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_바론도르
아주 사소한 사고.
“드래곤 스틸!”
“몬스, 이 선수가 해줘야 할 때 해주는 선수거든요!”
“클러치ㅡ 플레이!”
“나는! 다! 계획이 있었어!”
하지만 해설진은 대단히 신났다.
동시에 스틸 순간의 해머스 미드 라이너의 외침이 송출된다.
“흥ㅡ민ㅡ아아아아아아아아앗! 발롱도르 가자아아앗!”
“혀어어어어어어어엉! 내가! 해냈어어어어어어어어!”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신나게 울려 퍼지는 미드의 외침과 정글러의 대답에 다들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해머스의 미드 바슈는 수줍음이 많은 타입이었기에 이게 얼마나 기뻤는지 알 수 있다.
그냥 원딜한테 용 하나 뺏고 죽은 것뿐인데도 그렇다.
“아, 진짜 간절했나 봐요.”
“이렇게 고함을 쳤군요.”
“그럴만해요. 협곡에 발롱도르는 없어도 바론도르는 있으니까.”
“4 드래곤도르 모아가면 1 바론도르로 바꿔준다는 게 학계의 정설.”
짧게 농담을 나눈 두 해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요, 여러분, 진짜 대단한 게 뭔지 아세요?”
“자신감이 떨어져서 시도도 안 하고 처참하게 지는 길도 있었거든요! 근데, 이 선수가 진짜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어쨌든 한 건 해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같은 팀 선수도 이렇게 신났잖아요!”
“아, 이거 경기 너어어어무 재밌어지는데요!”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권건의 오브젝트 사랑은 유명했다.
아예 양보할 때를 제외하면, 이 완벽한 선수가 오브젝트를 스틸한 경우는 무수히 많지만 스틸을 당한 적은 없다.
꼭 그 자리에 있지 않아도 대부분 그랬다.
현장 브리핑이 늘 적합하게 이뤄지니까.
- 아ㅋㅋㅋ FWX 실력 많이 죽었네ㅋㅋㅋㅋ
- 용을 다 주고ㅋㅋㅋㅋㅋㅋㅋㅋ
- 건신은 몰라도 우리 세자는 신인 배려 확실..
- 홀리몰리 프로메테우스좌ㅋㅋㅋ 용을 떼다 인간에게 주고 만 그..
- 세자 다른 선수들이랑 존나 친하자너ㅋㅋㅋ
- 더 하면 애 울까 봐 떡 하나 준 거야?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건 FWX가 상대를 개박살낸다는 것 빼고는 볼일 없었던 이 경기에 등장한 작은 이슈였지만.
“이런 정신이 중요합니다, 예? 당연히 패배할 수 있어요! 게임을 하다 보면 사실 승, 패 두 가지 밖에 없는 것 같잖아요? 근데 이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 이게 진짜 가치거든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몬스, 김흥민 선수가 오늘 선수명과 이름 석 자를 여러분한테 충분히 각인시켰다고 볼 수 있겠죠!”
올 시즌 폭삭 망할 예정이었던 해머스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작은 빛이기도 했다.
“이제 이러면, 그래도 탭 눌러볼 때마다 기분이가 좋거든요?”
“어떻게, 용 스탬프 하나 찍었죠? 킬 스코어 이런 거 내려다보지 말고 우리가 용 하나 먹었다는 것만 보면 뿌듯할 수밖에 없어요!”
“그냥 용? 아닙니다! 이거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진짜 숱한 팀들이! 숱한 팀들이 얻어내지 못했던 포인트를, 해머스가 가져갔다는 거 아닙니까!”
해설할 맛이 난다.
어차피 권건이 눈 뜨고 빼앗긴 것도 아니니 그를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었고.
이상한 교환이긴 했지만 팀적인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는 좋은 판단이었다.
그 모든 건 몬스가 오늘 데뷔한 신인 선수임에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 이게 냉정하게 말해서 두 팀이 실력 차이가 꽤 나는데.”
이렇게 되면 솔직해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사실 네, 지금 이 결과가 그렇게 놀라운 건 아니에요. 각 라이너부터 경험까지 밸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잔인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쨌든 뭔가 꾸준히 해보려고 하는 건 저희가 극찬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에요. 살다 보면 항상 약팀만, 적당한 팀만 만나고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이번 시즌의 해머스는 정말 지난 시즌과 비교해서 정신력 면에서는 큰 성장을..”
범죄자 확정이 난 이전 정글러와 비교했을 때 더 그랬다.
KDA 관리에 넋이 나간 선수를 보는 것보다 이렇게 과감한 경기를 보여주는 선수가 있다는 건 리그 전체로 봤을 때 좋은 일이니까.
“물론 FWX의 퍼펙트가 깨진 부분은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어차피 기회는 아직 무수히 남았으니까요.”
리그에서 퍼펙트게임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기도 해서도 그랬다.
물론.
- 우리는 웃기긴한데
- 이거 임오화변급 재앙 아니냐?..
- 사도세자야ㅋㅋㅋ 괜찮은거지?ㅋㅋㅋㅋㅋ
“건아.. 형이야..”
