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주인을 찾습니다, 아직도
채지한 덕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해당 장면에 이의 제기가 들어가 추가 씬은 취소됐고.
나머지 일정은 트릭스터나 다른 팀들과 라이벌리 장면들을 촬영했다.
대충 알잖아.
팔짱 끼고 서로 노려보거나 하는, 긴 전통을 가진 그런 장면.
몇번이나 NG가 났지만 대체로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걱정했던 중국 선수들도 출석한 사람들만큼은 매너가 괜찮았다.
애당초 촬영장인데 특별히 사이가 나쁠 일도 없다.
특히 해외는 게임 팀을 연예인 집단처럼 키워내는 경우도 많아서 유쾌한 사람들이 많다.
중간에 마주친 윤도형이 제 새로운 동료들을 소개해주면서 뜻밖의 교류도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딱 과도기.
예선에서 탈락한 팀들이 후련한 마음으로 돌아가거나 관광을 준비한다.
그날 저녁, 일부 팀들이 숙소를 빼기 전에 다른 해외팀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됐다.
원하는 팀들은 누구나 올 수 있는 곳.
호텔 연회장이다.
우리도 참가했다.
“헤이, 라온. 너 보기 좋은데. 피부랑 모발 관리는 어떻게 해?
“K-뷰티에 대해 궁금하다면, 이 브랜드 제품을 추천해. 그리고 다양한 건강식을 챙겨 먹곤 해. 아로니아나 흑마늘이 무척 효과적이지.”
“아로니아와 블랙 갈릭? 혹시 그것들이 탈모에도 효과가 있어?”
“음.. 탈모는 예방이 중요해. 만약 더 많은 정보가 궁금하다면, 이 사이트를 가봐. 주소를 알려줄게.”
“오.”
영어도 잘하고 스타일도 좋은 엘리트 김예성은 유럽 선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관계있는 사람들보다는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더 친절한 사람.
사실상 영업맨이다.
“브로, 그렇게 많이 먹어도 괜찮아? 아직 일정이 남았잖아!”
“왜 안됨? 게임 전에는 많이 먹으면 좋음.”
“이 친구가 뭐라는 거야? 혹시 영어로 말해주지 않을래?”
“님 뭐함?”
“대화가 안 될 것 같은데!”
“아니! 그냥 게임을 하려면 많이 먹어야 된다는 뜻일걸! 게임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지!”
“배탈은 나약한 놈들이 나는 것임!”
“뭐래?”
“글쎄.. 이번에는 진짜 모르겠지만 이 친구의 의욕은 잘 알겠어.”
“그 역시 ‘탑 라이너’니까! 그래!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
“누가 많이 먹나 시합할 사람 있음?”
“좋아! 이 오리엔탈 샌드위치는 내가 먹을게!”
“맙소사, 친구! 그건 오이가 들어있잖아!”
“저 친구를 봐! 못 먹는 게 없다고! 그게 실력의 이유지!”
이유찬은 근육과 유쾌함으로 게임하는 라틴계 선수들에게 인기가 좋았으며.
“네가 FWX의 트릭스터(Trickster, 장난꾸러기 요정)야?”
“아니, 나는 FWX. 트릭스터가 아니야.”
“하지만 넌 정말 작은데.”
“나는 ‘작다’가 아니야!”
곽지운은 북미 선수들 사이에서 혹시 트릭스터냐는 말을 들으며 귀여움을 받았다.
다 큰 성인의 체구가 이렇게 작을 수 있다는 게 꽤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작은 걸 빼도 그래. 매드 무비를 봤는데, 네 경기력도 멋지던걸. 꼭 영리하고 교활한 트릭스터처럼..”
“아니, 나는 트릭스터가 아니야! FWX다!”
그리고 트릭스터는 신화 속의 로키나 헤르메스같이 엉뚱한 빌런을 말하기도 하니까.
물론 곽지운이 듣기에는 그게 많이 불편했겠지만.
“사이다 상. 당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습니다만은.. 괜찮으시다면, 잠깐? 실례지만, 일본어를 할 줄 아나요?”
“일본어. 나. 조금.”
서포터 유상준은.
“당신의 선수명은, 곤곤-상보다 발음하기 좋아요.”
“권건.”
일본 팀의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저는 곤곤 상과 당신의 도라-마가 멋져요.”
“드라마.”
“최-약의 팀에서 최-강의 지명이라고요? 스게에..”
“스게.”
"사스가 LKL! 마사카, FWX가 우승? 혼모노까?"
"혼모노다."
영어는 둘째치고 내 일본어는 교과서 수준인데.
이게 왜 들리냐?
“그 사람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최-약-체인 팀에서 보물을 찾자는 로오-망을..”
“로망.”
“맞아요. 최-약의 팀-”
“최약의 팀? 아니. 나는. 최강.”
