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63화 (263/326)

263화. 해외 로케

안전한 나라 대한민국에서도 크고 작은 범죄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살인, 절도, 폭행, 사기 등.

이렇게 수많은 범죄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병역 문제는 다른 사건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마약만큼이나 그렇다.

정직하게 청년기를 보냈던 성실한 젊은이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중대한 이슈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이 대상이 유명인일수록 일이 커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사건은 단순 프로게이머뿐만 아니라 연예인이 연루되어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 건에 대해 벌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이 밝혀낸 진실은 그 끝에 일부 정치인의 자식이 있다는 것까지 다다랐다.

일파만파.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스포츠만이 아니라 다른 스포츠의 현역 프로까지 연루되어있었다.

하지만 해외에 나와 있는 선수들은 그 허리케인에 휩쓸리지 않았다.

당장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을뿐더러, 장소가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FWX가 MSL 우승컵을 가지고 돌아갔을 때나 전해질 것이었다.

MSL 뒤에 이어질 트레이드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고, 스프링 시즌 중 위축됐던 선수 시장은 이번 기회에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권건을 비롯한 FWX 선수들은 며칠 사이에 TW 서버를 휩쓸었다.

특정 국가에서 조직적 규모의 방해 작업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의외로 영어권 국가의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방어에 동참했다.

세계인의 축제를 망치려는 그 국가가 꼴 보기 싫었던 건 한국만이 아니었다.

먼저 출국해서 경기 중이던 트릭스터가 2 시드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처럼 예선을 밟아버리고 있던 어느 날.

“왜 여기에?”

권건은 그가 머물던 층 테라스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

현 트릭스터 미드.

중국 귀환자 채지한.

“지금 바쁜데요.”

피트니스 센터에서 즐거운 지식 교류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잠시 땀을 식힐 겸 이곳에 잠시 앉았던 권건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지금 트릭스터 선수와 만나는 건 원하는 일이 아니다.

양 팀의 감정이 좋지 않았으니까.

긁어 부스럼.

권건이나 감독들이 선수들을 챙겨 로비 등에서 멋대로 활동하지 않게 두는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공식적이지 않은 자리에서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최은호처럼 유쾌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예기치 못한 차별이나 폭언은 항상 주의해야 하는 법이었다.

“쓰시는 동은 옆 동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권건은 오히려 자기가 이런 침입자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경팀도 같은 한국인 선수라서 프리패스시켰나?

“..연결돼있어.”

얼마 전에 진 일이나 기사 같은 걸로 시비나 걸려고 왔겠지.

권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긴 하죠.”

서포터 유상준과 달리 티끌 하나 없이 닦인 안경이 유리처럼 투명하다.

말랐다는 점과 안경을 썼다는 점은 비슷했지만, 채지한은 훨씬 더 싸늘한 점이 있었다.

유상준이 은밀하고 비인간적이라면 채지한은 존재감 있고 냉소적인 모습.

“다시 묻겠습니다. 여기 와 계신 걸 이 감독님은 알고 계신가요?”

한국 리그의 물갈이 문제.

다음 월챔 출전권 관리.

그리고 각 팀 간의 구도 만들기까지.

권건은 몸이 하나였지만 본업 외에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많았기에 이런 만남이 달갑지 않았다.

특히나,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변수 덩어리인 채지한은 더욱.

혹시 얘한테도 병역 문제가 있었나.

권건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제는 없었던 선수다.

“몰라.”

채지한은 말이 짧았다.

그 모습에 권건은 코웃음 쳤다.

그럼 그렇지.

“이제 돌아가시죠. 어차피 곧 다시 보게 될 테니까.”

정중한 축객령이었다.

“...”

하지만 채지한은 권건이 앉아있는 테라스 의자 근처에서 얼쩡거릴 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한참을 망설였다.

“너 혹시.. 혹시.. 데이터.. 보낸.. 아니, 작성자.. 누군지..”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채지한도 권건이 좀 무서웠다.

사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곤 했다.

인상 때문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근데 오히려 오늘은 채지한이 그런 기분을 느꼈다.

유독 크고 좋은 체격, 프로게이머라기보다는 오히려 최종 흑막 보스 같은 저 입매.

게다가 스프링 결승에서 마주쳤던 사람 같지도 않은 권건의 서늘한 눈빛.

저 눈은 제 팀을 볼 때만 빼고 항상 가라앉아있었다.

어쨌든 채지한은 자기가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권건 눈에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지만.

“할 말 많으세요?”

권건은 소매를 걷어 시계를 내려다봤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어제 이유찬은 방을 바꿨다.

