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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66화 (266/326)

266화. MSL에서 생긴 일

안타깝지만.

“스투페파이! 스투페파이! 아, 이거 왜 마법이 안 나가!”

“여정이 종료되었습니다..”

“이 게임 사기야!”

트릭스터는 G3에게 패배하면서 결승에 올라오지 못했다.

글쎄, 불안불안했는데 이 정도면 뭐.

강팀 몇 개가 빠져나가면서 오히려 기대보다 나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는 CQG를 이겼고 G3와의 결승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러니까 윤도형을 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것도 꽤 신기한 일이다.

나는 내가 밀어냈던 정글러를 이런 의미 있는 자리에서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당장 내일이 결승이다.

우리는 모든 일정을 숙소 안에서 해결했다.

대신 짧은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어쨌든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있었고, 상대가 G3인 만큼 이제 와서 새로운 전략을 준비하는 게 의미가 없기도 해서였다.

대신 ‘조금 다른 연습’을 했다.

이건 나중에 보면 알 거다.

“건이 무슨 생각 하냐?”

“레벨리오! 정체를 드러내라!”

나는 또 내 방에 모여서 떠들어대는 선수들을 뿌리쳤다.

연습실처럼 만들어놓은 공간이 있긴 했지만 공용 공간은 타국 선수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어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다 보니 우리는 주로 제 방에서 연습하곤 했다.

이번에 좋은 성과를 거두면 다음 월챔에서는 좀 더 공간 마련이 용이해질 거다.

“나 바람 쐬고 온다.”

“바람?”

이유찬이 즐거운 듯 콧김을 뿜어내고.

“바람?”

최은호의 얼굴이 화색을 띤다.

“바람을?”

김예성만 이마를 찌푸렸다.

“멀리 안 나가. 테라스 다녀올게.”

말썽꾸러기들을 정상인에게 맡긴 나는 코치님께 가볍게 인사했다.

김한빛 코치님은 시계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믿을만하지..”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드러난다.

기가 죽지 않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얘들은 왜 해외에서 더 난리를 치는 걸까?

월챔 걱정은 할 필요 없겠어요.

“다녀와라. 빨리.. 너 없으면 애들이.. 아니다..”

끝없이 이어졌던 베개 싸움 후, 코치님은 어디선가 콘솔 기계를 하나 가지고 왔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아이 손에 쥐여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걷는다.

“릴리야.”

안정이 좀 필요한 것 같은데 이 작은 악마는 또 종적을 감췄다.

혹시 해외로는 못 나오나?

비행기 타고 오고 있는 중?

“여기 과일 맛있는데.”

대만 망고가 맛있더라.

“...”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안 나온다는 건, 뭐 바쁜 일이 있는 거겠지.

G3.

이길만한 상대다.

뜻밖의 전략을 들고나오는 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벌이는 경우도 많아서 피로감이 좀 있긴 하다.

한국이 의외로 유럽 팀에게 지는 케이스는 체급 때문이라기보다는 당황해서거든.

그게 단순히 의외의 밴픽이나 뜻밖의 동선 정도의 폭이 아니란 게 문제지만.

근데 상관없지.

여긴 내가 있으니까.

체급 플레이를 즐겨하는 중국보다 의외성 있는 플레이를 하는 유럽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절대 카운터라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테라스에 언뜻 그림자가 비친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들어갔다.

“너!”

근데 또 왔니?

“왔구나!”

“짐 싸고 계실 줄 알았는데.”

밝은 표정의 탈락자 채지한이다.

“맞아. 이제 곧 귀국이니까. 잠깐 와봤어. 진짜 마지막이다.”

채지한은 오히려 후련해보였다.

범인을 찾아낸 명탐정 같은 얼굴이다.

왜지?

졌는데 왜 저런 표정이지.

“네. 그렇군요?”

나는 가만히 앉아 바람을 쐰다.

해가 졌지만 한국과는 다른 5월의 바람이 후덥지근하다.