메아리뿐인 대화였지만 어떻게든 뭔가 말을 하고 있다.
저게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해도 되는 게 맞아?
일본팀 사람이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는 게 사실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 같긴 한데.
이게 교토식 화법인가 뭔가냐?
근데 나는 그런 대화 방식을 선뜻 받아주는 타입은 아니라서.
그리고 최은호는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아나는 어디에 있어?”
“아나? 누굴 말하는 거야?”
“혹시 시계 게임 이야기하는 건가?”
“오. 나 알아. 정말 끔찍한 할머니 영웅이지.”
“아나는 어디에 있어? 아나 킴.”
“근데 이 친구는 왜 자꾸 여기에서 할머니를 찾는 거야?”
“몰라. 나노 부스트라도 받고 싶은가 보지.”
“넌 강해졌다! 가서 우승해!”
“아나..”
“하하! 그거 나도 한대 부탁해!”
못다 한 사랑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그만 알아보자.
그리고 나.
나는 어딜 가나 똑같지.
게임 잘하는 사람이 최고다.
물론 영어가 통한다는 것도 장점이 되긴 했을 거다.
내 사인 유니폼은 여기서도 완판됐지만 팀원들이 슬퍼하니 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저 교환한 유니폼을 방에 주렁주렁 걸어놓기만 했다.
다들 내 방에 그만 좀 오라고.
“권건. 내 말 듣고 있어?”
하지만 그건 낮 일정 얘기고.
“들립니다.”
이 자리에서는 채지한에게 붙잡힌 신세.
“아까 본.. 그건 특수 기종이다.”
채지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인상이 더럽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정말 인상이 더럽다는 거다.
무섭게 생겼다는 뜻은 아닌데.
사람한테 엄청나게 벽을 세우는 타입이고 그 기운이 주변에도 뿜어져 나와 제대로 접근하는 사람이 없다.
“아주 비싸고 예민한 리듬 게임 기계라는 말이지.”
어쨌든 나도 고마운 부분이 있으니 시간을 할애해주기로 했다.
보아하니 오해한 만큼 나쁜 뜻도 없었던 것 같고.
“그렇군요.”
“그게 어딘가로 송출됐다면 리듬 게임계에서 들고 일어났을 일이지. 버튼 위에 앉다니 저 사람은 게이머로서 개념도 없다,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도운 거야.”
츤츤거리는 건 미드들 특징인가.
말투가 좀 재수 없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식은 아니다.
제 나름의 정의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어쨌든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간다.
누구 입김이 가장 컸을까?
답은 뻔하다.
자본을 가장 많이 들고 있는 이들이 제 파티에 제가 참여를 제대로 못 하게 되면서 행패를 치고 있는 거다.
프로게이머라도 현업 게임과는 다른 게임, 그러니까 오락실에 나가야만 만나볼 수 있는 아케이드 게임 장르의 특성 혹은 예절까지 아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무지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구설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스크린 접촉 타입이 낫지. 근데 그럼 앉을 자리가 없나? 아냐, 리플렉이라면..”
아쉽게도 여기에는 잘 아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허용되는 부분은 반발력과 타격감을 살리기 위한 어느 정도 암묵적인..”
그리고 그 촬영 스탭.
알고 보니 헤드도 아니었고 사실 영어도 할 줄 알더라.
아예 푸른 눈 외국인이라서 안심했는데 중국 자본은 어디에나 깃들어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구질구질하잖아?
열받긴 해도 이게 다 경험이다.
FWX도 예방 주사를 맞았겠지.
내가 예전에 얼마나 황당한 일을 많이 겪었는지는 알기 어려울 거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불편하긴 한데 어디 가서 공식적으로 인터뷰할 정도는 아닌 그런 사건들.
깎아내리기 작전.
없을 것 같지만 정말 많이 있는 일이다.
우리 팀 평가가 올라갔으니까 기를 죽이겠다는 거다.
근데 그럴 거면 미리 와서 MSL부터 잡아먹지 그랬어.
시간만 줬네, 불쌍하게도.
우리를 견제한다는 건 그만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계속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나는 리겜계에서 레전드를 찍고 이 동체 시력을 이용해서 다른 게임도..”
근데 얘는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원래 이런 타입이야?
“왜. 뭐.”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채지한이 입을 닫았다.
왠지 무서워하는 눈치다.
사람은 긴장하면 말이 많아진다잖아.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어?
내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데.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어쩌면 중국에 갔더라면.
채지한은 나와 같은 팀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용병 둘은 같은 국가의 사람을 쓰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IF.
우리 애들을 괴롭히려고 했겠다?
내가 다시 중국을 생각할 리가 없지.
아니, 회귀는 이번 삶에서 반드시 끝날 거다.
“그.”
채지한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때.