FWX의 분위기는 달랐다.
그들도 안다.
이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록이라는 걸.
해머스한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냥 평범한 용 스택 하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글러는 단 한마디를 던진 뒤 침묵했다.
오랜만에 받은 충격으로 떠오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헉.”
“힉.”
“험.”
“그게.. 알다시피 내가 강타가 없어서..”
아니, 정정한다.
해머스한테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곽지운과 권건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미쳤다.”
“저걸 건드리네.”
“탑, 우리 이런 적 있었나?”
“없음. 존나 웃김.”
“그러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야, 얘들아, 웃지 마.”
최은호는 손으로 입을 슬쩍 가렸다.
바깥 상황이 어떤지 모르지만 어쨌든 실점하고 웃는 모습 보여주면 좀 그러니까.
“와, 우리 정글은 원딜에게 더블킬을 줬는데.”
그리고 바로 잔소리를 시동 건다.
“형이야.. 나.. 진짜.. 형이야.. 건아? 말 좀 해봐..”
“우리 원딜은 그걸 뺏기네? 정글이 큰 걸 바란 걸까?”
“아, 죄은호 좀 닥쳐.”
“나 닥치고 건이한테 직접 말하라고 할까? 뒤주 맛 좀 볼래? 곡기 끊어?”
“어.. 아니? 아니? 아니!”
“그래, 형. 은호 형한테 한소리 듣고 말아.”
“그게 좋겠음.”
손절은 빛보다 빠르게 일어났다.
정말 이 팀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곽지운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잠깐 경기장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게 탈주하고 싶은 마음인가?
“아까 건이가 주의하라고 했는데.”
“그게.. 진짜 스틸하러 들어오면 어차피 내가 킬을 먹으면 그게 더 이득이..”
강타가 있는 상대에게 뺏기는 건 당연한 일이 맞다.
하지만 곽지운에게 죄가 있다면 용을 좀 더 오래 드리블하지 않은 죄다.
안전 구역이 맞았고, 미드와 탑 텔 보험도 있었으며, 권건이 경고를 했던 것도 맞으니까.
“용 먹으면 돈이 다 같이 들어오고. 혼자 킬까지 먹으면 더 이득인데 이상하네. 계산이 잘 안되나? 우리 원딜 마인드가 원래 이랬나? 기억이 잘.”
“내가 너무너무 잘못했어.”
곽지운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지운이 형, 큽, 게임을, 큽, 항상, 크큽, 집중을 하셔야지..”
“그걸 뺏기고, 큭, 그러면.. 큽, 풉.”
입술은 한없이 입 속으로 말려들어 간다.
이상하다.
게임 진짜 엄청 이기고 있는데 왜 나 혼자 지고 있는 것 같지?
용기 낸 곽지운이 서포터에게 드디어 한마디 지적했다.
“고양이, 고양이 너는 언제 집에 갔어?”
“나? 말했잖아, 아까 건이 타고 간다고.”
“너는 내 옆에 붙어 있었어야 할 거 아니야!”
“미드랑 바텀 다 없는데 왜? 나는 와드 안 채워? 아까부터 말했잖아.”
“아니..”
할 말이 없다.
“뭐? 깍지야, 뭐? 말을 해봐. 내가 석고대죄할까? 내가 뺏겼어?”
“아니야..”
“나 은호 형이 지운이 형 이기는 거 처음 본다.”
“나도.”
분명 원딜을 갈구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분위기는 더 좋았다.
“내하 아흐러 쟈하게. 열히미 하게.”
이제 입술이 완전히 이와 이 사이로 들어 간 곽지운이 이 빠진 소리를 냈다.
“니하 원하먼 나 강하도 들거 게힘할게.”
고약한 꼰대 정글러는 그 꼴에 피식 웃었다.
항상 완벽하게 집중할 수는 없다.
특히 승부가 거의 결정된 지금, 완전히 날을 세우라고 하는 건 과한 일이다.
사실 정말 예전 같았으면 조금은 더 잔소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건아, 그래도 깍지 쟤 피드백 빠른 타입인 거 알지?”
동생인 정글러에게 들으면 불편할 만한 잔소리를 선수 쳐서 해버린 눈치 빠른 서포터가 있고.
“맞하. 나 그거로 주장 땄허.”
곽지운은 꽤 괜찮은 형이었으며.
“내 쵸가스 이제 무적임. 살아있는 문봉구 그 자체. 초식계 최강자에서 사실상 육식 최강자가 됨.”
“나돈데. 나 책 다 읽어가는데 다 읽으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른 선수들도 누군가 불편해지지 않게 분위기 쇄신에 열심이었다.
권건은 아주 짧게 자신의 태도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곽지운을 놀리려고 했던 건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절대 화 안났다.
절대.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선수들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앞으로 잘해라. 서폿한테 친절하게 대해.”
“너나 잘해라. 원딜 곁에 계속 붙어 있으란 말이야, 사고 안 나게.”
“근데 육식 공룡 중 최강은 백악기로 따지면 티라노 사우르스인데 쥐라기까지 보자면 사실..”