“잠깐 온 것뿐인데도 저랑 마주쳤다니. 마치..”

많은 이들이 돌아간 호텔은 조용했다.

“권건. 나도 그렇게 느낀다. 기적 같은 일이지.”

“아뇨. 일부러 절 기다리신 것 같다는 얘긴데.”

“...”

채지한은 눈썹을 들썩였다.

“역시 너였구나..”

나 뭐?

“결승 때 차니한테 점멸 동선 지시한 게 너지?”

아닌데.

그거 이유찬이 알아서 한 건데.

“일부러 트릭스터에게 데이터를 보내고 이름을 숨겼던 게, 너지?”

아닌데.

그냥 굳이 드러낼 필요 없어서 그렇게 한 건데.

“사실 니가.. 주인공이었던 거지?”

어.

그건 맞을지도.

“내가 여기 있는 모든 일의 뒤에 네가 있었다.. 너는.. 나를.. 키워내고 싶은 거구나.. 마치 내가 FWX에게그랬듯이.. 이렇게 혹독한 과정을 거쳐서 결국 나를 쓸만한 놈으로 만들기 위해.. 따라와 보라는 이야기였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이러다 대진표도 내가 짰다고 하겠네.

“어쩌면 이번 한국 이슈도, 그리고 모든 큰 그림이 다..”

거..

“너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군.”

착각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요, 미드 선생?

“그래. 네 뜻대로 나는 언젠가 돌아갈 거다. 알다시피 내 ‘근원’은 FWX니까.. 너는 그런 팀을 만들고 싶은 거잖아.”

이건 또 뭔 말이야.

전혀 몰랐던 이야긴데요?

#

Cry out your name.

일부 선수들의 오해와 달리 이번 주제가는 꽤 멋졌다.

한국 결승 무대가 남성 보컬로 힘을 준 강인함이었다면.

이번 MSL 결승 무대는 가녀리지만 절대 쓰러지지 않는 느낌의 여성 보컬이 메인이었다.

다만 무대의 규모가 지역 리그 결승보다는 조금 작은 편이다 보니 소박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신 객석과 경기장이 바짝 붙은 만큼 또 다른 부분이 있었다.

바로 격투기나 복싱 경기장처럼 팬들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나다는 것.

“익숙한 얼굴! 대한민구우우우우우욱!”

메인 진행을 맡은 영어권 캐스터가 유쾌한 목소리로 관객을 끌어당겼다.

어떤 국가의 불참?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도 않았다.

이 리그에서 FWX가 보여준 경기력들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오늘 경기가 그 결정체가 될 것이었다.

“이전 세대의 한국에 트릭스터가 있었다면! 이번에느으으으은 다릅니다! F-W-X!”

무대 입장은 월드 랭킹과 승점을 기준으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대단한 무대장치는 없었지만 이 경기를 위해 대만까지 몰려온 글로벌 팬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결승 무대에 오른 선수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지금부터 그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LKL과 다른 점이 또 있다면 월즈에서는 선수 한명 한명에게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북미나 유럽에서는 승패도 승패지만, 선수 한명의 스트리밍 서비스나 쇼맨십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캐스터는 결승전이 치러질 링 위로 선수들을 호명한다.

“이 사람의 얼굴을 처음 본다고요? 이제 막 1년 차가 된 따끈따끈한 ‘뉴비’냐고요? 아닙니다! 그는 ‘루키’! 그것도 대애애애애형 루키! 탑 라인!”

FWX의 탑, 이유찬부터였다.

“그의 이름은 차아아아아니!”

이유찬은 숨을 들이쉬었다.

“후으읍..”

그리고 입장할 때부터 높게 들었던 양 팔을 끌어내리면서.

“으으으으아아아아아ㅡ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르렁, 울부짖었다.

“아임 차아아아아아아니! 우오오오오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환호에 밀리지 않는 대단한 기합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차니! 차니! 차니! 차니!”

