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_하고 싶은 게 뭔데?
그날은 성남 스톰 선수들에게도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이게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냐?”
“그러니까. 진짜 이상하지 않아?”
첫 번째 세트.
스톰은 준비해왔던 무기를 꺼냈다.
샌드다운 됐다가 다시 콜업된 정글러 이태윤이 출전.
하지만 괜히 샌드다운이 아니다.
비교적 최근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이태윤이지만 오늘 경기에서까지 그러지는 못했고.
전체적인 밸런스를 중시했던 평소와 다르게 대놓고 탑 중심으로 돌아가는 FWX의 플레이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니까? 쟤네 상대로는..”
그리고 1세트 후 돌아온 코칭 박스.
이태윤 대신 올해의 주전 정글러 김기태가 제자리를 찾았다.
곧 2세트가 시작된다.
“아니 그게 아니라, 기태야. 진짜로 좀 이상하다니까..”
“꼭 중국 팀 상대하는 느낌이 있다고 해야 하나..”
“선 넘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랄까. 진짜로 약간 체급으로 갈아버리는 그런..”
“그것도 원래 한국 거야.”
“그건 그렇지만..”
멀쩡한 주전 정글러를 두고 샌드다운됐던 이태윤이 굳이 출전했던 이유는 하나, 경험이었다.
FWX와 해머스의 경우에는 힘의 차이가 심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다른 팀의 경기까지 모두 확인했을 때 정글러가 활약하기 쉽지 않은 메타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운영으로 풀어보려고 했던 생각은 완벽한 실패였다.
그리 자주 출전하지 않는 카드인 FWX 서포터, 유상준이 ‘왕자님 메타’에 걸맞지 않은 공격적인 챔피언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오늘 완전 탑 많이 간다니까. 2렙 갱을 탑으로 갔어. 근데 권건이 굉장히 생각이 깊은 타입이거든.. 이상해..”
권건의 플레이가 평소와 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임? 탑 가면 망한다는 뜻 아니냐? 정글놈들.. 진짜 그 거지 같은 편견 좀 버리면 안 되냐? 2렙 갱이 망하면 게임이 망한다고? 절대 안 망해.”
탑 최영광이 끼어든다.
“이번 메타는 탑 메타야. 사실 탑은 늘 탑이었지.”
“영광아. 조용히 해봐.”
마지막으로 입을 연 건 스톰의 주장이자 간판 미드.
그리고 권건의 친구 창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스톰 유일의 선수, 강준윤이었다.
“다를 수 있어. 다를 수 있는데..”
방금 김지훈 감독과 이야기를 마친 강준윤은 머리를 세게 긁었다.
“이거 지면 안 되는데. 오늘 경기 진짜 오래 준비했잖아.”
누군가 불안한 말을 던진다.
“당연하지. 쟤네 연승 끊어버려야지.”
이번 시즌 팬들이 열광하는 스톰과 미라쥬의 라이벌 구도.
하지만 이전 경기에서 스톰은 미라쥬에게 졌다.
진짜 실력이 부족한 거냐고?
그렇다면 스톰의 현 순위가 2위가 아니었겠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스톰은 처음부터 미라쥬를 보고 있지 않았다.
라이벌?
누가 이런 구도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
미라쥬는 먼 과거 승강전으로 올라온 뒤 오르락내리락하며 강팀 반열에 이름을 올린 팀이지만.
스톰은 유서 깊은 ‘진짜’ 강팀이다.
지난 한 해 부진했던 그들이 FWX에게 배운 것은 큰 그림을 보는 능력.
한 경기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차분히 승점을 쌓아나가며 1라운드 마지막 상대인 FWX를 꺾어내면서 평가를 뒤집는다.
이게 스톰의 진짜 목표였다.
“어쨌든 지금 뭔가 느낌이 다르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어.”
강준윤은 어딘가 쎄한 감각이 들었지만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권건 얘가 절대.. 절대.. 저렇게..”
FWX는 절대 게임을 막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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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차라 으차! 으차라 으차! 차아아아차차차! 차! 차! 차! 건! 라! 세! 클!”
“차! 차! 차! 건! 라! 세! 클! 클래스으으으으!”
곽지운과 유상준, 세자 사이다 조합.
곽지운과 최은호, 세자 클래스 조합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팀원을 교체하는 것, 그중에서 서포터를 교체하는 팀이 많은 편은 아니니까.
대체로 서포터가 보조 오더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다.
[ 오늘 두 명 다 보고 가나? 8_8 나와줘요 클래스쟝 ]
[ 한장의 표로 두 버전 경기를 다 본 내가 승리자! ]
승률로 보자면 나중에 들어온 유상준이 더 좋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최은호는 손목이 부러져라 희생한 개국공신 취급, 유상준은 게임을 안 했다면 방구석에서 마약 빨면서 힙쟁이로 살았을 것 같다는 합성 밈이 합쳐져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과만 좋다면 FWX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는 스톰도 정글 교체를 감행했다.
“좋아, 좋아.”
이건 일종의 유행이었다.
‘더블 스쿼드는 손해다’라는 고정 관념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언젠가부터였다.