“전에 연습 모드로 해봤을 때 해봤던 극딜 빌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걸 진짜 경기에서 사용할 수 있다니 오늘 경기, 난 정말..”
“어렸을 때 배틀 공룡왕 같은 걸 진짜 좋아했는데 그때부터 내가 동물을..”
“내 계산에 따르면 지금 드래이븐은 스킬 두 개만 써도..”
어쩌면 딱히 곽지운을 감싸려고 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정글러가 자제시키지 않으면 계속 입을 터는 놈들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냥 FWX가 그런 분위기라서 그렇다는 뜻이다.
“자, 그럼.”
권건이 다시 입을 뗐다.
잡담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제 어떨 것 같아요?”
“음, 쟤네는 집에서 안 나올 것 같고..”
“그럼 우리는 라인 정리하고 바로 끝낼까? 바론 필요 없겠는데.”
“미드에 상대 탑.”
물론 선수들이 권건의 눈치를 보는 사이에도.
“아니. 어떨 것 같아요?”
그는 깔끔한 신인 해체 분석을 마친 뒤였다.
“너 뭐 아니?”
“알면 빨리 좀 말해줄래?”
“비밀 많은 남자.. 어휴.”
“치고 있을 거예요.”
게임은 이미 거하게 망한 상황.
라인부터 타워, 운영, 결과론적인 픽까지.
약해 보였던 중반을 FWX는 통으로 들어냈고, 해머스는 알몸으로 나앉았다.
“바론.”
그중에 유일한 성공은 우연에 가까운 스틸.
“바론?”
“지금 바론을 왜?”
“내가 유찬이랑 확인하고 올게.”
“아뇨.”
정글러가 왼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주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바뀐 팀명.
그리고 미드에서 정글이라는 포지션 변경 때문에 잊었던 중요하지 않은 기억.
잠깐 스쳤던 2군, 지금의 1군이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잊었던 어떤 기억이.
“진짜면 과한데?”
“에바지. 이제 갓 나왔는데?”
“그거 완전 아침도 먹기 전에 저녁 먹는 거 아니야. 치다가 두 명은 죽을걸?”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확실히 그럴 겁니다.”
오랜 시간 수많은 신인의 성격 유형과 자신을 상대하는 수백만 가지의 기보를 읽고 온 정글러가 한 수 앞을 내다봤다.
“바론 뺏고 다 죽여버려야죠.”
기억을 되찾은 정글러의 입꼬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 있었다.
김흥민.
그는 FWX 2군에서 김창민과의 불쾌한 사건을 겪게 해줬던 그 팀의 그 선수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우리 신인, 버릇 잘못 들지 않게 따끔하게 선배 노릇 해줘야죠.”
하지만 지금은 제 후배죠.
“오..”
“아..”
“야.. 아까 그거 화난 거 아니었네..”
“그러네.. 이게 빡친 거 맞네..”
“바론 가자..”
“아니.”
정글러가 선언했다.
“저 혼자 갑니다.”
“...”
그리고 그 시각.
“어어어어어어, 해머스? 해머스? 해머스으으으?”
“이게? 그러니까? 이게? 이걸? 이 타이밍에? 이건? 정말? 금은동색 협곡에서나 볼 것 같은 그런 선택?”
“진짜 바론도르?”
그 일은 정말 벌어지고 있다.
“그냥 그만 칠까?”
“아냐, 진짜 이건 진짜 절대 몰라! 아니, 알아도 내가 해볼게!”
FWX의 권건을 보고 정글을 배운 권건 키즈, 김흥민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할 말은 다 하는 막내다.
“그 형님이 언제 2군이랑 게임을 해봤겠어? 아직 안 오는 거 보면 진짜 성공 백퍼야. 원딜 바텀 탔잖아. 알면 원딜을 왜 유배 보내? 여기로 부르지.”
이건 선의의 거짓말이 약간 섞여 있는 말이다.
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타이밍은 어차피 딱 지금 뿐. 다음 기회는 없어.”
“그, 그런가? 그럴 것 같긴 해.”
“맞아.. 흥민이 너는 2군 경기가 익숙하지..”
불과 1년 전 권건이 별 볼 일 없는 팀의 2군이었다는 사실은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회전이 빠른 2군 선수들은 서로를 기억하기 쉽지 않고 그가 FWX 2군에 있었던 시간은 꽤 짧았으니까.
“하긴, 나도 지금 너무 황당한데.. 이걸 어떻게 예상하겠어.”
어쨌든 타워 하나 못 깬 팀의 바론.
이 황당한 시도는 지금까지 꽤 성공적으로 보였다.
“이거 진짜 먹는 거 아니야?”
“근데 나도 너무 아픈데?”
“이제 어그로 내가 탈게.”
“오케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바론도 마찬가지.
“그러면 가능성은 조금 있을지도..”
한 줄기 희망을 품은 해머스가 서둘러 바론을 마무리 지으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섬뜩한 게 날아온다.
“어.”
그리고 이건 누군가 남긴 단말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