마이크도 없이 생목으로 내지른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전 세계인들이 함성을 질렀다.

물론 약속되지 않은 일이었다.

“와, 저거 분위기를 저렇게..”

대기열에 섰던 FWX 선수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와아아아아아아우! 루키? 루키도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탑! 이 무대의 탑 오브 더 탑입니다!”

샤이 아시안을 벗어난 그 돌발 행동에 캐스터도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더ㅡ 크ㅡ 게ㅡ! 더ㅡ 크ㅡ 게! 나는 차니! 월드 챌린저! 아임 탑ㅡ 오브ㅡ 더ㅡ 탑ㅡ 라이너!”

불과 작년 결승까지만 해도 큰 무대에서 벌벌 떨던 이유찬은 사라지고.

무대 위에는 자기를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의 함성을 양팔 벌려 눈까지 감은 채 즐기는 미친 광인이 서 있었다.

"차니! 차니! 차니! 차니!"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천장까지 올라간다.

“와우, 좋은데?”

하지만 유럽 팀은 당황하지 않았다.

꼭 정해진 리허설대로 이뤄져야 하는 한국식 무대와 달리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장난 아닌데. 나도 저렇게 해야겠어.”

함께 대기열에 서 있던 G3 선수들이 비죽비죽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G3 선수들은 하나같이 또라이.

그중에서도 일인자는 탑, 프레디.

“어떻게 생각해, 권건?”

프랜차이즈 스타에 열중하는 팀들답게.

유럽과 북미의 선수들은 수명이 꽤 긴 편이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바로 잘리는 일은 없다.

팬덤이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기회를 받은 선수들은 대부분 또 그다음 시즌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마련이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긴 만큼 팀웍이 올라가는 부분도 있고.

“글쎄.”

대신 숨겨진 부분도 있다.

신인 선수들이 탄생할 가능성이 한국에 비해 낮고 회전이 느리다는 것.

그래서 코치나 감독 쪽에서 아시아권 감독을 기용해 성장을 이끌어가려고 노력한다.

어느 쪽이 더 낫다거나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제일 곤란하네.”

부적응을 넘어 과적응을 보여주던 이유찬의 모습에 권건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 이유찬이 시간을 끌고 있었지만 곧 제가 나갈 차례다.

“게임은 몰라도 쇼맨십은 우리가 좀 낫지 않나? 뭐, 쟤넨 승점이 전부인 줄 아는 너드들이지만.”

“샤이 보이들은 못 하는 게 있는 법이거든.”

긴 선수 생활 중 자주 왔던 무대라 그런지 유럽 선수들은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럴 땐 먼저 입장하는 게 불리하기 마련이다.

준비되지 않은 발표가 그런 것처럼.

“혹시 너네도 대충 할 생각 없어?”

권건은 대놓고 한국어로 물었다.

“뭐라고?”

“헤이, 폴리. 그가 뭐라고 말했어?”

“근데 쟤 영어 잘하잖아?”

어리둥절한 유럽 선수들 사이에서 권건은 슬쩍 턱을 매만졌다.

“역시 말이 안 통하네. 그치?”

제 팀 선수들을 보면서였다.

“건아 너 지금 한국어로 물어봤는데..”

권건 다음 순서인 김예성이 자그맣게 말했지만.

“문답무용. 말이 안 통하면 행동으로.”

“?”

때마침 밖에서 다음 차례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마치이이이이이! 스톰(Storm)!”

이 대회의 키플레이어인 만큼.

권건의 출신까지 철저하게 조사한 말장난이었다.

“그가 여기까지 불어왔다!”

스탭의 지시하에 FWX 정글러는 천천히 무대로 걸어 나간다.

“레벨 1, 미풍(Light Air)에서 시작된 그가!”

발걸음은 느렸다.

“레벨 6, 강풍(Strong Breeze)을 거쳐!”

캐스터는 풍력 계급을 늘어놓으며 고조시켰다.