그의 방에서 일어난 토일렛 이슈가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곽지운은 베개 싸움을 하다가 베개를 두 개나 터뜨렸다.

밖에 나가는 것을 금지당한 최은호는 명상을 하겠다고 호텔 방 안에서 향을 피웠다.

두리안급 트롤짓에 화재경보기가 울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고뭉치들을 집에 놓고 온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이 든다.

특히 이 팀의 탑과 1번 서포터에게는 주기적으로 벽을 두드려 생존 신고를 받아야 한다.

“할 말 많으신 것 같은데. 의자라도 하나 드릴까요?”

“어..”

“여기 앉으시죠.”

권건은 자연스럽게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를 내밀며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채지한은 얼떨결에 앉았다.

“그..”

“안돼! 이유찬! 안돼!”

그리고 권건은 집에 놓고 온 강아지를 부르는 것처럼 말하며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왜 안 된다고 하지?

진짜 개라도 데려왔나?

채지한도 개들이 치는 사고 규모를 안다.

이불을 덮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솜만 남아있다든가 하는 그런 사건.

그런 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급하게 갈 리가 없지.

사람의 본명을 못 외우지만 편견은 없는 채지한은 머리를 긁었다.

수백시간의 연구.

그리고 이번에 데이터를 받고 나서 확실히 알았다.

길을 잘못 들었었다는 것을.

FWX에 ‘그 사람’이 있다.

대답을 꼭 들으려고 했는데.

그는 멀어져가는 권건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

“이번에 중국 완전체 안됐네? 맞지? 사실상 불가능하지?”

“시시해.”

“근데 우리 걔네 많이 이기지 않음?”

“그건 스크림이고. 우리도 스크림 질 때 있잖아. 걔넨 일부러 해외랑 할 때는 전력 숨긴다는 것도 있던데?”

“좋은. 경험. 이었지. 다시. 하고. 싶군..”

“끔찍하니까 다음에는 그딴 픽하지 마라.”

“뭐 했었더라?”

“그게 다리였나? 아님 랭가였나?”

“쟤 탑 포변 노림?”

“아니라서 그게 더 문제다.”

예선에서 본선 진출이 거의 확정된 팀은 세 팀.

한국의 트릭스터, 중국의 CQG, 북미의 TST가 올라왔다.

본선에서 기다리는 팀들은 다섯 팀.

우리, 중국의 SHG와 BJE, 유럽의 G3와 북미의 CLG .

총 여덟 팀이 본무대를 펼친다.

그 중 SHG 두 명, BJE에서는 한 명이 입국하지 못했다.

오늘 당장 현지 촬영이 있는데도.

“이거 완전..”

선수들의 입가가 실룩거린다.

“개꿀..”

뭐, 리그의 흥행이나 평가와는 별개로.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남는 건 우승 기록이니까.

“난 좀 짜치는데.”

“나도.”

이런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예전에도 국가 정세나 질병, 전쟁, 천재지변, 심지어 개인 사유 등으로 불참하는 경우는 있었다.

보통 반강제적인 상황이어서 용병 고용을 예외적으로 허용하거나 감독, 코치 등이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정말 막장 중에서도 막장이지.

외교 싸움을 리그까지 끌고 들어오는 거니까.

뭐, 내 회귀 시간이 국제 정세에는 영향을 주지 못해서건 어쨌건.

불참 건만큼은 계속 겪어봤던 일이라 놀랍지는 않다.

나는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방심하지 마라.”

그냥 월챔 경험 겸 국제 교류회 왔다고 생각하자.

“근데 뭘 그렇게 봐?”

“영어? 책?”

“음.”

이 일정.

상대나 전력은 달라도 일정에 적응하는 걸 목표로 하면 된다.

촬영도 그렇고 해외 선수들을 만나는 태도나 본사 직원, 해외 스탭들.

이 모든 게 적응 대상이다.

다음 월챔 때는 이렇게 여유 부릴 틈이 없을 테니까.

저 멀리서 촬영팀이 무언가 소리친다.

“가자. 우리 차례다.”

플래시가 터진다.

수많은 외국인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세상에는 많은 민족이 있다.

외형으로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문화로 나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전적으로, 지역적으로, 민족적으로 또 나뉜다.

이민자까지 하자면 그리스계, 세르비아계, 튀르키예계.. 이렇게 다 따지다 보면 끝이 없겠지만.

어쨌든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우리에게는 외국인이다.

서로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타인.

우리는 모두에게 둘러싸여 웃으라거나, 포즈를 취해달라거나 하는 간단한 말을 들으며 촬영에 임한다.

그들에게도 우리는 그냥 검은 머리 외국인일 거다.

“뭐라고 하는 거야?”

