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80화 (281/326)

280_부당 거래

“극 초반에 양 팀의 시야 싸움이 극렬했는데요!”

“예, 진짜 처음 기 싸움이 굉장했죠! 이게 해머스에서도 신경을 써줄 수밖에 없거든요!”

“신인이 무대에 처음 오르는 날의 플레이가 얼마나 힘든지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해서 이제 생략합니다!”

중계진은 숫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솔직히 그냥 바로 무너지는 경우도 대단히 많거든요?!”

“그렇습니다! 사실 데뷔 첫 무대에서 뭘 해보라는 건 혼자 요동 정벌 해오라는 말이나 다를 바 없어요!”

“예, 맞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 고려해주셔야 할 부분이 있는 게!”

해설이 소리를 지르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신인 선수가 이런 무대의, 그러니까 중압감이라던가 공기라던가 습도라던가? 예! 막 환경 변화! 적응! 이런 게 정말 쉽지가..”

“그러니까 최선을, 최선을, 최선으으으으으으으으으을! 다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중 하나는 정말 잘했을 때고.

또 하나는 그 반대인 경우.

“모오온스으으!”

“피해요오오옷!”

그러니까, 아주 못하는 경우다.

“아이구우우우우우! 아이구, 어이구, 어이구우우!”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아, 이러면, 아! 또다시..”

때론 해설들도 경기를 보다가 화가 나는 경우가 있다.

선수들이 경기를 너무 대충 하는 게 느껴지거나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를 때.

집중력 부족, 패배 의식, 연봉 루팡이 들여다보이는 순간.

그럴 때 가장 빨리 눈치채는 건 누구보다 경기를 많이 보는 해설들이다.

그리고 그런 짜증은 주로 싸늘하고 시니컬한 해설로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 이힉힉힉 뉴비 왔니? (칼을 핥으며)

- 귀엽게 생겼구나?

- 너 뭐 할 줄 아는 거 있니?

“으아아! 분하다, 분해요! 지금 몬스! 분합니다! 보여줘야 해요, 이거, 신인 선수의 패기! 보여줘야 합니다!”

“이 악물고! 주먹 꽉 쥐고!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어쨌든 이 판에서 해머스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긴급 트레이드를 진행한 팀에게 일방적으로 악담을 퍼부을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범죄자로 낙인찍힌 붐보이를 대신해 들어온 어린 신인에게는 더 그랬다.

반대급부로 면죄부를 줬다고 해야 할까.

“이게..! 좀.. 게임이 일찌감치 나이트메어 모드로 넘어가긴 했는데..!”

“그으..”

그리고 뭐라 따로 입을 열어 FWX를 부르지 않더라도.

-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거임

- 좀 불쌍

- 얘들아 클릭을 하면 평타가 나가 알고 있어?

- 개막 화끈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협곡에 불을 지르면 어떡해요 FWX!

그야말로 개박살 나고 있는 해머스의 광경에 덧붙일 말이 없다.

“아예, 해머스가 아예 타워를, 아예 못 친 건가요, 지금..”

“그렇.. 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퍼블은 정글에서 난 거긴 한데요.”

“전체적으로 다른 라인의 체급 차이도 조금, 예, 납니다.”

어쨌든 오늘은 개막 첫날.

멘트를 아낀다.

“현재 킬 스코어 9 대 0.”

하지만 현실은 시즌 개막 20분이 채 되기도 전에 20연패 한 팀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는 것.

“FWX의 오브젝트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그’가.. 몬스를 캠프처럼 먹고 몬스터로 성장했어요. PVP 존이 너무 일찍 열렸습니다.”

당장은 조용히 결론만 읊을 수 있을 뿐이었다.

“앗, 말씀드리는 순간 마주치..!”

비예고가 주머니 속에 꿍쳐뒀던 궁까지 털어버린 권건이 시야 압박을 시작한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몬스, 김흥민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없! 어! 요! 몬스, 캠프 없어요, 점멸 없어요, 이제 궁도 없어요!”

