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온 보드
목적지가 대만이었던 만큼 비행시간은 길지 않았고, 적응 역시 어렵지 않았다.
사실 이번 MSL 자체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몇몇 선수들이 대만 요리가 맞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걱정이었던 것과 달리 숙소에서 제공되는 호텔식은 대부분 별 탈 없이 잘 맞아서 오히려 재미없다는 얘기가 나왔고.
물이나 침구에 예민한 선수들을 위해 팀의 어머니인 박 감독님이 다양하게 준비해 온 터라 큰 문제는 없었다.
본격적인 일정에 며칠 앞서 도착해 특별할 것 없이 워케이션 느낌으로 적응한 선수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최은호.
“내가, 내가! 그래서!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니, 너무 좋은 분인거야!”
왠지 내 방에 모인 팀원들은 저들이 겪은 놀라운 이야기를 꼬박꼬박 보고하고 있었다.
“니가 어떻게 이야기를 해? 브라질이 무슨 말을 쓰는데?”
“영어로 하니까 되던데?”
“너 영어 잘해?”
“아니? 태그로 달던 단어들만으로 대화가 되던데?”
당연히 적응왕 상은 곽지운이 받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해외 출장 경기가 처음인 최은호가 국제 커뮤니케이션에 굉장한 강점을 보였다.
이게 진짜.. SNS의 힘?
“진짜 말도 안 돼.”
“브라질은 포르투갈어 쓰는 거 아니었어?”
“영어도 잘 통하긴 해.”
“우리가 우승하면 한국어가 표준어 됨?”
“되겠냐?”
“그래도 우리나라가 옛날에 히트시킨 단어 꽤 많을걸? 죽여, 저 개X끼 죽여.. 간나X끼..”
“그거. 옳게 된. 히트. 맞냐?”
어쨌든 이 자리의 주인공은 최은호였다.
“그래서 남미에는 여성! 리그가 있대!”
특히 흥분하기도 했지만.
“라틴! 서버는! 킹갓황이라고!”
다른 서버 이야기에.
“그녀의! 이름은.. 이름은.. 아나 암브로지우 킴! 라틴, 더 챌린저!”
심지어 제 특급 관심사인 ‘여성’ 코치와 이야기를 나누고 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SNS 교환까지 하고서.
“이름 기네. 챌린저가 이름에 들어감?”
“킴까지가 이름이야.”
“그래도 브라질 이름이 좀 길긴 해. 더 있을 수도 있을걸?”
“혼혈이신가?”
“아버지가 한국 쪽이시라나 봐. 그래서 한국어도 하시더라니까? ‘오! 김치 알아요! 사랑해요’ 이런 거!”
“오.. 굉장히. 사회적이시네. 네가 뭐라고 물어봤는지도 알 것 같다.”
어쨌든 결론은 이거였다.
“나.. 그녀에게 빠진 것 같아..”
“미친 금사빠.”
“이건 진짜야.. 우린 뭔가 통했어..”
타국에서 사랑을 만났다는 거.
이 사랑에 미친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브라질 사람들이 원래 유쾌하고 친절하니까 너무 들뜨지 마세요. 불편한 만남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혼자 나가지도 마시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한테는 완전 친절했다니까? 아.. 이따가 DM 보내봐야지..”
“개노답.”
최은호는 원래 이런 놈이니까.
막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해질 거니까 그냥 두면 된다.
어차피 집중할 때는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여기서 우승해서 인터뷰로 아나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 나랑..”
그래.. 뭐 그게.. 이 사람의 인생 목표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지랄하네 진짜..”
“솔직히 니가 FWX 아니었으면 말이나 붙여봤겠냐?”
“닥쳐.”
해외라서인가.
국제적 욕설인 중지 제스쳐가 오간다.
확실히.
브라질은 라틴 지역에서도 별도 서버를 가지고 있는 귀한 국가다.
예를 들어 호주와 뉴질랜드가 OCE, 오세아니아로 묶여있는 걸 생각하면 뭐.
주변에 라틴 아메리카 서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처럼 브라질 서버를 가진 나라라는 뜻.
물론 서버의 규모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해당 국가에서 LOS라는 게임에 대한 반응이 좋다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브라질의 LOS는.. 다소 즐겜 경향이 있어서.
며칠 뒤 예선이 끝나면 타국 리그 사람들은 대부분 귀국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야, 근데 걔도 오지 않았냐?”
“걔가 누군데?”
“걔 있잖아. 그..”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걔! 걔! 걔! 이름 왜 생각 안 나지? 걔! 윤네모세모!”
“?”
그래, 아마 반가운 만남도 있겠지.
어쨌든 이번 MSL은 이 정도의 의미일 거다.
교류회.
다 이유가 있다.
“이제 방송 시간이니까 다들 돌아가세요.”
“벌써?”
