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72화 (273/326)

272_신인 미드 (경력 있음)

한국.

대부분의 팀에는 ‘멤버십’이 있다.

‘유료 팬클럽’이라고 보면 쉽다.

팀별 멤버십 제공 가격과 혜택의 범위 등은 천차만별이지만.

크게 굿즈, 할인 혜택, 이벤트 참여권 세 가지로 나뉜다.

일부 팀의 멤버십에는 영상 선공개나 특별 콘텐츠 제공 등 다양한 구성도 있지만 기존 팬덤이 작은 편이었던 FWX는 디지털 콘텐츠에 차등을 두지 않았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FWX 멤버십.

여기에는 마킹을 포함한 선수 유니폼, 한정 굿즈, FWX 샵 적립금, 경기장 입장권 할인, 현장 부스 이벤트 참여권, 오프라인 이벤트 우선 예매권, 시즌 종료 굿즈가 들어간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만큼 사실상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LOS 파크를 몇번만 찾아도 페이백이 끝나는 정도였으니까.

“굿즈로 생활도 가능하겠다.”

“FWX 생활 건강 지렸고.”

패키지 안에 들어있는 굿즈의 종류도 황당할 정도로 실용적이었다.

“리얼 혜자. 너 최은호 린스 썼냐?”

“어.. 맞아..”

“어쩐지 클래스 향이 솔솔 나더라니.”

“왠지 불쾌한걸?”

“낄낄. 쓰고 분리수거 잘해라.”

FWX에 재직 중인 지세현은 과거 빅스 팬이었던 친구 최인규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빅스는 어땠었냐? 멤버십.”

“빅스? 고 새기들은 조온나 치사했지. 행사장 자체가 너무 작았어. 30석.”

“30석? 팬이 몇 명인데 30석이야? 스태프가 더 많겠다.”

“스탭 둘.”

“잘 못 들었습니다?”

“운영 뭣 박았지. 근데 멤버십은 또 개비쌈. 주는 건 없고.”

“이모탈이.. 모두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먼 과거, 정말 FWX가 인기 없던 시절에는 생일자에게 선수들의 축하 영상을 전송해주는 서비스도 제공되었지만 화제의 중심이 된 지금은 불가능한 이야기.

그래서 지금 가치가 가장 높은 건 오프라인 이벤트다.

“이다음에 뭐냐?”

보기 드문 사옥 공개.

“우승 트로피 실물 봤고. 피구 했고. 공짜 밥 먹었고. 퀴즈 했으니까.”

MSL 결승이 진행되는 지금, 선수들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탄 행사.

“이거 결승 시청 끝나면 마지막 세트 픽이랑 똑같이 5대5 협곡 한번 돌리고 끝일걸?”

꼼꼼히 눌러 담은 FWX의 이벤트에 팬들은 환호했다.

선수들을 직접 볼 수 없는 건 아쉽지만 멤버십을 살 정도로 FWX에 진심인 사람들끼리 모여서 응원할 수 있는 행사.

촬영은 금지됐지만 선수들의 생활 공간을 눈으로 구경할 수 있고, 게다가.

“이기면.”

특별 굿즈까지 제공된다.

“이기면? 뭐 줘? 또?”

이미 선물을 한 아름 안은 최인규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기면 좀 다를 수도 있겠지.”

아직은 비밀이라 지세현은 히죽히죽 웃었다.

이게 재직자의 여유다.

“무친 구단.. 진짜 무친 놈들.. 땅 파서 장사하나..”

눈치 빠른 극성팬 최인규도 히죽히죽 웃었다.

“어! 근데, 야. 너. 그럼.”

“뭐?”

“건신 자주 보냐?”

“그..러엄..”

사실 그렇진 않다.

콘텐츠 팀이 선수를 마주하는 건 드문 일이다.

지세현은 아직 촬영에 따라갈 짬은 아니라서 그렇다.

주로 문봉구를 따라다니고, 편집실에 처박혀 있는 경우가 많은 지세현은 머리를 긁었다.

권건.. 그래도 영상으로는.. 누구보다 많이 본다.

“전에 사인도 직접 받아다 준 거야 그럼?”

“그..렇지.”

사무실에 있는 여분이긴 했어도, 어쨌든 직접 사인한 건 맞을 테니까.

