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83화 (284/326)

283_유니버스 유니버스

FWX에 문제가 생겼다.

“나 밥 안 먹음.”

한 놈이 밥투정을 시작했기 때문, 은 아니고.

“밥은 먹어야지.”

“그냥 닭가슴살이나 먹을래. 밥 안 먹어.”

“그럼 밥 먹는 거 아니냐?”

“밥 안 먹는다고. 닭가슴살 먹는다고.”

그러니까 이게 되게 소소한 일이긴 한데.

이유찬이 반항기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밥으로 닭가슴살을 먹겠다는 거 아니야?”

“아니라고!”

저거 투정 부리는 거 봐라.

그래도 걱정해주는 건 최은호밖에 없다.

“저 미친놈이 저러니까 난 왜 다른 의미로 걱정이 되고 그러냐? 야, 이유찬. 이거 아연 시럽인데 이거라도 드레싱으로..”

“은호 형, 내버려 둬. 관심 주지 마.”

김예성이 뾰족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사람이 탄수화물이 부족하면 에너지가 부족해서..”

“형.. 방금 진짜 건이 같았어.”

“내가? 그래? 진짜? 멋있어졌나? 어제 손톱 깎아서 그런가?”

“음.. 그래, 그런 거로 하자..”

이번 시즌의 경기 진행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다.

강해져서 돌아온 유니버스와의 경기에서도 스윕.

여전히 산산조각 난 채인 빅스와의 경기도 스윕.

쭉쭉 스윕.

“근데 유찬이 쟤 진짜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몰라, 전에 그 이야기 신경 쓰이나?”

최은호가 뒷머리를 긁으며 말을 꺼냈다.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빅스와의 경기가 끝난 뒤 좀 재밌는 이야길 들었다.

개막전에서 만난 해머스 새싹 정글 김흥민.

트레이드 전 김흥민은 2군, 퓨처스 리그 유니버스의 미드였다.

이번에 만난 빅스의 정글러 박기준도 FL 유니버스였고.

둘은 같은 팀이었었다.

그런데 여기 꽤 복잡한 사정이 있다.

선수명 터틀, 박기준도 미드였지만 몇 년 전에 정글 포변을 했다고.

솔랭에서도 거북꼬북이라는 아이디로 만난 적 있다.

그때도 그 사람이 자기 주라인이 미드였다고 말했었지.

왜 이렇게 미드에서 정글로 포변을 하는 사람이 많은가 싶지?

이건 정글이 그만큼 멋진 포지션이란 뜻?

가만히 있으면 황족 취급받는 미드를 버릴 정도로?

사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2군 선수들의 물갈이는 잔인할 정도로 빠르다.

그나마 시스템이 바뀌면서 나아진 부분은 있지만 여전히 그곳은 아수라장에 가깝다.

아주 먼 옛날 승강전 시대가 더 천국이었다고 할 정도로.

콜업이 자유롭다는 건 샌드 다운도 자유롭다는 뜻이고, 자진 샌드 다운해 2군에 내려갔던 선수들도 거기서 현지화되어 돌아오지 못하곤 하거든.

그만큼 기어 올라오기 힘든 절벽이 퓨처스 리그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해서 정글 경쟁률은 미드 경쟁률보다 낮다.

그게 이유다.

미드에서 정글은 하향 지원이라는 거지.

이해한다.

그곳은 포변을 하건 선수명을 바꾸건 점을 찍고 돌아오건 뭐라도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런 스토리를 말해준 빅스의 박기준이나.

내가 상대했던 꿈나무 김흥민도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위대한 항로로 들어온 놈들.

어차피 나머지 증명은 리그가 해줄 거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정글이 상향 지원인 날을 만들어낼 테니까 상관없다.

“근데 뭐 유찬이랑 아는 사이였다며?”

어쨌든.

FL 유니버스 미드는 박기준에서 김흥민으로 바로 이어진 게 아니었다.

여기에서 정말 오래된 인물이 다시 튀어나온다.

바로 퓨처스 리그 FWX에서 같은 팀이었던 미드 라이너 김창민.