“난 오늘 하루 보고도 못 했는데.”
김예성이 아쉬운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나 룸서비스 하나만 시켜 먹고 가면 안 됨?”
이유찬도.
“가라.”
“힝. 내 숙소 변기 막혔는데.”
“방 안의 전화기를 들어. 0을 누른다. 토일렛 서비스를 요청해.”
“오.”
숙소는 MSL 측에서 제공된다.
예선부터 시작하는 지역이건, 본선부터 시작하는 지역이건 모두 평등하게 동일하다.
이것만으로도 따지는 모 국가가 있긴 했는데.
사실 사비를 들여서 업그레이드하면 그만이다.
금지되어있는 건 아니라서.
그러니까, 우리처럼.
- 형형형형형형형형
- 거기 괜찮아요? 잘 살아있어? 힘들지 않았어?
- 컨디션 어때? 왤캐 오랜만이야 진짜 ㅠㅠㅠㅠㅠㅠ
- 방송을 하도 안 켜서 우리가 형 TTS 제작 중이야
- 내 마음속의 AI 휴먼..
“안녕하세요.”
사람들을 내보내고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시청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얼마 전에도 방송하긴 했다.
내가 상대적으로 다른 선수들에 비해 방송 계약이 널널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의무니까.
- 형 안녕하세요 말고 다른 말도 좀 해줘..
- 수크랄로스라던가 게놈프로젝트 같은 유니크한 표현 부탁드립니다
- 이 새기들ㅋㅋㅋ AI 보컬 만드는 팀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
- [데이터 수집 중]
- 응원합니다 jae bal
“시차가 한 시간 나니까 이제 저녁 드실 시간이겠네요.”
- 어헝 so sweet
- mat ah.. 형 형이랑 같이 먹으려고 Gi da rim
- Mukbang hae?
내가 외국에 있다고 이러는 건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잠깐 여러분께 인사드리려고 켰어요. 안부 겸.”
- 형.. 많이.. 변했네.. 형 왤캐 사람이 부드러워졌어?
- 인사.. 하려고.. 켰다고..?
- 에이린이 형 좋대? 좋다지? 당연히 그렇겟지
- 당연하지 우리 형인데 쉽;;
- 지금 그 영상 인급동 2주 연속임ㅋㅋㅋㅋ
- 세상 사람들이 다 FWX 알게 해주세요
오만 반응이 쏟아진다.
잠시 찬찬히 채팅창을 보며 시청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게 둔다.
그리고 예리한 질문.
- 형 거기 서버는 어때? 안정됐어?
- 경기 제대로 진행되는 거 맞지?
이건 아까 말한 라틴 - 브라질 서버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대만 서버는 대만, 홍콩, 마카오의 TW 서버로 묶이며 중국 서버와 별도로 분리되어있다.
이건 대만과 중국, 그러니까 양안 관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게 전에 말했던 이번 MSL의 변수다.
LOS는 글로벌 원서버가 아니다.
대륙에 해당하는 중국 내부 서버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으나 게임의 본사가 아니라 중국 게임사에 의해 운영되며 불투명하기 때문에 중국 서버라고 퉁쳐서 이야기할 뿐이다.
어쨌든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실천하기 위해 TW 서버를 중국에서 관리하는 서버 쪽으로 흡수하고자 했으나, 당연히 대만 측에서 반대가 있었다.
고작 서버 병합 때문에?
한없이 작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정상 진행됩니다.”
하지만 병합은 독립의 반대말이다.
우리나라가 누구보다 잘 알 거다.
그래서 대만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태도를 내보이고 있다.
현시점 두 나라의 외교 관계는 최악이기도 하고.
대만은 중국팀에서 바라는 슈퍼 계정의 개수 제한 삭제나 일정 등의 특혜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
비자 문제에서도 강경책을 고수했다.
한국인의 대만행은 무비자로 가능하다.
중국인의 대만행은 조건이 조금 다른데, 여권이 아니라 일종의 여행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관광’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이건 상금이 있는 대회인 만큼 ‘수익 활동’에 해당하고 타국에서의 수익 활동 허가는 쉽지 않다.
비자에는 단순 대회용 C-3-1 비자와 단기 취업 비자인 C-4 비자, 초청에 해당하는 E-6 비자가 있는데..
음,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자세한 설명은 그만두자.
어쨌든 그래서 더 복잡하다는 얘기다.
사실 단순 관광 비자가 아닌 이상 복잡한 게 당연하다.
잘못되면 불법 체류자가 되는 거고, 각국의 외교부는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도 그런 과정을 거치며 개최국에 대한 존중을 보였으니까.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번 MSL이 대만에서 주최된다는 소식에 반대하다가 입국 일정조차 모든 나라 중 가장 늦게 잡았다.