“야, 그러면..”

“어, 어어, 어, 야. 저게 뭐지?”

지세현은 황급히 친구의 시선을 돌렸다.

“뭐?”

그런데 그 끝에는 정말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코스..프레?”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지나가는 거미 여왕.

“앨리스.. 맞지..?”

“저세상 퀄리티 도대체 뭐임? 오늘 픽할 거 알고 하고 오신 거임..?”

복도 방향에서 지나가던 앨리스는 사옥 컨퍼런스 룸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이 축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나름 챔피언 분장을 하고 온 사람들이 무색할 정도로 찰떡같은 소화력이었다.

“실화냐?”

짙은 화장과 높은 힐.

검은색과 붉은색이 유독 잘 어울리는 여성은 앨리스가 실존하는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완벽한 몰입감으로 손가락을 천천히 접으며 눈웃음쳤다.

“이거 비밀 행사야?”

“저쪽은.. 그건데? 선수 가족실..”

“근데 왜 저쪽으로 가냐고. 너도 몰라?”

“나.. 몰라..”

지세현은 멍청한 얼굴로 복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거미가 다리를 흔들며 천천히 멀어진다.

“혹시 저분.. 유명한 코스어 아니야?”

“와! 다희님 아시는구나!”

옆에서 띠모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말을 시작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해드립니다! 코스어 ‘휘감는 죽음의 광휘’님은 ‘큰바다 빛 영광 권건교’에 속한 ‘대주교’님입니다! 줄여서 ‘권.건.영.광.교’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건 진.짜.겁.나.어.렵.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핵심 인력’의 경우 최소 다이아 이상부터 신청할 수 있고 ‘일반 교도’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 찬양글을 올리지 않으면 즉.시 강퇴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이곳에서 개발하고 있는 주신 건님의 신성을 들을 수 있는 AI 보컬 및 TTS가..”

혼자만의 세상으로 나가버린 남자.

“기술력 무엇?”

“..건강교?”

“건.광.교.”

“...”

“그러니까, 다희? 저분이 건신 팬클럽 회장이시라는 거죠?”

“맞습니다! 그리고 다희보다는 ‘휘감는 죽음의 광휘’가 맞습니다!”

“고, 고마워요. 스피드띠모.. 휘죽광.. 고유 아이템같이 좋은 이름이네요..”

“근데 실례지만 건폭도세요?”

“아닙니다! 그런 추한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싱글벙글 웃는 남자의 모습은 보통의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개꿀잼 몰카네..”

“내가.. 물어볼게.. 오늘.. 이벤트 있었는지..”

“그래.. 꼭 좀 부탁한다.. 여기가 이렇게 위험한 곳인지 내가.. 너무 몰랐네..”

특별 이벤트가 추가됐다는 건 지세현도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

“미드 노플.”

FWX의 신입 미드 라이너가 씩 웃었다.

“이제 그냥 노플인 거 말하지 마라. 어차피 쟤 플 있을 때 없으니까.”

최은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투 미드 이거 사기 아니냐?”

“아예 몰랐으면 그렇겠지. 몰랐다면.”

곽지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투 미드.

유럽에서 끌고 나온 전략보다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야말로 고대 유물.

“진짜 갑작스럽긴 하겠네.”

정말 두 명이 계속 라인에 서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먼 옛날과 달리 정글러가 CS를 수급하는 건 손해가 있으니까.

다만 권건이 자리를 비운 순간 그 장소는 김예성의 미드가 되고.

김예성이 자리를 비운 순간 그곳은 권건의 미드가 된다.

미드 공간 공유.

홀린 듯이 이어지는 연계.

“어, 너네 영역 여기 아니야. 탑 누가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그럼 정글 누구 거야? 우리 거야!”

“정글 청소기 트타! 정글 먹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바쁘다 바빠!”

“이거 막을 수 있어요? 벌써 신인 미드가 전장 지배하고 있는데 이거 막을 수 있어요? 이게 사람이야 로켓 점프야? 로켓이야 너구리야!”

“밉니다, 밉니다, 밉니다아아아아악!”

“너무 빨라요, 너무 빨라요! 이번 킬은 정글 라온에게! 하지만 버프는 미드 권건에게!”

