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_탑은 탑만 안다
“그러니까! 여러분, 들어보소잉. 탱커를! 한다는 거는! 예? 몸이 딴딴하는 뜻이 아니고잉!”
문봉구는 꽤 훌륭한 프레젠터였다.
“정신머리가! 딴딴하다, 그 말인 거요. 알아?”
그의 탑 탱커론은 아주 훌륭했다.
“알긋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대번에 고개를 저은 건 곽지운이다.
“아, 행님들은 어떻게 그런 빡대.. 대.. 대머리로 게임을 한댜?”
“너 요즘 방송한다고 아주 입이 험해졌다?”
“그럴 리가 있나요~”
“잘나가니까 좋아, 실딱아?”
“실딱이? 예에! 나는 실버 버튼의 봉구 문! 실딱이 좋아, 짜릿해, 최고야!”
“행복해?”
“행복해! 봉구 행복해!”
“너 요즘 다른 게임도 하더라?”
“돈 주면 당빠지! 나는 LOS 안해도 되지롱! 크힛힛, 크핫핫, 푸히힛! 게임 전-문 스뜨리-머 봉구봉구 게임 최강 문봉구~”
“어휴, 꼴보기 싫어.”
“나중에 합방해달라고 엉~ 엉~ 울지나 말어~ 형은 자영업자다 이 말이야~ 인생 선배라고, 알것어? 이 프로게이머들아!”
“너무 빡치는데 대꾸할 말이 없어..”
고작해야 한살 터울인 선수들은 스스럼없이 농담을 나눴다.
제법 오랜만에 문봉구와 인사를 나눈 박 감독은 이제 멀찌감치 서서 팔짱을 끼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선수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말을 낀 오늘.
제 일도 바쁜 문봉구는 전화 한 통에 시간을 쪼개 사옥까지 달려왔다.
휴일을 반납한 선수들도 이유찬을 빼고 모두 모였다.
조만간 경기에서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며 참관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딱히 스승의 날도 아닌데 갑자기 찾아온 선물에 박 감독은 조마조마하면서도 장한 기분이었다.
“내가 애들을 참 잘 키웠지?”
“형님, 말씀을 잘못하신 거 아니에요?”
옆에 나란히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최수철 코치가 박 감독을 쿡 찌른다.
선수들은 쉬는 날이라도 감코진은 쉬지 않는다.
“뭐?”
“이렇게 바지 감독이 어딨어요?”
“아니야, 내가 쟤들 저렇게 착하고 건강하게 키우려고 얼마나..”
“그건 선수들 부모님께서 하셨겠죠.”
“그거야..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우리 수철이가 요즘 너무 기어오르는데..”
“요즘 가끔 1년 정도 쉬고 오면 어떨까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최 코치는 눈 밑까지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내가 사과할게. 우리 화해하지 않을래?”
똑같이 눈 밑이 패인 박 감독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잘하는 선수를 모아놔도 알아서 척척 경기하고 돌아오는 게 아니다.
FWX에 소속된 보석 같은 선수들, 그러니까 특히 정글과 미드, 그리고 주전 서포터의 경우 체계적으로 연구 참여에 일조하곤 했지만 감코진이 손을 대야 하는 부분은 여전히 많았다.
아니, 오히려 선수들이 열심히 참여할수록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늘었다.
시즌이라는 건 팀 전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깎아내는 과정이다.
선수들이 찰흙을 뭉쳐 형상을 만들면.
그걸 조각해서 만들어내는 게 나머지 사람들이 하는 일.
한 경기를 거쳐 조금 더 좋은 모양새를.
또 한경기를 거쳐 조금 더 괜찮은 모양새를 만들어 나가고.
선수들이 새로운 흙덩이, 그러니까 좋은 아이디어 같은 것들을 건네면 코치진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넣어야 가장 조형미가 아름다울지 만들어가는 일을 수행한다.
그게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팀’의 구조였고 FWX는 그런 팀이었다.
“주간 회의는 어떠셨어요?”
“나쁘지 않았어. 아니, 아주 좋았지. 요즘 퓨처스 리그 선수들도 정말 많이 좋아졌어.”
박 감독은 2군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예전부터 X팀, Y팀으로 부르자느니 A팀, B팀으로 부르자느니 하는 묘한 말에 찬동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특히 퓨처스 양태진 감독과 구태양 코치의 말이 인상 깊었지. 제일 좋은 건..”
태연하게 말을 하던 박 감독은 갑자기 뭔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FL 선수들이, 자기가 FWX인 게 자랑스럽대.”
“와우.”
그 말을 들은 최 코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말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요. 진짜.”
놀라운 일이다.
FWX는 그전까지 커트 라인이 가장 낮았던 팀 중 하나였으니까.
그들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단지 좋은 가능성과 재능을 가진 유망주들이 네임 밸류가 높은 팀 쪽을 원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을 뿐이다.
물론 커트 라인이 올라가기 시작한 건 좀 지난 일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그 턱이 명확하게 올라갔다.
