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_날이 적당해서
“아차. 땀이.”
G3 정글러 스프라익은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물론 손이 미끄러지지 않더라도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모든 투자를 퍼부었기 때문에.
“그으으으으대애애애애로오오오오오오오오!”
FWX의 정글러는.
그대로 독니를 박아넣고 상대 정글러에게 황홀한 죽음을 보여준다.
“똑바로 서서 죽었어!”
“정글이이이이이이이이! 죽었어요!”
기회는 세 번이었고, 끝났다.
“어어어아아아아아아! 퍼블, 퍼블, 퍼블 났어요! 궈어어어어어언거어어어어어언!”
“몇 번을 흘려내는 거야! 진짜아아아악! 이 선수 뭐 하는 사람인가요, 대체?!”
- 오 오오오옷 오오오오오옷! 우마이!
- 팬티! 시발! 팬티! 시발! 팬티! 시발! 팬티!
- 여왕님! 여왕님! 여왕님! 여왕님! 형 오늘 왤캐 섹시해?
- 혹시 형은 스킬쿨이 없어? 혹시 형은 스킬쿨이 없어? 혹시 형은 스킬쿨이 없어?
전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G3, 비상, 비상입니다! 퇴각! 퇴각하라아아아아아아아!”
폴리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권건을 조심하라고..
괜히 건드리지 말라고..
“세 번이나 찍었는데! 안 넘어갔어요!”
암전된 시야 속.
누가 속삭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 싸울 거야?
“이제 진짜 안 됩니다, 주요 스킬 진짜 다 빠졌잖아요!”
“어우, 어우, 어우우우우우우! FWX! FWX!”
너네 한명은 궁 셔틀이었고 한명은 그냥 없잖아.
“분명히 좋은 눈치싸움이었는데 이거 앞에서는 권건 선수가! 뒤에서는 사이다 선수가 시간을 너무 잘 끌어줬어요! 제이슨 완전 프리딜! 그래! 이게 미드지!”
“펑! 펑! 터집니다!”
“거미 죽이지 말라는 미신 있잖아! 서양에는 그런 거 없어?!”
선수들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
싱글벙글 웃던 G3 선수들의 표정이 굳었다.
“백?”
거미 여왕은 더 이상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다니지 않았다.
눈웃음을 건네지도, 상대를 매혹하지도 않았다.
이미 포식을 시작했으니까.
“이거, 이렇게 되면 G3는 바로 빼는 게 낫습니다! 시간 너무 끌렸어요!”
“너무 결과론적인 말일 수도 있는데! 처음 시도에서 실패로 돌아갔을 때 바로 빼는 게 나았겠죠!”
기어 온다.
바닥에 배를 붙이고 빠르게 기어 온다.
“백!”
“백! 백! 백! 백! 빼애애애애애애액!”
여덟개의 홑눈을 번들거리며, 그들을 향해 기어 오고 있었다.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너어어어어어어어어무! 무서워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여덟개의 다리.
“얼려줘, 메르시하트, 얼려줘! 얼려줘! 바도! 바도! 프리이이이이즈!”
“거미! 거미! 거미 온다! 거미 와!”
“헤이! 나부터! 나부터! 나 아라크노포비아!”
“나도!”
다가닥, 다가다다닥.
소름끼치는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어, 어, 오케이! 오케이!”
유쾌했던 협곡이 어느새 공포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조금 이르지만! G3의 승부수, 완전 실패!”
“이제 인장 안 띄우나요, G3?”
한국 해설진은 편파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기분 좋은 빈정거림이 묻어나고 말았다.
아까 보여주던 인장 쇼맨십은 포기한 거야?
“간신히 얼리고 도망치고 있죠?”
목숨만 부지한 채 몸을 돌려 도망치는 G3 선수들을 보며 해설진은 짜릿한 아쉬움을 느꼈다.
“어쩔 수 없네요!”
들어오는 것도 잘하지만 나가는 것도 잘하는 팀이니까.
“들어올 때는 매지컬 저니, 나갈 때는 매지컬 져었~니~”
“?”
신비한 차원문에 몸을 담은 적들이 한 몸처럼 움직일 때.
“어어어어어?”
발이 묶이지 않았던 한 사람.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쇼맨십을 이어받은 유럽 카운터 유상준의 화려한 등장.
“이거? 이거? 이거!”
부웅.
“날아갑니다! 날아갑니다아아아아아아악!”
차원문을 타고 가던 적들은 모두 하늘로 치솟았다.
협곡 바깥의 어떤 세상까지.
- GGG3
- 어이없네ㅋㅋㅋ 게임 아웃 (물리)
- 개같이 멸망ㅋㅋㅋㅋㅋㅋㅋㅋ
- FWX 식 디스토피아 개막
- 인장 왜 안 띄워 G3? 인장 왜 안 띄워 G3? 인장 왜 안 띄워 G3?
- 로켓(발사)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통로 에어본 이거 버그 아직도 안 고쳐졌냐고오오오오오!”
