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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71화 (272/326)

271_고전

미드.

미드에 대해 알아보자.

미드의 로망 중에는 상대를 농락하는 폭딜 암살자도 있을 수 있고 딜탱이 가능한 브루저 미드도 있을 수 있겠지만.

LOS를 처음 접하는 순간으로 돌아가자면 그 근원에는 순수 AP 챔피언이 있을 거다.

RPG에서도 파티는 탱, 근딜, 원딜, 힐이 있는 거잖아.

여기서 원딜 마법사가 미드.

정말 초보자라면 ‘마법사’ 챔피언이 거리를 유지하면서 때릴 수 있으니까 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어쨌든 우리가 미드를 만나는 첫인상은 대부분 ‘마법사’였다는 말이다.

강력한 딜을 쏟아부을 수 있지만 몸이 약한 존재.

하지만 오히려 순수 AP는 팀원들이 받쳐줘야 할 수 있는 픽이다.

말 그대로 몸이 너무 약하거든.

솔랭에서도 어렵고, 리그에선 약팀이 못 쓰는 픽이란 게 이런 것들이다.

도와줘야 하니까.

내가 잡은 트타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찬가지다.

유리 대포.

오히려 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상대의 에니가 오리지널에서 좀 더 벗어난 걸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흐르면서 딜탱 마법사라는 삿된 존재들이 등장했으니까.

“어어, 권건, 앞으로?”

“미드 라인은 짧습니다?!”

근데 고전이 왜 고전이겠어.

딜이 강하면 몸이 약해야 하는 거고.

탱이 될 거면 딜은 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우로라! 기회!”

메타 신이시여, 정신 좀 차리세요.

요즘 사기챔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쿨 돌았어요! 벌써, 벌써, 벌써 가면 안 됩니다! 권건!”

제 기도가 들리지 않으세요?

별수 없지.

아슬아슬한 체력을 남긴 채 앞뒤로 몸을 돌린다.

머뭇, 하는 순간.

“점멸!”

나를 먹잇감으로 판단한 상대가 들어온다.

자기들도 이런 심리전 했으면서 이걸 속네.

내가 거리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정글은 라인보다 어렵다.

동선과 심리전의 양상에서 그렇다.

라인은 정글보다 어렵다.

자원 관리와 주도권의 양상에서 그렇다.

하지만 둘 사이에 굉장히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다.

“아우로라!”

라이너만 가질 수 있는 든든한 우군이자 적군.

앞뒤로 흔들거리는 나를 향해 상대가 한걸음 들어오는 순간.

딱 한걸음.

“포탑 데미지!”

라이너의 특혜이자 저주.

아차 하는 순간 빨려 들어가 버리는 포탑이 우리를 동등하게 만든다.

“폭탄!”

째깍째깍.

상대 스킬 쿨까지 얼마나 남았지?

0.3?

“앞..”

비교적 느긋한 정글 챔피언과 달리.

“점프!”

유리 대포의 시간은 빨리 간다.

쿨이 돌았다.

절대 피할 수 없는 불똥이 내 눈앞으로 다가온다.

“히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그리고 그 직전에.

착지와 동시에 착탄.

“폭ㅡㅡㅡㅡㅡ발!”

“동시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양 측 미드, 사망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교환! 손해만 봤을 것 같은 상황에서 교환했어요!”

“퍼블, 퍼블은 누가? 누가 먹었어?”

당연히 나지.

“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FWX의 신인! 미드가! 이번 세트의 퍼블으으으으을 가져갑니다아아아악!”

#

“게임이! 너무! 와일드해요!”

“이 선수, 자기가 잡고 있는 게 원래 원딜 출신 챔피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건가요?”

“이거 그냥 완전 게릴라잖아!”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권건은 CS에 집착하는 플레이만 하지도.

킬에 집착하는 플레이만 하지도 않았다.

둘 다 했다.