이제 FL FWX의 자리는 욕심이 나도 들어오기 어려운 자리가 됐다.
그걸 가장 많이 느끼는 건 현직 2군 선수들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으니까.
“그치?”
우승하고 나서 닥쳐온 부담은 그들에게도 있었지만 이런 소식을 접할 때 힘이 난다.
“그..”
옆에서 김한빛 코치가 끼어들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감동이 두 배가 될 말 하나 해드릴까요?”
“뭔데.”
“또 뭐가 있어. 이것보다 감동적인 게 있을 수가 있어?”
“없다에 한표.”
“나도.”
깐죽거리는 두 사람을 보던 김 코치가 피식 웃었다.
“순우한테. 연락이 왔어요.”
“순..”
“순우.. 한테..?”
시간이 멈췄다.
“어..”
“그..”
다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왜요? 뭔 일 있습니까?”
나중에 들어온 문백산 코치만 코를 벅벅 긁으며 눈을 굴렸다.
“잘.. 지낸대?”
박 감독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조심스러운 사건이다.
“네. 지금은 그.. 프론트엔드 개발? 아무튼 프로‘게이머’ 대신 프로‘그래머’로 잘살고 있대요.”
김 코치는 나름 농담을 한 거였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FWX의 암흑기의 시작.
‘복권’ 박순우.
첫 경기 후 입스를 겪었던 선수이자 감코진에게 오랜 상흔을 남긴 선수.
그리고 그들이 권건을 콜업할 때 망설인 이유가 됐던 사람.
“흠, 흠, 결승도 보러 왔었다고 하더라고요.”
“결승을?”
“예. 스프링 결승.”
팀에서 멘탈을 담당하는 김 코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FWX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고. 무대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고. 그걸 올려다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대요.”
“그랬구나.. 섭섭했을까. 미리 연락해 줬으면 우리가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어떻게 마중을 나갑니까? 우리 경기 준비하는데.”
어리둥절한 문 코치가 툭툭 치고 들어왔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형님은 그때 순우네 아버님께 뺨도 맞았는데 안 미워요?”
“그럴 리가 없지. 어떻게 미워? 다 내가 잘못한 건데, 그게 어떻게 미워.”
박 감독은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며 씩 웃었다.
그 일로 가장 피해가 컸던 건 그였는데도 그랬다.
“살다 보면 많은 일이 있지.”
“와. 저래야 감독하는구나. 난 안할란다.”
최 코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예? 뺨을 맞아요? 남자한테? 그게 그냥 넘어갈 일입니까? 폭행으로 고소를 하셔야죠?”
여전히 문 코치는 이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미스터 문, 유니버스에서는 뺨 안 맞아봤니?”
그래서 최 코치는 문 코치를 놀리기로 했다.
“당연하죠?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말이 됩니까? 뭐 어디 국경일에 청룡 쇼바 달고 폭주 뛰던 시절에서 오셨어요?”
비교적 ‘요즘’ 사람인 문 코치는 학을 뗐다.
문 코치가 하는 말은 반쯤 못 알아들을 소리뿐이었지만 최 코치는 대충 뉘앙스로 이해했다.
“유니버스는 좋은 팀인가봐.. FWX에 있으면 뺨도 맞고 막 그래.”
“예에에?! 진짜요?!”
탑 출신의 이 코치는 놀리는 재미가 있다.
“다음에 뺨 맞을 일 있으면 문 코치 차례야. 알았지?”
“싫어요! 제가 얼마나 연약한데!”
“맞고 고소하면 되잖아.”
“박 감독님이 맞으셨으면 상식적으로.. 그 다음 순서는 최 코치님..?”
“지금부터 내가 널 때릴 테니까 고소해라.”
“억!”
“어휴, 저것들 진짜..”
티격태격하는 두 코치를 보던 김한빛 코치가 박 감독에게 메모를 하나 건넸다.
“감독님.”
“응.”
“순우가 감독님께.. 너무 죄송해서 연락을 못 드렸대요. 그래서 제가 월챔까지 끝나면 꼭 한번 조용한 데서 만나자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때 우리 못다 한 이야기 나눠요.”
“그래. 이번 서머 결승 티켓도 챙겨 줄 수 있으면 꼭 챙겨주고.”
김 코치는 속 깊은 박 감독의 이런 면에 반해 오래도록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다.
“그럼요.”
그때 어느 정도 의견 정리가 끝난 선수들이 저 나름대로 정리한 문서를 들고 달려온다.
“보여줘야지. 순우한테 부끄럽지 않게. 더 잘해보자고!”
“예!”
“예! 너도 대답해라, 문백산!”
“뭐가 뭔진 몰라도 일단 예에엡!”
박 감독은 가슴으로 낳은 자식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복권으로 입었던 상처가 복권으로 치료된 걸까?
아니, 그에게 2군이 ‘퓨처스 리그’인 것처럼 순우는 ‘복권’이 아니었다.
권건처럼 한 명의 사람이었을 뿐이다.