릴리한테 탈모 빔 맞고 퇴장한 걔.

기억나지?

“모름. 기억 안 남.”

“유찬이는 기억 안 난다잖아.”

김창민을 미드에서 밀어낸 게 새싹 김흥민이었고.

결국 그 김창민이랑 박터지게 싸워서 FWX로 쫓아낸 사람이 바로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 박기준이었다.

김창민이 박기준의 데스를 사주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난다.

솔랭에서 만난 박기준이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던 것도, 설 휴가 때 쳐들어왔던 유니버스 탑이 내 얘기를 박기준에게 들은 적이 있다고 했던 것도.

인연이라는 게 참 놀라워.

한 다리 건너면 다 이렇게 연결되어있고.

“그런 일이 한둘이야?”

김예성과 최은호의 대화에 곽지운이 끼어들었다.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사람이자 정이 깊은 사람인 만큼 곽지운은 선수들에 대해 잘 아는 편이다.

“그리고 걔는 잘린 거잖아. 부적격으로.”

“형 걔 알아?”

“잘은 몰라. 가끔 2군 애들 야식이나 사주고 연락하고 그러는 거지.”

곽지운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선수는 인성 문제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다.

“2군 서폿 지호가 걔 얘기만 하면 아직도 경기를 일으켜.”

“지운이 형.. 사람들은 그걸 보통 많이 안다고 말해.”

김창민은 뭘 하고 살고 있을까?

머리털은 가쓰오부시에서 좀 벗어났을까?

자기 전임 미드부터 후임 미드까지 전부 1군으로 진출한 걸 보면서 배가 아프지 않을까?

가만히 노력만 했으면 지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김흥민의 자리가 자기 자리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뭐, 그래도 결국 퇴출 이유가 LKL 공식 보살팀 FWX에서도 손절할 정도의 인성 부적격인 부분인 걸 봐선 내가 그리 신경 쓸 부분은 아닐 것 같다.

이상한 악플이나 달고 살겠지.

사회건 리그건 간에.

부족한 부분은 메울 수 있지만 타인을 깎아내리고 짓밟는 것만큼은 타협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 판에서도 게임만 잘하면 된다는 마인드는 우리가 없애버릴 거니까.

“그럼 건이 너랑도 아는 사이였어?”

“나도 기억 안 나.”

“그래? 하긴.. 다른 미드는 기억할 필요 없긴 하지..”

“김예성 너 왜 웃냐? 소름 끼친다.”

“하하. 은호 형, 내가 언제? 난 킨드 궁 위에서 초시계 치는 그런 미드랑 비빌 짬이 아닌데.”

“어어? 이거 봐라? 혹시 스토커세요?”

그러니까 나는 김창민 생각보다는 릴리가 주고 갔던 발모 빔의 사용처나 생각해보는 게 건강한 생각일 거다.

그래, 그런 게 있었지.

“닭가슴살 퍽퍽한데.. 구웨엑, 나한테 관심 좀.”

맞다.

이것도 있었지.

“건이 형님은 대체 이걸 왜 먹는 거임?”

닭가슴살의 효능을 모르는 이유찬이 불쌍해.

그리고 나는 벌크 믹서기용 닭찌에 프로틴을 조합하는 전심전력 타입은 아니다.

약간의 나트륨을 감수하더라도 맛과 조리 방식은 따져야지.

내가 운동선수는 아니잖아.

초심자는 더 그렇다.

좋은 제품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저런 순정 닭을.

“그거 말고 냉장 제품 있으니까 그걸로 꺼내먹어. 내 칸 보면 있어.”

“먹어도 됨?”

“그래.”

"오오옥! 뉴 아이템 겟또다제!"

“나도 먹어도 돼?”

김예성도 내 닭가슴살이 탐나는 눈치다.

“너도 먹어.”

“이제 냉장고 지역도 오픈? 호감작 성공적.”

너네 혹시 요즘 다른 게임하니?

“미드. 저거. 내가. 봐도. 진짜. 정상. 아닌..”

식사량이 극히 적은 유상준이 혀를 찼다.

