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78화 (279/326)

278_LKL All along

수원 해머스는 속상했다.

“왜 우리가 개막전이야?”

“우리 트레이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가, 개막전이야?”

“게다가.. 왜? 왜 상대가 FWX야?”

“감독님. 혹시 우리 미움받아요?”

“...”

한동규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 현실 맞아요? 진짜 맞아요? 사실 나가면 갑자기 제주 F.L.E 있고 그런 거죠?”

“그럴 수 있어. F가 같아서 입력 오류? 뭐 그런 거 난 걸 수도 있어..”

긴장한 선수들이 조잘조잘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한 감독은 침만 삼켰다.

얘들아 미안한데 사실 우리 지난 시즌 제주 F.L.E한테도 졌어..

걔네도 이제 별로 안 약해..

“얘들아, 이거 현실 맞고, 그럴 일 없다.”

이제 한 감독의 눈빛만 봐도 마음을 읽는 원딜러가 대신 대답했다.

“형.. 우리 망한 거야?”

“그런 말 하지 마.”

원딜러 이염이 차분하게 선수들을 가라앉혔다.

“잘 생각해보자. 지금이 최악의 상황인가?”

보기 드물 정도로 나이가 많은 선수인 그는 어린 동료들을 다독였다.

“어..”

“과연! 지난 시즌보다! 최악인가?”

“어.. 어.. 어..”

선수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팀, 지금은 달라졌잖아.”

“그래. 최소한 폭탄은 없지.”

문득 고개를 든 선수들이 주변을 둘러봤다.

툭하면 큰 체격과 거친 말로 분위기를 압박하던 허진수는 사라졌다.

끔찍하고 외설스러운 여자 이야기를 시도 때도 없이 꺼내던 미친 새끼의 선수 생활은 완전히 끝났다.

“하.. 그러네.”

이 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워했던 건 같이 생활했던 해머스 선수들이었다.

쉴새 없이 교묘한 언어폭력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맞는 것 같아..!”

“희망이 보인다.”

"어? 개판팀에서 신인 정글 등장.. 이거 완전 어디서 본 스토리 아니냐?"

“완전히 달라진 우리 팀, 이번에.. 옛날에 FWX가 트릭스터 갑자기 이긴 것처럼 우리도?”

“혹시? 혹시? 혹시?”

분위기가 조금씩 올라온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FWX가 존나 세졌어. 기억나지? 쟤네 탑 데뷔할 때 더 미친 팀이었던 거.”

“맞아! 그때 차니 모데한테 아트 들고 개쳐맞은 거 형이었지? 자신 없을 만 해.”

“아니? 오늘은 내가 팰 건데?”

“구라 자제 좀.”

“진짠데.”

탑 조석기가 단호하게 말하며 씩 웃었다.

“기수야, 오늘도 기저귀 잘 찼지? 형이 캐리할테니까 각오해.”

허진수라는 라그나로크를 맞은 뒤 자진 샌드 다운으로 잠정 은퇴를 결정했다가 돌아온 이염도 밝게 웃어 보였다.

“닥쳐.”

마찬가지로 사표 내기 일보 직전이었던 서포터 하기수도 장난스럽게 주먹을 흔들었다.

“형들 웃어서 다행이다. 악몽이 끝난 것 같아.”

낯을 많이 가리던 막내 미드 김진도 쑥스럽게 웃었다.

“진짜. 이제 우리가 막내 아니네.”

이염을 대신해 잠깐 콜업됐다가 1군에 자리 잡은 서브 원딜 천지수도 맞장구쳤다.

“얘들아..”

한 감독은 조금 감동받았다.

사람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나는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던 것인가..

팀 게임에서 왜 사람 성격을 보지도 않고 데려와서 이 여린 아이들을 고생시켰던 것인가..

주접 덩어리 한 감독은 코를 훔쳤다.

“FWX 덕분이지.. 아암, FWX 덕분이야..”

“FWX가 왜요?”

“아니다, 아니야.. 얘들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대로 붐보이를 들고 있었더라면 몇 년 간 수습이 안 될 뻔했다.

아마 감독 생활도 끝났을 거다.

초특가 매물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이번에 큰 교훈을 얻은 그는 이번에 사려고 했던 급매 아파트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빨리 가려다가 사고가 나는 법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박 감독이 추천한 쏘팔메토와 함께 그의 인생을 가장 크게 바꿔놓은 긍정적인 선택이 되지만 이건 아직 아무도 모를 이야기.

“근데 흥민이..”

“...”

물론.

“그.. 몬순아.”

모든 사람이 분위기가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몬순아.. 테이블이 떨려.”

스토리는 비슷해도 여기는 FWX가 아니었으니까.

