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_날이 좋지 않아서
LOS라는 게임이 그렇다.
어떤 챔피언을 하느냐에 따라 내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 역할에 맞춰 움직이게 된다.
장인이라는 게 그래서 생기는 거잖아.
자길 꼭 닮은 챔피언이 있을 때.
전우협에서 들고 일어날 이야긴가?
어쨌든 이 게임에서.
잠깐이지만 나는 거미들의 여왕이 된다.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인 존재.
앨리스는 은근히 ‘내 성향’으로 꼽히는 브루저 계열이나 탱커 계열과는 상반되는 이미지의 챔피언이다.
상대도 나의 낮은 숙련도를 기대하면서 이걸 쥐여줬을 거다.
근데 사실 싫어하지 않아.
팀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앞에 서기보다는 은둔자처럼 숨을 없앤다.
감각 끝에서 가는 실을 뽑아낸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이 넓은 협곡에 거미줄을 친다.
무방비한 인간 형태.
발뒤꿈치를 세우고 사뿐히 걷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도록.
코끝을 살짝 올린다.
협곡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바람이 분다.
거미줄이 흔들린다.
감각이 모여든다.
아직 봄의 협곡인 이곳.
양지바른 곳에는 개구리가 뛰어다닌다.
실이 흔들린다.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
칼날부리의 불온한 움직임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
진짜 뭐가 보이냐고?
아니, 여태까지 말한 거 다 개소리야.
개구리랑 칼부를 보고 알긴 뭘 알아.
그런 꿀팁이 있으면 저한테도 좀 알려주세요.
그냥 당연한 사실 때문이다.
정글러 포지션이 그렇고, 나라는 사람은 더 그렇다.
글로벌 무대에서도 항상 1순위 어그로꾼이라는 거다.
#
“헤이, 짐머.”
“침머. 짐머가 아니라. 침머.”
독일 출신의 게이머이자 글로벌 게임단 G3의 주전 원딜, 하지만 지금 미드에서 말파를 잡고 있는 프로게이머.
“까탈스럽긴. 어차피 다 짐머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짐머. 준비됐어?”
“나도 알아. 참견하지 말아줘.”
“오케이. 오케이. 너의 말파는 믿을만하니까.”
‘짐머상’은 때를 잘 아는 선수였다.
독일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동아시아의 문화에 매료됐던 그는 콘텐츠를 즐기기 좋은 나라, 한국으로의 프로게이머 진출을 꿈꿨었다.
하지만 한국 프로게이머 시장은 보통 레드 오션이 아니었다.
연습량이 지독하다는 소문도 있고.
아무튼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이 화랑이었던 짐머는 당당했다.
“권건이 Gun’d 하기 전에.”
장래 희망이 닌자였던 정글러, 스프라익은 입술을 할짝대며 씩 웃었다.
“제아무리 큰 물고기라도 한국은 작은 연못에 불과하단 걸 보여주자고.”
그들은 초반 게임 굳히기를 계획했다.
사실 상대도 탑과 미드를 돌리는 데에 좀 당황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초반부터 올인 싸움을 걸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한국은 그렇게 게임하는 나라가 아니니까.
그 리그에 속한 FWX 역시 마찬가지다.
바도가 뚫어준 길 끝.
수풀에서 숨을 죽인다.
불현듯 이 팀 용병 선수인 폴리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권건을 조심하라고.
가능하면 기회는 다른 데에 사용하라고.
그래서 G3는 오히려 ‘기회’를 만들어주는 챔피언들만으로 조합을 짰다.
그러니까 충분할 거다.
“솔랭에서 만났을 때 보니까 그렇게 대단하진 않던데?”
“미안하지만 쟤 랭크 넘버 원인데. 그리고 경기에서는 더 괴물이래..”
소심한 서포터 메르시하트가 중얼거렸지만.
“하하! 난 하나도 안 무서워. 세상에 괴물이 어딨냐? 내 손으로 죽여주지.”
권건과 같은 포지션인 정글러 스프라익이 빈정거렸다.
“스프라익,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그건 마치.. 공포 영화 플래그 같이 들려..!”
메르시하트가 절규했지만 상관없다.
쟤도 사람인데 여러 번 두들기면 넘어가겠지.
#
전투를 예측한 두 팀이 내세운 것은 각각 정글러와 탑이었다.
권건은 점 부쉬 근처를 배회하며 제 영역을 또렷하게 표시하고 있었고.
시작을 알릴 짐머는 틈을 엿본다.
“말파, 말파, 숨죽여서.. 숨죽여서..! 원딜 말파의 힘을 보여주고 싶죠, 짐머상?!”
“이거 권건이 다가와요?! 다가와요?! 한 걸음, 한 걸음만 더?!”
나풀나풀 움직이는 거미 여왕의 몸짓이 먹음직스럽다.