“야, 상준. 형이 봤을 때 쟤네 다 MBTI F다.”

“왜?”

“F로틴이니까.”

“..!”

서포터 간의 관계도 꽤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프로틴. F. 아니고. P야. 그딴. 개. 멍청한. 말. 할 거면. 주전. 서폿. 내놔.”

“안 줄 건데~ 내가 주전인뒈~ 너는 후배따린뒈~”

“너. ESFP.지?”

“선배한테 너라니.. 근데.. 어떻게..?”

“관.종.”

“..넌 혹시 INTJ냐?”

“어. 응?”

“눈치 없이 팩폭하는 놈.”

“그. 사실을. 어떻게!”

아마도.

아무튼 최근 경기는 여전히 탄탄대로.

연전연승을 이어 나가면서 차분하고 완벽한 승점 관리를 하고 있고.

오늘 경기도 1라운드도 절반 정도 지나간 상황.

대략 정규 시즌의 4분의 1지점.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입맛이 없다!”

새 닭가슴살을 뜯어 먹던 이유찬이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유찬.”

“또 저러시네.. 맛있는 닭가슴살이나 마저 드세요.”

그리고 오늘 있었던 경기, 피닉스 전에서.

우리의 넥서스 보이스는 전부 편집됐다.

라이브에서도 송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도오오오오오!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

경기 양상은 해머스전과 똑같았다.

하위권 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력.

“하라고!”

하지만 넥서스 보이스가 편집된 이유는 이유찬이 너희 나 왕따 시키는 거냐고 외치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보통은 강도 높은 욕설이나 차별적인 말, 상대에 대한 비난 등이 있을 때.

혹은 옵저버나 송출팀 기준에서 우려되는 부분이 있을 때 이렇게 처리하는데.

이 경우가 그랬던 모양이다.

물론 이유찬은 단순한 사람이라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오해의 여지가 있었을 뿐이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데~”

“쟤 좀 어떻게 해 봐.”

최근에 주로 탱커만 했던 이유찬이 다 커서 뭔가를 해보려고 할 때마다 경기가 끝나버려서 낙담했을 뿐이다.

내가 개막전 펜타를 가져간 것도 엄청나게 부러워했고.

그래도 이런 부분은 박 감독님이 항상..

“아,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

옆에서 시커먼 게 계속 종알대니까 두통이 올라올 것 같다.

박 감독님이 안 했을 리 없다.

그냥 얘가 여기서 꼬장을 더 부리고 있는 것뿐.

결국 이유찬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뭐가 하고 싶은데. 무슨 픽.”

“그건 나가서 상대가 하는 거 보고.”

하지만 대답은 늘 같다.

“상대가 뭐하면 뭘 하고 싶은데?”

“그건 요일마다 날씨마다 다름. 정해진 건 없음. 필이 옴.”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그럼 나머지 우리 픽은 어떻게 대응해.”

“몰?루.”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는 모르지만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니 세상에 이런 일곱살짜리 어린애 같은 억지가 어딨어?

“...”

그래도.

어른스러운 시각으로 보자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2군에 비해서 1군의 픽 자유도는 확실히 낮고, 이유찬도 꽤 오랜 시간 참아줬으니까.

얘는 원래 ‘이런’ 타입이었다.

“일단..”

나는 이마를 짚고 감독님께 눈빛을 보냈다.

감독님은 빠르게 응답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슬쩍 손을 들어 만들어내는 피스 아웃.

V가 똑바로 섰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옆으로 픽 쓰러진다.

이거 하루 이틀이 아닌가 본 데.

“좋아. 그러면..”

그래.

문제를 문제로만 마주하면 안 되는 거다.

자, 생각을 해보자..

“진짜 다음에도 하고 싶은 거 못하면 갑자기 무대에서 똥이 마려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바지 내릴지도?”

아니, 좀 무섭다.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지?

#

대-유니버스 탑, 써머 최정인은 요즘 컨디션이 좋다.

“서머 시즌을 맞은 써머라.. 후후, 농~담.”

“정인이 형, 왜 또 혼잣말하고 그래?”