“이번 컨셉은 일렉트로닉 뮤직이래.”

“일렉트로닉 뮤직? 나 그거 싫은데. 시끄러운 거잖아.”

“그건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EDM.”

“뭔 차이여?”

“난 EDM 좋던데. 매드무비같고.”

“그래도 티저 음악은 모름지기 막, 어? 빠밤 둥둥 부우우웅~ 하면서.”

“왕자의 게임 같은 거.”

“발음 똑바로 해.”

음잘알 김예성이 고개를 저었다.

팀 내 예술 파트를 담당하는 예민한 사람.

그것이 바로 김‘예’성이다.

그럴듯한데?

“형들 노래 안 들어봤어? 전개는 비슷한데.”

“어..”

“됐어. 그럼.”

이번 음악에 참여하는 팀이 김예성이 좋아하는 DJ팀이랬나.

“그 팀 전담 탑 라이너가..”

“거기도 탑이 있음?”

“음악에도 탑 라이너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탑신병자 닷지 요망?”

“멜로디를.. 됐다, 내가 무슨 이야길 하겠냐.”

어쨌든 촬영하고 있는 선수들이 편집 후 최종본으로 나올 티저 영상을 추측하기란 쉽지 않다.

조각조각 촬영해서 갖다 붙이니까.

촬영을 주도하고 있는 이는 글로벌 팀의 어떤 이.

그는 갈색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지만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통역가에게 말하면 팀에서 직접 데려온 통역가가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번에는 저쪽 기계 위에서 앉아서 촬영하시게 될 거라고 합니다.”

“기계요? 아..”

그리고 나는 음잘알은 아니지만 대충 올해의 컨셉을 안다.

이번 콜라보 뮤지션은 주로 희로애락에서 ‘노’를 뺀 노래를 만드는 사람.

다짜고짜 웅장하다기보다는 가녀린 호소와 전개를 가져가다가 점점 웅장해진다.

기쁠 때 들으면 기쁘고 슬플 때 들으면 슬픈, 뭉근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라는 얘기다.

“이거 맞죠? 멋지다.”

“네.”

그리고 이번 노래의 제목이자 전체적인 주제는 ‘Cry out your name’.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

비어있는 공간에서 제 이름을 외치면서 간절하게 바라는 모습.

뭐 대충 그런 느낌.

“여기 올라가서 앉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조각조각으로 촬영한다 해도 저런 오락실에 비치되어있을 것 같은 그런 기계랑은 큰 관련이 없고.

“그렇다고 합니다.”

노래에 칩튠, 그러니까 80년대 고전 게임기에서 나올 것 같은 삥뿅삥뿅 샘플링 사운드가 들어가는 음악이 아니라는 얘기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런 장면을 티저 영상에서 본 적이 없다.

“넵. 받침대 좀 가져다주세요. 저 키가 작아서 한번에는 못 올라가요.”

“알겠습니다.”

우리 팀 주장은 약간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합리적인 요구를 건넸다.

저 기계는 아마 아케이드 리듬 게임 기계.

음악과 노트에 맞춰 버튼을 조작하는 식의 기체다.

“잠깐만.”

나는 불길함에 곽지운을 잡았다.

“어? 건아 왜?”

발판으로 사용할 스텝 스툴이 순식간에 도착했다.

“뭐 하세요? 바쁩니다! 올라가셔서 앉으시면 됩니다! 빨리 빨리!”

영어면 모르겠지만 중국어.

통역을 거치지 않고 곽지운에게 다가와서 쏟아내는 말.

뜻은 몰라도 다소 신경질적인 태도에 위축된 곽지운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래, 해외에다 처음 보는 외국인과 모르는 언어에 둘러싸이면 이런 일이 생긴다.

내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곽지운은 엉거주춤하게 기계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똑바로 앉아요! 중앙에!”

촬영팀 남자가 또다시 빠른 말을 쏟아내며 발판을 치우려고 했다.

“잠깐..”

곽지운이 발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게 중심을 옮기는 순간.

“그거 큰일 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디선가 들려온 유창한 중국어.

“이 장면 꼭 필요한 게 맞아? 예비 영상 촬영이지?”

채지한.

트릭스터의 등장에 다들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그가 앞으로 나섰다.

한참 중국어로 쏘아붙이던 푸른 눈의 외국인이 멈칫한다.

“다시 생각해봐. 그게 맞는지.”

채지한의 중국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국어보다 훨씬 나지막했고 듣기 편했다.

LKL에서 출장 선수 밀착 콘텐츠 제작 차 나온 인터뷰 팀도.

FWX 소속 매니저들도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얘는 왜 자꾸 여기로 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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