“두 팀의 구성이 모두 후반을 바라보고 있는 조합이긴 한데, 이건 평범한 해석입니다. 사실 자르반은 초중반에 가장 강하죠. 특히 궁을 처음 사용하는 순간이 가장 강합니다!”
그리고 위태로워 보였다.
“FWX는 국지전에서는 좋지만 한타를 봤을 때 썩 잘 맞는 느낌은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바로 끊어서 흔들어버리겠다는 심산!”
“사실 G3 같은 경우에는 말 그대로 CC 아무거나 한 개만 들어가면 줄줄이 따라오거든요! 일명 궁 누르면 되는 조합!”
“그래서 G3가 FWX를 순식간에 잡아먹을 생각인 거죠!”
- 위험해 보이냐?
- 그래 보이겠냐?
- 저기 있는 게 차니가 아니라 우리 형인데 긴장이 되겠냐?
너무 빠른 타이밍.
어쩌면 방심하기 좋은 순간.
“이거 알고 있나요? 알고 있어요? 혹시 아나요?”
FWX에서 누군가 짧은 핑을 남긴다.
찍은 사람은 명백하다.
‘거미 새끼’들이 산발적으로 진영을 형성한다.
“어어?”
선수들이 마우스를 짧게 잡는다.
손바닥을 깊숙이 밀착하고 움켜쥔다.
노리는 자와 노려진다는 걸 알고 있는 자, 모두가 ‘그’ 포인트로 모인다.
“말파, 들어갑니까?”
짐머가 바위 같은 몸을 드러낸다.
첫 호흡, 첫 번째 심리전이다.
실수라도 있었던 것처럼 수풀 끝에 불쑥 몸을 걸친 모습이었다.
“안..”
“어어어어어어어?”
“안 갔죠? 인장 띄우고 있죠?”
여왕이 ‘우연히’ 마주친 적과 눈을 마주친다.
분명 깜짝 놀랐어야 할 타이밍인데.
오히려 몸을 틀고 새침한 눈웃음을 흘린다.
“흠!”
긴장의 끈이 팽팽해진다.
첫 호흡이 다시 들어간다.
첫 번째 가위바위보는 여왕이 이겼다.
“들어가..?”
두 호흡, 거석의 파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다.
마치 그게 나무토막 같은 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 가? 또 인장?”
“어어, 타이밍 살짝 놓친 건가요?”
호흡의 반의반.
망설인 게 아니다.
두 번째 심리전이다.
아주 짧은 시간, 두 사람은 한바탕 기 싸움을 하고 있다.
말파의 존재 이유인 궁극기를 단 한명에게 꽂아?
아니면 계속 페이크?
답은 정해져 있다.
꽂을 거다.
하지만 권건은 이걸 확신할 수 없겠지.
감각의 경종이 울린다.
짐머는 그 흐름을 느낀다.
아니야.
아직 아니야.
“허억!”
세 번째 호흡.
움찔, 스톱 무빙.
여왕은 속지 않는다.
흐느적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아니군요! 딱히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긴, 곧 있을 전령 싸움 생각하면.. 근데 왜 자꾸 인장을.. 거 참..”
- 좀 꼽네? 들어오지도 않을거면서 왤캐 재
- 쟤네 트레이드 마크잖아 쿨한 척
- 대응 좀 해줘 형들 나 열바다
- 우린 왜 인장 안하냐고!
세 번째 호흡의 반의반.
어깨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G3, 전열을 가다듬으러?”
그리고 반의반의 반.
모든 사람이 안심하고.
호흡을 토해내기 위해 갈비뼈가 들썩이는 순간.
“잇!”
번쩍.
“이.. 엇.. 으, 엇!”
- ㅇ
- ㅗ
맞점멸.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건 정말 갑작스러웠고.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정말 순식간이었다.
“멈출 수 없는 히이이임이! 빗나..갑니다!”
- 인간 미끼
- 저걸 뻔히 보이는 데 쓰냐? 우리 형인데?
- 거미 눈나 헤으응
- 맞는 게 ㅄ아님?
- 그건 일단 피하고 말씀해보세요
“이거어어어어어어어얼! 점멸 반응하나요! 이거어어어어어얼! 완전 엇박의 엇박의 엇박의 엇박자로 들어왔는데!”
“위빙을 몇번이나 했는데! 위빙을! 이거 권건한테 심리전 전혀 안 먹혔어요! 궈어어어어어어어언거어어어어어어어언!”
“누가 알려줬어? 칼날부리 너야? 네가 말했어?!”
싸움이 시작된다.
“오.. 이런.”
“놉, 기회는 더 있어.”
누군가 말했다.
“여왕님의 고치! 고치이이이이이이!”
“맞았어요! 이거, 맞으면 끝입니다!”
“짐머상의 빛보다 빠른 인장 판단!”