“공중 부양 간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뒤에는 FWX의 쇼맨십이 있었다.
#
퍼즈 후 마저 진행된 첫 경기는 꼭 서커스 공연 같았다.
힘 대 힘이라기보다는 계속되는 심리전과 느린 속도감으로 진행되는 경기.
다만 G3가 FWX를 속이려고 했을 때 FWX는 속아주지 않았고 FWX는 속여넘겼다는 점이 달랐다.
라인을 스왑했던 선수들도 상상 이상으로 해당 위치에 대한 숙련도가 높았다.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정글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서 의외였던 건, 초반에는 권건만 노리던 G3에서.
중간부터는 거미만 봐도 화들짝 놀라서 피하는 기색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선수 개인 캠에서도 드러날 정도였다.
일부는 LOS에도 ‘거미 안전 모드’가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어쨌든 일부였다.
유쾌했던 첫 번째 세트와 달리 두 번째 세트는 조금 더 엄숙하게 진행됐다.
물론 그들은 모든 순간 진지했다.
정서가 한국과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예능감을 가지고 있다는 게 승부욕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힘을 정확하게 가늠해보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그건 더 확실한 패배로 끝이 났다.
하지만 초반까지만 해도 분명히 FWX가 불리했다.
최근 한국 리그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북미에서 고평가받던 서폿픽 레오니.
G3 서포터 메르시하트의 시그니처 픽인 레오니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에 선픽했던 유상준의 노틸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탑으로 돌아간 이유찬은 크샨테를 들었지만 뜻밖에 상대 탑 프레디가 유물 AD 케낸을 들고나오는 당혹스러운 대응을 보여주면서, 초반까지는 어떻게든 G3의 의도대로 흘러가는가 했는데.
“스으으으으으으으티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일!”
“믿고 있었다고오오오오오오!”
“권건 그는 신인가? 그는 신인가? 그는 신인가?”
작전명 건이야.
“아주! 다! 자기 거라고! 자기 거라고 말하고 있죠! 예?!”
“여태까지 오브젝트를, 전부, 전부, 저어어어어어어언부 뺏었죠!”
“첫 번째 용이야 바텀에서 도와줬다지만! 지금 뺏은 거로만 영혼을 모았잖아요!”
- 무친 대도ㄷㄷㄷㄷ
- 고봉밥 잘 먹고 갑니다77ㅓ억ㅋㅋㅋㅋ
- 나눔추ㅋㅋㅋ
- 스프라익 거의 셔틀 아니냐고ㅋㅋㅋㅋㅋ
- 야 늑대 먹고 용 가져와ㅋ 잔돈으로 니 목숨도 가져와라ㅋ
- 건아치;;; ㄷㄷ 협폭 칭송합니다
“이거 진짜 억울한 일 아니에요? 아니, 내가 G3면 잠도 안 올 것 같아요! 이게 말이 돼? 말이 안 돼! 으아아아!”
“뺏긴 게 내 탓이야? 다 같이 지키자고 했어 안 했어?! 나 정글러 하기 싫다! 정글 돌기 싫다! 저 그냥 탈주합니다!”
결국 그는 유럽이 만들어내는 혼란을 정리하는 것은 한 사람의 선에서 가능한 일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게! 지금 이게! 권건 선수가! 정글 균형을! 아예! 무너뜨렸다는 점이에요!”
“지금 이 선수가 가리는 픽이 없잖아요! 1세트에서 앨리스? 권건 선수가 이걸 국제전에서 보여준 적이 있었나요?”
“아니오!”
“그럼 이번 세트에서 한 정글 섀코는요?”
“아니오! 이것도 처음 보여줬어요! 요즘 대회에서 이걸 누가 써? 이번 메타, 지난 메타, 아니 최근 2년 기록 다 합쳐도 오로지 북미에서만 나왔던 정글 섀코입니다! 유행한 적 없었던 코리안 시크릿 웨퍼어어어어어어언!”
“갱도 안 가! 오로지 스틸만을 위한 릭트쇼! 그냥, 지금 완전히 용도 변경을 했다 이거에요!”
유럽이 스왑을 하면 스왑으로.
잊혀진 픽을 하면 더 잊혀진 픽으로.
“거미부터 시작해서 광대 공포증까지? 이거 오늘 유럽 선수들한테 단단히 포비아 심어주고 있습니다!”
- 공포겜 수듄ㄷㄷㄷㄷ
- 아ㅋㅋㅋㅋ 고대의 분쟁 유발자 섀코ㅋㅋㅋㅋ
- 그거 완전 시즌 3, 4 아니냐ㅋㅋㅋ 탑 대장군 시절
- 그리고 정글 인권 바닥 시절ㅋㅋㅋ
- ??? : 자동 평타로 먹음 ㅠㅠ ㅈㅅ해요ㅠ
- 유일한 대처법은 섀코를 밴하여 봉인하는 것 뿐ㅋㅋㅋㅋㅋ
- 할아버지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경기를 보던 사람들은 이게 한국과 유럽의 경기라기보다는 유럽과 유럽의 경기 같다고 평가했다.
