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날이 좋아서
기세는 잡았다.
유럽 팀의 콧대를 꺾어 놓는 데에는 이런 게 제격이다.
물론 나도 단 한 번도 이런 걸 해본 적은 없다.
항상 경기 생각하기 바빴지.
근데 이게 되네?
하지만 사람들이 왜 그렇게 굳었는지까지는 나도 잘 모른다.
내 존재가 충격적이었나.
그런 걸로 해두자.
이런 쇼맨십은 일부 북미 선수들이 환호로 이기면 경기에서 이긴 것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착안했을 뿐이다.
앞에서 이유찬이 분위기를 만들었으니까.
“Fuxk it.. baylife..”
물론 유럽과 북미는 다르다.
꾸준히 결승이나 준결승에 오르는 유럽, 평가는 좋지만 이상하게 성적이 안 나오는 북미.
세대를 지나면서 많이들 변해왔지만 유럽은 전형적으로 ‘Man, Maketh, Game’을 중시한다.
영국 신사 이야기 아니냐고?
브렉시트는 어떻게 된 거냐고?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유럽 리그에서 활동하는 영국 출신 선수들도 있거든.
어쨌든 말하자면 유럽은 ‘몇 위를 하건 세계 방송 1위는 우리가 먹을 테니까 상관없다, 게임 문화를 만들어가는 건 우리’ 정도일까.
북미는 생각보다 열심히 한다.
아까 누군가 말을 던졌듯, ‘Fuxk it, baylife’는 캘리포니아처럼 항상 좋은 기후를 가진 곳에서도 삶을 즐기지 않고 연습실에 틀어박혀 게임만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서핑이나 일광욕처럼 야외 활동을 하기 좋은 곳에서도 굳이 게임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되고.
반대로 그렇게 대단한 선택을 하셔놓고도 성적이 그것밖에 안 되나요, 같은 비판이기도 하다.
북미는 이상하게 예선까지 잘하다가도 본선에서는 글로벌 호구가 되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유럽 선수들이 우리를 향해 중얼거렸으니 삶의 회한 같은 걸 가졌다고 보면 되겠지.
이럴 거면 일찍 떨어진 북미 팀 따라 서핑이나 하러 갈 걸 그랬다는 뭐 그런 말이다.
우리한테 쇼맨십에서 져버렸으니까.
“렛츠 고! 렛츠 고!”
“고 FWX! 고 FWX!”
“이유찬. 소리 지른 값은 해야지.”
어쨌든 쇼맨십이란 게 그렇다.
이기면 본전, 지면 참혹하다.
귀국해서 물어뜯길 생각을 하면 끔찍하잖아.
우리나라 선수들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지금 맞붙는 G3 같은 경우에는 져도 뻔뻔하게 SNS를 올리는 걸로 유명한데 그게 매력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 이런 거긴 해.
“오케이.”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기는 게 낫잖아?
“은호, 대기.”
“네네, 이번에는 제가 로열 로더 되어 드립니다.”
“로열 로더 그거 아니라고..”
“지금 뭐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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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일정에 맞춰 순차적으로 공개된 티저 영상의 인기는 대단했다.
서양권 국가에서 비치는 아시안 프로게이머의 모습이란 외형적으로는 매력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
인종 얘기가 아니다.
유독 두드러지는 선수들은 뭐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굽어진 목, 심각한 디스크 문제, 메이크업을 받았는데도 여기저기 튼 피부, 불룩 튀어나온 배 혹은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체격.
직업병이라기에도 너무 심했다.
해외로 진출한 아시안 코치들이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가 ‘혹시 선수들을 방 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느냐’ 였으니까.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노력은 많았지만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플레이 스타일 역시 분명 강하고 놀랍긴 하지만, 스타성으로 보자면 떨어졌다.
항상 보여주던 걸 보여주는 건 ‘재미’가 없다.
그래서 유럽 선수들은 분명히 정신 승리할 부분이 남아있었다.
그들의 리그는 단순히 승점으로만 평가받지 않았으니까.
머리털 개수로 붙지 않는 이상 태도나 여유에서는 질 리가 없다.
“우효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런데 달랐다.
“이거 맞나요, 우효오오오오오오오오! 왓 더, 핵!”
지난 한국 월챔 때도 글로벌 중계에 얼굴을 비쳤던 FWX였지만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선수들의 얼굴은 말끔했고, 거북목이 심하지도 않았으며.
꾸준히 운동했을 것이 분명한 체형과 무대에서의 돌발 상황에서도 자신감 있는 태도.
“지금! 이거! G3 선수들이! 올 미드로 밀려오고 있습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경기에서도 달랐다.