“죄. 죄. 제. 재. 재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없고.”

“어. 어. 어어어어떡하죠? 어. 어. 어떡해요?”

신입 정글러 김흥민.

흥민이라는 득점왕 같은 이름에 비해 너무 순하고 어린 선수다.

그래서 김흥민은 주로 선수명 몬스를 바꾼 몬순이로 불렸다.

“그..”

드물게 5월 말부터 갑자기 합을 맞추게 된 상황.

당연히 적응이 안 끝났다.

심지어 몬순이 김흥민은 유니버스 2군 미드라이너가 포변한 케이스.

물론 시작을 더블 포지션으로 한 케이스긴 했지만 퓨처스 리그 경험은 대부분 미드 라이너로서 겪었던 선수다.

1군에서 매물을 찾을 수 없었던 해머스는 이번에 MSL에서 FWX가 보여준 포지션 돌리기를 보고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퓨처스 리그를 탐색했고.

거기에 얻어걸린 게 김흥민이었다.

의외로 더블 포지션 훈련을 소화해낸 선수나 2군에서의 포지션과 1군에서의 포지션이 다른 선수들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알려지지 않는다.

라인은 점차 고정되기 마련이고, 퓨처스 리그 경기까지 찾아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유명해지고 나서야 조금씩 알려질 뿐이다.

“경험이다 생각하고..”

매물이 없어서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이번 트레이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팀원들과 성격이 잘 맞는가’ 였다.

“괜찮아. 어쩔 수 없어. 이번 시즌은, 그, 위에서도 적응을 목표로 하자고 했으니까.”

단장과의 알력 싸움이 심한 편이던 해머스.

단장의 잘못된 선택을 증명한 한 감독은 이제야 발언권과 시간을 좀 얻었다.

조금 늦었지만 한 감독은 최선을 다해 선수들을 보호할 셈이다.

그래서 그 몬순이의 정글 데뷔전 첫 경기 상대?

“배울 게 많을 테니까.. 허허..”

권건이다.

“마, 마, 마, 말이 되는, 말씀을, 하셔야, 마, 말이 되죠. 마, 마,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우리 몬순이.. 할 말은 다 하네?”

“제.. 재재재재재재송합니다..”

“이번 시즌 정글이 어떻다?”

“자.. 자자자자자기 정글 잘 돌면 된다..!”

“그래서 어떻게 경기할 거다?”

“메메메메타를.. 최대한.. 활용해서.. 장점을.. 살린다..!”

“그래, 그럼 어떻다?”

“권건.. 혀혀혀혀형님.. 안.. 안안안 무섭다..!”

“옳지! 잘한다!”

“안.. 무섭다!”

“그래!”

개막전의 해머스는 그런 각오였다.

아무튼 그랬다.

#

2026 LKL 서머 시즌.

개막전, 대전 FWX와 수원 해머스의 경기.

경기 시작에 앞서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시즌 안내 콘텐츠가 송출된다.

라이브가 아니라 사전 녹화된 분량이다.

다시 전성기를 맞은 부드러운 네오 소울 음악이 흐른다.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 류수정입니다.”

R&B 그루브에 맞춰 여유롭게 손가락을 흔들며 기분 좋은 모습으로 스튜디오에 앉아있던 중계진들이 한명씩 일어난다.

“반갑습니다. 해설 현수진입니다.”

“저는 남동현입니다.”

“네, 저는..”

조금씩 달라진 중계진이 새롭게 인사를 올리고.

“재즈의 시대가 돌아왔군요. 그래서 출시했습니다. LOS 파크 멤버즈!”

“네, 그렇습니다. 이번 멤버즈는 시즌 구독 개념이고요. 부대 시설 할인부터..”

“특히 이 멤버십의 경우에 LKL 브랜드 제품들까지 특별한 가격으로..”

“기존에 출시되었던 LKL 카드와 연계하면 혜택의 폭이 훨씬 커지니까 충분히 가치가 있겠죠?”

비즈니스 홍보.

“공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으로 보안 절차에서 관객분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입장 지연이 해결되었고, 논란이 있었던 선수분들의 공간도 완벽하게 개선됐습니다!”

“선수들이 보다 편안하게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게하기 위함이죠.”

이전부터 진행되던 시설과 시스템의 완공, 개보수 알림 등이 이어진다.

“그 외에도 투명한 부분이 많아졌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지를 참고하세요!”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죠?”

“이번 시즌 변화점입니다.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임 패치와 버전에 대한 설명.

“바텀의 밸류가 다시 올라왔고.”

서폿 출신 분석가 문시환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따라 미드에서는 바텀 지원을 위해 유틸성 높은 챔피언의 선호도가 높은 경향이 있습니다.”