“당근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상대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타워가 무너질 것이라는 강한 예감을 현실로 만든다.

“미드 내각 타워까지! 벌써! 철거됩니다!”

“게임 너무 힘들어집니다, G3!”

- G게이들아.. “권건이 미드”라고 생각하니까 지치는 거임

- ㄹㅇ “권건 특별 미드 출현! 대만 대축제! 여름맞이 스페셜 챌린지!” 이러면 레어 이벤트 같고 좋자너ㅋ

- 오브젝트 도둑이 타워 도둑이 됐다는 것 말고 사실상 큰 차이도 없음ㄹㅇ

- 개꿀잼ㅋㅋㅋㅋㅋㅋㅋㅋ

- 시1발ㅇㅅㅇ;; 게임사에서 정한 라인이 있는데 저게 게임이냐? 눈 없는 새기들

- 님 왤캐 화났음?

- 왜 아무도 관심 없는 말 ㅈㄴ 씀?

- 너 아직도 이러고 다니니?

- 3연벙 싸움덱 지린다ㅋㅋㅋ 시영이 또 왔니?

- ㄹㅇ 아는 사람임?

- ㄴㄴ 걍 애칭임^^ ㅇㅅㅇ 이시영

우려를 빙자한 비난을 내놓던 시청자들의 태도도 순식간에 돌변했다.

다만 사람들이 영원히 알 수 없는 대화도 있었다.

“근데. 건아.. 내가 진짜 조심스럽게 말하는 건데..”

김예성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너 너무 위험하게 플레이하는 거 아니야? 나 심부전증 올 것 같은데.”

“김예성이 미드 그렇게 하는 거 아니래.”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잘해! 너 진짜 잘해! 너무 잘해! 근데 그러니까 이게 너무..”

상대 미드 아우로라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닥돌하는 미친 플레이의 신입 미드는 같은 팀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괜찮아, 안 죽어.”

물론 당사자는 태연했다.

“그 대사가 여기서 왜 나와..”

일단은 정글에 서있는 김예성이 손끝을 떤다.

그는 미드가 외줄 타기를 해야 하는 라인이라는 걸 너무 잘 안다.

권건의 미드 심리전과 피지컬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연습 게임을 할 때도 느꼈지만, 그냥 그걸 그대로 인게임에 가져온 느낌이었다.

심지어 오더까지 해주면서.

그로서는 아직 불가능한 일이 맞다.

언뜻 김예성이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권건에게 느끼는 열등감 따위보다 불안감이 훨씬 더 크다.

정글러 입장에서 바라본 미드 권건은.

물가에 애를 내놓은.. 아니, 애는 아니지만.

외줄 타기를 하는 것도 불안한데 까치발로 서 있는 모습이다.

그래, 그러니까.. 남자가 일찍 죽는 이유를 몸소 실천하는 라이너?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라인이 정글러였나?

다른 라인 지켜보면서 아이구, 또 저러신다, 하면서 벌벌 떠는 게 정글?

“거니 형님, 안 죽어? 혹시 지금 데스 숫자 안 보이시는?”

그런 ‘남자’ 중 하나인 탑이 야무지게 물었지만.

“라이너는 킬에서 데스 빼고 계산하는 거다.”

대쪽 같은 신인 미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아..”

“아.. 그래서 KDA가지고 뭐라 안 하는 거구나..”

“신문물이네. 계산을 그렇게 잘하는 애가 저런 데서 이렇게 변하네.”

“혹시 얘 피지컬 뇌지컬은 챌린저 미드인데 의식은 아이언 미드인 부분?”

“틀린 말은 아니긴 해. 근데 왠지 인정하기가 싫어.”

정글러의 계산식과 라이너의 계산식은 다른 모양이다.

“아니, 아까 처형 안 터졌으면 현상금을..”

“죽더라도 미니언 먹고 죽어야지.”

“아니, 미니언이 문제가 아니라 애당초..”

“미니언 먹고 타워 부숴야지.”

“아니, 타워보다 중요한 게..”

“라인에 섰으면 미니언 먹고 타워를 부숴야지. 이 게임은 타워를 부수는 게임입니다.”

권건이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이게 미드 버프?