“근데 그걸 받아쳐요? 받아쳐요? LKL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나요?”
“뭐야! 뭐야! 정말 어어어어어어썸 플레이!”
이게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솔직히 G3가 이즈를 골랐을 때부터 알고 있었죠? 그랬잖아요, 라아아아아온!”
‘진짜 챔피언’ 같은 느낌.
“그래서 스왑한 거죠? 그래서 스왑한거잖아요오오오오오!”
게임 실력만을 보고 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외모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도, 케미나 무대 매너, 인터뷰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FWX는 그 대부분을 아우르는 팀이었다.
세계에서 모여든 팬들은 FWX가 이런 경기조차 이겨서 스타성까지 보여준다면 그 마지막 조각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FWX와 G3가! 라인 파괴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아아아아아아아악!”
그걸 보고 있는 한국 해설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이게, 이게에에에에에에!”
바로 이런 경기.
“나는 이걸 받아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한국에서 FWX가 챔피언을 돌린다면.
유럽에서는 라인을 바꿔버린다.
“이게 진짜 라인 파괴야! 진짜 라인 파괴라고오오오오오오! 라인 바꿔! 사람도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여기는 자유 경제 구역!”
“그러니까, 지금 G3가! 결승 첫 번째 세트부터! 그라, 자르반, 말파, 이즈, 바도를 잡고 플레이하고 있는데요!”
“사실 이것도 정상은 아닙니다! 미드에서 말파 하지 말라고!”
“근데 말파를 잡은 선수는 또 미드 선수가 아니야! 원딜 짐머상이 미드로 갔습니다!”
“아니, 말파를 좋아했으면 원딜을 하지 말았어야지!”
- ㅋㅋㅋㅋ존나 골때려ㅋㅋㅋㅋ
- 이게 대체 무슨 ㅋㅋㅋㅋ
- 하여간 미친 새끼들ㅋㅋㅋㅋ
남동현 해설은 열을 올렸다.
“근데요!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도 제정신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라온 선수가 그윈을 잡았는데! 미드에 선 게 아니라 탑에 서 있습니다!”
- 띠요옹?
- 형이 왜 거기서 나와?
- 지금 봤니?
“탑의 차니 선수는 미드에서 제이슨을 플레이 중이고!”
“그러니까 FWX는 그윈, 앨리스, 제이슨, 자이야와 로칸 조합인데!”
“맞아요! 미드 제이슨도 사실 이상해! 근데 파일럿이 차니야! 미드에 차니!”
“탑이랑 미드가 아예 라인 스왑을 해버렸어요!”
“왜냐? 지금 이거 G3가 완전히 뒤집어버리려고 했던 거거든요!”
“근데 같이 뒤집어버렸어요!”
FWX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었다.
G3가 전략을 넘어서는 어떤 키를 들고나올 것을.
경기는 밴픽부터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
보통이라면 대응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보통이라면.
“이게 도움이 되네.”
작년, 정글러 윤도형이 서포터로 출전한 경험 이후.
“김미드. 미드에서 CS를 놓치는 게 말이 되냐? 라인이 이렇게 짧은데.”
“탑. 탑에서 갱을 당하는 게 말이 되냐? 이렇게 안전한데.”
FWX 선수들은 다양한 라인 플레이를 해왔다.
솔랭에서 걸렸을 때의 대응 정도가 아니다.
때론 권건이 다른 라인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코치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하물며 이질적인 서포터 유상준이 들어온 이후부터는 더 그랬다.
이 새로운 옷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권건이 해줬고.
“근데 지금 그러니까! 로칸을 잡은 사이다 선수가..”
선수들은 그저 연습만 하면 됐으니까.
그리고 그건 단순히 해당 라인에 ‘섰다’ 정도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었다.
안되면 될 때까지.
잠잘 시간도 없애고 끝없이 갈구는 지독한 FWX 정글러의 손에서 완성된 것은 또 다른 개념이었다.
“이건 또 뭐야?”
이적의 길을 걷는 자.
절대 지지 않는 대 유럽 무기 유상준.
“처음부터 탱템 가고 있죠? 이거 뭐야? 이거 제정신이냐고! 갑옷 가냐?”
“아니, 그게 충분히 가능하긴 한데.. 왜냐면 지금 라인이 비어서!”
- 선생님 그런 식의 새로운 서포터를 원하는 게 아니었잖아요
- 이건 큰 반역입니다..
- 원딜 자이야는 어디로
- 미드를 먹고 있습니다
- 그럼 미드.. 아니.. 탑은 어디로..
- (탑이었던) 현재 미드 차니는 탑으로 갔다가 내려오고 있고.. (미드였던) 현 탑 라온은 정글을.. 그리고 권건은..