“내가 나와서 사람들이 이렇게 환호하는 부분?”
본인을 트렌드 세터로 받아들인 최은호가 감상에 젖어있는 사이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어이어이! 은호쟝 보여달라고! 네가 숨겨왔던 걸 보여달라고!”
입장 중이던 선수들의 귀에까지 또렷이 꽂힐 정도의 음성.
최은호는 귀를 실룩였다.
“숨겨.. 왔던.. 것? 좋았어.. 드디어 오늘이 온 건가? 상준이가 이상한 서포터 한다고 깝치는 걸 드디어 눌러줄 차례가 됐나?”
“무슨 생각 하니? 우리 클포터.. 또 쓰레기 같은 생각하니?”
이거 곽지운이 내 생각 또 말한 거 맞지?
“맞아. 난 쓰레기야.”
말싸움에서 곽지운을 이겨본 최은호는 크게 너그러워졌다.
“아, 저거 서폿 버릇 잘못 들었네.”
“명심해라.. 너의 뒤주행은 서폿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쉣..”
본격적인 경기 시작 전, 잠시 시간이 떴다.
“잠시만요.”
전 세트에서 발생했던 프레임 드랍 때문이었다.
“자, 그럼.”
밴픽을 준비하던 감독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약속의 2세트 왔으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진짜 괜찮겠니, 유찬아?”
“당빠죠.”
이 약을 준비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
“유찬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다.”
그건 바로 이유찬의 하루짜리 대장 놀이 때문이다.
“대장이라고 불러주시면 감사.”
“..대장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다.”
“...”
“...”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마다 선수마다.
어떤 고민이나 스트레스를 겪을 때 그걸 해소하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경기에서, 누군가는 상담으로 그걸 풀 수 있었지만 FWX의 탑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아까 말한 대로. 오늘은 동물 농장 조합으로 가겠음.”
“벌써 불안하다.”
“쉬잇.. 생각은 머리로만..”
“아니 상식적으로.. 전술을 말하려면 대형이나 전선 구축, 보급을 어떻게 할지를 제시해야지? 지금 말하는 건 전쟁한다면서 군복을 메이드 복으로 입히자고 얘기하는 거랑 뭐가 달라?”
“예성아, 네 말이 너무 맞는 말인데..”
일부 반항이 있었지만.
“그래.”
압도적인 지지자가 한 명 있었다.
“우리 유찬이. 하고 싶은 게 뭔데? 다 해봐. 오늘은 내 감독 자리를 걸고 약속한다.”
“역시 감독님, 뭘 좀 아시는 분. 오늘은 다 동물챔이어야 함. 사람, 인간 말고 동물.”
“왜 동물이어야 하는데?”
아니, 나까지 두 명.
“일단 내가 동물을 좋아함.”
“동물 좋지.”
“거니 형님도 동물 좋아함?”
“이제 형님이라고 안 불러도 돼. 동갑이잖아.”
“개꿀.”
이유찬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해도 그렇다.
오늘은 상냥하게.
“그리고 또?”
“동물 챔이 진짜 쓰레기인 경우는 절대 없음.”
“동물이 뭐가 있더라. 그래. 취급은 몰라도 성능이 그런 경우는 잘 없지. 또?”
“전략상 비밀.”
“그렇구나.”
“역시 우리 유찬이.”
나와 감독님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사람 왜 저래?”
“몰라. 무서워..”
“생일 선물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몰라.”
다들 조금씩 투덜거렸지만 얌전했다.
이유찬을 빼고 만났던 그날의 소집.
그때 감독님이 공유해준 심리 검사지에서 이유찬의 우울과 스트레스 수치가 꽤 높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고.
각 라이너들은 머리로 그걸 이해했다.
이유찬이 바라는 건 아마 승리, 우승, 그리고 돋보이는 자기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예측하기에는 그랬다.
대부분의 선수가 그렇기도 하고.
감코진은 거사를 치를 날을 신중하게 택했고 그 중 길일이 오늘.
이왕이면 직전에 상대했던 호넷 전에서 하고 싶었지만 ‘대장’이 반려했다.
상대 탑이 시시하다고.
그래서 모두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일일 대장이 선포한 컨셉은 동물.
고민이 깊은 건 반찬 없는 원딜이다.
“내가 진짜 오래 고민했는데. 바텀에는 동물이 없지 않아요?”
“지운아. 쥐가 있어. 그리고..”
감독님은 준비해 온 리스트를 바탕으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이 ‘동물’ 컨셉이라도 안 바뀐 게 어디냐.
사람은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스트레스를 이기다 못해 바지를 까는 것보다는 낫잖아.
“또 뭐가 있어요? 야, 유찬아. 공허 출신은 동물이야 괴물이야?”
“괴물임.”
“그럼 뭘 해야 하지? 진짜 쥐밖에 답 없나? 아!”
한참 고민하던 곽지운이 손뼉을 쳤다.
“비원딜 하면 되겠지? 야쓰오.”
“깍지야. 야쓰오가 왜 동물이야? 인간은 안된다니까?”
“야쓰오는 사람이 아니라 벌ㄹ..”