지금의 박진현이라는 감독을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
이 시즌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시간이 흘러야만 할 이유는 여기에도 있었다.
#
최정인이 내린 진단과 문봉구가 처방해준 약은 제법 신뢰도가 높았다.
“끼야아아아앗호오오오오우우우우우!”
“호 맞아?”
“끼야아앗메우!”
“잘한다! 우리 대장 이유찬!”
“탑, 그거 이제 공소시효 지나지 않았냐?”
“축알못 미드 지렸다.”
“아니..”
“넌 그렇게 평생 야구나 좋아하고 살아.”
“니가 말 안 해도 그럴 거거든?”
“예성아, 오늘만은..”
“알겠어. 형. 진짜 알겠어. 그만할게.”
하지만 FWX가 이 약을 준비하는 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단 원래부터 팀의 픽이라는 건 어느 정도 포맷이 있기도 했고.
이유찬은 정말 심연과 같은 사람이라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대장이다! 차니! 차니! 대! 장! 차! 니!”
그래서 들여다보는 걸 포기했다.
“2026 LKL 스어, 스어, 스어, 스어어어어어머! 서머 시즌의 마흔 세에에에에번째 경기!”
리그의 분위기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오늘의 경기에에에에에! 오신! 여러분으으으을! 환영합니다!”
거대한 환호가 울려 퍼진다.
“캐스터 안은우!”
“저는 남동현!”
“저는! 이승수!”
“오늘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정장 차림으로 왔냐고요? 저희도 와서 갈아입었습니다! LOS 파크에는 새 샤워실이 있거든요!”
“혹시 원하시는 분 있으시면 손을.. 아, 죄송합니다, 안 된다고 하네요. 죄송합니다. PD님. 예.”
어느덧 7월 중순.
최고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만큼 사람들의 복장은 가벼워졌고.
가벼워진 복장 대신 양손은 무거워졌다.
[ 우산은 챙기셨나요? 오늘 경기 보면 비옵니다 심장마비 ]
[ 기억나니? 너네가 돌잡이 때 내 심장 잡은 거.. ]
[ 난 너희의 포로(그림) 포로 간식 주세여 ]
[ FWX 좋아하는 사람 접어 *지구가 반으로 접힘* ]
여전한 주접 치어풀과.
“요즘 진짜 날이 덥다, 덥다 하는데 여기서만큼은 더 뜨거워져도 되는 거거든요?”
“네,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고요?”
“요즘은 손풍기 배포가 기본이니까?”
팬들의 손마다 들린 각종 팀 굿즈들.
과거 결승 무대의 이벤트 존을 방불케 하는 이벤트들이 이어졌고.
팬들은 제가 만든 배지나 스티커 등을 가져와 나눠주며 서로의 팬심을 확인했다.
“그것도 맞습니다, 요즘 정말 굿즈 대란 엄청나거든요? 전보다 프로 구단에 들어오는 광고도 많아졌거든요? 하지만 더 뜨거워져도 되는 진짜 이유는!”
물론 모든 경기의 열기가 똑같이 뜨거운 건 아니었다.
LKL 자체의 인기가 올랐다고 한들 결국 팬들이 사랑하는 팀은 상위권에 쏠리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그 상위권 중에서도 상위권 경기.
“정말 수많은 분이 기다려왔던! 오늘의 경기!”
“아! 드디어 다시 만났습니다, 길고도 긴 시간을 돌아서, 결국에 다시 만났습니다!”
“현재까지 아예 언터처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곳에 올라가 우뚝 솟은 탑, 챔피언, 대전 FWX!”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추격자 중 우두머리, 폭풍의 주인, 성남 스토오오옴!”
대전 FWX와 성남 스톰의 경기이자 1라운드 마지막 경기.
“아, 이게 또 진짜 너무 반가운 게~ 저는 FWX 경기 중계가 처음이거든요!”
“그렇네요, 이승수 해설께서는 분석만 하셨었죠?”
“네네.”
“그럼 진짜 깜짝 놀라시겠네. 이게 또 현장감이란 게 다르거든요, 예!”
“암요, 우리 유니버.. 아니, 문백산 코치가 탑 전담 코치를 맡은 팀 아닙니까!”
해설 이승수는 스톰과 왕좌를 놓고 다퉜던 과거의 유니버스 출신이다.
“하하하, 이 죽일 놈의 유니버스.”
물론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세계관 이야기는 그만들 하시고!”
이 경기에서 이기면 FWX는 전승으로 1라운드를 마감한다.
“오늘은 정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이 경기, FWX가 반드시 이겨야겠네요!”
“반가운 얼굴도 보이네요! 지금, 카메라!”
[ FWX at worlds! ]
그런 날, 경기장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선글라스를 쓰고 출석한 문봉구.
은퇴하고도 여전히 명예 FWX 선수 대접을 받는 탑.
[ 형님 왔다 유찬아! ]
[ 탑은 탑만 안다 ]
그는 보란 듯이 주문 제작한 몸통만 한 현수막을 들고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