!!!
- 근데 왜 이렇게 존나 프섭지?
- 착각이야 제발 착각이야
물론 상대를 비롯해 해설진과 팬은 우리가 어떤 미션을 업고 게임을 하는지 모른다.
어쨌든 말이 안 되는 것 안에서 말이 되게 해야 하는 건 우리의 사적인 영역이고.
똑바로 선 스포츠 정신으로 상대를 때려눕혀야 하는 건 공적인 영역이다.
둘 다 놓칠 생각은 없다.
“LKL에 나온 적이 있어요! 미드에서도 있지만 탑에서도 있죠. 예, 분명히 있습니다!”
“근데 라온, 차니 선수가 쓴 적은 확실히 없고, 대신 지금 굳이 교체 출전한 클래스 선수가 피쯔 장인으로 유명하거든요?”
“그렇죠. 물론 리그에서 선보인 적은 당연히 없긴 합니다만 언더그라운드 피쯔 장인으로 꽤 유명했었던 이력이 있어서..”
“근데 지금 스톰에서 가져간 미드가 베이거잖아요?”
“그럼 미드에서 피쯔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게 되거든요?”
“이러면 스톰! 머리 너무 아파져요!”
“나왔던 적이 있는 탑이냐! 원래 포지션인 미드냐! 장인이 있는 서폿이냐!”
그럼 이게 또 악명높은 FWX의 재간둥이 밴픽이 되는 거다.
- 또 돌려?!
- 여기요 ㅅㅂ 계정 공유 신고합니다
“어.. 그러니까! 밴픽.. 완료됐습니다!”
우리라고 뭐 완벽하게 짜고 왔겠어?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완벽하게 밴픽을 짜고 왔다는 건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이지.
“왜 내 픽 뺏는데?”
“미안. 아라가 밴이라.”
“왜? 왜? 왜 내 염원 못 이루게 하는데? 나 장인인 거 몰라?”
“은호형, 미안해.”
“내가 이거 하려고 진짜 밑밥을 1년째.. 내가 문봉구 새우 알러지 방송 때부터..”
“이제 그만해.”
“왜!”
“나 미드야. 피쯔의 고향.”
“...”
안타깝지만 최은호는 김예성한테 픽을 뺏겼다.
“이러면.. 미드에서 베이거와 피쯔 구도 성립되죠?”
“그리고 탑에서.. 랭가.”
“진짜 랭가를 했어요.. 차니가 어흥 랭가를 했어요!”
“암살자죠?”
“예~ 암살자죠.”
“이번 시즌 암살자 어때요?”
“할많하않~입니다.”
“게다가 숱한 암살자 중에 하필 랭가죠?”
“예~ 그렇네요. 이번에는 고양이가 탑으로 갔어요.”
그렇게 됐다.
“FWX에서 탑에서 랭가, 미드에서 피쯔. 그리고 바텀에서 자이야와 로칸으로 구성을.”
어떤 기준에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바텀은 조류 듀오로 결정됐다.
우리 탑은 ‘둘이 합치면 한 마리의 새’ 라는 바텀의 의견과 ‘사실 둘은 까마귀와 공작새’라는 감독님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사실 오케이한 가장 큰 이유는 ‘미드에서 픽을 뺏었다’ 때문인 것 같지만.
“스톰에서는 클래드, 요공, 베이거, 바류스와 노틸 조합을 가져갔습니다..”
어쨌든 뜻밖이다.
모든 게 뜻 밖에서 일어난 일.
라인별로 보자면 우리가 유리할 게 없다.
오히려 조금 불리하다고 볼 수 있지.
“전체적으로 완성도 면에서 보자면 라인전, 한타 모두 저는 스톰 쪽에 조금 기우는 게 사실입니다만..”
“클래드한테 다이브 당하기 시작하면 렝가가 뭘 할 수 있을지, 저는 그게 좀 의심스럽거든요?”
각 라인전에서 이길 수 있는 픽들을 뽑는다는 건 솔랭에서 좋은 전략이다.
“그래요, 그럴 수 있지.. 살다보면~ 많은 일이 있습니다..”
이 단순명쾌한 전략에 단점이 있다면 각자 라인전을 이겨야 한다는 것.
그래서 강팀들이 자주 사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근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정글러가 바빠진다는 것도 있다.
왜냐고?
혹시라도 라인전이 망하면 게임이 끝나니까.