“역시.. 배우신 분.. 나랑 잘 맞는 이유가 있었네. 그래! 게임은 그렇게 하는거지!”

만족스러워하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아니..”

김예성은 꼭 자기한테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아서 입만 쩍 벌렸다.

그 와중에 탑과 다른 건 불가능에 가까운 정교한 계산이 들어가 있다는 거지만 지적할 도리가 없었다.

“김예성 ‘아니’ 연참 지린다.”

“아니, 아니, 아니이! 우리 미드가 결과만 보고 행동해! 미드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제발! 정글러 속 타 죽어요!”

“결국 말해버렸고~”

“건이가 뭐라고 했길래 미드 그렇게 하는 거 아니래?”

“라인에 섰으면 미니언을 먹고 타워를 부수래.”

“어? 맞는.. 말인데?”

게임의 요지에는 딱 맞는 말이긴 하다.

한참 타워를 치던 곽지운도 얼이 빠졌다.

쟤가 대체 왜 저래?

“그럼 정글은?”

대답은 권건에게서 돌아왔다.

“갱 갔다 오브젝트 먹어야죠.”

세계 최고 정글러의 모토가 이렇게 단순 쌈박한 것이었나?

하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러..네.”

그걸 세계에서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이 권건이었으니까.

“예성. 이제 버프 줘. 10초 뒤 리젠.”

“그러네.. 귀신같네.. 너무 잘 아네..”

하지만 ‘주던 사람’이 ‘요구하는 사람’이 되는 건 정말 다른 느낌이다.

“얘 상대로는 버프 꿍치기도 안 되겠는데..”

“그런 생각을 했어?”

날카로운 신인 미드의 말에 신인 정글러가 화들짝 놀란다.

“아니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한평생 권건에게 큰 잔소리 들은 적 없이 게임했던 김예성은 바짝 쫄았다.

“혹시.. 나 미드 설 때 저렇게 게임해?”

“너? 음..”

“원래 모든 미드가 그래.”

블루는 못 참던 김예성이 탄식을 터뜨렸다.

“말투는 다르지만.. 그래, 말투가 중요하긴 한데..”

하지만 권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트타니까 레드도 먹을게?”

“...”

“...”

“줘라.. 줘.. 아주라 해라..”

레드는 못 참던 곽지운도 탄식을 터뜨렸다.

“레드 먹고.. 원딜 하겠다는 말만 하지 마라. 니가 평소에 얼마나 잘해줬는지 알았으니까. 나 진짜 깨달았으니까 그러지 말아줘, 제발.”

“서포터 대표도 반대한다.”

최은호가 말을 보탰다.

“나 신고하고 탈주함.”

뭐, 우리 주장이 도발적인 성향의 원딜?

목숨을 걸고 적을 끌어들인다고?

우리 원딜은 오늘의 가짜 미드에 비빌 게 못 된다.

앞 비전도 아니고 앞 점프를 하고.

웨이브 메이킹이랑 처형을 교환하는 원딜이랑 어떻게 게임을 해요?

근데 잘해서 또 할 말은 없다?

뒤지게 잘하긴 하는데 그 전에 내가 심부전증으로 뒤지겠다.

“입금 완료됐습니다.. 미드님..”

“어. 다시 간다.”

“어딜 가?”

“미니언 먹고. 타워 부수러.”

권건의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이했고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쟤 왜 신났냐?”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지?”

“미드에서 원딜 챔피언 잡고 탑처럼 플레이하는 미친 사람..”

모든 선수들이 같은 감정을 느꼈다.

“나 쟤가 왜 다른 라인이 아니라 정글러인지 잘 알겠다.”

“왜?”

“건이가 주전 미드면 쟬 감당하는 정글러가 있을 수가 있겠어? 다른 라이너라도?”

“...”

“와.. 진짜.. 와.. 돌거북 1타마다 잔소리.”

“한 걸음 뗄 때마다 정글 그렇게 도는 거 아닌데 소리 듣겠네.”

“리얼 백정행..”

“사표 내겠습니다.”

“지금 김예성은 가짜니까 극한으로 참아주는 거 맞음.”

“진짜면?”

“넌 벌써 입으로 죽었어.”

“협곡 평화를 위해 정글 돌아주세요.”

“제발..”

기도가 하늘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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