“또! 없! 어! 요!”

- 테에엥! 아! 건이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 (급보) 오늘 FWX 경기력 전격 영화화 결정

- 해머스는.. LKL. 최약체입니다만?

- 울지 말고 말을 해봐

- 해머스인데여 쫌만 봐주세요 제발

- 죄송한데 저는 우승도 못 한 팀 팬이랑은 말 안 섞어요

- TlqToemf..

“이거 다 뺏겨요, 시야 다 뺏겨요!”

예상보다 훨씬 빡빡하게 들어오는 FWX 정글의 견제는 현실에서도 아팠지만.

“유마의 단점이 시야 관리인데, 이러면 단점이 아예 없어요! 그냥 사기캐에요, 사기캐! 저거 봐! 그냥 나와서 돌아다니잖아요! 저, 저, 저!”

다른 라이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시즌에도 FWX는 강했지만 이번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라이너들이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탑에서 리모 선수가 압박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전체적으로 체급 차이가 나다 보니 여유가 생기질 않아요!”

“그것도 사실.. 구도 덕을 좀 봤습니다! 이게, 이게, 정확히는 뚫지는 못하고 있어요, 뚫어야 하는데! 쵸가스를 뚫어야 하는데 뚫리질 않았어요! 그러니까 종합적으로 보면 상당히 해머스가 불리한..”

- 응애 나 애기정글 시1발 도와줘요

- 이게 대진표가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왜 첫날부터 우리가!!

- 지난 시즌 1위 vs 10위 ㅋㅋㅋ 웅장하다

- 이게 ‘사건을 거쳐 공정해진’ LKL?

- 때론 [진실이 가장 냉혹한 법] (씇)

MSL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한국 시즌이 끝나고도 여전히 현역이었던 FWX.

그리고 준비 중이었던 해머스.

어떤 이들은 준비 기간이 넉넉한 쪽이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실전 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빼더라도 두 팀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미드, 미드, 미드, 미드으으으으!”

“어딜 보시는 거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라아아아아아아오오오오오온! 르블란으로 또 한 번 딜교에 성공!”

“탈리아 피 1, 피 1, 피 1!”

“그러면 누가 와요? 누가 와요? 이제 심장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죠, 바슈?”

“혹시 미드에 와 줄 사람 없어? 기분이 좀 쎄한데 혹시 우리 정글.. 아..”

사실 그건 꼭 픽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왔어요!”

“오긴 왔는데!”

“아군 정글러가 아니에요!”

“노오오오오오오오오!”

어쩐지 그 픽이 악질 정글의 버튼을 누른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이러면 진짜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나는 조합이죠? 르블란만 있어도 빡치는데 주변에서 리싱이 날아다닌다?”

해머스의 이번 메타 해석은 ‘정글러의 약화’였다.

그래서 권건이 뭘 잡더라도 큰 힘을 보여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거라면 후반 가치가 높은 정글러, 그래, 예를 들어 오늘 잡은 비예고같은 챔피언이 클러치 플레이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서어어어어어 찹니다아아아아아아!”

“쭈우우우우욱! 날아갑니다! 담장, 담장, 담장 넘어가는 탈리아!”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건! 이 시대! 최고의! 중견수우우우우우우우우!”

“강철 어깨의 르블란, 라아아아아온의 공중 사슬 묘기 쑈! 쑈! 쑈오오오오오옥!”

“아아아아아아아아앗!”

“잡아아아아아아! 냅니다! 해머스 미드, 아웃! 킬 스코어어어어어어어어어! 10 대 0!”

- 왜 자기들이 치고 자기들이 잡아

- 우린 그럼 뭐야

- 공?

- ···

“FWX가 앞서나갑니다!”

이미 강해져 버린 정글 앞에서 메타 해석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왜 우리 정글만 약해졌냐?