“권건 선수의.. 워웍은 대체 뭐예요?”
“정글 밴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 게 아닐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죠.”
“근데. 늘 헷갈리는데 워윅 아니에요?”
“아뇨, 워웍이에요. 확실히 워웍입니다. 진짜 라떼 시절엔 정글 돈다고 하면 누누랑 워웍밖에 없어서 제가 알아요. 워웍입니다.”
- 혹시 게임 본사에서 녹봉 챙겨줘? 유입들한테 올드 챔피언 소개해달라고
- 숨어있던 장인 여러분 밤이 되었습니다 손을 들고..
- (아재)
- 복권 긁기에 중독된 LKL.. 괜찮은가?
- 응 괜찮아~ 복권 다 성공이야~
라인 스노우볼.
스톰에게는 이게 핵심이다.
그럼 우리는 뭘까.
“이유찬.”
“어.”
‘동물’이라는 단순한 개념을 떼고 생각해보자.
챔피언이 동물의 형태를 가진 데에는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아?
게임사의 디자이너도 아무 생각도 없이 챔피언을 디자인했을 리가 없잖아.
특히 이렇게 오래도록 자리 잡은 동물들이라면 더 그렇지.
“잘하자.”
“오케이.”
나는 이유찬을 좀 더 알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고 설명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지만, 이유찬이 ‘동물’을 고른 데에는 단순히 자기가 좋아한다는 것 외에도 의미가 있다는 거다.
일부러 피쯔로 상대에게 밴픽 싸움을 건 것도 그런 뜻이 틀림없다.
그치?
맞겠지?
그래서 동물 형태의 챔피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특징이 뭘까?
“네. 그럼 이제 FWX가 어떤 경기를.. 또 보여줄지!”
그건 우리가 스톰에게 천천히 알려주면 될 일이다.
“지금부터! 만나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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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5분, 5분, 5분 되기 전!”
FWX는 확실했다.
“5분도 되기 저어어어어어어어언!”
2렙 갱은 아니었다.
“권건이! 빠른 정박 타이밍에 탑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더 확실한 탑 중심 게임.
“그런데 워웍만 가는 게 아니에요!”
“미드에서 라인 버리고! 전부! 탑으로! 향합니다!”
“3인! 3인! 3인 다이브!”
이유찬은 ‘대장’을 맡았지만 실제로 오더를 내리는 사람은 여전히 똑같았다.
FWX 자율 주행 시스템이 분석한 탑 오더, 그 첫 번째 메뉴.
상대보다 먼저 때린다.
“상대는 클래드인데!”
“어림없습니다! 피쯔도 어디 가서 핑퐁 할 사람 손 들어! 하면 절대 빼는 챔피언이 아니거든요!”
“이러려고 미드 피쯔했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에에에에에에!”
“FWX에서 선취점을 가져갑니다아악!”
과감한 투자로 첫 번째 킬.
“용은 스톰에 양보합니다, 대각선 들어갔죠?”
“킬을 챙긴 FWX와 오브젝트를 차지하는 스톰!”
어느 쪽의 기분이 더 좋을지는 저울에 올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당한 포지션이 탑이니까.
“워웍이 왜 나올 수 있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왜죠!”
“이 챔피언이 정말 오래됐지만 맞다이는 진짜 강하거든요?”
“그렇죠?”
“진짜 올드 워웍 유저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있어요, 물약 사는 워웍은 워웍이 아니다.”
“오.”
“요즘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또 저 말에서 얻을 게 뭐냐. 피흡으로 인한 유지력이 엄청 좋다는 거거든요.”
“하지만 느린 초반 정글링 속도는..”
“지금은 정글이 어떻다?”
“자생..! 그러면..!”
아슬아슬하게 적합.
- 드디어 왔냐 늑대시대?
- 그래봤자 중반 이후 똥개행
- 그래서 지금이 몇 시라고요?
“아직 극초반!”
“근데 지금 문제는, 우리 모두 잊고 있던 이 늑대의 장점이 6렙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죠~? 워웍을 몰라도 워웍의 6레벨은 모두가 알죠. 한번 물면?”
“안 놓는다!”
이승수 해설이 무릎을 탁 치는 순간.
“지금 탑에서 차니가 위기!”
“이게 클래드가 돌격형 챔피언이긴 한데, 챔피언이 탈것을 타고 있다가 내리면서 핑퐁이 된다는 장점 때문에! 탱커라고 보는 시각도 있거든요? 근데 가장 큰 장점은 다이브!”