“레벨 11, 폭풍(Violent Storm)이 되기까지!”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던 뜨거운 탑의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정글러의 차갑고 느린 걸음.

“수많은 것들을 짓밟고, 부수고, 또 날려버리면서 바다를 건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건 어딘가 기대감을 키웠다.

“FㅡWㅡX, 더어어어어어어 정글러어어어어어어어어어!”

어딘가에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무대 뒤 통로에서부터 시작된 바람이 계곡풍처럼 객석을 휩쓸었다.

어떤 이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객석은 저기압권에 들어섰다.

권건이 무대 가운데에 멈췄다.

으레 함성이 나와야 하는 타이밍이지만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

앞서 탑 라이너가 보여준 것 같은 행동처럼.

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캐스터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는, 어나더, 넥스트 레벨이 될 수 있을까요? 폭풍을 넘어.. 태풍(Hurricane)이..!”

권건이 한 손을 높이 올렸다.

주목.

캐스터는 말을 멈췄다.

객석은 숨을 죽였다.

선명한 시선이 군중을 제어한다.

이미 태풍의 눈에 들어온 듯 고요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태껏 인터뷰에서 원활한 영어 실력을 보여줬던 그였지만.

이건 명백한 한국어였다.

마이크는 없었지만 또렷하고 낮은 목소리.

“FWX의 권건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바람이 맴도는 듯 술렁임이 생겼다.

“정글러죠.”

미풍이 분다.

높게 들었던 손을 꽉.

움켜쥔다.

이제 틀림없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뭐야..”

“바람이.. 불어..”

“이게.. 주게-리앙이 보여줬다는 동남풍?”

사실 원래 원형 경기장 안에는 동선을 따라 순환하는 바람이 분다.

이토록 고요할 일이 없기에 눈치채지 못할 뿐.

어쨌든 이유찬 때문에 한껏 달아올랐던 관객들은 동양에서 온 선수가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기. 이기겠습니다.”

그의 말은 별로 대단치 않았다.

“어.. 어..”

하지만 이유찬이 끌어올렸던 열기를 식히는 차가운 강풍이 불어올 때.

“어.. 와.. 와.. 와아아..!”

권건은 허리를 깊이 숙이지는 않았지만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가슴에 손을 얹은 깔끔한 무대 인사였다.

"정말로!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이이이이이 불고 있습니다아아아아아아! FWX의 정글러, 권건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으아아아!”

“건건! 건건! 건건! 건건!”

“GG! GG! GG! GG!”

그야말로 폭풍이 경기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 헤에엑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ㄴㅇㄱ

- 형.. 그런 쇼맨십은 어디서 배웠어..? 8_8

- 그의 얼굴은 선녀 그러나 몸은 나무꾼

- 키힣히이이히힛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 꺄르륵ㄹ를낄낄낄 오홀호로로록 그는 나의 꿀.. 나의 사탕.. 나의 뀨리파이..

- 이렇게 한마디씩 할 거면 애들 마이크나 좀 채워줘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전혀 예상에 없던 일인 것 같은데ㅋㅋㅋㅋ

물론 무대 뒤에는 더 큰 태풍이 불고 있었다.

“저거 맞아? 저거 어떻게 이겨? 동양의 신비?”

“오리엔탈리즘을 여기에 가져오면 어떡해? 그가 마호토코로 출신이라는 걸 왜 아무도 안 알려줬어?!”

“호그와트 다녀 본 사람? 제발 먼저 나가줘!”

같은 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망했다! 우승 인터뷰만 생각했지 무대 각오는 생각도 안 했는데!”

"마이크 주지 마세요! 저는 안 할 거예요! 노 마이크! 노 모어 마이크!"

“이런 것도 지기 싫어하는 거 실화냐? 저거 인성 이거 맞아? 우리는 어쩌라고!”

“아니, 답은 정해져있었.. 권건.. 너마저도..!”

다음 차례인 김예성이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정글.미드. 두 사람. 신뢰 관계. 드디어. 무너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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