“궁 쓰면서 인장 같이 띄우는 거 어떻게 하는 건데!”
- 우리도 인장 써달라고!
- 왜 오늘 점잖게 구는 거야!
- 차니 미드 가서 긴장했어??? 왜 인장 안 써?
- 포변 좀 더하지ㅋㅋㅋ
- 뭔 포변을 함;
- 아니 그렇잖아 어차피 저쪽에서도 숙련도 포기하면..
무대가 뜨거워진다.
G3 선수들은 그 열기를 느낀다.
“그냥 고!”
“예아, 죽여버려!”
실패?
자주 겪는 일이다.
남은 기회는 많다.
유쾌한 또라이들이 숨을 너무 오래 참았다.
숨어있던 G3 선수들이 모두 웃으며 뛰쳐나온다.
“으아, 으아, 그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거! 시워어어어언하게 달려듭니다!”
“쏴아아아아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한ㅡ타ㅡ의 G3!”
달려든다.
그야말로 덮어놓고 싸우자는 식이었다.
FWX가 고지식한 팀이었다면, 트릭스터였다면 오히려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스킬이 빠졌는데 싸움을 건다?
뭐가 숨겨져 있다는 뜻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주 만나지 않는 해외 팀.
낯선 장소, 드문 전략.
보통은 그래서 심리전에서 진다.
체급 차이가 나는 팀이 갑자기 덮어놓고 싸움을 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라랑 말파가!”
“어깨 형님들 바로 달려듭니다!”
하지만 FWX는 아니다.
“그윈과 제이슨 바로 대응! 양팔 꽉 붙잡고! 야, 겨뤄보자! 야! 니가 힘이 그렇게 세? 니가 유럽 일짱이야?! 앙?!”
순식간에 전장이 달아오른다.
지루한 심리전은 끝났다.
이제 무력 시위다.
정돈되지 않은 싸움은 결승답지 않게 엉망진창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 예리한 공격이 섞여 있다.
“술토오오오오오옹 나가신다!”
탑, 프레디의 감쪽같은 궁극기.
권건을 향한 두 번째 도전이다.
“..리고!”
즉각 플립.
몸을 모로 꺾은 권건이 하늘로 훌쩍 뛰어든다.
“줄타기! 흘립니다!”
“네! 또 흘렸어요! 이걸! 이걸 또! 이쪽을 노리나요!”
“권거어어어어어어어어언! 투우사처럼! 날렵한! 몸놀림!”
아슬아슬한 거미줄에 매달린 그를 향해 쉽게 포기하지 않는 적들이 달려든다.
“내려오면 권건부터 죽여!”
G3의 누군가 외쳤다.
2초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다.
거미는 하늘에서, 나머지 선수들은 땅에서 시선을 교차한다.
FWX의 선봉장인 탑 김예성의 그윈.
그리고 뒤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미드 이유찬의 제이슨.
그가 내려올 자리 주변으로 깃털 진영을 형성한 곽지운의 자이야.
뒤에서 들어온 가짜 탱커 유상준의 로칸.
그리고 G3의 원딜이 미드 말파를, 미드가 원딜 이즈를 하고 있다.
서로 바뀐 역할극 속에서 다들 제 일을 해내고 있다.
신비의 숲에서 일어난 희극 같다.
하강을 준비한다.
“건을 죽여!”
“이제 노 스킬 노 스펠!”
“내 차례인가!”
조금 이른 타이밍.
“온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려옵니다!”
전장 한가운데로 레펠.
“지금!”
그 순간.
번개같이 움직인 정글러, 스프라익이 자르반의 창을 꽂는다.
세 번째 도전이자 그들이 준비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기회다.
“대애애애격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하지만 낡고 오래된 자르반의 궁극기 틈새.
“그..!”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데..!”
타이밍을 비집고 들어온 이유찬의 강력한 망치 타격.
“근데 이거, 이거!”
수석 호위 기사의 망치질에 유서 깊은 챔피언의 창이 멈칫하는 순간.
“오소이!”
분명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김예성의 바늘이 한 점으로 모여들어 그를 찌른다.
산개해있던 깃털이 곽지운에게 빨려 들어가며 적의 발을 묶는다.
- ㄷㄷㄷ 엔서니급 궁 편파 판정
- 여기만 보고 있었냐고
- 이 개같은 충신들..
“오히려 바로! 아, 이거! 이거! 아까 권건한테 스킬 투자 과잉!”
“이런 난전에서 바도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G3가 준비한 기회는 모두 사용됐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은.
“자르반이 위기!”
거미줄에 걸렸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이이이!”
“이러면..!”
당당하게 기회를 논했던 정글러 스프라익의 창이 미끄러진다.
“쓰로잉! 쓰로잉! 하아아아아드 쓰로잉!”
문득.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 같다.
“비이이이이이이이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