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너였어?
“그거, 전데요.”
우당탕, 벌떡 일어나는 몸짓과 함께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쨍그랑 소리에 잠시 시선이 집중된다.
“무, 무, 무, 무, 무, 무?”
채지한의 안경이 콧잔등으로 쭉 미끄러져 내려왔다.
“무무무무무뭐어어어라고오오오오오!”
어차피 나나 채지한이나 여기서 뭘 먹는 타입은 아니어서 접시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시끄럽다.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로..”
“진짠데.”
안 믿을 거면 묻지를 말던가.
“그럼 스킬 쿨 역계산식으로 아이템 효율 순위 책정한 게..”
“매번 다시 해야 하니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죠. 근데 만들어 놓은 CSV가 있어서.. 아, 이건 안 드렸던가? 문서화할 수는 없어서.”
“이번 버전에서 사용하기 좋은 챔피언 데이터는.”
“그건 쉽잖아요. 이미 프로그램으로도 있는데. 상향된 챔피언을 바탕으로 재가공만 돌리면 금방 뽑죠. 단지 해당 팀 선수의 챔피언 풀 데이터를 3으로 잡고 들어가면 됩니다. 손이 안 가는 챔피언을 강요하면 죽은 데이터가 되잖아요.”
“그래.. 그거 맞춤이었지. 단순 결괏값이 아니라.. 근데 그런 시각이..”
내가 정말 타고난 천재라서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한 건 아니다.
어쨌든 팀을 돌아다니다 보면 얻는 게 있거든.
수많은 코치들의 다양한 시각 같은 거.
경험을 잘 버무려서 ‘선수’로서 할 수 있는 걸 찾았을 뿐.
“팀별 인베 확률은?”
“그건 제 의견 보정이 들어간 것과 아닌 것. 그래서 두 가지 정보로 나뉩니다. 경기나 스크림을 뛰었을 때 알 수 있는 부분과 상대 선수 성격이나 감독의 성향, 픽을 고려했을 때..”
책상머리 분석과 실전 데이터를 묶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경기에서 ‘느끼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채지한은 미스테리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래서. 그래서인가? 그래서 체감 적중률이 월등하게?”
그런 면에서 그걸 눈치챈 채지한도 보통은 아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채지한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지면서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아, 이 시선 알지.
게임 안 하는 시간에는 운동이랑 관리만 할 것 같은데 그럴 틈이 있었냐는 시선이다.
아님 말고.
“니가.. 너? 네가? 그걸 하는 선수가, 굳이, 당연히 해야 하지만, 그, 다들 하지 않는 게 보통, 그걸..”
그런 스타일 좋아하시는구나.
분석하는 선수가 요즘 드물긴 하지.
감독과 코치 시스템이 워낙에 잘 되어있어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제 직업이잖아요.”
내 대답에 채지한은 그대로 굳었다.
“직업.. 직업이라서..”
안경에서 번쩍번쩍 빛이 난다.
“내 완벽한 조력자.. 보고서의 주인.. 멀리 보는 독수리.. 미래를 읽는 눈..”
이건 또 무슨 칭호야?
호칭에 복리가 붙네.
“그 사람이랑 게임을.. 할 수가 있다고? 보고서만 받는 게 아니라.. 인게임에서.. 그런 사람을..?”
문득.
“그게.. 너였어?”
채지한은 혼자 중얼거리며 떨어졌던 식기들을 제자리에 놨다.
시끄러운 소리에 김예성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채지한이 낮고 빠르게 물었다.
“너네 미드. 라온 쟤 몇 살이지?”
“두 살 어릴걸요.”
채지한은 김예성이 오기 전에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그래. 잘 알겠다.”
음.
어쩐지 또 귀찮은 사람이랑 얽힌 것 같다.
#
한국.
MSL 기간 동안 FWX는 팀명으로 불리기보다 ‘지뢰’라고 불리는 일이 잦았다.
“지금 우리 선수들이 MSL에서 이름을 높이면서 국위선양을 하고 있죠.”
“밟으며어어어어어언! 터진다! FWX가 승승장구 중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당장 글로벌 기사부터 해외 포럼 반응까지. 연일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번 MSL!”
그리고 LKL 해설진 역시 그 지뢰들의 현황을 콘텐츠로 만들어 올리고 있다.
“혹시 남 해설, 해외 사이트 새로고침만 하시는 거 아니야?”