- 용을 먹고 있습니다..
- ??? 누가 어디라고?? 안 해 시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또 지금 G3가, 처음부터 게임을 그렇게 길게 보는 게 아니라!”
“네, 그러니까 미드에서 말파 짐머상 선수가 7레벨을 찍는 순간!”
“이름 말하지 마요, 나 헷갈려! 짐머상은 원딜이잖아!”
“그래, 그러니까 원딜이 미드!”
“혼돈! 파괴! 망각!”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내 라인 돌려줘!”
라인과 픽이 뒤섞인 광란의 도가니.
“그러니까 이때 바로 전령으로 소집되는 FWX를.. 노립니다아아아아악!”
“올ㅡ미ㅡ드! 모오오오오오오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이게 G3가 바랬던 그림.
탑으로 가야 할 것이 미드로 와있고, 서폿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탑으로 가며.
각각 해당 선수들이 평소에 하던 챔피언과 전혀 다른 챔피언을 잡게 해 ‘일반적인’ 플레이 예측이 쓸모 없어지게 만들어버리는 챔피언을 잡게 만드는 것.
그리고 LKL의 강점인 분석 플레이에 균열을 만들고 그걸 비집고 들어가 단박에 부수는 전략.
우습기 짝이 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밴픽 자체는 의외로 꽤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호흡을 오래 맞춰왔으며 선수 수명이 길다는 점을 살린 것이다.
일부 숙련도 부족을 감수하더라도 피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이 구성은 유럽 강호들이 자주 사용해왔고.
실제로 과거에 한국 팀들도 패배한 적이 있었던 모 아니면 도 계책.
휘둘리면 끝장이다.
“아, 이걸 진짜 하네.”
근데 그걸.
한국 팀에서 똑같이 맞대응하고 있다.
같은 라인의 선수 대응이 아니라 이들 역시 상대의 분석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건이 말은 틀린 적이 없다니까. 내가 말했지?”
“충신 김미드.. 지겹다 지겨워. 아까 너 입장 전에는 권건 저주했잖아.”
이유찬은 헤드폰을 대충 흔들어서 귀를 긁었다.
“우리 집 돼지 따라 하니까 반응 좋던데. 오히려 놀라운..”
“하.. 재미없어.”
“정미. 동맹. 파기. 계획. 실패.”
“유상준이 이쿠에쿠하면서 들어오는 건 나만 봄?”
“C가문 사람다웠지. 머리는 언제 미냐?”
“...”
“오. 서폿 감정 표현 지렸다. 방금 나한테 Q 날리고 감. 와, 미드 화개장터네. 사람도 많이 들르고 좋다 야.”
“원래 절대 그렇지 않아. 미드는 숭고하고 고결한..”
여기가 해외 결승 무대가 맞나.
걱정 따위가 무색한 분위기에 권건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 모였어?”
“거미줄에서는.. 거미만 안전하지.. 헤으응 앨리스 눈나 나 머큐리 캐논 준비 완료시마스.”
이유찬의 말에 권건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선수들의 적응은 부족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남의 비장의 무기를 엿보고 다양한 플레이를 경험하게 해주는 건 좋은 일이다.
“가자. 거미새끼들아.”
“거지새끼?”
“거미새끼.”
“헤이, 건이 형님. 새끼 거미 아님?”
“끼에. 끼에엑. 새끼.탱커. 갑.니다. 이크! 에크!”
"쟤 누나 얘기 이후에 진짜 막 나가네? 나라고 못 할 것 같아? 끼기끼기! 미드 갑니다!"
"예성아..”
“여기가 광신도 클럽이냐? 혹시 여기서 내가 제일 정상인? 끼요오오옷!”
“주장의 이름으로 말하는 데 그건 확실히 아니다.”
"원딜. 서폿.은. 한. 몸. 형도. 해라."
"끼에에..”
어차피 1세트.
이기건 지건 한 세트.
하지만 이건 첫 번째 세트.
“5판 3선승제의 경기에서는 언제나! 언제나 첫 번째 게임이 중요합니다아아아악!”
“바도의 신비한 차원문! G3, 매지컬 저어어어니! 옵니다!”
“여기서 우리 선수들이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FWX, MSL에서 한국의 이름을 빛내 줄 수 있는 유일한 팀! 그들이! 오늘을! 좋은 날로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 건지!”
“오늘따라 왜 바람은 또 완벽한지!”
“그냥 모르는 척! 와드 못 꽂은 척!”
“지워버린 척 딴 데를 바라볼까!”
“옵니다, G3!”
“나는요! 우승이! 좋은걸!”
- 이쿠, 하나 둘!
- 매 지컬 저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