“아직, 아직 처음에 빠졌던 점멸이 안 돌았거든요, 아우로라!”

“목숨값이 비쌌습니다! 킬을 따면 뭐 해요! 같이 죽었는데!”

“심지어 권건은 퍼블, 그리고 그 후 G3쪽으로 라인 박히면서 미드 차이가 꽤 벌어지고 있죠!”

“라온, 라온, 라온, 라아아아아아아아온!”

“또 들어갑니다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심지어 조심스러운 라이너도 아니었다.

“권건이 시야 확보용 와드 싹 꽂아주면서!”

그야말로 돌격형.

“앞 점프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 ㅎㄷㄷㄷㄷㄷ

- "달려"

- 똥꼬가 마른다;;;;

- 형 그만 좀 뛰어 존나 보는 내가 다 무서워 죽겠어

- 공중 폭격기 시1벌탱;

“라온의 점멸 억아아아아아아아아압!”

여태까지 ‘정글러’라는 포지션을 맡았던 것이 어쩌면 이런 위험성 있는 플레이를 막기 위한 게 아니었냐는 말이 더 정확할 정도로.

“이거 안될 것 같은, 아니, 앗, 아니!”

“들어갑니다, 라온! 다이브으으으으으으으!”

“이걸? 이걸 따라 들어가? 이걸?”

“바로 붙어줍니다! 포탑 어그로, 권건!”

“1타! 2타아아아아아! 이거 진짜 죽기 일보 직.. 전에 아껴놨던 점멸!”

“그 사이 라온이 킬 가져가면서! 킬 먹고 살아서나갑니다아아아아아악!”

- 이게.. 갱이야? 갱 맞아?

- 이걸 연약한 미드가 왜 대신 맞아줌;;;

- ㅎ ㅏ 숨넘어가겠네;;; 쉬바 우리 미드 지금 미니언 칼날만 스쳐도 죽겠다;;

- 헤이 그가 원래 ‘정글’이야..

- 쉽;;;

- 이렇게 포탑이랑 친한 선수였어? 여태까지 왜 정글 돌았어?

“그렇, 그렇구나!”

“이거 처음부터!”

“처음부터 완전! 중반까지 갈 생각조차! 아니었어요! 그냥! 시작하자마자! 터뜨린다!”

첫 미드 교환, 그리고 그때 만들어진 구도를 이용한 김예성의 ‘로밍’.

이 이득을 통해 정글과 미드 두 사람은 오브젝트 영향력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거 투 미드야? 투 정글이야?”

그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와일드하게 라인을 밀면서 쭉쭉 밀어붙이는 신인 미드.

이런 건 G3의 데이터에도 없었다.

“댐 잇, 나 저거 컬리지 시절에 친구들이랑 하던 전략인데!”

“몇 년 전 이야기야?!”

“저런 게 있었어? 왜 아무도 쓰지 않았던 거지?”

“했다가 지면 개같이 지니까! 생각해봐, 솔랭 미드가 들이박는다고 생각해보라고!”

“홀리..”

“아무튼 강하면 좋아!”

- 권건이 미드한다는 소식 듣고 허겁지겁 왔습니다

- 이제 왔니 스붕이 트붕이 미붕이들아?

- ㅎ;

- 근데 그냥 정글 트타 한 거 아닌가요?

-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쉽; 저거 미드 아닌 것 같은데

- 스펠을 잘 봐

- 그냥 미드 전입 신고만 했음..

- 이게 계약 결혼인가 사기 결혼인가 뭔가냐?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가장 미칠 것 같은 사람은 아우로라.

처음에 속은 건 둘째치고.

정글러가 와서 해줘야 할 것 같은 교환을 미드에서 걸어대니 상대하는 미드라이너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저 어그로를 왜 지가 받아? 왜 점멸이 아직도 있어? 왜 미드가 목숨이 아까운 줄을 몰라?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반역이야!”