“자꾸 해외 사이트 돌면 광고 이상한 거 뜬다?”
“어어. 광고 알고리즘 진짜 이상하던데. 나 게임 관련만 누르는데 자꾸만 야한..”
“나도 실제 취향과는 다른..”
“어차피 한국팀 경기가 야동인데..”
“새 영상 떴냐? 나도 공유 좀..”
“또 시작이니 너네들? 오늘도 열시간 녹화 할 거니? 오늘은 진짜 짧은 토크랬잖아! 10분짜리야, 10분짜리! 딱 광고만 붙이면 된다고!”
“어휴, 자본주의.”
“그걸로 너희 월급 나간다, 이 자식들아!”
모처럼 자리에 모인 해설진도 슬슬 본 시즌 시동을 위해 몸을 풀고 있었다.
사실 본 시즌만큼 꼼꼼하고 정확한 해설은 쉽지 않다.
워낙 일정이 짧은 리그인데다 버전까지 달랐기 때문에.
“일정이 정말 빠르죠?”
본선부터 결승까지가 고작 열흘.
촉박한 일정 속에 선수들은 5전제 더블 엘리미네이션으로 경기를 펼쳤고.
신속하게 탈락한 것은 북미의 두 팀이었다.
“안타깝지만 가장 먼저 고배를 마신 것은..”
“네, 그래도 이번에 북미의 TST, 팀 솔로 탑이 본선까지 진출하면서 꽤 화제가 됐었거든요.”
“북미도 사실상 본선 시드의 4분의 1을 먹은 거니까 최소 4위를 확보한 거나 다름없다는 그런 말이..”
“그게.. 무슨.. 소리야? 25%도 아니고 왜 그게 4위야?”
“이승수 해설의 북미 응원은 이번에도 실패로 돌아갔군요?”
북미는 전통의 강자.
사실상 LOS의 출발이 북미라고 봐도 무방하기에.
그들도 리그를 지배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 이번에 정말 아츄가츄 선수가 그 좀, 무리하지만 않았어도.”
“뭐.. 됐습니다. 어쨌든.”
“그 선수는 항상 새로운.. 동선을 창출하는 데에 재능이 있는 선수죠.”
“그렇죠? 하하하. 너어어어무 새로웠어! 고정 관념을 부쉈다니까? 하하하! 교수님인 줄!”
“근데 이 해설님, 현역 시절에 북미에 너무 세게 맞은 기억 때문에 고평가하시는 건..”
“어허, 남.동.현.해.설.”
곧 분석 데스크에서 고정 해설로 자리를 옮길 이승수가 뒤통수를 긁었다.
“과거.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네, 네. 한마디만 더 할게요. 유니버스도 좀 잊으시고.”
“...”
대구 유니버스 출신인 이승수는 이제 그 콧대가 한풀 꺾였다.
FWX에서 유니버스 출신 코치를 데려간 후부터였다.
“잊었어. 잊었으니까 여기 있는 거잖아.”
편파적이었던 그가 그런 마인드를 버린 뒤, 주변에서는 자연스럽게 그의 위치를 상향 조정해줄 수 있었다.
“어쨌든 그래서. 현황부터 살펴보자면, 이틀 뒤면 4강 경기가 있는 날입니다.”
“그래도 시차가 별로 나지 않아서 여러분들도 즐거운 축제를 즐기실 수 있겠네요.”
가벼운 잡담이 오간다.
“아무래도 중국의 SHG와 BJE가 완전체를 이루지 못하면서 이번 MSL에서 크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죠.”
“SHG에서는 기권을, BJE에서는 플레잉 코치가 선수를 대신해서 출전했습니다. 서포터 선수가 원딜 포지션을 가고, 코치가 서포터 포지션을 간 셈이죠.”
가장 이슈가 됐던 이야기도 나온다.
항의 등 불편한 이야기는 생략했지만 이것 때문에 이번 MSL은 그냥 올스타전이자 친목회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어요.”
“아아. 맞아요. 그때 뭐였죠? 예전에도 어떤 선수가 비자 문제로 나오지 못해서..”
“그리고 해외 모 팀의 선수가 개인 사정으로 불참을 선언했는데, 사실 그게 여자친구랑 싸워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지금은 두 사람이 결혼을 했을까요?”
“글쎄요.. 결혼..? 하지..”