“너 방금 수많은 사람을 적으로 돌렸어. 어서 사과해.”
“죄송합니다. 제가 하는 야쓰오를 말한 거였습니다. 사과합니다.”
왠지 우리 보이스를 수신하던 심판이 몸을 움찔 떤다.
야쓰오 장인이신가?
지연되는 경기 시작에 선수들의 수다는 이어진다.
“미리 정해놓고 밴픽에 들어가는 건 위험해.”
“그렇긴 한데요. 이거 아님 답 없잖아요.”
“동물 서폿은 뭐 있어?”
“나는 정해둔 게 있어. 무조건 한다. 오늘 무조건 할 거야.”
“보나마나 또양이..”
“아닌데? 딱 봐라.”
“그럼 미드는 동물이 뭐가 있어?”
“음..”
김예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리 거론됐던 픽들이 많다.
“미드가 좀 애매한게.. 워낙 많아서. 많은데. 많긴 한데 좀..”
하지만 오늘의 기분에 따라 돌려돌려 돌림판 탑 대장에게 허락을 맡아야 한다.
“아라는 여우야?”
“여우임.”
이 대답은 고정이고.
“카시는?”
“사람임.”
이건 그때그때 다른 대답이 돌아온다.
“아자르는 비둘기로 쳐 줄 거지?”
“명백하게 닭임.”
이건 뭐.. 종이 다른 거고.
“이게 문제야.”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후보군에 쉬운 듯 쉽지 않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 애니비야 정도인데, 이건 진짜..”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김예성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이상해. 공식 설정을 따라가는가 싶다가도 아니고. 내가 이런 이상한 취향에 맞춰야 하는 게 맞아? 아무리 요즘 털 달린 두발짐승을 좋아하는 문화가 만연한 사회상이..”
“예성. 그만.”
개인 취향.
존중.
“쟤한테 동물은 이성이 아니야. 그냥.. 어릴 때 로봇이랑 공룡 좋아하는 것 같은 거지. 자기 주관이 강한 걸로 하자.”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우리 미드는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리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미드 챔피언 중에는 동물이 섞인 것들이 꽤 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는 이래도, 문봉구가 왔을 때 탑 마인드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물어본 사람도 미드였다.
“그럼 정글은 뭐 할 수 있는데?”
“정글은 뭐 많지.”
“카직쓰도 벌레잖아. 아니! 그 벌레 말고 진짜 이번엔 진짜 리얼 곤충 말한 거라고요.”
“그거 메뚜긴가?”
“사마귀란다, 얘들아.”
감독님은 공부를 많이 했다.
상상도 못 할 방향으로.
“어떻게 그게 사마귀?”
“곤충은 동물이야? 절지동물?”
“카직쓰는 동물이긴 한데..”
이유찬이 얼굴을 찌부러트렸다.
“아이반은 식물이야 동물이야?”
“요른은 삽살개야 사람이야?”
“케낸은 바람이야 사람이야?”
질문이 밀려든다.
“다 안돼!”
일일 대장은 폭발했다.
“대장은 힘들군.”
마이크를 가리고 중얼거리는 이유찬의 목소리는 옆에 앉아있는 나에게나 간신히 들린다.
“식물이 어떻게 동물이 된다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거니거니 힘들었겠다.”
사람이 고민할 게 이렇게 없나?
내가 이런 거로 내 노고를 인정받는 게 맞는 거냐?
그리고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게 둘 걸 그랬나?
“거니거니 말고.”
“거니쓰.”
어쨌든 당장 경기를 코앞에 두고 있지만 이유찬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큰 긴장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뭐.. 어쨌든 아이반은 움직이는 식물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런 챔피언 많잖아.”
애당초 말도 하고 이족보행으로 전투를 벌이는 게 동물이라는 전제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지만 상냥하게, 상냥하게, 상냥하게.
“그래도 아이반은 식물임.”
이 동물 애호가의 시각을 넓혀주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동물의 혼이 합쳐진 걸 수도 있어. 우뒤르처럼..”
나도 아무 소리를 지껄인다.
이게 받아들여진다면 사실상 모든 챔피언이 가능해진다.
“탑에서 뭐 할 건데? 랭가? 랭가 동물이잖아. 완전 동물이잖아.”
나는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는 척하면서 슬쩍 묻는다.
“너 랭가 하고 내가 아이반 할까?”
이유찬의 머리털이 너풀거리며 춤춘다.
뭔가를 상상하고 있다.
“저거 고민한다, 저거.”
“지금 이유찬 동물 세계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저거.”
“수풀은 못 참지.”
아, 나 방금 이유찬이 이동식 부시에서 뛰어나와서 목 다 물어뜯는 상상함.
“그건..!”
통했냐?
“안돼! 동물로 해!”
실패다.
“정비 끝났습니다. 경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선수분들 방 재입장 부탁드립니다.”
까비.
그래도 이런 무의미해 보이는 질문 속에서.
나는 이유찬이 무슨 생각으로 ‘동물’을 골랐는지는 알 것 같다.
“나는! 사자! 간다! 알았지!!”
오케이.
너도 영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