“또틸미? 어쩔 수 없죠. 미드는 가제트 만능 손.”

미드 출신 해설 이승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탑. 탑은 탁월한 밸런스 체계로 유례없이 독립성이 강해졌습니다. 어떤 픽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저는 탑이 탱커 포지션을 가져가 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한타를 위해서요.”

“저는 의견이 다릅니다. 탑은 한점 돌파도 가능한 메타거든요.”

안전 제일의 강기수 해설과 공격적인 게임을 사랑하는 현수진 해설이 다른 의견을 나눈다.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냐,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이냐. 어느 쪽이 대세가 될지는 까봐야 알 수 있겠죠.”

많은 사람이 탑을 사랑하는 이유는 메타에 그리 크게 얽매이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지만 메타 영향이 큰 포지션이 있다.

“정글.”

“정글은 갱 혹은 오브젝트 관리 중 택일 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정글은 다섯명 중 유일한 비 라이너. 그래서 라이너들의 중요도가 올라갔다는 건 곧 정글 자원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동시에 부자가 될 수는 없는 거거든요. ‘부자’ 개념은 상대적인 거니까요.”

“원래부터 LOS가 그렇지만 정글 혼자 뭘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메타거든요. 기본은 라이너들의 체급입니다. 이번 메타에서 팀원들이 모두 잘해주지 않으면 원탑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죠.”

총출동한 해설진은 사뭇 진지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정도 캠프 경험치 너프가 들어갔고, 라인전 중요도가 올라간 만큼.”

“정글러는 도움이나 투자를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도 정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을만한 챔피언들이 선호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죠?”

“그렇습니다! 게다가 라이너에게 라인전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면 또 뭐다? 라이너들은 정글러가 지원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정글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부담이 큽니다.”

라이너가 자기 라인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면.

정글은 전라인의 변화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포지션.

“혼자 힘으로 주도권 유지해야 하는데 도와주기까지 해야 해.”

“와우!”

“카정도 갱도 전보다 리스크가 생겼군요.”

“그전에는 단춧구멍만 했다면 이제 바늘구멍만 해졌다고 볼 수 있죠.”

이승수의 말에 남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정글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거 완전..”

“정글러 도대체 왜 하는 거냐? 여러분, 정글 왜 해요? 혹시 전생에 죄를..”

편집.

“포지션 견제가 끊임없이 들어가네요. 메타신께서 잡으라는 탑 미드 사기챔 밸런스는 안 잡고 이상한 걸 잡으시는 것 같..”

또 편집.

“한 번도 정글러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 정글 쪽에 이입을 하게 되네요.”

“하하하하, 왜 그런지 알 것 같기도 하고. 하하하하!”

“엥? 이거 완전 권모 씨를 노린 패치..”

또또 편집.

“그럼 아예 패치 견제를 피해서 메타마다 포변을..”

“누구 말씀하시는 건지 저는 전혀 모르겠..”

또또또 편집.

“근데 중요한 건 메타 분석이 어떻든, 시즌이 진행되면서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점이 LOS의 매력 아닐까요.”

“유행이란 게 분명히 있거든요. 항상 힙한 개념들이 등장합니다. 같은 버전이라도 국가별로 다른 전략이 나오는 것처럼요!”

“그건 오늘 경기부터 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오늘이 바로! 개막전이니까!”

중앙에 있는 화면에 LKL 로고가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여태껏 자잘한 질문을 던지며 진행을 맡았던 아나운서가 활짝 웃는다.

“자, 그럼 이제 황부 리그 LKL의 개막전을 만나러 가볼까요?”

해설진들이 밝게 웃었다.

세계 무대에서 탑을 차지한 한국의 리그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좋습니다!”

MSL에 누가 불참?

뭐 어쩌라고.

왔어도 이겼을걸?

어쨌든 가장 최신 데이터가 우리가 최고라는데.

간신히 되찾은 한국의 위상.

그걸 돌려놓은 주인공 FWX.

한국이 최고이던 당시에 현역이었던 일부 해설들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끝나가는 시간을 알리며 네오 소울 뮤직이 다시 켜진다.

자리가 달라져서 그런가?

평범한 진행 음악인데도 유독 더 여유롭게 느껴진다.

해설진 내면의 어깨춤이 밖으로도 삐져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나운서가 밝게 웃으며 이번 시즌 표어를 읊는다.

세계 1위의 리그.

이 영광은.

“LKL.”

아주, 처음부터.

“All along.”

한국 것이었다.

“2026 서머 시즌.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다시 날개를 단 LKL 로고가 화면 중앙으로 날아오른다.

챔피언스 리그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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