“결혼해! 결혼 좋아! 무조건 해! 너네도 해! 어쨌든!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사실 크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MSL의 권위가 부족했던 시절에 자주 받았었던 평가기도 하고.
그때는 아예 준비하지 않고 오는 팀도 많았다.
“물론 이게 월챔이었다면 이러지는 않았겠죠.”
“그건 그렇습니다.”
어차피 MSL은 지나가는 길목일 뿐이니까.
“그래서! 먼저! 4강 진출 팀 중 하나인 우리 자랑스러운 트릭스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유럽의 G3와 맞붙습니다!”
어쨌든 4강.
“사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훠어어얼씬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트으으으릭스터!”
“아, 저도 그런 생각 많이 했는데. 북미를 떨어뜨린 팀이 트릭스터였죠!”
“그렇습니다! 북미가 절대 만만치 않은 지역인데 우리 2짱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왜 이 해설님은 그때 북미와 그 경기..”
“조용히 해요..”
인천 트릭스터는 자존심을 챙겼다.
사실 탑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그래도 트릭스터가 약한 팀은 아니었다.
정확한 분석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바텀 중심의 전략과 미드의 멱살 캐리.
탑은 탑에서 숨 쉰 채 발견.
“트릭스터도 좋은 경기력 보여주고 있습니다!”
트릭스터 미드는 무슨 대단한 기연이라도 겪은 것처럼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힘으로 상대를 두들겨 팼다.
“이제 트릭스터가 G3만 꺾으면 한국 결승이 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G3는 유럽의 명문 중 명문입니다. 절대 만만한 팀이 아니에요.”
유니버스 출신 이승수 해설과 FWX 팬 남동현 해설은 한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원래 근본이 어느 팀이건 간에 국제전에서 한국팀끼리 결승에서 만나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근데 또 G3에 우리 자랑스러운 한국 선수가 한명 있죠?”
“그렇습니다! 폴리 선수! 본명은 윤도형, 정글러입니다!”
“이 팀이 동양계 용병을 잘 기용하지 않는 팀인데요, 우리 폴리 선수는 주전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경기에서도 꾸준히 얼굴을 내비치는 훌륭한 선수가 됐습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해외 팬덤에서도 인기가 많은 선수예요.”
“주로 좀.. 뭔가.. 오타쿠적인 밈이 좀 많긴 한데..”
“유럽에서는 그것도 다 스타성으로 받아들여 주니까요. 폴리 선수는 우승하면 루루 코스프레를 하겠다고 선언했죠!”
“끔찍하네..”
“결국 폴리 선수가 친정 팀인 FWX를 만나는 것도 꽤 좋은 그림이 되겠는데요!”
그리고 본론이 시작된다.
“근데 지금 재밌는 게.”
“무슨 말씀 하실지 뻔하다 뻔해.”
“우리 지금 한가지 전제를.. FWX가 중국 충칭 게이밍, CQG를 이길 거라는 거야?”
“형 우리 1짱 못 믿어?”
인천 트릭스터와 유럽 G3를 제외하고 4강에 남아있는 두 팀.
대전 FWX와 중국 CQG.
“CQG가 약한 팀이냐, 그럼 그건 아니거든요.”
“그렇습니다. 트릭스터 미드 리뉴! 채지한 선수가 작년까지 몸을 담았던 팀이기도 하죠.”
“이번에 예선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CQG는 여전히 LPL 우승 후보로 꼽히는 팀이기도 하고, 팬 투표 기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팀’입니다.”
“오, 그럼 이 두 팀이 서로의 친정과 맞붙는 셈이군요?”
“아하! 그렇게 되네요! 트릭스터 미드가 CQG 출신, G3 정글이 FWX 출신이니까요!”
“와~ 엄대엄이다~”
“왜 그렇게 대충대충이에요? 너네들 편집의 힘을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어우권~”
“...”
“아~ 충칭삼림 해버리라고~”
“CQG의 충칭이 중경이야?”
“응.”
“근데 그거 홍콩 영화잖아.”
“그러게.. 어떻게 된 거지?”
“이름만 따온 거다.. 아는 척 좀 하지 마라, 니들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일걸..”
“아, 또 나이로 저러시네. 저도 알 거 다 알아요. 거기서 왕가위 누님이 얼마나 섹시한 줄 알아요?”
“남 해설, 왕.. 가위..? 다른 사람 말하는 거지? 왕가위는..”
“그냥 너는 LOS 동영상이나 봐라..”
아무도 FWX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