“야! 건! 건! 건! 건건! 건건건건건!”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히이잇사시부리이이이이! 너 내 라라퐁 아직도 가지고 있다며?! 그거 승리의 토템이라며?! 다 들었다. 코치님들이 나한테 다 말해줬어! 그렇게 튕기더니.. 새끼들..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이라도 하지. 노래라도 녹음해서 보내줄 텐데!”
시끄러운 FWX 구정글러 윤도형.
“이건 또 뭐야?”
그래, 정말 오랜만에 보지만.
우락부락함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사람이다.
“너! 누구?”
입에서 바나나 조각이 튄다.
오른손에 바나나를 쥐고 우물거리며 이야기하던 윤도형이 식탁 위로 껍질을 툭 던진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오해 사기 좋게 행동할 수가 있지.
속수무책으로 바나나 테러에 당한 채지한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니 트릭스터 아니냐? 니가 뭔데 여길 와?”
아니, 올 수 있긴 하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니까.
“너는 뭔데?”
채지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봐봐, 얘 얼굴도 만만치 않다니까.
“나? 여기 출신 정글러다. 어쩔래? FWX가 내 고향이여!”
“고향? 나는..”
쌍 도끼를 든 부수와 단검을 역수로 쥔 도적이 맞붙는 느낌이다.
“트릭스터 니넨 한국에서도 모자라서 여기까지 와서 지랄이야?”
“...”
“또 뭔 수작 부리려고 깝치냐? 존나 재수 없는 새끼들. 기사도 안 보냐? 작년 너희 악행 심각하더라? MSL 데이터 받아 처먹고 입 싹 닦고. 배부르더냐? 앙?”
누가 듣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언사.
오랜만에 듣는 날것 그대로의 말에 제법 마음이 시원해진다.
윤도형 너는 내 마음속의 루루.
실드는 못 씌워줘도 입으로 사람을 털지.
근데 문제는.
“형.”
“어, 건아.”
“이 사람은 그때 트릭스터 아니었는데요.”
“..어?”
“그 일이랑 상관 없다구요. 트릭스터로 MSL 참여도 이번이 처음이고.”
“...”
채지한이 귀환자라는 거다.
“그랬어..?”
“네.”
“말을 하지.”
“지금 말하잖아요.”
두 사람이 동갑이던가?
일단 나이로는 나보다 형에 해당하는 사람들.
채지한은 눈을 모로 뜨고 윤도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윤도형은 뜨끔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채지한은 여전히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바나나 조각이 안 떨어진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윤도형이 그걸 떼어주려다가 번들거리는 채지한의 눈빛에 뒤로 물러났다.
“미안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 꼴이 우스워 피식 웃음이 터졌다.
“와.. 건이 너는 여전히 인성이..”
내가 뭐?
“앗..아.. 아니다. 절대 그를 화나게 해선 안돼.. 그를 만날지도 몰라..”
윤도형은 채지한에게도 어색한 사과를 건넸다.
그래, 잘못은 해도 금방 인정하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이거.”
그리고 나한테 편지를 한 장 건넸다.
주소와 우표까지 붙어있는 그 편지를 한국에 돌아가서 부쳐달라고 했다.
“부탁 좀 할게.”
해외에서 보내도 되는 걸 왜 굳이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걸 받아 들었다.
“잘 지내세요.”
“본선에서 보자.”
윤도형은 씩 웃고 사라졌다.
말씀들 잘 나누시고 또 한 번 FWX 괴롭히면 죽여버리겠다는 정중하지 않은 말과 함께.
“폴리가.. G3던가.”
“지금은 그렇죠.”
어쨌든 덕분에 분위기는 좀 나아졌다.
아직도 우리 선수들은 웃고 떠들고 있었다.
각각 감독님이나 코치님, 매니저님들을 근처에 둔 채로.
이번에는 좀 안심이다.
“너네가 보내준 자료.”
드디어 평정을 찾은 채지한이 안경을 쓱 올렸다.
“그거 누가 메인으로 작업한 거야?”
책상을 툭툭 두들기는 게 초조한 모습이다.
“MSL 데이터?”
내 질문에 채지한이 끄덕인다.
굳이 이런 걸 왜 물어보지?
“다 같이 작업한 거죠.”
“좀 더 주체가 되는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런 걸 말씀드리기는 좀.”
“내가 오늘 도와줬잖아.”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은 없지.
커버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겠지만 귀찮은 일을 덜어준 것도 사실이다.
“음.”
“부탁 좀 할게. 데이터 그리드 잡은 사람이라도.”
도대체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알려준다고 해도 빼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별로 상관은 없나?
“분석 방향성 제시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뭐든지..”
그러고 보니.
나 얘랑 LOS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구나?
“아, 그거?”
“어, 어, 어! 그거!”
채지한의 얼굴이 확 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