“그래서 지금 차니 선수가 똑같이 다이브로 얻어맞을 수도 있는 상황!”
“스톰 미드 베이거까지 올라옵니다!”
“복수의 시간이다!”
“그런데에에엑!”
“클래스! 클래스! 클래스가!”
“탑으로, 탑으로 왔어요!”
탑 오더, 그 두 번째 메뉴.
탑이 망하면 모두 망한다.
“다이브 훌륭하게 막아내면서! FWX, 득점 그대로 유지합니다!”
환호.
게임은 평소 FWX가 선호하던 스타일과 달랐다.
탑 쪽을 맡겨놓고 영향력이 큰 미드와 바텀 중심으로 밀어주던 정글러는 오늘, 윗 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ㅡㅡㅡ런데! 그럼 다이브 실패하고 나면!”
“피가! 피가 흘러요! 피 냄새가 납니다!”
“클래스, 오히려 붙습니다! 따라붙어요!”
“달립니다, 뚜벅이 늑대, 달립니다, 사족 보행 달립니다!”
이건 여전히 남아있는 LKL식 정규 메타와도 달랐다.
서로 눈치 보다가 점잖게 툭, 툭.
힘을 쌓아서 왕 대 왕으로 겨루는 그 스타일과는 또 달랐다.
“물립니다!”
라인전에서 갱, 갱에서 라인전, 그리고 오브젝트로 이루어지는 평균적인 동선보다 훨씬 더 크고 활발한 루트였고.
“이러면! 이러면! 다시 3 대 3!”
“교환! 클래스의 로칸이 죽긴 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스톰의 탑은 쓰러지고 맙니다!”
“꼬여도 이렇게 꼬이나! 이러면! 킬은! 킬은!”
“돌팔매질로 킬! 차니가 2킬 가져가면서 탑의 무게추가 완전히 쏠리는 상황!”
“아~ 이거 말하기 좀 조심스러운데 탑이 개망했는데요?”
이게 권건이 판단한 탑의 오더.
그 세 번째 메뉴.
계속 싸워라.
소림 축구처럼 싸워라.
“지금 FWX 뛴 거리 벌써 10km 넘었죠?!”
“계속해서 돕니다, 계에에에속해서 돕니다!”
드물게 FWX가 하체 주도권.
용을 완전히 버리는 경기.
“이거 이러면 전령 없이 탑 밀려요?!”
“지금 라온은 킹이랑 싸워 줄 생각이 없습니다! 아예 없어요!”
“그냥 라인 밀고 탑 쪽으로 올라가겠다는 생각으로 보이죠, 이러면 이거 베이거가 평화롭게 농사만 짓고 싶은데 안 될 수도 있어요!”
“차라리 나랑 싸워! 나랑 싸우자고오오오옥!”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데 하필! 하필 미드가!”
미드의 힘을 위로 올려붙이는 경기.
내 턴 네 턴, 홈런 한 방 얻어걸리기를 기다리며 풀 스윙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또오오오오오오오! 갑니다아아아악!”
순식간에 시야에서 벗어나 버리는 공에 집중하면서, 짧은 경기를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스프린트가 끊임없는 이어지는 경기였다.
“이러면 탑, 탑은 정말 완전히 망했어요!”
“하지만 지금 킹 선수가 멀쩡히 미드에서 파밍하면서 잘 컸거든요?”
“이거 절대~ 무시 못 합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
"어어어, 이러면 허점 열려요, 미드 비었습니다? FWX! 약점 없던 팀인데 이런 전략 익숙하지가 않나요?"
찌링, 찌링.
휘슬과는 다른 핑 소리가 격렬하게 울린다.
“네 번째 오더.”
삐익, 휘슬이 울리는 것처럼 FWX의 정글러가 말한다.
“탑에 계신 대장님이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FWX 미드에 길이 열렸다.
“역타워 점유 갑시다.”
이건 마우스만 잡고 있는데도 100여 미터짜리 그라운드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
"경기! 맛있어집니다!"
“미드 타워 바로 내줍니까, FWX?”
탁구에서 하는 핑퐁이 아니라 정말 공을 뻥뻥 차올리는, 단 한 순간도 쉴 수 없는 필드에서의 전투.
“진짜 내 차례 왔냐?”
오랜만에 돌아온 협곡의 스트라이커.
탑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