그대로 유럽으로 구단을 이전하면 안 되겠냐고.
그리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권건이 무대 인사를 할 때 바람이 불었다’고 한 개소리 역시 이런 플레이에 따라 아름아름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도 물어보면? 아니요! 저것도 물어보면? 아니요! 그러니까 지금 막을 길이 없다는 얘기에요!”
어쨌든 확실히 픽부터 플레이까지.
한국 팀이 나온 것 같은 ‘정상적인’ 경기는 아니었다.
“FWX 더 정글러! 유우우우우럽 절단기!”
“위기는 있었지만! 패배는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결국 두 번째 세트도! 한국의 자랑 FWX가 승리르으으으으으을 가져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음 세트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 다음 세트에는 뭐 띠모라도 하려고 그래?
- G3라면 킹능성 있다ㅋㅋ
- 선 존나 잘 넘는 애들ㅋㅋ
- 쟤네 아직도 퍄이크 하냐?
- ㅋㅋ쟤네가 보여주면 패치되잖아ㅋㅋ
- 레오니랑 AD 케낸은 패치 안 될 것같은뎈
- 아ㅡㅜ 이번 결승 끝나고 권건때매 섀코 또 무덤가겠네; 안 그래도 바닥없는데..
다만 사람들의 예측은 한참 부족했다.
“이렇게 자꾸 재밌게 만들어주면.”
“우리도 재밌게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
“인정함.”
다른 팀을 만났다면 이렇게까지 심화되지 않았을 FWX의 픽과 플레이 양상이.
FWX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
#
경기 시작 전 FWX를 향해 휘파람을 보내던 유럽 선수들은 두 번째 경기 내내 침울해했지만.
결국 세 번째 세트를 맞아 마지막으로 즐기자는 태도를 내보였다.
그렇게 3세트.
각종 포비아를 겪은 정글러 스프라익을 대신해 G3의 서브 정글 윤도형이 출전했다.
“오우야.”
“우리 도형이 왔니?”
“너무 반갑다.”
픽창에 루루를 띄우며 인사를 건넨 곽지운이 사일런트를.
한때 잠시나마 윤도형이 앉았던 자리에 앉은 최은호가 마지막으로 트타를 픽했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자 선수들이 챔피언을 교환한다.
“사일이 미드일테고, 그라 정글일까요?”
“그럼 탑 트타? 아니면 탑 사일에 미드 트타?”
카운트 다운 끝.
“응?”
로딩은 시작됐고.
제법 평범한 줄 알았던 FWX의 픽은 평범하지 않았다.
“...”
“...”
“...”
“누가 말 좀 해요.”
정말 드문 정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안은우 캐스터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게임을 중계한 것이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사람의 말문이 막히는 건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어쨌든 LOS에 관한 수다라면 빠지지 않을 사람들이 양옆에 앉아있었으니까.
“상당히 이례적인, 에, 음. 그러니까 FWX가 G3에 맞춰서 한바탕 신나는 춤을 춰 주겠다는, 뭐 그런 부분인 거잖아요. 그쵸? 예.”
- 갑자기 이렇게?
- ??? 로딩 왜 길어짐???
- 오류 있었던 거 아님?
- 아 그랬을지도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건데, 이게 지금 준비 시간이 살짝 오래 걸리고 있어서 정확한 답은 저희도 모릅니다. 그래도 중요 포인트를 정리해드리자면..”
베테랑 캐스터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뭔가. 뭔가 있었죠. 하지만 지금 준비가 길어지는 건.. 네, 아. 네. 단순 중계 UI 오류 때문에 길어지고 있는 거라고 확실히! 전달됐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본 게 여러분이 본 거고, 여러분이 본 게 제가 본 겁니다!”
- ??
- 근데 수진이 형이랑 동현이 형은 왜 얼었어ㅋㅋㅋ
- 안 얼겠냐?
- QUEUED..
“예..”
그때 남동현 해설이 먼저 깨어나고.
“예에에에..!”
뒤이어 메아리처럼 현수진 해설이 깨어난다.
“맞아요! 스펠, 바꿨죠? 원래 자동으로 들어가 있는데 손으로 눌러서 정말로 바꾼 게 맞죠?”
“그러니까 지금 이게, 버그나 화면 오류가 아니라 여러분!”
“화면! 화면 돌아옵니다!”
“경기! 시작됐습니다!”
“진짜야..! 픽이 문제가 아니라 포지션이 문제야!”
“진짜로.. 권건이.. 권건이.. 미드야아아아아아아아악!”
- 꿈☆은 이루어진다????????
- 우미권..?
- 와.. 38번 버스 같은 남자.. 기다릴 땐 안오고 안 기다리면 오지;;;;;:
- 나는 1세트부터 예상했다 이 말이야~~~;;;;;;;;
- 날이 적당해서.. 포변을.. 해봤다..
- 안녕하세요 신입 미드 월즈 결승 데뷔 권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