미드는 미드끼리의 약속이 있다.

다른 라인은 뭐 그렇다 치고, 미드는 뭐랄까.

골프나 테니스처럼 귀족 스포츠인 거 아니냐고!

“노오오오오오오!”

총구가 채 식기도 전에 또다시 불을 뿜는다.

뭐 이런 깡패 같은 새끼가 다 있어?

아무리 라인 스왑을 해봤다지만 결국엔 곱게 자란 미드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밀어내고 철거! 철거! 철거 들어갑니다아아아아아아악!”

“이거 속도가 너무 빨라요! 속도 빠릅니다! 지금 미드가 완전히! 완전히 망했거든요!”

“와, 철거 들어보고 싶었을 거거든요! 시원합니다! 속이 시워어어어언해요, 권건!”

“지금 집 내놓으라고 하고 있죠? 아우로라 형님, 여기 재개발 예정입니다! FWX 테마파크 유치 예정이니까 빨리빨리 나가세요!”

“도둑이야! 타워 도둑! G3, 타워 도둑 잡아라아아아아악!”

아우로라의 마음이 급해진다.

“어딨어? 어딨는 거야? 우리 정글은 어디에 있어?”

“가고 있어!”

“우리 타워가 나를 공격하잖아! 도와줘!”

“헤이! 아우로라! 타워에 폭탄이 붙어있으니까 그렇지! 좀 떨어져!”

분명 아우로라의 집인 미드에 나타난 신인 미드, 아니 미친 정글러는 멈출 줄 모르고 타워를 돌려 깎으며 불꽃놀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떨어지면 미드가 온다고!”

어떤 미드가 온다는 얘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윤도형은 그 말을 백번 이해했다.

그래서 더 빨리 움직였다.

“탑도 와!”

“오케이!”

드디어.

드디어 권건을 포위했다.

신나게 타워로 불꽃놀이를 보여주던 권건이 깜짝 놀란 듯 몸을 기울인다.

속지 않는다.

윤도형은 그 정도 짬은 있다.

깜짝 놀라?

말도 안 된다.

저 새끼는 절대 안 쪼는 놈이다.

자기가 무섭게 노려봤을 때도 그랬는데, 게임에서 쫄 리가 없다.

“내가 아래쪽에서 포위!”

하지만 이제 니가 권건 할아버지래도 여기서는 못 살아나간다.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권건, 위기? 위기? 위기?”

“쭈우우우우욱! 달아납니다아아아아아아악?”

“근데 그 방향은!”

뜻밖의 진로 선택.

“잡아!”

G3가 허겁지겁 그를 쫓는다.

첫 세트부터 라인 스왑을 통해 ‘재미없는’ 한국 팀을 놀려주려던 전략은 이미 온데간데없다.

“저어어어어어어어어어엄프!”

‘보통의’ 정글러와 달리 작아서 선택하기도 힘든 챔피언이 기예를 부리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 형 혹시 미드 안 갔던 게 외압 때문이야?

- 만약 그렇다면 대포를 흔들어줘

“끼이이이이이이이얏호오오우우우!”

권건이 잘 잡지 않는 원거리 AD 챔피언.

굳이 찾아보자면 그브와 가장 닮았을까?

하지만 무거운 정글의 껍데기를 벗고 미드에 선 날렵한 그는 완전히 다른 플레이를 보여준다.

제 몸뚱아리만큼이나 큰 대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

“대애애애애구경 탄화아아아아아아안!”

뻐엉.

큼지막한 소리와 함께 한자리에 모인 선수들의 몸이 쭉 밀려난다.

“라인 못 잃어!”

타워와 타워의 중앙까지 날아들어 간 권건이 짧은 틈새에 대구경 탄환을 욱여넣고, 또 욱여넣어 라인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여태까지 자기가 양보했을 뿐.

절대 미니언이 탐나지 않았던 건 아니라는 것처럼.