심지어 대만 역시 ‘자국’ 공관에 해당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의견을 내세워 날치기 비자 통과를 시도했지만 그게 막혀 풀엔트리 참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경기용 서버 나들이도 끝냈고.”
안하무인.
한마디로 중국이 대륙 했다.
“본섭도 플레이하는 데에 문제없어 보여요. 쾌적합니다. 신경을 많이 쓴 게 티가 나네요.”
내가 개인 방송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다.
나서서 뭘 많이 아는 척할 필요는 없다.
상대가 어떻건 우리 실력만 보여주면 되니까.
- 길게 말했어;;
- 저장했냐?
- 뭐라고요? 그대 가슴이 너무 커서 안 들려.. 팔든? 다시 한번만?
- 이십오년동안얼어잇던내heart지금뛰기시작해pit a pat
- 미친ㅋㅋㅋㅋ 팬싸 밀렸다고 별 잡것들이ㅋㅋㅋ
- 형 그러니까 방송 좀 자주해ㅋㅋㅋㅋㅋㅋㅋ
- 타이완 남바완 먹을 거지?
글로벌 이벤트인 만큼 세계인들이 TW 서버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프로 선수부터 감코진, 스탭들, 그리고 각국의 강자들까지.
“그럼요.”
아마 입국 거부된 모 선수들도 뭐나 긁으면서 이 서버로 올 수도 있겠지.
대회에 깽판을 놓겠다는 심산으로.
“찍어야죠.”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박살 내러 가겠습니다.”
감히 너희가 없으면 이 리그가 무너질 거라고 기대해?
어림도 없다.
- 어? 님들 지금 기사 뜬 거 봄?
- 오
- 형 급보야 급보! 급보!
- 우리나라 지금 난리 났어!
- 이거 맞냐? 이거 맞아?
- 붐보이 개ㅐㅐㅐ쌧ㅅㅅㅅㅅ기였네..?
- 한국에서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ㄷ ㅏ..
아, 이것도 이제 올 때가 됐나 보네.
#
한국.
기업 해머스의 요체에 가까운 언론사의 이사실.
“와.. 이거 몇 명이 얽혀있는 거지?”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 큰 건일 줄 몰랐다. 연예인이 몇이야.”
“프로게이머는요?”
“은퇴한 사람과 관리직까지 포함하면, 셋.. 넷.”
“그 정도면.. 규모 진짜 크네요.”
“혹시 모르니까 앞으로는 해외에서 오래 일했던 놈들을 중심으로 살펴라. 요새는 그쪽으로 접선하는 것 같으니까.”
“예에, 예에..”
이제 슬슬 서머 시즌을 준비하는 해머스 감독, 한동규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음.”
나이는 먹을만큼 먹었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여전히 아들이다.
“아부지. 거..”
“고맙다고?”
“아뇨? 저한테 뭐 수수료 같은 거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가 브로커냐?”
“...”
“너도 한번 크게 데이게 해줘?”
“아뇨.”
“어리광 부리지 말고 이제 가라. 불똥 안 튀게 대응이나 잘해.”
세상이 변했다.
먼 과거, 게임을 ‘악역’으로 만들었던 언론사의 헤드는 여전히 그대로다.
하지만 그들의 다음 세대에는 분명히 그 업계에 발을 걸친 사람들이 있다.
“근데 진짜로..”
“가.”
“아니, 아부지. 이거. 이거는 진짜로 고맙다고.”
“뇌물 수수 안 한다.”
“아들의 효도 선물. 그게 남자한테 그렇게 좋대.”
책상에는 중년 남성의 자신감, 쏘팔메토가 올려져 있다.
동생이라도 만들어달라는 얘긴가?
인제 와서?
늦어도 한참 늦었는데?
그것보다도 '내' 아들이 과대광고에 속아 넘어간 건가?
녀석.. 게임만 하더니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구나.
훌륭하다..
“먹어보니 좋더라고. 진짜로.”
어처구니없는 꼴에 한동규의 아버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늙고 못난 아들은 그 말만 남기고 쏙 나가버렸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 화면에는 그들이 터뜨린 기사가 떠 있었다.
[ (단독) ‘병역의 신’ 브로커 구속 기소 ]
[ (단독) 리스트 확보, 최대 규모 병역 비리.. 유명 연예인을 비롯해 프로 스포츠 선수 연루! ]
아래에는 다른 언론사들이 줄을 지었다.
적당한 선에서 들쑤셔놓은 불은 이제 곧 예민한 분야까지 번질 것이었다.
[ 검찰, 기소 예정.. 브로커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
[ ‘큰 거 한 장’에 해드립니다.. 연기 지도까지, 비결은 ‘이것’? ]
[ (메디컬) 질병을 통한 ‘면탈 시도’는 단순 병역 비리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회적 문제.. ]
한국에 남아있는 구단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