“지금 뭐야? 방관이야? 방관 리싱이야? 아니잖아! 근데 딜이 왜 이렇게 잘 나와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실! 레벨이! 아이템이! 깡패다!”

“탭키 누를 때마다 자괴감 들고 괴로워!”

어쨌든 FWX가 보여주는 당구 플레이는 예술적 가치가 있었다.

한 호흡에 쏟아지는 스킬샷과 적중률.

혼자 대상 지정 스킬을 사용하는 것 같은,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권건의 실력.

“이게 리싱이야 야쓰오야?”

“한번 물어봐 주실래요?”

“뭘요?”

“혹시 특성이랑 템 전판 야쓰오 하던 거 그대로 박은 채로 시작한 거냐고!”

“회차 계승 시스템? 여기도 좀 만들어 주세요! 제발!”

그 외에 나머지 것들은 해설진의 헛소리로 메워졌다.

“미드 타워 쭉쭉 밉니다, 전령이 2차까지 들이받으면서! 타워가! 그냥! 그으으냐아아앙!”

“발 풀립니다, 미드 발 완전히 풀려요, 라온! 이거 이제 르블란 어떻게 막아요?”

- 형들 유틸 미드가 온다며

- 유틸 미드가 뜻이 대체 뭐야?

- 실드랑 이속 주는 게 유틸 아니었어??

- 유틸 = 용도가 다양함

- 다 죽이고 가서 도와주는 것도 유틸성이 아닐까요?

넉넉하게 킬을 챙겨 먹고 책을 읽기 시작한 미드.

발이 풀린 정도가 아니라 머리까지 풀어 헤친 망나니 김예성의 르블란이 탑으로 뻗어나가는 사이.

“바텀, 바텀, 바텀!”

“라인 쭉쭉 밀립니다, 해머스! 세자와 클래스가 마구잡이로 밀고 있어요! 이거 프리징, 프리징 누가 좀 도와줘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권건이 정한 다음 행선지는 바텀.

사실 이쯤 되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FWX는 자기들만의 싸움을 할 뿐.

“이러면 누구라도 알 수 있죠? 여기 누가 올 지 누구나 예상이 가능하죠? 이거, 라인 이렇게 민다는 건..!”

공정한 정글러는.

“왔어요! 권건, 왔습니다!”

여전히 이 라인 저 라인을 찌르고 다니며 전장을 흐트러뜨린다.

“몬스, 몬스 비예고 언제 오나요? 달려오고 있습니다! 합류라도 해줘야 해요! 머릿수라도 맞춰 줘야 바텀을 하나라도 살릴 수가..!”

“이거 그냥 직선으로 치고 들어오는데 막을 수가 없어요! 너무 빠릅니다, 리싱 너무 빠른데!”

“해일, 해일이다아아아아악!”

시간을 끌어보려는 해머스 바텀의 노력은.

“방금 유마가 내려서 피할 각을 만들어 줬흐아아아아아아아악!”

고양이가 해결했고.

“아예 앞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교환이라도 해보려는 허니의 노림수!”

서로 완전히 뒤바뀐 것 같은 FWX의 포지셔닝에 해머스 원딜은 과감한 선택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지만 꿀 발라 놓은 것처럼 몸에 달라붙는 음파.

“드래이븐이! 킬을! 못! 먹었! 어요!”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바텀 스펠 다! 빠졌어요!”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오오오오오오오!”

“세자의 루시언이 더블킬 가져가면서!”

“반 더 린드 FWX 갱단의 집행자, 세에에에에에에에자아아아아!”

“12대 0!”

해머스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또다시 용까지 챙길 것 같은데요! 예! 갑니다, FWX!”

“이 팀! 도대체! 뭐 하는 팀인가요! FWX! 진짜 미쳤어요?”

“왜! 잠깐의 틈도 안 주는 건데요!”