“주원아. 아직 오전인데 쟤한테 말 걸지 마. 피곤하니까.”

“알지.. 근데 관심받고 싶은 것 같아서..”

그는 여전히 쟁쟁한 탑이었고, 리그에 그를 상대할 만한 탑은 몇 없었으며 그가 있는 이상 유니버스는 그냥 살아있는 킹갓 레게노 팀이다.

알지?

이번에 대-유니버스 출신이 해설자로 올라간 거.

그것도 알지?

FWX에 대-유니버스 출신 코치 들어간 거.

그리고 스프링에 빅스에서 대-유니버스 2군 출신 정글러가 한명 데뷔했고.

이번 서머에는 해머스에서 대-유니버스 2군 출신이 정글러로 한명 데뷔한 것도 알지?

진짜 사방에 유니버스가 득실거리는 세계관.

정작 팀 자체의 출연 빈도는 낮지만 어쨌든.

근데 정글러를 이렇게나 많이 데뷔시켰는데 우리 정글은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탑 중심으로 하면 무조건 이길 텐데.

그걸 할 줄 아는 정글 놈들이 너무 부족하다.

아, 그래서 수출만 했나?

“저 새끼 눈빛이 불쾌한데.”

정글러 진도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참아! 건드리지 말라며.”

서포터 이주원이 말린다.

최정인은 자신에게 아무도 개기지 못하는 이 상황에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 그렇군.”

생각해보니 이번 서머 시즌.

아직 유니버스를 이긴 팀은 단 한 팀밖에 없다.

같은 대-구, 대-전의 대-FWX.

“‘그 정글’의 자리를 비워두기 위해서 미리 보낸 건가.. 우리 팀도 생각이 참 깊어.”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어? 저거 봐라? 저거 이상한데? 이주원! 진짜 좀 놔봐!”

“참아!”

“아니, 쟤한테 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무조건 참아!”

그는 의자를 휙 돌려 책상에 앉았다.

탑이 아랫것들의 다툼을 더 볼 필요가 없다.

유니버스는 정말 완벽한 팀이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팬들이 그에게 붙인 호칭이다.

지난해까지 늙은 호랑이 소리를 듣던 최정인은 그 호칭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랑이면 호랑이지 웬 늙은 호랑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최정인은 제정신이 아닌 선수긴 했지만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나이를 벗어나는 그의 완벽한 삶은 규칙으로 완성된다.

기상 후 사랑하는 상업 소설을 복습하고.

활발하게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자신을 사랑해주는 FWX 팬들을 만끽한다.

금년 몇 살 난 사내애 옥희라느니, 성장기라느니.

그를 기억해주는 팬들이 한가득이다.

솔직히 늙은 호랑이보다는 이런 애칭이 좀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탑 중의 탑답게 그에게는 가끔 상담 메시지도 들어온다.

- 똥싸개 : 형님

그래, 이런 식이다.

- 똥싸개 : 형님 말대로 해봤어

- 나 : 그래 원하는 게 있으면 니가 가진 가장 큰 무기를 사용하면 되는 거다

최정인은 자기가 봐도 꽤 멋진 답변이었다고 생각했다.

이유찬의 무기가 뭔지까지는 생각 안 해봤지만 어쨌든 그랬다.

- 똥싸개 : 근데 잘 모르겠음

- 나 : 어차피 세상은 탑 뜻대로 흘러가게 되어있어ㅋ

- 똥싸개 : 오! 역시 형님의 개소리는 항상 큰 도움이 된다!

후배의 고민거리까지 상쾌하게 해결해준 그는 메시지 창을 내리다 흠칫했다.

그리고 달력을 살펴본다.

오늘은 월요일.

다시 살핀다.

오늘은 경기 없는 월요일.

그러니까 오늘은 권건한테 문자를 하는 날이다.

- 내동생 : 형

선톡..

- 내동생 : 진짜 딱 형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있어서

멈췄던.. 탑의 심장이.. 뛴다..

- 내동생 : 뭐 좀 물어보려고요

그의 선톡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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