그래도 덕분에 권건을 때려죽일 기회가 왔다.

영광의 순간이다.

윤도형은 기운을 냈다.

아낌없는 점멸.

마지막으로 이 작은 침입자의 머리 위로 봉을 내려찍으려는 순간.

자신만만한 권건의 움직임.

그리고.

“권건! 또오오오 죽었습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서 있었던 유리 대포가 감쪽같이 쓰러진다.

제법 빠른 시간, 벌써 두 번째 죽음이다.

“지가 사이언이야? 싱드야? 왜 오버 파밍을 해? 댐, 잡았어? 죽었지? 죽은 거지?”

하지만 권건은 정글러일 때도, 미드일 때도.

결코 의미 없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

“헤이, 폴리!”

“...”

“이거 UI에 뻐킹 에러가 있는 거 맞지?”

화면 중앙에 뻘건 노티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윤도형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왜 웃는지 알 것 같았다.

현실을 인정하게 돼서 그렇다.

“대답해! 대답하라고! 헤이!”

아, 이거 안되네.

역시 역모를 꿈꾼 것 자체가 좀.. 그랬지?

권건이 잘하긴 해.

그냥 친하게 지내야지.

“나는.. 탑으로 돌아갈게. 차-니가 기다려서. 어이구, 쟤 또 타워 부순다. 어이구. 싸이코.”

“오, 폴리. 정글러가 미드를 가는 건 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고마워, 메르시하트. 동의. 다음에. 나도 해볼까?”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해!”

그새 살아난 권건은 텔을 꽂는다.

정글러의 텔이라니, 정말 감동적인 순간인걸.

감화된 윤도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 아우로라. 그는 엑스-큐티드야.”

죽긴 죽었다.

제 스펠에 탑 주도권까지 투자했는데 그냥, 잘 죽었다.

“한국말로, 처-형이라고 해.”

호상이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팀에게는 미안하지만.

앞선 두 세트만 봐도 실력 차이 난다는 걸 누가 모르겠어.

그저 내가 한국에 있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새삼 나 대신 저걸 맞아준 아우로라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이, 이, 이, 이! 뻐킹 개 같은 팀이 마치 라잌 투-미드처럼 플레이하잖아!”

한국에서의 윤도형이라면 나약하다느니 어쩌라는 거냐느니 지랄했겠지만.

어쨌든 여기의 공용어는 영어.

“뻐킹 팀, 아닌데..”

“FWX가 WTF이랑 뭐가 다른데? 말해봐!”

“X가..”

“FuXk?”

“아니, FWX는 Fireworks를 뜻한다고.”

언어의 장벽 때문에 순한 대답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오.. 어쨌든.. 미안해. 아우로라.. 후 새드..”

“헤이.. 폴리..”

흔들다리 효과 때문일까.

“폴리, 그냥 가지 마. 내가 여태까지 너를 잘못 생각했어..”

“늑대만 먹고 올게.”

“나.. 이제.. 인장을 누를 힘이 없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아.. 아픈 여동생에게 인장으로 신호를 보내주기로 했는데..”

“헤이, 그딴 클리셰같은 개소리하지 말라고, 아우로라. 너 여동생 없잖아!”

정신이 빠진 아우로라는 윤도형에게 더 이상 화내지는 않았다.

“네가 스프라익보다 나아.. 그놈은 아무 말이나 하고 가서 제일 먼저 죽어버렸어.. 아무리 그래도 죽은 정글러보다는 살아있는 정글러가 낫거든..”

왠지 이해되는 마음이다.

“아우로라.. 권건은 정말 호러블해. 인 코리안, 악-질.”

“알고 있구나, 역시.”

포로로 잡혀 본 경험을 한 사람들의 우정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피어난다.

“폴리. 제발 나와 미드에서 듀오하자..”

“오케이.”

의미 없는 피해자 연합이 결성됐다.

“미친놈들..”

여기서도 정상인만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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