“캠프를 그만큼 줬으면! 용 하나 정도 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까지.. 해야만.. 속이 시원했냐! 어어! 권건! 또 차압 들어가요? 또요?! 이거 부당 거래 아닙니까?! 예에에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남동현과 현수진의 목소리에 캐스터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와, 오늘 텐션 끝내주네..

“지금 FWX 대장님 바쁩니다! 바빠요! 지금 시간 여러 개로 쪼개서 또 건르미온느 모드 들어갔거든요? 얘들아, 나 먼저 갈 테니까 바텀이 용 딱 먹어다 놔라. 알았지? 입금해! 형이 우물에서 확인 좀 할게!”

“예, 형님! 원딜이 처리하겠습니다! 킬도 주셨는데 그 정도쯤이야!”

이건 FWX를 좋아하는 두 사람임과 동시에 언더독을 응원하는 정신이 결합한 끔찍한 혼종들이었다.

FWX에 이입하면서도 어떻게든 해머스에서 뭔가를 끌어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해머스 입장에서는 이거 진짜 어처구니없는 일이거든요! 아무리 미드 킬이 나온 지 얼마 안 됐고, 그다음 바텀이 노 스펠로 다 죽었다지만! 그래도! 그래도!”

- 그럼 주는 게 맞잖아

- 뒤구르기 하면서 봐도 주는 게 맞는데ㅋㅋㅋㅋ

- fact) 은근히 해머스 꼽주고 있는 것..

“근데! 세금 낼 거 다 내면! 고생하시는 우리 정글러 아이템은 누가 챙겨주나?”

“아무도 못 챙겨줘!”

“그렇습니다! 이거 계속 이렇게 엎드려서 얻어맞을 수 만은 없거든요! 이거 진짜 잘못하면 개막하자마자 퍼펙트게임 가는 거예요, 그건 정말.. 정말..!”

“한번 확! 뒤집어줘야 합니다! 으아아아! 야! 우리는! 경기도 최대 도시! 수원의! 해머스야! 불러! 도청 소속 국선 변호사라도 불러줘!”

물론 그들도 잘 안다.

이 말이 해머스에게 들리지도 않을 테고, 저들도 이뤄질 수 없는 시나리오를 입으로 나불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래도 흐름을 타버린 이상 이 경기는 그런 경기다.

- 몬스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부계 새로 파라

- 야 그래도 신인이 저 정도면 가능성? 있는 것 같다

- ??? 정글이 정글한테 솔킬을 벌써 세 번 따였는데 무슨 가능성?

- 다섯번은 안 줬잖아

- 오

그들의 외침은 팬들에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

“어어어어어어어어어! 신인! 신인 몬스! 몬스! 몬스으으으으!”

정말 놀랍게도 그 정신은.

“몬스가! 몬스가아아아아아악!”

“스, 스, 스, 스, 스티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일!”

이후 해머스 창단 이래 가장 기적 같은 일이자 계기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터진다.

“용을.. 몬스가, 용을 빼앗았습니다!”

흔해빠진 평범한 스틸.

스틸만 하고 제 목숨은 내준 가성비 나쁜 교환.

그만큼 당연히 할 필요가 없는 행동.

“어.”

하지만 정말 큰 일이었다.

객석에서도 웅장한 환호가 터져 나온다.

FWX 팬이건, 해머스의 팬이건 관계없다.

어차피 이 경기는 더 볼 것도 없이 끝날 정도로 심한 차이가 났다.

“FWX를 상대로, 신인 정글이, 용을, 스틸하는 데에! 성공! 했습니다!”

그래도 스틸이다.

권건은 이미 예전에 귀환했다.

그리고 그가 없는 오브젝트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어쨌든 FWX 정글은 권건이었고.

결국 이 기록이 ‘권건이 빼앗긴 기록’은 아니지만 어쨌든 스틸이다.

“살다 보니 이런 봉변이?”

더블킬까지 받아먹고 혼자 용을 마무리하던 곽지운에게도 큰일이 났다.

“너..”

누군가의 목소리에 뻣뻣해진 곽지운은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 범인 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